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씻을 수 없는 상처…진실은 감출 수 없다

입력 2015.08.15 (08:33) 수정 2015.08.1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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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씻을 수 없는 상처.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진실도 묻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커지고 있습니다.

확인된 한인 위안부 할머니는 중국에도 두 분이 생존해 계시는데요.

연고가 없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우한의 현장을 저희 특파원이 찾아봤습니다.

일본 정부는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의 여성들이 무참히 인권을 유린당했던 그 현장에서는 지금도 위안부의 진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소홀히 했는데, 최근 들어 관련 자료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태욱 특파원이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1937년 여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 야욕을 노골화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중국과 일본의 백만 병력이 이 곳 양쯔강을 사이에 두고 수개월 동안 혈투를 벌입니다.

중일 전쟁의 최대 격전지, 후베이성 우한입니다.

뒷골목엔 지금도 1920~30년대 지어진 2층 집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곳의 지명은 지칭리, 한국 발음으로는 적경리입니다.

좋은 일이 쌓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본 침략기, 이 거리는 참혹한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당시 일본육군의 대규모 위안소가 바로 이 곳에 설치됐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지금도 이 거리가 간직한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녹취> 주민 : "(일본)육군, 특히 계급이 높은 군인들이 사용했어요. 일반인은 못 들어왔어요."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건물 안은 위안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중앙에 대기실에 있었고 사방으로 방들이 나뉘어 있습니다.

<녹취> "(여기는 뭐였어요?) 원래는 (차례를 기다리는) 객실이었어요. 테이블도 있었어요."

이렇게 위안소로 쓰인 가옥이 모두 20채.. 위안부는 280여 명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 곳에만 당시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이 150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인터뷰> 두홍잉(우한도서관 연구원) : "조선인 150명을 포함해 280명의 위안부가 여기에서 하루종일 일본군을 상대했어요."

지칭리 위안소는 일본군 장교와 군의관이 쓴 책에도 그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입구를 철문으로 가로막아 위안부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위안부들에겐 병으로 죽기 전엔 떠날 수 없는 생지옥이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중국까지 끌려왔던 한국인 위안부는 어떻게 됐을까?

우한시 인근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만난 94살 박모 할머니..

<녹취> "할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20살 때 끌려와 4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당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수치심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엄두조차 못 냈습니다.

<인터뷰> 박00 할머니(위안부 피해자) : "(젊었을 때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집을 찾을 수 없었어. 연락할 사람도 없어."

그렇게 살아온 70년..

한국말은 잊었지만 그래도 끝내 잊을 수 없었던 두 단어가 있습니다.

<녹취> "어머니..아버지.."

중국인 양녀 부부가 곁을 돌보고 있지만 구순을 넘긴 할머니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녹취> "안녕히 계세요!"

박 할머니와 같은 중국내 한국인 위안부는 이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생존자는 단 2명 뿐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삶은 중국에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우한시 예술창작연구센터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작품입니다.

<녹취> 연극 일부분 : "조국으로 돌아가는 이 길이 50여 년이 걸렸어!"

돌아갈 수 없어 아무 인연도 없는 낯선 중국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야 했던 한국인 위안부의 실화입니다.

관객들은 양국이 겪은 역사의 아픈 기억에 연신 눈물을 훔칩니다.

<인터뷰> 우치웨이(관객) : "모두가 전쟁중에 아픔과 불행을 겪었지만 사랑으로 단결해 계속 살아가고 전진할 수 있었어요. 감동스러웠어요."

<인터뷰> 쟈오뤼이타이(연극 작가) : "역사는 부인해서도 은폐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을 관중과 우리 사회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유독 위안부 문제에는 소극적이던 중국 정부도 차츰 태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허름하고 낡은 2층짜리 일본식 가옥..

중국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설치됐던 건물입니다.

중국 당국은 거의 방치되다시피했던 이 곳을 위안부 기념관으로 꾸밀 계획입니다.

지난 6월엔 중국정부가 단독으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일본 정부의 항의에 대해서도 중국은 '신청 철회는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국이 위안부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데는 한 학자의 끈질긴 연구가 밑바탕이 됐습니다.

상하이 사범대학 쑤즈량 교수..

20년 넘게 위안부 문제 연구에 천착해 온 중국 최고의 권위자입니다.

최근엔 상하이에서만 166곳의 위안소 위치를 찾아내 분포도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쑤즈량(상하이사범대 교수) : "일본군 기록과 상하이 주민들의 회의록, 증언들에 근거한 겁니다."

쑤 교수의 위안부 자료관에 한.중.일 3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한때의 가해국, 한 때의 피해국 후손들이 만나 과거의 실상을 함께 바라봅니다.

일본 청소년들에겐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입니다.

<인터뷰> 신케아미(일본 학생 참가자) : "교과서에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중학교 2학년때 선생님이 좋은 분이셔서 가르쳐 주셨어요."

진실을 인정하고 공감해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청소년들은 가슴에 새깁니다.

<인터뷰> 한국 학생 참가자 : "3국의 학생들이 세 관점에서 토론해서 생각의 차이를 느꼈어요. 이걸 좁혀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조국이 해방된 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여전히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쑤즈량(교수) : "중국의 한국인 위안부들은 당시 총동원령에 의해서 징집돼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역사를 증언할 할머니들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 보입니다.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을 참하게 유린했던 가해자가 이제 그 진실을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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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부 씻을 수 없는 상처…진실은 감출 수 없다
    • 입력 2015-08-15 09:38:06
    • 수정2015-08-15 17:18:44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씻을 수 없는 상처.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잇따라 세상을 뜨면서 진실도 묻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커지고 있습니다.

확인된 한인 위안부 할머니는 중국에도 두 분이 생존해 계시는데요.

연고가 없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우한의 현장을 저희 특파원이 찾아봤습니다.

일본 정부는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의 여성들이 무참히 인권을 유린당했던 그 현장에서는 지금도 위안부의 진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소홀히 했는데, 최근 들어 관련 자료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태욱 특파원이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1937년 여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 침략 야욕을 노골화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중국과 일본의 백만 병력이 이 곳 양쯔강을 사이에 두고 수개월 동안 혈투를 벌입니다.

중일 전쟁의 최대 격전지, 후베이성 우한입니다.

뒷골목엔 지금도 1920~30년대 지어진 2층 집들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곳의 지명은 지칭리, 한국 발음으로는 적경리입니다.

좋은 일이 쌓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일본 침략기, 이 거리는 참혹한 인권유린의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당시 일본육군의 대규모 위안소가 바로 이 곳에 설치됐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지금도 이 거리가 간직한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녹취> 주민 : "(일본)육군, 특히 계급이 높은 군인들이 사용했어요. 일반인은 못 들어왔어요."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건물 안은 위안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중앙에 대기실에 있었고 사방으로 방들이 나뉘어 있습니다.

<녹취> "(여기는 뭐였어요?) 원래는 (차례를 기다리는) 객실이었어요. 테이블도 있었어요."

이렇게 위안소로 쓰인 가옥이 모두 20채.. 위안부는 280여 명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 곳에만 당시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이 150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인터뷰> 두홍잉(우한도서관 연구원) : "조선인 150명을 포함해 280명의 위안부가 여기에서 하루종일 일본군을 상대했어요."

지칭리 위안소는 일본군 장교와 군의관이 쓴 책에도 그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입구를 철문으로 가로막아 위안부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위안부들에겐 병으로 죽기 전엔 떠날 수 없는 생지옥이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중국까지 끌려왔던 한국인 위안부는 어떻게 됐을까?

우한시 인근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만난 94살 박모 할머니..

<녹취> "할머니, 건강은 어떠세요?"

20살 때 끌려와 4년 동안 온갖 고초를 당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수치심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 엄두조차 못 냈습니다.

<인터뷰> 박00 할머니(위안부 피해자) : "(젊었을 때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집을 찾을 수 없었어. 연락할 사람도 없어."

그렇게 살아온 70년..

한국말은 잊었지만 그래도 끝내 잊을 수 없었던 두 단어가 있습니다.

<녹취> "어머니..아버지.."

중국인 양녀 부부가 곁을 돌보고 있지만 구순을 넘긴 할머니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녹취> "안녕히 계세요!"

박 할머니와 같은 중국내 한국인 위안부는 이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생존자는 단 2명 뿐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삶은 중국에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우한시 예술창작연구센터가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작품입니다.

<녹취> 연극 일부분 : "조국으로 돌아가는 이 길이 50여 년이 걸렸어!"

돌아갈 수 없어 아무 인연도 없는 낯선 중국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야 했던 한국인 위안부의 실화입니다.

관객들은 양국이 겪은 역사의 아픈 기억에 연신 눈물을 훔칩니다.

<인터뷰> 우치웨이(관객) : "모두가 전쟁중에 아픔과 불행을 겪었지만 사랑으로 단결해 계속 살아가고 전진할 수 있었어요. 감동스러웠어요."

<인터뷰> 쟈오뤼이타이(연극 작가) : "역사는 부인해서도 은폐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을 관중과 우리 사회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유독 위안부 문제에는 소극적이던 중국 정부도 차츰 태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허름하고 낡은 2층짜리 일본식 가옥..

중국 최초의 일본군 위안소가 설치됐던 건물입니다.

중국 당국은 거의 방치되다시피했던 이 곳을 위안부 기념관으로 꾸밀 계획입니다.

지난 6월엔 중국정부가 단독으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한 사실도 확인됐습니다.

일본 정부의 항의에 대해서도 중국은 '신청 철회는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국이 위안부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한 데는 한 학자의 끈질긴 연구가 밑바탕이 됐습니다.

상하이 사범대학 쑤즈량 교수..

20년 넘게 위안부 문제 연구에 천착해 온 중국 최고의 권위자입니다.

최근엔 상하이에서만 166곳의 위안소 위치를 찾아내 분포도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녹취> 쑤즈량(상하이사범대 교수) : "일본군 기록과 상하이 주민들의 회의록, 증언들에 근거한 겁니다."

쑤 교수의 위안부 자료관에 한.중.일 3국의 중고등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한때의 가해국, 한 때의 피해국 후손들이 만나 과거의 실상을 함께 바라봅니다.

일본 청소년들에겐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입니다.

<인터뷰> 신케아미(일본 학생 참가자) : "교과서에 나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중학교 2학년때 선생님이 좋은 분이셔서 가르쳐 주셨어요."

진실을 인정하고 공감해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청소년들은 가슴에 새깁니다.

<인터뷰> 한국 학생 참가자 : "3국의 학생들이 세 관점에서 토론해서 생각의 차이를 느꼈어요. 이걸 좁혀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조국이 해방된 지 이미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여전히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쑤즈량(교수) : "중국의 한국인 위안부들은 당시 총동원령에 의해서 징집돼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역사를 증언할 할머니들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아 보입니다.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을 참하게 유린했던 가해자가 이제 그 진실을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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