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리포트] ‘강제징용 현장’ 오키나와는 말한다

입력 2015.08.15 (08:25) 수정 2015.08.1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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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의 식민 지배는 우리 민족에게 7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진실이 묻히거나 왜곡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강제 징용 입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끝내 타향에서 숨져간 강제 징용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오키나와도 만명이 넘는 한인이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린 징용의 현장인데요.

일본 본토에선 유일하게 미군과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라 징용 한인들의 희생도 컸습니다.

오키나와에는 강제 징용자들의 피와 눈물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현지 주민들도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습니다.

윤석구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본섬에서 뱃길로 한 시간.

주민 3백여 명이 사는 작은 섬 아카시마입니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달리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처음 상륙했던 이 섬엔 전쟁의 깊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섬 곳곳에는 이처럼 전쟁 당시 자살공격용 특공정을 숨겨두기 위해 파놓은 동굴들이 남아 있습니다.

1945년 2월 강제 징용된 한국인 150여명이 이 섬에 끌려왔습니다.

군대의 잡역부란 의미로 "군부"라고 불린 이들은 특공정을 운반하는 등 미군 공격에 대비한 군 작업에 동원됐습니다.

이들이 노역장을 오가던 모습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이곳에 아리랑 고개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녹취> 신조(아카시마 주민) :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 달 후인 3월 미군이 상륙하면서 이 섬에선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학도병으로 군 생활을 했던 주민 가키노하나씨는 한국인 군부들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인터뷰> 가키노하나(당시 학도병) : "여기서 일본군이 군부 7명을 세워놓고 총살하는 모습을 주민들이 함께 봤습니다."

당시 일본군 중대장의 수기엔 영양실조로 매일 2~3명씩 사망자가 나왔고, 굶주린 군부 5명이 음식을 훔친 혐의로 총살당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결국 한국인 군부들 가운데 70여명이 이 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군부들이 도주할 우려가 크다며 산속에 굴을 파게 한 뒤 강제로 가두기도 했습니다.

깊이 2미터, 길이 20미터 크기로 50여명이 갇혀 있던 굴 두 곳의 흔적이 지금도 마을 뒷산에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가키노하나(당시 학도병) : "갇힌 군부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깥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아 매일 몇 명씩 사망했습니다."

전쟁 말기 궁지에 몰린 일본군 지휘부는 본토 수호를 위한 최후 방어선으로 오키나와 사수를 명령했습니다.

오키나와 본섬에 있는 키타 비행장 터. 지금도 당시 전투기 격납고가 남아 있습니다.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일본군은 비행장 건설과 진지 구축 등 각종 군 작업에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을 동원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 연구자) : "이 작은 섬 오키나와에 비행장을 일제히 15개나 건설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한반도에서 강제로 사람들을 연행했습니다."

취재진은 현지 취재를 통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국인 군부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주로 군수 물자 운반 임무를 맡아 ‘특설 수상근무대’란 명칭이 붙은 이 부대 명부엔 1944년 6월부터 경상북도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2천 6백여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 연구자) : "군수물자가 항구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리는 작업이 이들의 주임무였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중노동은 주로 한국인 군부들이 맡았습니다."

오키나와 중부의 요미탄항..

수상근무대 소속 한국인 군부들이 전쟁 막바지인 1944년 여름부터 강제노역을 하던 현장입니다.

당시 작업 내용을 적은 부대 일지엔 (그래픽) 건축자재와 탄약, 식량 등 군수물자 운반 작업에 하루 11시간씩 동원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문맹’이나 ‘3등 국민’ 등 한국인 군부들을 멸시하는 차별적 표현들이 적혀 있습니다.

<녹취> 마츠다(당시 요미탄촌 주민) :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취사장에서 부대원 배식을 받아가던 군부 두 명이 길에서 뜨거운 밥을 맨손으로 퍼 먹었습니다."

마츠다씨는 자신의 집에서 숙박을 했던 경북 봉화 출신 청년과 특별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마츠다(요미탄촌 주민) : "그가 마당의 나무를 잘라 이 도장을 새겨 줬는데 70년 동안 버리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1945년 4월 1일 요미탄 항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오키나와에선 ‘철의 폭풍’으로 불리는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군에 쫓긴 일본군이 남부지역으로 후퇴하면서 수상근무대 소속 군부들은 강제로 전투현장에 내몰렸습니다.

오키나와 최후 전투가 벌어진 남부 야마시로 지역입니다.

참혹한 전투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강요당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당시 한국인 군부들이 전투현장에 탄약을 운반하던 모습과 함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인터뷰> 긴조(야마시로 주민) : "최전선에 탄약을 나르는 일이니까 숨을 곳도 없고 군부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길에 온통 시체가 쌓여 밟고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취재진은 수상근무대 기록을 통해 당시 한국인 군부들이 군수품 운반 뿐 아니라 직접 전투 병력으로 동원된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이 기록엔 5월 29일 군부들이 야마시로 전투에 참가했고, 6월 22일엔 전원 자살공격대로 투입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6월 20일에서 21일 사이 야마시로 전투에서 생존자 3명을 제외하고 중대가 전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결국 수상근무대 소속 군부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부대 명부엔 대부분 행방불명으로만 표시돼 있어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야마시로 전투현장 부근엔 전쟁 직후 사망자들의 유골을 모아 놓은 ‘혼백의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밑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의 유골이 3만 5천구나 쌓여 있습니다.

<인터뷰> 오키모토(오키나와 역사가이드) : "유골이 너무 많아 여기에 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쌓아 놓았습니다. 한국인 군부들의 유골도 여기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희생된 24만 여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평화공원입니다.

그 한쪽엔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는 447명. 비석은 대부분 빈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터뷰> 타이라(강제징용 한국인 추도모임 공동대표) : "군부들은 한사람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 명예를 명확히 회복하는 게 우리들의 큰 사명입니다."

머나먼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던 수많은 한국인들은 참혹한 전투 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역사의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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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 리포트] ‘강제징용 현장’ 오키나와는 말한다
    • 입력 2015-08-15 09:36:10
    • 수정2015-08-15 17:18:44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일본의 식민 지배는 우리 민족에게 7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진실이 묻히거나 왜곡되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강제 징용 입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거나 끝내 타향에서 숨져간 강제 징용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여전히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오키나와도 만명이 넘는 한인이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린 징용의 현장인데요.

일본 본토에선 유일하게 미군과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라 징용 한인들의 희생도 컸습니다.

오키나와에는 강제 징용자들의 피와 눈물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당시를 기억하는 현지 주민들도 참혹했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습니다.

윤석구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키나와 본섬에서 뱃길로 한 시간.

주민 3백여 명이 사는 작은 섬 아카시마입니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달리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이 처음 상륙했던 이 섬엔 전쟁의 깊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섬 곳곳에는 이처럼 전쟁 당시 자살공격용 특공정을 숨겨두기 위해 파놓은 동굴들이 남아 있습니다.

1945년 2월 강제 징용된 한국인 150여명이 이 섬에 끌려왔습니다.

군대의 잡역부란 의미로 "군부"라고 불린 이들은 특공정을 운반하는 등 미군 공격에 대비한 군 작업에 동원됐습니다.

이들이 노역장을 오가던 모습을 기억하는 주민들은 이곳에 아리랑 고개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녹취> 신조(아카시마 주민) :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 달 후인 3월 미군이 상륙하면서 이 섬에선 참혹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학도병으로 군 생활을 했던 주민 가키노하나씨는 한국인 군부들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인터뷰> 가키노하나(당시 학도병) : "여기서 일본군이 군부 7명을 세워놓고 총살하는 모습을 주민들이 함께 봤습니다."

당시 일본군 중대장의 수기엔 영양실조로 매일 2~3명씩 사망자가 나왔고, 굶주린 군부 5명이 음식을 훔친 혐의로 총살당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결국 한국인 군부들 가운데 70여명이 이 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군은 군부들이 도주할 우려가 크다며 산속에 굴을 파게 한 뒤 강제로 가두기도 했습니다.

깊이 2미터, 길이 20미터 크기로 50여명이 갇혀 있던 굴 두 곳의 흔적이 지금도 마을 뒷산에 남아있습니다.

<인터뷰> 가키노하나(당시 학도병) : "갇힌 군부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깥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아 매일 몇 명씩 사망했습니다."

전쟁 말기 궁지에 몰린 일본군 지휘부는 본토 수호를 위한 최후 방어선으로 오키나와 사수를 명령했습니다.

오키나와 본섬에 있는 키타 비행장 터. 지금도 당시 전투기 격납고가 남아 있습니다.

미군의 공격에 대비해 일본군은 비행장 건설과 진지 구축 등 각종 군 작업에 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을 동원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 연구자) : "이 작은 섬 오키나와에 비행장을 일제히 15개나 건설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한반도에서 강제로 사람들을 연행했습니다."

취재진은 현지 취재를 통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국인 군부 명단을 확인했습니다.

주로 군수 물자 운반 임무를 맡아 ‘특설 수상근무대’란 명칭이 붙은 이 부대 명부엔 1944년 6월부터 경상북도 지역에서 강제 징용된 2천 6백여명의 이름과 주소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인터뷰> 이즈하라(오키나와 역사 연구자) : "군수물자가 항구에 도착하면 배에서 내리는 작업이 이들의 주임무였습니다.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중노동은 주로 한국인 군부들이 맡았습니다."

오키나와 중부의 요미탄항..

수상근무대 소속 한국인 군부들이 전쟁 막바지인 1944년 여름부터 강제노역을 하던 현장입니다.

당시 작업 내용을 적은 부대 일지엔 (그래픽) 건축자재와 탄약, 식량 등 군수물자 운반 작업에 하루 11시간씩 동원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와 함께 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문맹’이나 ‘3등 국민’ 등 한국인 군부들을 멸시하는 차별적 표현들이 적혀 있습니다.

<녹취> 마츠다(당시 요미탄촌 주민) :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취사장에서 부대원 배식을 받아가던 군부 두 명이 길에서 뜨거운 밥을 맨손으로 퍼 먹었습니다."

마츠다씨는 자신의 집에서 숙박을 했던 경북 봉화 출신 청년과 특별한 인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마츠다(요미탄촌 주민) : "그가 마당의 나무를 잘라 이 도장을 새겨 줬는데 70년 동안 버리지 않고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1945년 4월 1일 요미탄 항에 미군이 상륙하면서 오키나와에선 ‘철의 폭풍’으로 불리는 참혹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군에 쫓긴 일본군이 남부지역으로 후퇴하면서 수상근무대 소속 군부들은 강제로 전투현장에 내몰렸습니다.

오키나와 최후 전투가 벌어진 남부 야마시로 지역입니다.

참혹한 전투현장에 끌려와 노역을 강요당하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당시 한국인 군부들이 전투현장에 탄약을 운반하던 모습과 함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인터뷰> 긴조(야마시로 주민) : "최전선에 탄약을 나르는 일이니까 숨을 곳도 없고 군부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길에 온통 시체가 쌓여 밟고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취재진은 수상근무대 기록을 통해 당시 한국인 군부들이 군수품 운반 뿐 아니라 직접 전투 병력으로 동원된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이 기록엔 5월 29일 군부들이 야마시로 전투에 참가했고, 6월 22일엔 전원 자살공격대로 투입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6월 20일에서 21일 사이 야마시로 전투에서 생존자 3명을 제외하고 중대가 전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결국 수상근무대 소속 군부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부대 명부엔 대부분 행방불명으로만 표시돼 있어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야마시로 전투현장 부근엔 전쟁 직후 사망자들의 유골을 모아 놓은 ‘혼백의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밑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의 유골이 3만 5천구나 쌓여 있습니다.

<인터뷰> 오키모토(오키나와 역사가이드) : "유골이 너무 많아 여기에 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쌓아 놓았습니다. 한국인 군부들의 유골도 여기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희생된 24만 여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평화공원입니다.

그 한쪽엔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는 447명. 비석은 대부분 빈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터뷰> 타이라(강제징용 한국인 추도모임 공동대표) : "군부들은 한사람의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 명예를 명확히 회복하는 게 우리들의 큰 사명입니다."

머나먼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와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던 수많은 한국인들은 참혹한 전투 현장에서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역사의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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