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강제징용 유적 현장을 가다

입력 2015.06.08 (00:01) 수정 2015.06.08 (00:4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녹취>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00m)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

<녹취> 김민철 :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그런 부분들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채 단지 동양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시설이라는 그 명분만 가지고..."

<녹취> 호사카 유지 : "메이지 시대 침략의 중심지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것, 그것은 대단히 우려해야 하는 내용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남서쪽으로 약 290킬로미터.

제주도 10분의 1 정도 면적의 작은섬 미야코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마에하마 등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2차대전 말기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녹취> "발이 미끄러지니까 조심하세요"

열대림을 지나자, 큰 동굴이 나타납니다.

<녹취> 시미즈 하야코(미야코 주민) : "포대를 만들기 위해서 일본군이 진지로 삼았던 장소입니다. 기계는 쓰지 않고 곡괭이로만 팠어요."

감시초소에 부엌까지 갖춘 이 섬에서 가장 큰 진지입니다.

그런데, 이 진지를 만든 사람들은 바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었습니다.

<녹취> 요나하 히로토시 : "조선인의 일은 굉장히 많았어요. 항구 화물선의 짐을 올리고 내리는 작업, 그리고 주로 진지 구축 작업입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위험한 노역에 내몰렸습니다.

<인터뷰> 나가하마 유키오(미야코 주민) : "1945년에는 일본군 2,300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부분 굶어죽었거나 말라리아입니다. 총에 맞아 죽은 건 적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조선인들은 그 이하의 생활을 했을 겁니다."

이곳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이었는지, 또 얼마나 희생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곳 미야코 주민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제동원됐던 조선인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2차 대전 말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곳 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 강제 동원의 흔적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시설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등재를 추진하는 곳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등재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지 취재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일찌감치 서구와 무역을 시작했던 항구도시 나가사키.

<녹취> "출항하게 되면 2시 40분에 다카시마에 입항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배로 40분을 가면 섬 전체가 탄광이었던 하시마, 이른바 '군함도'가 나옵니다.

군함의 모습을 닮아 이름 붙여진 작은 섬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견학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안내원의 설명이 시작됩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군함도 해설사)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입니다. 건립된 것은 1916년이니까, 거의 100년 전입니다."

지금은 건물 뼈대만 덩그러니 남아 음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무인도지만 100년 전, 군함도는 그야말로 최첨단 도시였습니다.

섬은 대기업 미쓰비시의 소유였고, 아파트는 물론, 학교와 어린이집, 영화관과 수영장까지 지어졌습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 : "당시 도쿄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도쿄의 9배가 넘는 인구밀도가 이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석탄 산업의 최전성기였던 1945년, 축구장 두 개 면적의 이 섬엔 무려 5300명이 거주합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 : "당시 이곳엔 사람이 살고, 소리가 나고, 생기가 있고, 일본의 미래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설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섬을 안내하는 이들과 관관객들, 어느 누구도 이 섬이 '지옥섬'이라고 불린 이유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88살 최장섭 할아버지.

최 할아버지는 14살이었던 1943년

'야마모토 쇼쇼'라는 이름으로 군함도에 끌려가 2년 반 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백미터)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여름 겨울 없이 팬티 하나 차고서는 땀으로 며칠을 해버려 그냥. 거기 나오면 귀신 같다고 목욕탕에 와서 자기 얼굴 형상을 쳐다 볼 때 귀신같아..."

해저탄광인 군함도는 바다 밑으로 이어진 수직갱도를 따라 지하 600미터까지 내려갑니다.

수평 갱도를 통과해 다시 경사진 사갱을 몇 개 거치면 해저 1000미터 막장에 도착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 곳에서 조선인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석탄을 캐야했습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열기와 가스는 심해졌습니다.

8시간씩 2교대로 이뤄지는 하루 16시간의 고된 노동.

쉴 수 있는 숙소마저 파도가 들이치는 저지대에 있어 항상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시래기 국에 콩깻묵을 한 덩이 씩 주는데, 그거 먹고 어떻게 살겠어. 영양실조로 쥐가 나서 꺽꺽 우는 소리...내가 들어봐도 참혹한 세상에 있단 말이야"

감옥같던 섬을 탈출하려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엄쳐 도망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기도 하고,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탈출하려고 가다가 50리 밖에서 잡혀오고, 30리 밖에서 잡혀오고. 잡혀가는 사람은 밧줄로 그냥 후려 갈겨서 피가 묻어나오고 살이 묻어나오고 야단을 치고...참 그거 참혹해서 보지를 못했어"

1943년부터 45년 사이 군함도엔 최대 800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이 가운데 122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채 폐허가 된 섬.

그런데 최근 이 섬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미쓰비시가 폐광을 선언한 뒤 무인도가 됐던 이 섬은 지난 2009년 나가사키시가 일부 지역을 관광 코스로 개발하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정부는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공식 작업에 착수했고, 지난달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이코모스는 이에 대해 적합 판정을 내렸습니다.

<인터뷰> 이장희(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교수) : "(이코모스는) 글자 그대로 사실 유네스코의 민간 자문기구죠. 하지만 지금까지 그 사람들의 권고가 거의 한 건도 부결되는 예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가진 그런 자문 기구죠."

일본이 등재 신청을 한 시설은 모두 23곳.

이 가운데 군함도를 비롯해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와 미이케 탄광 등 7곳이 강제동원 시설입니다.

일본은 이 시설들이 서양 기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방식으로 산업화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등 어두운 역사는 철저히 감추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국제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전쟁포로에 대한 강제노동이라든지 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그런 부분들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채 단지 동양에서 처음으로 산업 혁명을 일으켰던 시설이라는 그 명분만 가지고..."

등재 대상의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한한 점도 이후 시작된 강제동원의 역사를 숨기려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 지원위원회 조사과장) : "그 지역이 1910년으로 끝난 지역이 아니라 1910년 이후에 더욱더 많이 활용된 지역이예요. 그러니까 1910년 이전에 처음에 태동은 되었지만 1910년 이후에 더 활용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주장하는 것은 맞지가 않고요"

미쓰비시의 나가사키 조선소.

2차대전 당시 87척의 군함이 만들어진 곳으로 역시 강제동원이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 영국에서 수입한 자이언트 크레인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입니다.

이외에도 20세기 초에 지어진 영빈관 등 조선소 안에 있는 4개 시설이 등재 후보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 "나가사키 조선소는 지금 작동을 하고 있는 조선소입니다. 여기가 세계유산이 된다? 아무도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일본은 나가사키 조선소를 빼버리면 이게 조선업에서의 가장 핵심공간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편법을 쓰는 거죠. 찾아보니까 영빈관 하나, 크레인 하나 이런 것들은 메이지 시대 것이 맞아요. 그러면서 나가사키 조선소 전체를 등재하지 않고 요소를 등재하는 거죠."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조선소가 이런 방식을 통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 "87대의 군함을 만들었고, 부국강병이라고 하는 전쟁을 일으킬 때 이들의 가장 핵심인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을 이 사람들은 산업유산 얘기하는 데 뺄 수가 없는 거죠. 하시마(군함도)도 그런 겁니다. 뺄 수가 없는 상징 시설이기 때문에 이걸 빼지 못하는데 모습이나 이런 것들이 형편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방법을 총 동원해서 각색을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왜 이런 각색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노리는 속셈은 따로 있다고 지적합니다.

야마구치현 북쪽에 자리잡은 하기시.

방 두 칸의 작은 건물 앞에 관광객들이 모여있습니다.

불과 30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요시다 쇼인.

그의 사설 학당인 쇼카손주쿠입니다.

<녹취> 관광 해설사 : "요시다 쇼인은 문하생들의 단점을 보기보다는 장점을 발견해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시다 쇼인을 중심으로 걸려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모두 그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도, '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이라며 침략 의사를 명확히 했던

야마가타 아리모토도 그의 제자입니다.

<인터뷰>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이토 히로부미라든가 이노우에 가오루라든가요,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거든요. 조선을 지배한 사람들의 계보는 거기에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라든가, 2대 하세가와 총독 같은 사람은 3.1 독립 운동을 무참히 짓밟은 사람이잖아요. 다 그 계열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인 요시다 쇼인은 한편으론 이른바 '정한론', 그러니까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곳 역시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이란 명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 "(쇼카손주쿠는) 산업 혁명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는, 제가 볼 때는 1%도 관계가 없는 장소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사실은 규슈-야마구치의 산업유산 보다는 메이지 시대에 관심이 더 많은 거죠. 정한론이니 탈아입구니 하는 그런 침략사상이 메이지 정신의 핵심이거든요."

요시단 쇼인이 25살 때 쓴 '유수록'.

'무력 준비를 서둘러 조선을 꾸짖어 옛날처럼 조공을 바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런 침략 사상은 그가 보낸 여러 서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침략하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침략해서 지배하므로 러시아에게 교역으로 빼앗긴 부분을 조선 땅과 만주 땅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조선과 만주를 침략한다면 울릉도는 첫번째 발판이 될 것이다."

<인터뷰> 이장희(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교수) : "유네스코 협정의 문화유산 정신은 보편적으로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를 기념할 만한 그런 역사적인 장소인 거죠. 그런데 요시다 쇼인이 만든 전체저의적인, 정한론을 기초로 한 전체주의적인, 침략주의적인 또 제국주의적인 사상을 키우는 그 장소가 과연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인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요시다 쇼인의 신사를 매년 참배해왔습니다.

<인터뷰>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일본 우파들의 주장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모든 시작이 요시다 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상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려고 했던 그런 사람의 중심적인 가르침이 있었던 그 서당을 사실상 세계문화유산으로 하고 싶어서 나머지 것을 다 모아서 그렇게 한 의혹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전쟁의 상처와 강제동원의 아픔이 서린 섬, 미야코.

취재진이 찾았던 이 미야코는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려고 준비 중인 지역입니다.

<인터뷰> 정혜경 : "일본이 지금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12개 지역 중에 아마미-류큐 제도가 있어요. 이 지역은 지금 잠정 목록에 올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역인데 여기를 류큐 문화권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자연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하는데, 그 아마미에는 자살 특공기지가 네 군데나 있었고요. 여기에 지금 저희 강제동원 피해자 분들이 24명이 확인이 되는 그런 지역입니다."

규슈와 야마구치의 산업유산 외에도 일본의 유네스코 등재 전략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저지른 반 인륜적인 범죄 행위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면, 세계는 이곳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인류의 보편 가치가 서린 곳으로 잘못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군함도, 쇼카손주쿠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6월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다"


[연관 기사]

☞ [디·퍼]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본이 진짜 노리는 것은?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일본 강제징용 유적 현장을 가다
    • 입력 2015-06-07 23:43:46
    • 수정2015-06-08 00:40:24
    취재파일K
<녹취>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00m)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

<녹취> 김민철 :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그런 부분들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채 단지 동양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시설이라는 그 명분만 가지고..."

<녹취> 호사카 유지 : "메이지 시대 침략의 중심지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것, 그것은 대단히 우려해야 하는 내용이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남서쪽으로 약 290킬로미터.

제주도 10분의 1 정도 면적의 작은섬 미야코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마에하마 등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2차대전 말기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녹취> "발이 미끄러지니까 조심하세요"

열대림을 지나자, 큰 동굴이 나타납니다.

<녹취> 시미즈 하야코(미야코 주민) : "포대를 만들기 위해서 일본군이 진지로 삼았던 장소입니다. 기계는 쓰지 않고 곡괭이로만 팠어요."

감시초소에 부엌까지 갖춘 이 섬에서 가장 큰 진지입니다.

그런데, 이 진지를 만든 사람들은 바로 강제 동원된 조선인이었습니다.

<녹취> 요나하 히로토시 : "조선인의 일은 굉장히 많았어요. 항구 화물선의 짐을 올리고 내리는 작업, 그리고 주로 진지 구축 작업입니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위험한 노역에 내몰렸습니다.

<인터뷰> 나가하마 유키오(미야코 주민) : "1945년에는 일본군 2,300명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부분 굶어죽었거나 말라리아입니다. 총에 맞아 죽은 건 적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조선인들은 그 이하의 생활을 했을 겁니다."

이곳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이었는지, 또 얼마나 희생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곳 미야코 주민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강제동원됐던 조선인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요.

2차 대전 말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곳 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 강제 동원의 흔적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시설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등재를 추진하는 곳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등재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지 취재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일찌감치 서구와 무역을 시작했던 항구도시 나가사키.

<녹취> "출항하게 되면 2시 40분에 다카시마에 입항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배로 40분을 가면 섬 전체가 탄광이었던 하시마, 이른바 '군함도'가 나옵니다.

군함의 모습을 닮아 이름 붙여진 작은 섬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견학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안내원의 설명이 시작됩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군함도 해설사)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입니다. 건립된 것은 1916년이니까, 거의 100년 전입니다."

지금은 건물 뼈대만 덩그러니 남아 음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무인도지만 100년 전, 군함도는 그야말로 최첨단 도시였습니다.

섬은 대기업 미쓰비시의 소유였고, 아파트는 물론, 학교와 어린이집, 영화관과 수영장까지 지어졌습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 : "당시 도쿄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도쿄의 9배가 넘는 인구밀도가 이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석탄 산업의 최전성기였던 1945년, 축구장 두 개 면적의 이 섬엔 무려 5300명이 거주합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 : "당시 이곳엔 사람이 살고, 소리가 나고, 생기가 있고, 일본의 미래라고 불리던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설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섬을 안내하는 이들과 관관객들, 어느 누구도 이 섬이 '지옥섬'이라고 불린 이유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88살 최장섭 할아버지.

최 할아버지는 14살이었던 1943년

'야마모토 쇼쇼'라는 이름으로 군함도에 끌려가 2년 반 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백미터)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여름 겨울 없이 팬티 하나 차고서는 땀으로 며칠을 해버려 그냥. 거기 나오면 귀신 같다고 목욕탕에 와서 자기 얼굴 형상을 쳐다 볼 때 귀신같아..."

해저탄광인 군함도는 바다 밑으로 이어진 수직갱도를 따라 지하 600미터까지 내려갑니다.

수평 갱도를 통과해 다시 경사진 사갱을 몇 개 거치면 해저 1000미터 막장에 도착합니다.

가장 위험한 이 곳에서 조선인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옆으로 누워서 석탄을 캐야했습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열기와 가스는 심해졌습니다.

8시간씩 2교대로 이뤄지는 하루 16시간의 고된 노동.

쉴 수 있는 숙소마저 파도가 들이치는 저지대에 있어 항상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조선인 징용자들은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시래기 국에 콩깻묵을 한 덩이 씩 주는데, 그거 먹고 어떻게 살겠어. 영양실조로 쥐가 나서 꺽꺽 우는 소리...내가 들어봐도 참혹한 세상에 있단 말이야"

감옥같던 섬을 탈출하려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엄쳐 도망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기도 하고,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탈출하려고 가다가 50리 밖에서 잡혀오고, 30리 밖에서 잡혀오고. 잡혀가는 사람은 밧줄로 그냥 후려 갈겨서 피가 묻어나오고 살이 묻어나오고 야단을 치고...참 그거 참혹해서 보지를 못했어"

1943년부터 45년 사이 군함도엔 최대 800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이 가운데 122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두운 역사를 간직한 채 폐허가 된 섬.

그런데 최근 이 섬이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미쓰비시가 폐광을 선언한 뒤 무인도가 됐던 이 섬은 지난 2009년 나가사키시가 일부 지역을 관광 코스로 개발하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정부는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공식 작업에 착수했고, 지난달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이코모스는 이에 대해 적합 판정을 내렸습니다.

<인터뷰> 이장희(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교수) : "(이코모스는) 글자 그대로 사실 유네스코의 민간 자문기구죠. 하지만 지금까지 그 사람들의 권고가 거의 한 건도 부결되는 예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권위를 가진 그런 자문 기구죠."

일본이 등재 신청을 한 시설은 모두 23곳.

이 가운데 군함도를 비롯해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와 미이케 탄광 등 7곳이 강제동원 시설입니다.

일본은 이 시설들이 서양 기술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방식으로 산업화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등 어두운 역사는 철저히 감추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국제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전쟁포로에 대한 강제노동이라든지 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에 대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그런 부분들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채 단지 동양에서 처음으로 산업 혁명을 일으켰던 시설이라는 그 명분만 가지고..."

등재 대상의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한한 점도 이후 시작된 강제동원의 역사를 숨기려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 지원위원회 조사과장) : "그 지역이 1910년으로 끝난 지역이 아니라 1910년 이후에 더욱더 많이 활용된 지역이예요. 그러니까 1910년 이전에 처음에 태동은 되었지만 1910년 이후에 더 활용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주장하는 것은 맞지가 않고요"

미쓰비시의 나가사키 조선소.

2차대전 당시 87척의 군함이 만들어진 곳으로 역시 강제동원이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 영국에서 수입한 자이언트 크레인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입니다.

이외에도 20세기 초에 지어진 영빈관 등 조선소 안에 있는 4개 시설이 등재 후보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 "나가사키 조선소는 지금 작동을 하고 있는 조선소입니다. 여기가 세계유산이 된다? 아무도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일본은 나가사키 조선소를 빼버리면 이게 조선업에서의 가장 핵심공간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편법을 쓰는 거죠. 찾아보니까 영빈관 하나, 크레인 하나 이런 것들은 메이지 시대 것이 맞아요. 그러면서 나가사키 조선소 전체를 등재하지 않고 요소를 등재하는 거죠."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의 조선소가 이런 방식을 통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 "87대의 군함을 만들었고, 부국강병이라고 하는 전쟁을 일으킬 때 이들의 가장 핵심인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을 이 사람들은 산업유산 얘기하는 데 뺄 수가 없는 거죠. 하시마(군함도)도 그런 겁니다. 뺄 수가 없는 상징 시설이기 때문에 이걸 빼지 못하는데 모습이나 이런 것들이 형편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방법을 총 동원해서 각색을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왜 이런 각색이 필요할까?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노리는 속셈은 따로 있다고 지적합니다.

야마구치현 북쪽에 자리잡은 하기시.

방 두 칸의 작은 건물 앞에 관광객들이 모여있습니다.

불과 30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요시다 쇼인.

그의 사설 학당인 쇼카손주쿠입니다.

<녹취> 관광 해설사 : "요시다 쇼인은 문하생들의 단점을 보기보다는 장점을 발견해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시다 쇼인을 중심으로 걸려있는 사진 속 주인공은 모두 그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도, '국가 이익의 초점은 조선'이라며 침략 의사를 명확히 했던

야마가타 아리모토도 그의 제자입니다.

<인터뷰>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이토 히로부미라든가 이노우에 가오루라든가요,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고로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이 거든요. 조선을 지배한 사람들의 계보는 거기에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라든가, 2대 하세가와 총독 같은 사람은 3.1 독립 운동을 무참히 짓밟은 사람이잖아요. 다 그 계열입니다."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인 요시다 쇼인은 한편으론 이른바 '정한론', 그러니까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이곳 역시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이란 명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에 올랐습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 "(쇼카손주쿠는) 산업 혁명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는, 제가 볼 때는 1%도 관계가 없는 장소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사실은 규슈-야마구치의 산업유산 보다는 메이지 시대에 관심이 더 많은 거죠. 정한론이니 탈아입구니 하는 그런 침략사상이 메이지 정신의 핵심이거든요."

요시단 쇼인이 25살 때 쓴 '유수록'.

'무력 준비를 서둘러 조선을 꾸짖어 옛날처럼 조공을 바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섬들을 노획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런 침략 사상은 그가 보낸 여러 서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침략하기 쉬운 조선, 만주, 중국을 침략해서 지배하므로 러시아에게 교역으로 빼앗긴 부분을 조선 땅과 만주 땅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조선과 만주를 침략한다면 울릉도는 첫번째 발판이 될 것이다."

<인터뷰> 이장희(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과 교수) : "유네스코 협정의 문화유산 정신은 보편적으로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를 기념할 만한 그런 역사적인 장소인 거죠. 그런데 요시다 쇼인이 만든 전체저의적인, 정한론을 기초로 한 전체주의적인, 침략주의적인 또 제국주의적인 사상을 키우는 그 장소가 과연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인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요시다 쇼인의 신사를 매년 참배해왔습니다.

<인터뷰>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일본 우파들의 주장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모든 시작이 요시다 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상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려고 했던 그런 사람의 중심적인 가르침이 있었던 그 서당을 사실상 세계문화유산으로 하고 싶어서 나머지 것을 다 모아서 그렇게 한 의혹이 대단히 큰 것입니다."

전쟁의 상처와 강제동원의 아픔이 서린 섬, 미야코.

취재진이 찾았던 이 미야코는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려고 준비 중인 지역입니다.

<인터뷰> 정혜경 : "일본이 지금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12개 지역 중에 아마미-류큐 제도가 있어요. 이 지역은 지금 잠정 목록에 올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지역인데 여기를 류큐 문화권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자연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하는데, 그 아마미에는 자살 특공기지가 네 군데나 있었고요. 여기에 지금 저희 강제동원 피해자 분들이 24명이 확인이 되는 그런 지역입니다."

규슈와 야마구치의 산업유산 외에도 일본의 유네스코 등재 전략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제가 저지른 반 인륜적인 범죄 행위를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면, 세계는 이곳을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인류의 보편 가치가 서린 곳으로 잘못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군함도, 쇼카손주쿠 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6월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된다"


[연관 기사]

☞ [디·퍼]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본이 진짜 노리는 것은?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