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공습 버텨 낸 중국 충칭 시민들
입력 2015.06.16 (12:46)
수정 2015.06.1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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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제가 저지른 '충칭대공습'의 참상을 담은 기록 영상이 공개됐는데요,
화마로 얼룩진 도시를 살린 것은 바로 시민들이었습니다.
<리포트>
1940년 8월 19일, 일본 전투기 135대가 융단 폭격을 퍼붓습니다.
충칭 시내 곳곳이 시커먼 연기로 뒤덮입니다.
중국 대륙을 노린 일제의 무차별 폭격은 6년 10개월 간이나 이어졌는데요,
한 언론사는 당시의 참혹 상을 "화마로 태양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묘사했습니다.
당시 충칭에는 대나무와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어서 거리는 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시민들의 불굴의 의지가 도시를 살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적은 기록을 보면, 민간 소방대원 5천 명이 소방대 역할을 자청했다고 합니다.
전쟁 통에 동원된 민간 소방 인력만 만 명이 넘었고, 인력으로 가동하던 펌프 소방 장비가 화재 진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충칭 시민들은 "폭탄이 터질 수록 우리는 강해진다." 라는 글귀를 벽에 새겨 놓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제가 저지른 '충칭대공습'의 참상을 담은 기록 영상이 공개됐는데요,
화마로 얼룩진 도시를 살린 것은 바로 시민들이었습니다.
<리포트>
1940년 8월 19일, 일본 전투기 135대가 융단 폭격을 퍼붓습니다.
충칭 시내 곳곳이 시커먼 연기로 뒤덮입니다.
중국 대륙을 노린 일제의 무차별 폭격은 6년 10개월 간이나 이어졌는데요,
한 언론사는 당시의 참혹 상을 "화마로 태양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묘사했습니다.
당시 충칭에는 대나무와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어서 거리는 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시민들의 불굴의 의지가 도시를 살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적은 기록을 보면, 민간 소방대원 5천 명이 소방대 역할을 자청했다고 합니다.
전쟁 통에 동원된 민간 소방 인력만 만 명이 넘었고, 인력으로 가동하던 펌프 소방 장비가 화재 진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충칭 시민들은 "폭탄이 터질 수록 우리는 강해진다." 라는 글귀를 벽에 새겨 놓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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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공습 버텨 낸 중국 충칭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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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06-16 12:47:59
- 수정2015-06-16 13:01:16
<앵커 멘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제가 저지른 '충칭대공습'의 참상을 담은 기록 영상이 공개됐는데요,
화마로 얼룩진 도시를 살린 것은 바로 시민들이었습니다.
<리포트>
1940년 8월 19일, 일본 전투기 135대가 융단 폭격을 퍼붓습니다.
충칭 시내 곳곳이 시커먼 연기로 뒤덮입니다.
중국 대륙을 노린 일제의 무차별 폭격은 6년 10개월 간이나 이어졌는데요,
한 언론사는 당시의 참혹 상을 "화마로 태양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묘사했습니다.
당시 충칭에는 대나무와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어서 거리는 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시민들의 불굴의 의지가 도시를 살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적은 기록을 보면, 민간 소방대원 5천 명이 소방대 역할을 자청했다고 합니다.
전쟁 통에 동원된 민간 소방 인력만 만 명이 넘었고, 인력으로 가동하던 펌프 소방 장비가 화재 진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충칭 시민들은 "폭탄이 터질 수록 우리는 강해진다." 라는 글귀를 벽에 새겨 놓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제가 저지른 '충칭대공습'의 참상을 담은 기록 영상이 공개됐는데요,
화마로 얼룩진 도시를 살린 것은 바로 시민들이었습니다.
<리포트>
1940년 8월 19일, 일본 전투기 135대가 융단 폭격을 퍼붓습니다.
충칭 시내 곳곳이 시커먼 연기로 뒤덮입니다.
중국 대륙을 노린 일제의 무차별 폭격은 6년 10개월 간이나 이어졌는데요,
한 언론사는 당시의 참혹 상을 "화마로 태양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라고 묘사했습니다.
당시 충칭에는 대나무와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어서 거리는 늘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시민들의 불굴의 의지가 도시를 살렸습니다.
당시 상황을 적은 기록을 보면, 민간 소방대원 5천 명이 소방대 역할을 자청했다고 합니다.
전쟁 통에 동원된 민간 소방 인력만 만 명이 넘었고, 인력으로 가동하던 펌프 소방 장비가 화재 진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충칭 시민들은 "폭탄이 터질 수록 우리는 강해진다." 라는 글귀를 벽에 새겨 놓고 마음을 다지곤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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