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퍼] 해남 옥매산에 돌탑이 쌓여가는 이유

입력 2015.06.21 (08:55) 수정 2015.07.0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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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감싼 안개는 더디게 흘렀다. 안개는 등성이를 넘어 협곡에 쌓였다. 80년 전만 해도 산봉우리가 있던 자리다. 함께 산을 오른 박철희(61)씨가 안개에 가려진 협곡을 가리켰다. 노천광산인 옥매광산이다.

"원래 여기는 이렇게 높았는데 일본놈들이 광물 캔다고 다 파헤쳐버려서 지금은 이렇게 협곡이 돼버린 거예요."

전남 해남의 옥매산은 조선시대부터 광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장식용 석재가 채취됐고, 1924년부터는 명반석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했다.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이용됐다.

당시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6년까지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10만 톤이 넘는 명반석이 채굴돼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옥매산 정상은 해발 174미터였지만 채굴이 진행되면서 깎여나갔고, 지금은 169미터의 다른 봉우리가 정상이다.

이곳에서 수백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지난 2012년에야 강제동원 지원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박 씨의 할아버지도 옥매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였다.

■ 산봉우리가 협곡으로…옥매광산 강제동원 현장

등산로 곳곳엔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있었다. 박 씨와 마을 주민들이 쌓은 것들이다.

"여기 광산에서 일하던 분들이 갑자기 제주도로 끌려갔다고... 그리고 해방돼서 돌아오는데, 타고 있던 배에 화재가 나서 120명 정도가 수장됐어요. 그분들 한을 풀어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해오자 일본은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 포진지 등 군사시설물을 집중적으로 구축했다. 1945년 3월, 일본은 옥매광산 광부 200여 명을 제주도로 이동시킨다. 이들은 대부분 동굴을 파거나 진지를 만드는 작업에 동원된다.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끌려온 이들은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역을 견디며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발파 작업 도중 낙석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거나 장티푸스로 숨진 경우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은 배를 타고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8월 20일 새벽 1시, 이름 모를 35톤급 목선은 220여 명을 태우고 출항했다. 무리한 승선 때문일까? 청산도 앞바다를 지날 무렵 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침몰한다.

"불이 났는데, 마침 지나가던 일본 군함이 있어서 사람들을 건져 올렸는데...바다에 일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더니 그냥 가버렸다는 거야."

구조된 사람은 100여 명. 절반 이상인 120여 명은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옥매산 주변 마을 전체가 비통에 빠졌다. 유족들은 매년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다. 2012년 강제동원 지원위원회 조사 당시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45명이다. 유족이 일찍 고향을 떠났거나 숨진 희생자는 지금까지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70년이 흘렀는데 무슨 보상이 필요하겠어요. 다 필요 없고 단지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게끔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줬으면 하는 게 유일한 바람입니다."

위령비 건립이 지지부진하자 지난 2012년부터 주민들은 손수 돌탑 108개를 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02개를 쌓았어요. 아직 6개가 모자랍니다. 이렇게라도 넋을 위로해야지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 120명 잊혀진 죽음…108 돌탑 쌓아 넋 위로

광산을 메운 안개가 서서히 물러났다. 광부들은 떠났지만 분홍빛의 명반석은 아직도 나뒹굴고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던 흔적만이 이곳이 노천광산이었음을 알려줬다. 박 씨는 취재진을 인근 광물 저장고로 안내했다.



높이 10미터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벽 두께가 1미터를 넘었다.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곳곳에 포탄 자국이 남아있다.

"광산에서 캔 명반석을 저장했던 곳인데 배로 싣고 가야 하니까 부두로 이어지는 철로까지 만들어놨어요."

박 씨는 이 저장고를 역사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흔치 않은 대규모 건물인데다 일제의 수탈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매광산 주변 부지와 건물은 모두 한 대학 법인이 소유하고 있다. 주민들의 요청을 받은 해남군은 대학 법인 측에 이 저장고를 기부하거나 문화재로 등록해달라고 건의했지만 거부당했다.

대학 법인 관계자는 "문화재로 등록되면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해진다"며 "해남군의 요청은 땅과 건물을 공짜로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 “역사관 만들어야” vs “재산권 행사 불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 등 해외보다 국내에 훨씬 더 많다. 현재까지 확인된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이 4천 126곳, 한국은 8천 434곳이다. 국내 강재동원 피해자도 연인원 650만 명으로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 130만 명의 5배에 달한다.

☞ [바로가기] 6월 21일 취재파일K 예고

하지만 국내 강제동원에 대해서는 피해자 지원도, 유적 보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혜경 강제동원 지원위원회 조사과장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금 제도도 지원 대상을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로 제한하고 있다.

강제동원 관련 시설물도 무관심 속에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인데 굳이 아픈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에 의해, 또는 군사 시설 가운데 대부분은 산이나 해안 등 도심 외곽에 있다 보니 관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방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부끄럽고 기억하기 싫은 역사라 해서 감추려하고 외면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차이가 있기는 해도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과 위안부에 관한 역사를 외면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 국내 강제동원 해외의 5배…관련 시설 ‘방치’

옥매광산 같은 국내 강제동원 시설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다.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던 시설은 개발에 밀려 사려져버렸고, 이를 증언해줄 목격자도 이젠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피와 땀으로 쓴 역사의 교훈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김종헌 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실패한 역사든 성공한 역사든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며 "실패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고 가공해서 우리 미래세대에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관기사]

☞ 잊혀져가는 ‘한반도 강제동원 시설’

※ 이 기사는 6월 21일 KBS 1TV <취재파일K>에서 방송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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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감싼 안개는 더디게 흘렀다. 안개는 등성이를 넘어 협곡에 쌓였다. 80년 전만 해도 산봉우리가 있던 자리다. 함께 산을 오른 박철희(61)씨가 안개에 가려진 협곡을 가리켰다. 노천광산인 옥매광산이다.

"원래 여기는 이렇게 높았는데 일본놈들이 광물 캔다고 다 파헤쳐버려서 지금은 이렇게 협곡이 돼버린 거예요."

전남 해남의 옥매산은 조선시대부터 광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장식용 석재가 채취됐고, 1924년부터는 명반석을 집중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했다.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로 태평양전쟁 당시 전투기 등 군수품 제작에 이용됐다.

당시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6년까지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한 해 10만 톤이 넘는 명반석이 채굴돼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옥매산 정상은 해발 174미터였지만 채굴이 진행되면서 깎여나갔고, 지금은 169미터의 다른 봉우리가 정상이다.

이곳에서 수백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지난 2012년에야 강제동원 지원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박 씨의 할아버지도 옥매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였다.

■ 산봉우리가 협곡으로…옥매광산 강제동원 현장

등산로 곳곳엔 어른 키 높이의 돌탑이 쌓여있었다. 박 씨와 마을 주민들이 쌓은 것들이다.

"여기 광산에서 일하던 분들이 갑자기 제주도로 끌려갔다고... 그리고 해방돼서 돌아오는데, 타고 있던 배에 화재가 나서 120명 정도가 수장됐어요. 그분들 한을 풀어드려야 할 것 아닙니까."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해오자 일본은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 포진지 등 군사시설물을 집중적으로 구축했다. 1945년 3월, 일본은 옥매광산 광부 200여 명을 제주도로 이동시킨다. 이들은 대부분 동굴을 파거나 진지를 만드는 작업에 동원된다.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끌려온 이들은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역을 견디며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다. 발파 작업 도중 낙석으로 심한 부상을 당하거나 장티푸스로 숨진 경우도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들은 배를 타고 함께 고향으로 향했다. 8월 20일 새벽 1시, 이름 모를 35톤급 목선은 220여 명을 태우고 출항했다. 무리한 승선 때문일까? 청산도 앞바다를 지날 무렵 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침몰한다.

"불이 났는데, 마침 지나가던 일본 군함이 있어서 사람들을 건져 올렸는데...바다에 일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더니 그냥 가버렸다는 거야."

구조된 사람은 100여 명. 절반 이상인 120여 명은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옥매산 주변 마을 전체가 비통에 빠졌다. 유족들은 매년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냈다. 2012년 강제동원 지원위원회 조사 당시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45명이다. 유족이 일찍 고향을 떠났거나 숨진 희생자는 지금까지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70년이 흘렀는데 무슨 보상이 필요하겠어요. 다 필요 없고 단지 후손들이 기억할 수 있게끔 위령비라도 하나 세워줬으면 하는 게 유일한 바람입니다."

위령비 건립이 지지부진하자 지난 2012년부터 주민들은 손수 돌탑 108개를 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02개를 쌓았어요. 아직 6개가 모자랍니다. 이렇게라도 넋을 위로해야지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 120명 잊혀진 죽음…108 돌탑 쌓아 넋 위로

광산을 메운 안개가 서서히 물러났다. 광부들은 떠났지만 분홍빛의 명반석은 아직도 나뒹굴고 있다.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던 흔적만이 이곳이 노천광산이었음을 알려줬다. 박 씨는 취재진을 인근 광물 저장고로 안내했다.



높이 10미터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은 벽 두께가 1미터를 넘었다.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곳곳에 포탄 자국이 남아있다.

"광산에서 캔 명반석을 저장했던 곳인데 배로 싣고 가야 하니까 부두로 이어지는 철로까지 만들어놨어요."

박 씨는 이 저장고를 역사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흔치 않은 대규모 건물인데다 일제의 수탈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매광산 주변 부지와 건물은 모두 한 대학 법인이 소유하고 있다. 주민들의 요청을 받은 해남군은 대학 법인 측에 이 저장고를 기부하거나 문화재로 등록해달라고 건의했지만 거부당했다.

대학 법인 관계자는 "문화재로 등록되면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해진다"며 "해남군의 요청은 땅과 건물을 공짜로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 “역사관 만들어야” vs “재산권 행사 불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 등 해외보다 국내에 훨씬 더 많다. 현재까지 확인된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이 4천 126곳, 한국은 8천 434곳이다. 국내 강재동원 피해자도 연인원 650만 명으로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 130만 명의 5배에 달한다.

☞ [바로가기] 6월 21일 취재파일K 예고

하지만 국내 강제동원에 대해서는 피해자 지원도, 유적 보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혜경 강제동원 지원위원회 조사과장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금 제도도 지원 대상을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로 제한하고 있다.

강제동원 관련 시설물도 무관심 속에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인데 굳이 아픈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에 의해, 또는 군사 시설 가운데 대부분은 산이나 해안 등 도심 외곽에 있다 보니 관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방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자기 입장에서 부끄럽고 기억하기 싫은 역사라 해서 감추려하고 외면하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차이가 있기는 해도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과 위안부에 관한 역사를 외면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 국내 강제동원 해외의 5배…관련 시설 ‘방치’

옥매광산 같은 국내 강제동원 시설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다.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던 시설은 개발에 밀려 사려져버렸고, 이를 증언해줄 목격자도 이젠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피와 땀으로 쓴 역사의 교훈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김종헌 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실패한 역사든 성공한 역사든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며 "실패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하고 가공해서 우리 미래세대에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관기사]

☞ 잊혀져가는 ‘한반도 강제동원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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