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반도 강제동원 시설’

입력 2015.06.21 (23:20) 수정 2015.06.2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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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가사키 항에서 배로 40분 거리.

섬 전체가 탄광이었던 하시마는, 군함의 모습을 닮아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군함도 해설사) : "당시 도쿄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도쿄의 9배가 넘는 인구밀도가 이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산업화의 원동력으로 소개하는 군함도는 그러나 조선인 8백여 명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던 어두운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인터뷰> 최장섭(군함도 강제동원 피해자)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백미터)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여름 겨울 없이 팬티 하나 차고서는.. 거기 나오면 귀신 같다고 목욕탕에 와서 자기 얼굴 형상을 쳐다 볼 때 귀신같아..."

고된 노동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려던 사람들에겐 고문과 가혹행위가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탈출하려고 가다가 50리 밖에서 잡혀오고, 30리 밖에서 잡혀오고. 잡혀가는 사람은 밧줄로 그냥 후려 갈겨서 피가 묻어나오고 살이 묻어나오고 야단을 치고...참 그거 참혹해서 보지를 못했어"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사실은 숨긴 채 산업혁명의 유산으로만 군함도를 홍보하는 교활한 외교 전략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프닝>

수많은 인권유린이 저질러졌던, 그래서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고 불렸던 군함도는 우리에겐 강제동원의 아픔이 서린 곳인데요.

군함도와 같은 조선인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에만 4천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 등 해외보다, 우리 땅에 더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라는 이유로 무관심 속에 방치되거나 제대로 된 조사 한 번 없이 우리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국내 강제동원 시설들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조선시대부터 광물 생산지로 유명했던 옥매산.

30분 정도 산을 오르자, 편평한 바위 지대가 나타납니다.

1920년대부터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된 옥매광산입니다.

전투기 등 군수품에 사용되는 알루미늄의 원료인 명반석이 주요 광물입니다.

광맥을 따라 산을 파헤치면서 해발 173미터였던 옥매산 봉우리는 깎여 나가 협곡이 됐습니다.

<인터뷰> 박철희 : "노천광산이기 때문에 굴을 판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차츰차츰 캐오다 보니까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린 거예요 지금..."

일제시대 이곳에서 주민들이 강제동원 돼 노역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확인됐습니다.

<녹취> 박철희 : "이게 다 사람이 뚫은 거예요. 지금은 기계로 뚫지만"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과장) : "한 천여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동원돼서 가혹행위를 경험했어야만 했고요. 특히 이곳이 1944년에 군수공장으로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는 분들은/임금이라던가 이런 것들도 받지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

광산과 이어진 해변에 자리잡은 광물 저장고.

높이 10미터 정도의 2층 구조물인데, 벽 두께가 1미터를 넘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습니다.

<인터뷰> 박철희 : "깔때기 식으로 돼 있잖아요. 광석을 철 수레에다 떨어뜨리기 좋게끔 깔때기 식으로 돼 있어서 (광석을) 떨어뜨리면 여기서 레일로 밀고 저 바다 끝까지 가는 거예요."

가혹했던 수탈의 현장.

하지만 주변 어디에도 일제의 강제동원 역사를 알리는 간단한 안내판 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광물 저장소를 역사관으로 만들자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1963년 광업권을 취득해 일대 부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한 대학 법인이 문화재 등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녹취> ○○대학 법인 관게자(음성변조) : "만약에 문화재로 등록이 되면 저희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땅을 내놔라, 공짜로 줘라 그런 이야기하고 똑같거든요"

이런 국내 강제동원 시설은 약 8천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역사학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군함도처럼 일본에 있는 강제동원 시설은 4천여 곳이니, 우리 땅에 있는 강제동원 시설이 일본의 2배가 넘습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1과장) : "동원된 인원수로 따지면 한반도에 동원된 사람들은 연인원 650만 명이고요, 국외로 동원된 사람들은 연인원 130만 명이예요. 절대다수가 한반도 내에서 동원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제동원 시설은 대부분 무관심 속에 방치돼있습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 "일본의 지배가 썩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건데 굳이 아픈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냐는 논리에 의해서 방치하고 있거나, 일본군과 관련되어 있는 시설이다 보니까 도심에 있지 않고 외곽에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특별히 관리를 해야될 이유가 부족한 거예요."

오륙도를 마주한 해안 공원.

아파트 단지 옆, 바닥을 덮은 철문을 열자 지하로 연결된 사다리가 나옵니다.

1920년대 초 일제가 만들어 놓은 장자등 포진지입니다.

연합군 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으로 구경 400밀리미터에 사거리가 3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형 함포가 설치됐습니다.

<인터뷰> 왕정문(부산 향토사학자) : "포를 세 군데 설치해서 공격할 목적으로 했는데, 결국은 시험만 두 번 했대요. 화약만 넣어서 두 번 했는데 그 이후에는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망했기 때문에 그대로 이렇게 땅 속에 묻히게 된 거예요."

강제 동원된 조선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건설한 이 포진지는 해방 이후 새우젓 저장창고로 이용됐습니다.

철근과 레일 등 돈이 될 만한 쇠붙이는 누군가 떼어가 버렸고, 아파트 개발에 밀려 입구는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뷰> 왕정문 : "(아파트) 공사할 때 일부는 파괴를 해서 콘크리트는 다 깼어요. 껍데기는 일부 깼는데 주민들이 '깨지 마라' '그냥 둬라' 항의를 하니까 그나마 깨다가 완전히 파손되기 직전에 끝난 거예요."

최근 이 포진지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 되면서 지자체가 나서 복원을 계획했지만 예산 20억 원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강제동원 등 일제시대와 관련된 시설의 복원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경우도 있습니다.

중일 전쟁 당시 지어진 일본군 장교 관사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면서 서울시는 지난 2010년 13억 원을 들여 관사 2채를 이전,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건물을 문화재로 등록하려던 계획은 일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지금도 정부가 나서서 일제 잔재를 보존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주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 주민 : "일본군 관사를 우리나라 돈으로 관리를 한다는 게 그것도 웃기고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일본인 학교 바로 건너편에 지었는지...별로예요. 없애버렸으면 좋겠어요."

흉물스럽다, 기분 나쁘다, 이런 반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위치가 문제가 된다면 다른 곳으로의 이전도 검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적인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하는지 이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인터뷰> 김종헌(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 "실패한 역사든 아니면 성공한 역사든 간에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달려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사실 굉장히 많은 무형과 유형의 자산을 갖고 있는데 그 무형과 유형의 자산을 어떻게 재해석해서 재가공해서 우리한테, 우리 미래에 잘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본 오키나와 현의 작은 섬 미야코.

독특한 풍광을 지닌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2차 대전 말기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당시 만들어진 진지는 지금도 섬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 시미즈 하야코(미야코 주민) : "한 사람이 타서 적선에 돌진하는 자살 공격을 했던 특공정을 숨겨뒀던 곳입니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진지 대부분을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야코 주민들은 직접 나서 이런 진지를 조사하고 관련 기록을 수집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위안부에 대해서도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채집해 책으로 묶었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 "굉장이 예쁜 여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아주 많았어요.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조선에서 끌려온 여자들이라는 것을 군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알았어요."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난 2008년 미야코에는 조선인 위안부를 추모하는 '아리랑비'가 건립됐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 "비참했던 과거를 저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후세 아이들에게 전해줘야만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연구로 이어지면서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김종헌(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 "일본인들은 지역주민들, 아니면 마니아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녹취하고 또 토론하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분석하고 이렇게 하면서 계속 자료집으로 남기고 또 거기에 전문가들이 개입해서 학술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이런 작업이 들어가는 거죠."

<에필로그>

가파른 해안 절벽에 층층이 자리한 논.

관광명소로 유명한 다랑이마을입니다.

그런데 이곳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김태연(다랑이마을 주민) : "여기에 탄약고가 있었고 저기 저 위에 중대장 사택이 있었고, 저 위에 아까 비닐하우스 있는 거기에 내무반 자리고..."

2차 대전 말기 이곳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진지와 막사 건설에 한반도 곳곳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동원했습니다.

<인터뷰> 김태연 : "나주 부근 사람들이 왔고, 하여튼 전라남도 사람들이 주로 많이 왔어. 뭐 월급도 없고 강제로 잡아다가 시킨거지."

하지만 김태연 할아버지의 기억 외엔 남아있는 시설이나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 건축학과 교수) : "조금 독특하거나 건축양식적으로 토목양식적으로 아주 뛰어나거나 현재에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되는 것들은 잘 보존이 되어 있죠. 그런데 기능이 바뀌어서 그런 것들이 필요 없게 됐다거나 개발이 필요한 지역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그냥 소리 소문 없이 해체되거나 사라진 것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정혜경 : "우리가 일본이 산업유산이라고 해서 규슈-야마구치 지역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데요, 그것과 아울러서 우리 주변에도 있는 지역들에 대해서 이것을 어떻게 세계시민들이 평화의 장소로 공유하게 할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군함도 등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시설 7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될 예정입니다.

다시 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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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져가는 ‘한반도 강제동원 시설’
    • 입력 2015-06-21 23:16:20
    • 수정2015-06-21 23:46:00
    취재파일K
<프롤로그>

나가사키 항에서 배로 40분 거리.

섬 전체가 탄광이었던 하시마는, 군함의 모습을 닮아 '군함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녹취> 스기모토 히로시(군함도 해설사) : "당시 도쿄는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 도쿄의 9배가 넘는 인구밀도가 이 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산업화의 원동력으로 소개하는 군함도는 그러나 조선인 8백여 명이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돼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던 어두운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인터뷰> 최장섭(군함도 강제동원 피해자) : "매일 바다 밑으로 천척(3백미터)이야 천척을 들어간단 말이야. 그래야 석탄이 나오기 때문에...여름 겨울 없이 팬티 하나 차고서는.. 거기 나오면 귀신 같다고 목욕탕에 와서 자기 얼굴 형상을 쳐다 볼 때 귀신같아..."

고된 노동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려던 사람들에겐 고문과 가혹행위가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최장섭 : "탈출하려고 가다가 50리 밖에서 잡혀오고, 30리 밖에서 잡혀오고. 잡혀가는 사람은 밧줄로 그냥 후려 갈겨서 피가 묻어나오고 살이 묻어나오고 야단을 치고...참 그거 참혹해서 보지를 못했어"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사실은 숨긴 채 산업혁명의 유산으로만 군함도를 홍보하는 교활한 외교 전략을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프닝>

수많은 인권유린이 저질러졌던, 그래서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고 불렸던 군함도는 우리에겐 강제동원의 아픔이 서린 곳인데요.

군함도와 같은 조선인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에만 4천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강제동원 시설은 일본 등 해외보다, 우리 땅에 더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라는 이유로 무관심 속에 방치되거나 제대로 된 조사 한 번 없이 우리 기억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국내 강제동원 시설들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조선시대부터 광물 생산지로 유명했던 옥매산.

30분 정도 산을 오르자, 편평한 바위 지대가 나타납니다.

1920년대부터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된 옥매광산입니다.

전투기 등 군수품에 사용되는 알루미늄의 원료인 명반석이 주요 광물입니다.

광맥을 따라 산을 파헤치면서 해발 173미터였던 옥매산 봉우리는 깎여 나가 협곡이 됐습니다.

<인터뷰> 박철희 : "노천광산이기 때문에 굴을 판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차츰차츰 캐오다 보니까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린 거예요 지금..."

일제시대 이곳에서 주민들이 강제동원 돼 노역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확인됐습니다.

<녹취> 박철희 : "이게 다 사람이 뚫은 거예요. 지금은 기계로 뚫지만"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과장) : "한 천여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동원돼서 가혹행위를 경험했어야만 했고요. 특히 이곳이 1944년에 군수공장으로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는 분들은/임금이라던가 이런 것들도 받지 못하고 일을 했습니다."

광산과 이어진 해변에 자리잡은 광물 저장고.

높이 10미터 정도의 2층 구조물인데, 벽 두께가 1미터를 넘을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졌습니다.

<인터뷰> 박철희 : "깔때기 식으로 돼 있잖아요. 광석을 철 수레에다 떨어뜨리기 좋게끔 깔때기 식으로 돼 있어서 (광석을) 떨어뜨리면 여기서 레일로 밀고 저 바다 끝까지 가는 거예요."

가혹했던 수탈의 현장.

하지만 주변 어디에도 일제의 강제동원 역사를 알리는 간단한 안내판 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광물 저장소를 역사관으로 만들자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1963년 광업권을 취득해 일대 부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한 대학 법인이 문화재 등록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녹취> ○○대학 법인 관게자(음성변조) : "만약에 문화재로 등록이 되면 저희 재산권 행사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땅을 내놔라, 공짜로 줘라 그런 이야기하고 똑같거든요"

이런 국내 강제동원 시설은 약 8천여 곳에 이르는 것으로 역사학계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군함도처럼 일본에 있는 강제동원 시설은 4천여 곳이니, 우리 땅에 있는 강제동원 시설이 일본의 2배가 넘습니다.

<인터뷰> 정혜경(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1과장) : "동원된 인원수로 따지면 한반도에 동원된 사람들은 연인원 650만 명이고요, 국외로 동원된 사람들은 연인원 130만 명이예요. 절대다수가 한반도 내에서 동원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제동원 시설은 대부분 무관심 속에 방치돼있습니다.

<인터뷰> 신주백(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교수) : "일본의 지배가 썩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건데 굳이 아픈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냐는 논리에 의해서 방치하고 있거나, 일본군과 관련되어 있는 시설이다 보니까 도심에 있지 않고 외곽에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특별히 관리를 해야될 이유가 부족한 거예요."

오륙도를 마주한 해안 공원.

아파트 단지 옆, 바닥을 덮은 철문을 열자 지하로 연결된 사다리가 나옵니다.

1920년대 초 일제가 만들어 놓은 장자등 포진지입니다.

연합군 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으로 구경 400밀리미터에 사거리가 3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형 함포가 설치됐습니다.

<인터뷰> 왕정문(부산 향토사학자) : "포를 세 군데 설치해서 공격할 목적으로 했는데, 결국은 시험만 두 번 했대요. 화약만 넣어서 두 번 했는데 그 이후에는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망했기 때문에 그대로 이렇게 땅 속에 묻히게 된 거예요."

강제 동원된 조선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건설한 이 포진지는 해방 이후 새우젓 저장창고로 이용됐습니다.

철근과 레일 등 돈이 될 만한 쇠붙이는 누군가 떼어가 버렸고, 아파트 개발에 밀려 입구는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뷰> 왕정문 : "(아파트) 공사할 때 일부는 파괴를 해서 콘크리트는 다 깼어요. 껍데기는 일부 깼는데 주민들이 '깨지 마라' '그냥 둬라' 항의를 하니까 그나마 깨다가 완전히 파손되기 직전에 끝난 거예요."

최근 이 포진지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 되면서 지자체가 나서 복원을 계획했지만 예산 20억 원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강제동원 등 일제시대와 관련된 시설의 복원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경우도 있습니다.

중일 전쟁 당시 지어진 일본군 장교 관사입니다.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면서 서울시는 지난 2010년 13억 원을 들여 관사 2채를 이전,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건물을 문화재로 등록하려던 계획은 일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지금도 정부가 나서서 일제 잔재를 보존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주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뷰> 주민 : "일본군 관사를 우리나라 돈으로 관리를 한다는 게 그것도 웃기고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일본인 학교 바로 건너편에 지었는지...별로예요. 없애버렸으면 좋겠어요."

흉물스럽다, 기분 나쁘다, 이런 반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위치가 문제가 된다면 다른 곳으로의 이전도 검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적인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하는지 이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인터뷰> 김종헌(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 "실패한 역사든 아니면 성공한 역사든 간에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달려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사실 굉장히 많은 무형과 유형의 자산을 갖고 있는데 그 무형과 유형의 자산을 어떻게 재해석해서 재가공해서 우리한테, 우리 미래에 잘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본 오키나와 현의 작은 섬 미야코.

독특한 풍광을 지닌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2차 대전 말기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당시 만들어진 진지는 지금도 섬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 시미즈 하야코(미야코 주민) : "한 사람이 타서 적선에 돌진하는 자살 공격을 했던 특공정을 숨겨뒀던 곳입니다."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진지 대부분을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야코 주민들은 직접 나서 이런 진지를 조사하고 관련 기록을 수집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위안부에 대해서도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채집해 책으로 묶었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 "굉장이 예쁜 여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아주 많았어요.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었는데 나중에 조선에서 끌려온 여자들이라는 것을 군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알았어요."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난 2008년 미야코에는 조선인 위안부를 추모하는 '아리랑비'가 건립됐습니다.

<인터뷰> 요나하 히로토시 : "비참했던 과거를 저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후세 아이들에게 전해줘야만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이 연구로 이어지면서 부끄러운 역사도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김종헌(배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 "일본인들은 지역주민들, 아니면 마니아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녹취하고 또 토론하고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분석하고 이렇게 하면서 계속 자료집으로 남기고 또 거기에 전문가들이 개입해서 학술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이런 작업이 들어가는 거죠."

<에필로그>

가파른 해안 절벽에 층층이 자리한 논.

관광명소로 유명한 다랑이마을입니다.

그런데 이곳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김태연(다랑이마을 주민) : "여기에 탄약고가 있었고 저기 저 위에 중대장 사택이 있었고, 저 위에 아까 비닐하우스 있는 거기에 내무반 자리고..."

2차 대전 말기 이곳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진지와 막사 건설에 한반도 곳곳에서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동원했습니다.

<인터뷰> 김태연 : "나주 부근 사람들이 왔고, 하여튼 전라남도 사람들이 주로 많이 왔어. 뭐 월급도 없고 강제로 잡아다가 시킨거지."

하지만 김태연 할아버지의 기억 외엔 남아있는 시설이나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인터뷰> 강동진(경성대 건축학과 교수) : "조금 독특하거나 건축양식적으로 토목양식적으로 아주 뛰어나거나 현재에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되는 것들은 잘 보존이 되어 있죠. 그런데 기능이 바뀌어서 그런 것들이 필요 없게 됐다거나 개발이 필요한 지역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그냥 소리 소문 없이 해체되거나 사라진 것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정혜경 : "우리가 일본이 산업유산이라고 해서 규슈-야마구치 지역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데요, 그것과 아울러서 우리 주변에도 있는 지역들에 대해서 이것을 어떻게 세계시민들이 평화의 장소로 공유하게 할 것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군함도 등 강제동원이 이뤄졌던 시설 7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는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될 예정입니다.

다시 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를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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