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14살 피아노 천재에겐 박수 소리가 왜 슬펐을까?

입력 2015.08.15 (09:01) 수정 2015.08.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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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조금 특별한 여름 캠프가 열렸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음악회를 열기 위해 5일 동안 맹연습에 들어간 겁니다. 이 친구들의 모습을 꼭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후천성 시각 장애로 악보를 볼 수 없어 작곡을 그만두고, 악기 연주를 포기해야 했던 아픈 사연들을 많이 봐왔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에 그 아이들이 누군지, 또 얼마나 수준급의 연주를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취재를 하면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유지민 학생유지민 학생


◆ “박수 소리가 마치 슬픈 빗소리 같았어요”

14살 지민이는 미숙아 망막증을 가지고 태어나 세상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피아노 영재입니다.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4살 때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를, 5살 때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듣고 따라쳤습니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어거스트 러쉬'의 주인공처럼 지민이는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에 대한 감각을 타고났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한 번 곡을 연주하면 바로 그 곡을 기억해 변주(선율ㆍ리듬ㆍ화성 등을 변형해 연주)까지 할 정도로 수준급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자작곡이 벌써 20곡이 넘습니다. 피아노 연주곡뿐만 아니라 합창곡까지 작곡할 정도입니다. 음악회 연습이 한창인 캠프를 방문했던 날 지민이는 '슬픈 왈츠'라는 자작곡을 연주했습니다. 왈츠 특유의 4분의 3박자에 단조로 구성된 음악과 '슬픈 왈츠'라는 제목이 썩 잘 어울렸습니다. 유아기 발달장애가 있는 지민이는 어눌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이 곡을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설명해나갔습니다.

“와~하고 박수 치잖아요. 그때 빗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민이의 귀에 연주가 끝난 뒤 쏟아지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마치 빗소리같이 느껴졌나 봅니다. 이후 어느 비 오는 날, 음표들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지민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음표들은 한 곡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보내는 박수 소리가 왜 지민이에게는 슬프게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민이는 "그냥 그렇게 짓게 됐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김민주 학생김민주 학생


◆ “어려운 아이들 가르치고 싶어요”

17살 민주는 첼로를 연주합니다. 시각장애 학생으로는 최초로 올해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시각장애 1급인 민주의 첼로에는 현과 악기 몸통 사이 공간에 하얀 종이가 끼워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점자로 빼곡한 악보입니다. 일반인들은 악보 대에 악보를 놓고 보면서 연주하지만, 민주는 곡을 대부분 외우거나 활을 잡은 손으로 점자를 짚어가며 한 음 한 음 연주해야 합니다. 특이한 건 민주의 첼로 소리는 조금 다르다는 겁니다. 클래식 전공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묵직하고 마치 동양 악기를 연주하듯 음이 살짝 끌리는 게 매력적입니다. 민주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연주자마다 특유의 음색이 있는데, 민주는 짚어야 할 현의 위치를 감각적으로 알고 소리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 일반인들보다 좀 더 깊은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민주의 꿈은 뭘까요? 민주에게 꿈이 뭔지 물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민주의 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민주의 꿈은 세계적인 첼리스트도, 유명 인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신보다 조금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첼로 소리를 들으면 마음도 편안해지는 느낌이에요. 제 음악을 듣고 사람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첼로를 연주해요.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감동을 하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다음에 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김민주 양 인터뷰 가운데-

그렇게 지민이와 민주처럼 시각장애가 있는 초·중·고등학생 12명이 모여 5일 동안 음대 교수의 일대일 레슨 등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대일 레슨일대일 레슨


드디어 음악회가 열리는 날. 아이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했습니다. 남학생들은 멋진 정장을 차려입었습니다. 그날 자기 모습이 얼마나 우아하고 멋있었는지 본인은 알까.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그들 앞에 꼭 비춰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조금은 어설펐지만, 꽤 진지했던 이들의 연주회가 끝나고 몇 안 되는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이날 공연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울컥하고 솟구치는 감동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시간 지민이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슬픈 빗소리를 연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를 쓰고 리포트를 만드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느꼈던 감동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려니 자꾸만 그들의 특별한 사연을 찾게 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게 일상이고 현실이며, 평범한 아이들이 어릴 때 악기 하나쯤 배우는 것처럼 단지 악기를 배우고 있을 뿐인 이들을 자꾸 다른 시선으로 설명하려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연주를 듣는 사람이나 제 리포트를 보는 사람들이 너무 큰 감동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어떤 감동을 받았다면 그건 단지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일 뿐이니까요. 우리가 흔히 '장애'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과는 조금 다른 아이들의 이런 연주회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매 순간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연주회가 특별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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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14살 피아노 천재에겐 박수 소리가 왜 슬펐을까?
    • 입력 2015-08-15 09:01:04
    • 수정2015-08-16 11:24:00
    취재후·사건후
지난 3일, 조금 특별한 여름 캠프가 열렸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음악회를 열기 위해 5일 동안 맹연습에 들어간 겁니다. 이 친구들의 모습을 꼭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후천성 시각 장애로 악보를 볼 수 없어 작곡을 그만두고, 악기 연주를 포기해야 했던 아픈 사연들을 많이 봐왔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에 그 아이들이 누군지, 또 얼마나 수준급의 연주를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취재를 하면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유지민 학생


◆ “박수 소리가 마치 슬픈 빗소리 같았어요”

14살 지민이는 미숙아 망막증을 가지고 태어나 세상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피아노 영재입니다. 3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4살 때 베토벤의 '월광소나타'를, 5살 때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듣고 따라쳤습니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어거스트 러쉬'의 주인공처럼 지민이는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에 대한 감각을 타고났습니다. 피아노 선생님이 한 번 곡을 연주하면 바로 그 곡을 기억해 변주(선율ㆍ리듬ㆍ화성 등을 변형해 연주)까지 할 정도로 수준급의 실력을 갖췄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자작곡이 벌써 20곡이 넘습니다. 피아노 연주곡뿐만 아니라 합창곡까지 작곡할 정도입니다. 음악회 연습이 한창인 캠프를 방문했던 날 지민이는 '슬픈 왈츠'라는 자작곡을 연주했습니다. 왈츠 특유의 4분의 3박자에 단조로 구성된 음악과 '슬픈 왈츠'라는 제목이 썩 잘 어울렸습니다. 유아기 발달장애가 있는 지민이는 어눌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이 곡을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설명해나갔습니다.

“와~하고 박수 치잖아요. 그때 빗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지민이의 귀에 연주가 끝난 뒤 쏟아지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마치 빗소리같이 느껴졌나 봅니다. 이후 어느 비 오는 날, 음표들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지민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음표들은 한 곡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이 됐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보내는 박수 소리가 왜 지민이에게는 슬프게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민이는 "그냥 그렇게 짓게 됐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김민주 학생


◆ “어려운 아이들 가르치고 싶어요”

17살 민주는 첼로를 연주합니다. 시각장애 학생으로는 최초로 올해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시각장애 1급인 민주의 첼로에는 현과 악기 몸통 사이 공간에 하얀 종이가 끼워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점자로 빼곡한 악보입니다. 일반인들은 악보 대에 악보를 놓고 보면서 연주하지만, 민주는 곡을 대부분 외우거나 활을 잡은 손으로 점자를 짚어가며 한 음 한 음 연주해야 합니다. 특이한 건 민주의 첼로 소리는 조금 다르다는 겁니다. 클래식 전공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묵직하고 마치 동양 악기를 연주하듯 음이 살짝 끌리는 게 매력적입니다. 민주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연주자마다 특유의 음색이 있는데, 민주는 짚어야 할 현의 위치를 감각적으로 알고 소리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 일반인들보다 좀 더 깊은 소리가 난다고 했습니다. 민주의 꿈은 뭘까요? 민주에게 꿈이 뭔지 물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민주의 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민주의 꿈은 세계적인 첼리스트도, 유명 인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신보다 조금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첼로 소리를 들으면 마음도 편안해지는 느낌이에요. 제 음악을 듣고 사람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첼로를 연주해요.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듣고,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감동을 하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 다음에 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김민주 양 인터뷰 가운데-

그렇게 지민이와 민주처럼 시각장애가 있는 초·중·고등학생 12명이 모여 5일 동안 음대 교수의 일대일 레슨 등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일대일 레슨


드디어 음악회가 열리는 날. 아이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했습니다. 남학생들은 멋진 정장을 차려입었습니다. 그날 자기 모습이 얼마나 우아하고 멋있었는지 본인은 알까.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그들 앞에 꼭 비춰주고 싶었습니다. 물론 조금은 어설펐지만, 꽤 진지했던 이들의 연주회가 끝나고 몇 안 되는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이날 공연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울컥하고 솟구치는 감동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 시간 지민이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또다시 슬픈 빗소리를 연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를 쓰고 리포트를 만드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느꼈던 감동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려니 자꾸만 그들의 특별한 사연을 찾게 됐습니다. 보이지 않는 게 일상이고 현실이며, 평범한 아이들이 어릴 때 악기 하나쯤 배우는 것처럼 단지 악기를 배우고 있을 뿐인 이들을 자꾸 다른 시선으로 설명하려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연주를 듣는 사람이나 제 리포트를 보는 사람들이 너무 큰 감동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어떤 감동을 받았다면 그건 단지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일 뿐이니까요. 우리가 흔히 '장애'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과는 조금 다른 아이들의 이런 연주회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매 순간 희망을 가질 수 있고, 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연주회가 특별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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