서양인 총에 쓰러진 조선 호랑이

입력 2015.04.27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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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00년대초 포드 바클레이(Ford Barclay)라는 영국인이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고 찍은 모습이다.

그가 쓴 ‘만주호랑이’라는 책에서 공개한 사진인데, 사냥 장소는 목포의 비녀산, 지금의 양을산이다.

잡은 호랑이 크기가 크지 않은 어린 개체인 것을 볼 때 목포 일대에서 호랑이가 다량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더구나 목포의 양을산은 숲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작은 야산에 불과하다. 이런 야산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한반도 서남 해안에 적지 않은 호랑이가 분포해 있었다는 얘기다.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한국 호랑이(amur tiger). 1920년대까지만 해도 자주 출몰했다는 호랑이는 왜, 어떻게 사라졌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서식처 파괴에다 먹잇감이 줄던 호랑이가 일제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해방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최근 발굴되는 고증 자료들에 따르면 이미 1900년대초부터 호랑이 사냥이 기승을 부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서양인들의 호랑이 사냥 사례가 적지 않았다.

KBS 보도본부 디지털뉴스팀이 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의 도움으로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1900년대초 서양인들에 의한 호랑이 사냥이 성행했고, 특히 이들의 주 사냥지는 목포와 진도 일대의 서남 해안 지역인 것으로 나타났다.

바클레이의 ‘만주호랑이’라는 책을 보자.

“호랑이는 한반도의 남부 보다는 북부에 훨씬 더 많이 서식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다른 영국인 사냥꾼과 여행자들의 경험도 그렇고, 내 개인적인 경험에 미루어 보면 북쪽에서 호랑이를 발견하는 것이 남쪽 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수목이 너무나 울창하고 면적도 광대해 사냥이 거의 불가능한 압록강 일대와 그보다 훨씬 동쪽의 시베리아 접경지대를 제외하면 호랑이가 꾸준히 출몰할 정도로 제대로 된 숲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부에 호랑이가 많았다는 증언이다. 바클레이외에도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호랑을 잡은 외국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미국인 의사 W. L Smith는 석달 동안 목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호랑이 세 마리를 잡았고, 영국 외교관인 F. Lindley 역시 목포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클레이는 놀랍게도 섬인 진도에서의 호랑이 사냥 경험도 소개한다.

그는 진도에 호랑이 네 마리가 서식하는 것을 확인하고 성숙한 암, 수 호랑이를 한 마리씩 포획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마리를 찾아 열흘을 섬에서 헤맸지만 호랑이 발자국만 발견했다.



위 사진은 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이다. 몰이꾼으로 추정되는 세 명이 화승총을 들고 있다. 전남 진도에서 호랑이가 잡혔다는 기록은 Mazak이 1967년 쓴 논문과 Harper가 쓴 책에도 인용돼 있다.

예전 다도해 일대의 섬에는 꽃사슴이 무척 많았는데, 이런 서식 환경이 호랑이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한국범보전기금의 설명이다.

바클레이는 당시 조선인들에 의한 호랑이 사냥도 매우 성행했다고 증언했다.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의 에는 호랑이의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마을들의 활동적인 남성들이 대략 대여섯 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더 많은 숫자는 창으로 무장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



위 사진은 일제 강점기 금광개발로 조선 제일의 거부로 떠올랐던 최창학이 호랑이 샤낭후 호랑이 시체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특히 조선인들 중에는 화승총을 이용한 사냥외에도 독극물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 시대때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호랑이 사냥이 많아져 일제가 이를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에서는 호랑이 사냥이 성행했을까.

호랑이 모피는 비싸게 거래됐으며, 특히 서양인들의 호랑이 가죽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바클레이는 조선 남부에서 거래되는 스무 장 남짓 되는 호랑이 모피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위 사진은 전란통이던 1951년 부산 국제시장에서 팔리던 호랑이 가죽 사진이다. 피난민이 소지하고 있던 호랑이 가죽이 매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호랑이 사냥이 해방 이후에도 이뤄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호랑이 사냥이 이뤄지던 시절, 호랑이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을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바클레이이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식이 마을 노인에게 알려지자 호랑이 사체는 잡은 자리에서 완전히 팔려나갔다. 노인들이 도착하자 거의 곧바로 내장을 발라낸 뒤 한 컵 될까 하는 복부에 남은 신성한 체액을 나눠 먹을 권위를 가진 여섯 명이 누구냐를 놓고 지루한 언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합의되자 내장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사진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1970년대까지 호랑이 사냥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은 북한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이다. 총을 든 남자의 표정에는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위 사진은 호식총이란 불리는 것이다.

예전에 호랑이나 표범에게 잡아 먹히면 호환을 당한 시신을 수습한 자리에 돌무덤을 쌓고, 시루를 얹은 후 가락을 꽂았다고 한다. 이게 호식총이다.

우리나라에서 맹수에게 사람이 희생한 마직막 사례는 지난 1963년 경기도 양주의 한 마을에서 어린이 두 명이 표범에게 희생한 일이 있었다.

한반도에 호랑이 보다 훨씬 흔했던 맹수는 표범(amur leopard)이다.

20세기 초까지 표범은 한반도에 흔했다. 1930년대 한반도를 여행한 Lautensach는 표범이 북부 산악지대에 흔한 편이며, 겨울철에 표범사냥이 행해진다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 통계에 따르면 1915~1916년, 1919~1924년, 1933~1942년의 표범 공식 포획수는 각각 136, 385, 103마리(총624마리)나 된다.

이처럼 흔하던 표범이 사라진 것은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남획 때문이었는데 표범은 값 비싼 가죽과 한약재에 대한 수요 때문에 사냥꾼의 표적이 됐다.

조선총독부조사 자료에 따르면 1925년 표범의 가죽 1장 가격은 50~150원으로 이는 쌀 10가마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위 사진은 구한말 정장을 한 조선의 관료들 모습이다. 관료들의 발 밑에 표범 가죽이 깔려 있다.

해방 이후에도 표범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계속 포획됐다.

1959년 12월 무주 설천에서 멧돼지 올무에 걸린 표범을 포수가 잡은 것을 비롯, 1960년 무주 무풍에서 포수가 암컷 한 마리를 잡았다. 1962년 합천에서 수컷 1마리, 1963년 지리산에서 암컷 1마리가 생포되기도 했다.



위 사진은 표범 가죽을 덮은 신부 가마의 모습이다. 한국범보존기금이 구한말 사진들을 검색해 본 결과 표범 가죽이 사용된 경우는 대략 6건이나 됐다고 한다.

예전 조선시대 문무관들의 그림을 보면 표범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표범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이 깔린 사인교(가마)를 타고 다니는 고관들의 모습을 흔히 봤다고 적고 있다.



위 사진은 한 사또의 행차 모습이다. 표범 가죽을 깔고 있는데, 뒤에 기댄 가죽은 호랑이 가죽으로도 보인다.



위 사진은 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의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사라진 한국의 호랑이와 표범. 호랑이에 대한 증언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 표범에 대한 목격이나 증언은 간간히 나오지 않지만 맹수가 한반도에 남아 있다는 증거는 현재로선 없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호랑이와 표범은 언제 다시 돌아올까.

한국범보전기금 조장혁 이사의 말을 들어보자.

“한반도에 대형 맹수가 생존하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러시아 남서부 (한국, 중국, 러시아의 3국 접경지역)의 호랑이와 표범의 번식 개체군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과 중국간의 연결통로가 보장되고, 먹이가 늘어난다면 러시아에서 번식한 개체들이 만주와 북한으로 퍼지고, 나중에 휴전선이 없어진다면 번식한 호랑이와 표범들이 남한에 올 것이다. ”

(자료제공=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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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인 총에 쓰러진 조선 호랑이
    • 입력 2015-04-27 06: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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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00년대초 포드 바클레이(Ford Barclay)라는 영국인이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고 찍은 모습이다. 그가 쓴 ‘만주호랑이’라는 책에서 공개한 사진인데, 사냥 장소는 목포의 비녀산, 지금의 양을산이다. 잡은 호랑이 크기가 크지 않은 어린 개체인 것을 볼 때 목포 일대에서 호랑이가 다량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더구나 목포의 양을산은 숲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작은 야산에 불과하다. 이런 야산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한반도 서남 해안에 적지 않은 호랑이가 분포해 있었다는 얘기다.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한국 호랑이(amur tiger). 1920년대까지만 해도 자주 출몰했다는 호랑이는 왜, 어떻게 사라졌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서식처 파괴에다 먹잇감이 줄던 호랑이가 일제의 무분별한 남획으로 해방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최근 발굴되는 고증 자료들에 따르면 이미 1900년대초부터 호랑이 사냥이 기승을 부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서양인들의 호랑이 사냥 사례가 적지 않았다. KBS 보도본부 디지털뉴스팀이 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의 도움으로 자료들을 분석한 결과 1900년대초 서양인들에 의한 호랑이 사냥이 성행했고, 특히 이들의 주 사냥지는 목포와 진도 일대의 서남 해안 지역인 것으로 나타났다. 바클레이의 ‘만주호랑이’라는 책을 보자. “호랑이는 한반도의 남부 보다는 북부에 훨씬 더 많이 서식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다른 영국인 사냥꾼과 여행자들의 경험도 그렇고, 내 개인적인 경험에 미루어 보면 북쪽에서 호랑이를 발견하는 것이 남쪽 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수목이 너무나 울창하고 면적도 광대해 사냥이 거의 불가능한 압록강 일대와 그보다 훨씬 동쪽의 시베리아 접경지대를 제외하면 호랑이가 꾸준히 출몰할 정도로 제대로 된 숲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부에 호랑이가 많았다는 증언이다. 바클레이외에도 한반도 서남해안에서 호랑을 잡은 외국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미국인 의사 W. L Smith는 석달 동안 목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호랑이 세 마리를 잡았고, 영국 외교관인 F. Lindley 역시 목포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클레이는 놀랍게도 섬인 진도에서의 호랑이 사냥 경험도 소개한다. 그는 진도에 호랑이 네 마리가 서식하는 것을 확인하고 성숙한 암, 수 호랑이를 한 마리씩 포획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마리를 찾아 열흘을 섬에서 헤맸지만 호랑이 발자국만 발견했다. 위 사진은 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이다. 몰이꾼으로 추정되는 세 명이 화승총을 들고 있다. 전남 진도에서 호랑이가 잡혔다는 기록은 Mazak이 1967년 쓴 논문과 Harper가 쓴 책에도 인용돼 있다. 예전 다도해 일대의 섬에는 꽃사슴이 무척 많았는데, 이런 서식 환경이 호랑이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한국범보전기금의 설명이다. 바클레이는 당시 조선인들에 의한 호랑이 사냥도 매우 성행했다고 증언했다.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의 에는 호랑이의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마을들의 활동적인 남성들이 대략 대여섯 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더 많은 숫자는 창으로 무장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 위 사진은 일제 강점기 금광개발로 조선 제일의 거부로 떠올랐던 최창학이 호랑이 샤낭후 호랑이 시체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특히 조선인들 중에는 화승총을 이용한 사냥외에도 독극물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은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일제 시대때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호랑이 사냥이 많아져 일제가 이를 금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에서는 호랑이 사냥이 성행했을까. 호랑이 모피는 비싸게 거래됐으며, 특히 서양인들의 호랑이 가죽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바클레이는 조선 남부에서 거래되는 스무 장 남짓 되는 호랑이 모피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위 사진은 전란통이던 1951년 부산 국제시장에서 팔리던 호랑이 가죽 사진이다. 피난민이 소지하고 있던 호랑이 가죽이 매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호랑이 사냥이 해방 이후에도 이뤄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호랑이 사냥이 이뤄지던 시절, 호랑이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을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바클레이이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식이 마을 노인에게 알려지자 호랑이 사체는 잡은 자리에서 완전히 팔려나갔다. 노인들이 도착하자 거의 곧바로 내장을 발라낸 뒤 한 컵 될까 하는 복부에 남은 신성한 체액을 나눠 먹을 권위를 가진 여섯 명이 누구냐를 놓고 지루한 언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합의되자 내장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사진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1970년대까지 호랑이 사냥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은 북한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이다. 총을 든 남자의 표정에는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 사냥꾼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위 사진은 호식총이란 불리는 것이다. 예전에 호랑이나 표범에게 잡아 먹히면 호환을 당한 시신을 수습한 자리에 돌무덤을 쌓고, 시루를 얹은 후 가락을 꽂았다고 한다. 이게 호식총이다. 우리나라에서 맹수에게 사람이 희생한 마직막 사례는 지난 1963년 경기도 양주의 한 마을에서 어린이 두 명이 표범에게 희생한 일이 있었다. 한반도에 호랑이 보다 훨씬 흔했던 맹수는 표범(amur leopard)이다. 20세기 초까지 표범은 한반도에 흔했다. 1930년대 한반도를 여행한 Lautensach는 표범이 북부 산악지대에 흔한 편이며, 겨울철에 표범사냥이 행해진다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 통계에 따르면 1915~1916년, 1919~1924년, 1933~1942년의 표범 공식 포획수는 각각 136, 385, 103마리(총624마리)나 된다. 이처럼 흔하던 표범이 사라진 것은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남획 때문이었는데 표범은 값 비싼 가죽과 한약재에 대한 수요 때문에 사냥꾼의 표적이 됐다. 조선총독부조사 자료에 따르면 1925년 표범의 가죽 1장 가격은 50~150원으로 이는 쌀 10가마를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위 사진은 구한말 정장을 한 조선의 관료들 모습이다. 관료들의 발 밑에 표범 가죽이 깔려 있다. 해방 이후에도 표범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계속 포획됐다. 1959년 12월 무주 설천에서 멧돼지 올무에 걸린 표범을 포수가 잡은 것을 비롯, 1960년 무주 무풍에서 포수가 암컷 한 마리를 잡았다. 1962년 합천에서 수컷 1마리, 1963년 지리산에서 암컷 1마리가 생포되기도 했다. 위 사진은 표범 가죽을 덮은 신부 가마의 모습이다. 한국범보존기금이 구한말 사진들을 검색해 본 결과 표범 가죽이 사용된 경우는 대략 6건이나 됐다고 한다. 예전 조선시대 문무관들의 그림을 보면 표범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표범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이 깔린 사인교(가마)를 타고 다니는 고관들의 모습을 흔히 봤다고 적고 있다. 위 사진은 한 사또의 행차 모습이다. 표범 가죽을 깔고 있는데, 뒤에 기댄 가죽은 호랑이 가죽으로도 보인다. 위 사진은 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의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사라진 한국의 호랑이와 표범. 호랑이에 대한 증언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 표범에 대한 목격이나 증언은 간간히 나오지 않지만 맹수가 한반도에 남아 있다는 증거는 현재로선 없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호랑이와 표범은 언제 다시 돌아올까. 한국범보전기금 조장혁 이사의 말을 들어보자. “한반도에 대형 맹수가 생존하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러시아 남서부 (한국, 중국, 러시아의 3국 접경지역)의 호랑이와 표범의 번식 개체군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과 중국간의 연결통로가 보장되고, 먹이가 늘어난다면 러시아에서 번식한 개체들이 만주와 북한으로 퍼지고, 나중에 휴전선이 없어진다면 번식한 호랑이와 표범들이 남한에 올 것이다. ” (자료제공=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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