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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퍼]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본이 진짜 노리는 것은?
입력 2015.06.07 (09:00) 수정 2015.06.08 (00:23) 디지털퍼스트
지난달 27일 오후 2시. 나가사키의 하늘은 화창했다. 하시마(군함도)로 출발하는 관광선은 승객들로 가득 찼다.

"군함도는 파도가 거센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1년에 며칠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운이 좋은 겁니다."

관광 안내원의 목소리도 활기찼다. 배가 출발하자 미쓰비시 조선소의 자이언트 크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106년 전, 1909년에 영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크레인이다. 일본은 군함도와 함께 이 크레인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40분 뒤 잿빛의 건물 뼈대만 남은 군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음산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무인도였지만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 군함도 나타나자 일본인 관광객 ‘환호’

선착장에 도착해 견학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검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입니다. 1916년에 건립됐습니다. 이런 건물은 당시 도쿄나 오사카에도 없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시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 섬은 도쿄보다 인구밀도가 9배나 높은 곳이었습니다."

석탄 산업의 최전성기였던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축구장 2개 면적의 군함도엔 5천여 명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석탄 소비량이 줄어들던 1974년, 섬의 소유권을 갖고 있던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는 폐광을 선언했다. 지난 2009년 나가사키시가 관광코스를 개발해 일반에 공개하기 전까지 군함도는 버려진 섬이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도 있다는 소식에 이곳을 찾았다는 한 일본인 관광객은 '이 섬에서 나온 석탄 때문에 당시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때 산업화와 제국주의의 심장이었던 탄광,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린 무인도. 이곳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의 눈빛엔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당시 이곳엔 사람이 살고, 소리가 나고, 생기가 있고, 일본의 미래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었습니다."

안내원의 목소리가 멈췄다.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최대 800명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군함도에서 숨진 122명의 조선인 사망자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 폐광을 관광코스로 개발…강제동원 흔적 찾을 수 없어

해저탄광인 군함도의 갱도는 지하 1000미터까지 내려간다. 88살 최장섭 할아버지는 14살이었던 1943년 '야마모토 쇼쇼'라는 이름으로 군함도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2년 10개월 동안 기온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막장'에서 석탄을 캤다.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尺)을 내려가야 해. 그래야 석탄이 나오니까.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일했지. 갱도에서 나오면 내가 꼭 귀신같아 보였어..."

8시간 2교대 근무가 계속됐다. 하루 최대 16시간의 중노동이다. 조선인들의 숙소는 일본인 숙소와 달랐다. 파도가 들이치는 저지대의 반지하 건물엔 항상 악취가 진동했다.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시래깃국에 콩깻묵을 한 덩이씩 줬는데, 그거 먹고 어떻게 살겠어? 영양실조 걸리고... 내가 참 참혹한 세상에 있었지."

■ 지하 1,000미터 해저탄광…‘지옥도’ 악명

일본 정부는 이런 군함도의 어두운 역사를 철저히 감춘 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역사를 지우고 각색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 자료를 직접 검토한 강동진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의 신청서는 굉장히 결과 중심적입니다. 왜 군함도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탄광이 존재하게 됐고, 어떤 과정으로 석탄이 생산됐고, 그 생산 과정에 어떤 사람이, 또 어떤 기술이 접목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인지 설명이 부족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이다. '노동자가 누구인가?'라는 자연스러운 질문을 피하려 했다는 지적이다.

등재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한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군함도가 만들어진 것은 메이지 시대였지만 석탄 채굴이 가장 활발히 이뤄진 시기는 1940년대다. 전쟁시기와 겹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는 모두 23곳이다. 이 가운데 군함도 등 7곳이 강제동원과 관련된 곳이다. 일본은 강제동원에 대한 언급은 피하면서 이 시설들이 '서양 기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방식으로 산업화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일본 정부의 설명대로 등재 후보 23곳은 산업화의 현장인가?



■ 노동자 언급 없고 등재 시기 한정…일본의 ‘꼼수’

후쿠오카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가량을 달리면 야마구치 현 '하기'시가 나온다.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하시모토강과 마쓰모토강 사이에 낀 오지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 역사에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로 기록된다.

그 주역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다. 지금도 하기엔 그가 세운 사설 학당이 있다. 바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다. 이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이다.

취재진이 쇼카손주쿠를 찾은 날은 평일이었음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위대한 스승이자 스스로 삶을 개척한 영웅으로 추앙한다. 관광 안내원을 따라가며 설명을 들었다.

"그는 학생들의 단점을 보기보다는 언제나 장점을 살리려 했습니다. 때문에 문하생들은 굉장히 의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든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메이지 시대에 총리대신이 되는 인물을 여러 명 배출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문관으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일본을 대표하는 무관이다. 야마가타의 군부 계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인 가쓰라 다로(桂太郎), 조선 초대 총독으로 병합조약을 체결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조선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등으로 이어진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의 설명이다.

"한 마디로, 조선을 지배한 사람들의 계보는 전부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 조선 침략 가르친 학당이 세계문화유산?

요시다 쇼인은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의 주창자였다. 그가 25살에 감옥에서 쓴 '유수록(幽囚錄)'엔 '무력 준비를 서둘러 조선을 꾸짖어 옛날처럼 조공을 바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의 침략 사상은 여러 서한에서도 발견된다.

"침략하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침략해서 지배하므로 러시아에게 교역으로 빼앗긴 부분을 조선 땅과 만주 땅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1855년 4월 24일 스기 우메타로에게 보낸 서한)

"군함을 많이 만들어 북쪽은 북해도를, 서쪽은 조선을 정복하여 당당하게 진취적인 기세를 보여준다면 서양열강들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1854년 12월 12일 스기 우메타로에게 보낸 서한)

"조선과 만주를 침략한다면 울릉도는 첫 번째 발판이 될 것이다." (1858년 2월 19일 기도 타카요시에게 보낸 서한)

이장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기념할만한 장소"라며 "'정한론'을 기초로 한 침략주의적인, 또 제국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치는 장소가 과연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정한론’, ‘탈아입구론’이 인류 보편 가치?

쇼카손주쿠가 '산업 유산'이란 명목으로 등재되는 것도 문제다. 강동진 교수는 "산업 혁명과는 1%도 관련이 없는 장소"라고 못 박았다.

"지금 등재를 추진하는 규슈-야마구치의 산업 유산에 쇼카손주쿠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것은 산업 유산 자체보다는 메이지 시대에 관심이 더 많다는 증거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핵심 정신은 '정한론'과 '탈아입구론'으로 대표되는 침략사상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매년 요시다 쇼인의 신사를 참배한다. 그의 이름에 있는 '신(晋)'자는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신(晋)'자를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쇼인 사상의 신봉자다.

때문에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의 이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진짜 목표가 다른 산업화 유산이 아닌 쇼카손주쿠라고 분석한다.

"일본 우파들의 주장을 대변할 수 있는 모든 사상의 뿌리가 요시다 쇼인에게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등재를 신청한 다른 산업 유산들은 쇼카손주쿠 등재를 위한 위장일 수 있습니다. 만약 쇼카손주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요시다 쇼인의 사상이 전부 정당화 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 “쇼카손주쿠 유네스코 등재는 침략과 전쟁 정당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의 등재 방식도 독특하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지금도 가동 중인 곳이다. 취재진이 조선소를 찾았을 때도 선체 길이가 300미터에 이르는 대형 유조선 2척이 건조되고 있었다. 내년 완성을 목표로 만2천 톤급 크루즈 선도 건조 중이었다. 작동 중인 조선소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다. 게다가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87척의 군함을 만든 대표적인 전범 기업이다.

강동진 교수는 일본이 조선소의 요소를 쪼개서 등재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 입장에서 산업 유산을 이야기 하면서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를 뺄 수는 없습니다. 일본 조선업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법을 쓴 거죠. 찾아보니까 영빈관이라든가 자이언트 크레인은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맞아요. 그래서 조선소 전체를 등재하지 않고 요소를 등재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요소들이 등재되면 그것은 곧 조선조 전체가 등재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 전범 기업 미쓰비시 조선소도 세계문화유산?

일본은 여전히 어두운 역사를 가린 채 군함도를, 쇼카손주쿠를, 미쓰비시 조선소를 산업 혁명의 유산으로만 국제사회에 소개하고 있다. 이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오는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군함도와 쇼카손주쿠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알리지 못한다면, 세계는 이곳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인류의 보편 가치가 서린 곳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연관 기사]

☞ [취재파일 K] 일본 강제징용 유적 현장을 가다

※ 이 기사는 6월 7일 밤 11시 20분 KBS 1TV <취재파일K>에서 방송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디·퍼(디지털 퍼스트)는 KBS가 깊이있게 분석한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더 빨리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디지털 공간입니다.
  • [디·퍼]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본이 진짜 노리는 것은?
    • 입력 2015-06-07 09:00:12
    • 수정2015-06-08 00:23:33
    디지털퍼스트
지난달 27일 오후 2시. 나가사키의 하늘은 화창했다. 하시마(군함도)로 출발하는 관광선은 승객들로 가득 찼다.

"군함도는 파도가 거센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1년에 며칠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주 운이 좋은 겁니다."

관광 안내원의 목소리도 활기찼다. 배가 출발하자 미쓰비시 조선소의 자이언트 크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106년 전, 1909년에 영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크레인이다. 일본은 군함도와 함께 이 크레인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다.

40분 뒤 잿빛의 건물 뼈대만 남은 군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음산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무인도였지만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 군함도 나타나자 일본인 관광객 ‘환호’

선착장에 도착해 견학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검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입니다. 1916년에 건립됐습니다. 이런 건물은 당시 도쿄나 오사카에도 없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시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이 섬은 도쿄보다 인구밀도가 9배나 높은 곳이었습니다."

석탄 산업의 최전성기였던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축구장 2개 면적의 군함도엔 5천여 명이 모여 살았다. 하지만 석탄 소비량이 줄어들던 1974년, 섬의 소유권을 갖고 있던 일본 대기업 미쓰비시는 폐광을 선언했다. 지난 2009년 나가사키시가 관광코스를 개발해 일반에 공개하기 전까지 군함도는 버려진 섬이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도 있다는 소식에 이곳을 찾았다는 한 일본인 관광객은 '이 섬에서 나온 석탄 때문에 당시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때 산업화와 제국주의의 심장이었던 탄광,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린 무인도. 이곳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의 눈빛엔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당시 이곳엔 사람이 살고, 소리가 나고, 생기가 있고, 일본의 미래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었습니다."

안내원의 목소리가 멈췄다.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최대 800명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군함도에서 숨진 122명의 조선인 사망자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 폐광을 관광코스로 개발…강제동원 흔적 찾을 수 없어

해저탄광인 군함도의 갱도는 지하 1000미터까지 내려간다. 88살 최장섭 할아버지는 14살이었던 1943년 '야마모토 쇼쇼'라는 이름으로 군함도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2년 10개월 동안 기온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막장'에서 석탄을 캤다.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尺)을 내려가야 해. 그래야 석탄이 나오니까.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일했지. 갱도에서 나오면 내가 꼭 귀신같아 보였어..."

8시간 2교대 근무가 계속됐다. 하루 최대 16시간의 중노동이다. 조선인들의 숙소는 일본인 숙소와 달랐다. 파도가 들이치는 저지대의 반지하 건물엔 항상 악취가 진동했다.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시래깃국에 콩깻묵을 한 덩이씩 줬는데, 그거 먹고 어떻게 살겠어? 영양실조 걸리고... 내가 참 참혹한 세상에 있었지."

■ 지하 1,000미터 해저탄광…‘지옥도’ 악명

일본 정부는 이런 군함도의 어두운 역사를 철저히 감춘 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역사를 지우고 각색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 자료를 직접 검토한 강동진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의 신청서는 굉장히 결과 중심적입니다. 왜 군함도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어떻게 탄광이 존재하게 됐고, 어떤 과정으로 석탄이 생산됐고, 그 생산 과정에 어떤 사람이, 또 어떤 기술이 접목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인지 설명이 부족합니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이다. '노동자가 누구인가?'라는 자연스러운 질문을 피하려 했다는 지적이다.

등재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한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군함도가 만들어진 것은 메이지 시대였지만 석탄 채굴이 가장 활발히 이뤄진 시기는 1940년대다. 전쟁시기와 겹칠 수밖에 없다.

일본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는 모두 23곳이다. 이 가운데 군함도 등 7곳이 강제동원과 관련된 곳이다. 일본은 강제동원에 대한 언급은 피하면서 이 시설들이 '서양 기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방식으로 산업화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일본 정부의 설명대로 등재 후보 23곳은 산업화의 현장인가?



■ 노동자 언급 없고 등재 시기 한정…일본의 ‘꼼수’

후쿠오카 공항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가량을 달리면 야마구치 현 '하기'시가 나온다. 인구 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로 하시모토강과 마쓰모토강 사이에 낀 오지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 역사에 메이지 유신의 발원지로 기록된다.

그 주역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다. 지금도 하기엔 그가 세운 사설 학당이 있다. 바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다. 이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이다.

취재진이 쇼카손주쿠를 찾은 날은 평일이었음에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0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위대한 스승이자 스스로 삶을 개척한 영웅으로 추앙한다. 관광 안내원을 따라가며 설명을 들었다.

"그는 학생들의 단점을 보기보다는 언제나 장점을 살리려 했습니다. 때문에 문하생들은 굉장히 의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제자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 식으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든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메이지 시대에 총리대신이 되는 인물을 여러 명 배출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문관으로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웠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일본을 대표하는 무관이다. 야마가타의 군부 계보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역인 가쓰라 다로(桂太郎), 조선 초대 총독으로 병합조약을 체결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조선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등으로 이어진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의 설명이다.

"한 마디로, 조선을 지배한 사람들의 계보는 전부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 조선 침략 가르친 학당이 세계문화유산?

요시다 쇼인은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의 주창자였다. 그가 25살에 감옥에서 쓴 '유수록(幽囚錄)'엔 '무력 준비를 서둘러 조선을 꾸짖어 옛날처럼 조공을 바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의 침략 사상은 여러 서한에서도 발견된다.

"침략하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침략해서 지배하므로 러시아에게 교역으로 빼앗긴 부분을 조선 땅과 만주 땅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1855년 4월 24일 스기 우메타로에게 보낸 서한)

"군함을 많이 만들어 북쪽은 북해도를, 서쪽은 조선을 정복하여 당당하게 진취적인 기세를 보여준다면 서양열강들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1854년 12월 12일 스기 우메타로에게 보낸 서한)

"조선과 만주를 침략한다면 울릉도는 첫 번째 발판이 될 것이다." (1858년 2월 19일 기도 타카요시에게 보낸 서한)

이장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기념할만한 장소"라며 "'정한론'을 기초로 한 침략주의적인, 또 제국주의적인 사상을 가르치는 장소가 과연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정한론’, ‘탈아입구론’이 인류 보편 가치?

쇼카손주쿠가 '산업 유산'이란 명목으로 등재되는 것도 문제다. 강동진 교수는 "산업 혁명과는 1%도 관련이 없는 장소"라고 못 박았다.

"지금 등재를 추진하는 규슈-야마구치의 산업 유산에 쇼카손주쿠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는 것은 산업 유산 자체보다는 메이지 시대에 관심이 더 많다는 증거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핵심 정신은 '정한론'과 '탈아입구론'으로 대표되는 침략사상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매년 요시다 쇼인의 신사를 참배한다. 그의 이름에 있는 '신(晋)'자는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였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신(晋)'자를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쇼인 사상의 신봉자다.

때문에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의 이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진짜 목표가 다른 산업화 유산이 아닌 쇼카손주쿠라고 분석한다.

"일본 우파들의 주장을 대변할 수 있는 모든 사상의 뿌리가 요시다 쇼인에게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등재를 신청한 다른 산업 유산들은 쇼카손주쿠 등재를 위한 위장일 수 있습니다. 만약 쇼카손주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요시다 쇼인의 사상이 전부 정당화 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 “쇼카손주쿠 유네스코 등재는 침략과 전쟁 정당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의 등재 방식도 독특하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지금도 가동 중인 곳이다. 취재진이 조선소를 찾았을 때도 선체 길이가 300미터에 이르는 대형 유조선 2척이 건조되고 있었다. 내년 완성을 목표로 만2천 톤급 크루즈 선도 건조 중이었다. 작동 중인 조선소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다. 게다가 미쓰비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87척의 군함을 만든 대표적인 전범 기업이다.

강동진 교수는 일본이 조선소의 요소를 쪼개서 등재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 입장에서 산업 유산을 이야기 하면서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를 뺄 수는 없습니다. 일본 조선업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법을 쓴 거죠. 찾아보니까 영빈관이라든가 자이언트 크레인은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 맞아요. 그래서 조선소 전체를 등재하지 않고 요소를 등재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요소들이 등재되면 그것은 곧 조선조 전체가 등재된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 전범 기업 미쓰비시 조선소도 세계문화유산?

일본은 여전히 어두운 역사를 가린 채 군함도를, 쇼카손주쿠를, 미쓰비시 조선소를 산업 혁명의 유산으로만 국제사회에 소개하고 있다. 이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오는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군함도와 쇼카손주쿠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알리지 못한다면, 세계는 이곳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인류의 보편 가치가 서린 곳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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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파일 K] 일본 강제징용 유적 현장을 가다

※ 이 기사는 6월 7일 밤 11시 20분 KBS 1TV <취재파일K>에서 방송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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