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 “배우의 권력은 시청자로부터 나온다”

입력 2015.08.16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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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서 너무 맛있는 글이 들어와요. 마치 재료가 너무 좋아서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셰프의 심정 같아요. 대본에 적힌 대사를 어떻게 하면 살아있게 전달할까 고민합니다."

배우가 이렇게 신이 나는데 시청자가 모를 수가 없다. 화면은 그의 진심과 열정과 흥으로 꽉 채워진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어김없이 명장면, 명대사가 탄생한다.

KBS 2TV 정치드라마 '어셈블리'에서 노회한 5선의 국회의원 박춘섭을 연기하는 박영규(62)를 최근 광화문에서 만났다.

박영규는 지난해 KBS '정도전'에서 고려 권문세족 이인임을 맡아 안방극장을 뒤흔들었다. 야심과 확신, 지략으로 무장한 카리스마 넘치는 고려시대 정치인 이인임은 정현민 작가의 글과 박영규의 연기를 만나 시공을 초월한 생생한 인물이 됐다.

정 작가와 박영규의 궁합은 '어셈블리'의 박춘섭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어셈블리'는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박춘섭만큼은 군계일학으로 눈에 번쩍 띄는 캐릭터다.

"정치드라마는 어려운 거예요. 현실보다 더 실감 나야 사람들이 보거든. 매일 뉴스에서 온갖 정치판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보는데 드라마가 그보다 못하면 누가 보겠어요. 최근 성폭행 논란, 명품 시계 수수 논란 등도 있었지만 300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바람 잘 날이 있겠어요? 그래서 '어셈블리' 시작할 때부터 위험한 게임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와 배우의 내공이 얼마만 한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박춘섭은 9번 총선에 나가 4번 떨어지고 5번 당선된 여당의 중진의원이자 반청계의 거두다. 말과 행동에 무게감이 있고, 판을 읽는 눈이 날카로우며 치열한 전투를 수십 번 치른 베테랑이라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내공 있는 정치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싶었어요. 동시에 품격있는 정치인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고요. 20부 중 이제 10부까지 왔는데, 지금까지는 사실 분량이 적어서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짧은 분량 속 대사들이 너무 좋아서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대사가 정말 맛있잖아요."

'어셈블리'에서 화제가 되는 대사는 모두 박춘섭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사람을 안 믿는다. 사람의 욕심을 믿는다" "소신은 꺾으라고 있는 것" "정치는 결국 머릿수 싸움" "계파 없이 정치 없다" "진정한 승부사는 패배가 만들어내는 것" 등이다.

"박춘섭이 진상필(정재영)을 식사자리에 불러놓고 돈 봉투를 주면서 '세상 예절이나 국회 예절이나 똑같아. 어른이 주면 그냥 받으면 돼'라고 말하는 신 같은 것을 보면 막 흥분됩니다. 진짜 보스 같은 정치인이잖아요. 특정 정치인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지만 5번 당선된 의원이라면 내공이 보통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픽션이지만 논픽션보다 더 사실적인 그런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품위있게, 카리스마를 뿜어내면서 하고, 그래서 상대방이 듣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힘과 자신감이 있는 정치인을 나도 현실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30여 년의 연기 인생에서 박영규가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을 연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인임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아마 이번 역할도 없었을 듯 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역할에도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한다.

"1981년 11대 총선 때 제 사촌형님이 대전에서 민한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어요. 박완규 전 의원이죠. 제가 그때 군에서 제대해 연극을 할 때인데 선거운동을 도왔어요. 총선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한 거죠. 형님이 당선되고 나서는 제 친구들이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해서 이후에도 국회에 자주 가기도 했고 옆에서 정치하는 걸 지켜봤어요. 박춘섭이 총선에 9번 나온 걸로 설정됐는데 따져보니까 1981년 시작했으면 이번 19대까지 9번 나온 거더라고요. 이번 역할을 제가 맡을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정 작가의 주옥같은 대사를 많이 읊어서인지 박영규도 메모해놓을 만한 말들을 많이 했다.

그는 "연기는 대출받아서 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연기는 자기한테 없는 것을 표현해낼 수 없어요. 배우가 자기 안에 가진 것을 끄집어내서 하는 거고, 내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절대로 어디서 대출받듯 연기를 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가짜, 흉내내기에 머물지 실제처럼 보이지 않아요. 저는 연기의 첫번째는 리얼리티이고 두번째가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박춘섭의 캐릭터가 아무리 좋아도 배우가 리얼리티를 살리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는 대충해서는 절대로 구현하지 못해요. 저는 현실 정치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려고 피똥을 싸며 고민합니다."

박춘섭은 온갖 수를 예상하는 노회함에,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답게 뒤통수를 맞아도 허허 웃어넘기는 배짱이 있다. 또 무게감 있는 정치인답게 공천권을 무기로 협박하는 사무총장 백도현(장현성)에게 "나는 공천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정말 세상을 리드하고 끌어가는 사람들은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출구없는 정치를 하지 않아요. 그래야 격 있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우 인생도 그렇게 살았어요. '쪽팔리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주변에서 돈 많이 벌어 빌딩 올리는 친구들을 봐도 부럽지 않았어요. 제 마음속으로는 빌딩을 이미 수없이 지었기 때문이죠. 배역을 구걸하는 대신, 어떤 배역이 들어와도 해낼 수 있게 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듯, 배우의 권력은 시청자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권력을 다시 시청자에게, 국민에게 돌려줘야한다는 것"이라며 "나는 시청자에게 받은 사랑을 다시 좋은 연기로 돌려 드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남은 10부에서 '어셈블리'는 박춘섭을 통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정치인 박춘섭이 선악을 떠나 품위를 지키면서 멋지게 정치를 하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싶습니다. 그럼으로써 시청자가 정치인의 모습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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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규 “배우의 권력은 시청자로부터 나온다”
    • 입력 2015-08-16 11:06:11
    연합뉴스
"배우로서 너무 맛있는 글이 들어와요. 마치 재료가 너무 좋아서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셰프의 심정 같아요. 대본에 적힌 대사를 어떻게 하면 살아있게 전달할까 고민합니다." 배우가 이렇게 신이 나는데 시청자가 모를 수가 없다. 화면은 그의 진심과 열정과 흥으로 꽉 채워진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어김없이 명장면, 명대사가 탄생한다. KBS 2TV 정치드라마 '어셈블리'에서 노회한 5선의 국회의원 박춘섭을 연기하는 박영규(62)를 최근 광화문에서 만났다. 박영규는 지난해 KBS '정도전'에서 고려 권문세족 이인임을 맡아 안방극장을 뒤흔들었다. 야심과 확신, 지략으로 무장한 카리스마 넘치는 고려시대 정치인 이인임은 정현민 작가의 글과 박영규의 연기를 만나 시공을 초월한 생생한 인물이 됐다. 정 작가와 박영규의 궁합은 '어셈블리'의 박춘섭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어셈블리'는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박춘섭만큼은 군계일학으로 눈에 번쩍 띄는 캐릭터다. "정치드라마는 어려운 거예요. 현실보다 더 실감 나야 사람들이 보거든. 매일 뉴스에서 온갖 정치판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보는데 드라마가 그보다 못하면 누가 보겠어요. 최근 성폭행 논란, 명품 시계 수수 논란 등도 있었지만 300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바람 잘 날이 있겠어요? 그래서 '어셈블리' 시작할 때부터 위험한 게임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와 배우의 내공이 얼마만 한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박춘섭은 9번 총선에 나가 4번 떨어지고 5번 당선된 여당의 중진의원이자 반청계의 거두다. 말과 행동에 무게감이 있고, 판을 읽는 눈이 날카로우며 치열한 전투를 수십 번 치른 베테랑이라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내공 있는 정치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싶었어요. 동시에 품격있는 정치인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고요. 20부 중 이제 10부까지 왔는데, 지금까지는 사실 분량이 적어서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짧은 분량 속 대사들이 너무 좋아서 연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대사가 정말 맛있잖아요." '어셈블리'에서 화제가 되는 대사는 모두 박춘섭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사람을 안 믿는다. 사람의 욕심을 믿는다" "소신은 꺾으라고 있는 것" "정치는 결국 머릿수 싸움" "계파 없이 정치 없다" "진정한 승부사는 패배가 만들어내는 것" 등이다. "박춘섭이 진상필(정재영)을 식사자리에 불러놓고 돈 봉투를 주면서 '세상 예절이나 국회 예절이나 똑같아. 어른이 주면 그냥 받으면 돼'라고 말하는 신 같은 것을 보면 막 흥분됩니다. 진짜 보스 같은 정치인이잖아요. 특정 정치인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지만 5번 당선된 의원이라면 내공이 보통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픽션이지만 논픽션보다 더 사실적인 그런 인물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품위있게, 카리스마를 뿜어내면서 하고, 그래서 상대방이 듣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힘과 자신감이 있는 정치인을 나도 현실에서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30여 년의 연기 인생에서 박영규가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을 연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인임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아마 이번 역할도 없었을 듯 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역할에도 이미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한다. "1981년 11대 총선 때 제 사촌형님이 대전에서 민한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어요. 박완규 전 의원이죠. 제가 그때 군에서 제대해 연극을 할 때인데 선거운동을 도왔어요. 총선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한 거죠. 형님이 당선되고 나서는 제 친구들이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해서 이후에도 국회에 자주 가기도 했고 옆에서 정치하는 걸 지켜봤어요. 박춘섭이 총선에 9번 나온 걸로 설정됐는데 따져보니까 1981년 시작했으면 이번 19대까지 9번 나온 거더라고요. 이번 역할을 제가 맡을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정 작가의 주옥같은 대사를 많이 읊어서인지 박영규도 메모해놓을 만한 말들을 많이 했다. 그는 "연기는 대출받아서 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연기는 자기한테 없는 것을 표현해낼 수 없어요. 배우가 자기 안에 가진 것을 끄집어내서 하는 거고, 내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절대로 어디서 대출받듯 연기를 할 수는 없어요. 그러면 가짜, 흉내내기에 머물지 실제처럼 보이지 않아요. 저는 연기의 첫번째는 리얼리티이고 두번째가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박춘섭의 캐릭터가 아무리 좋아도 배우가 리얼리티를 살리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는 대충해서는 절대로 구현하지 못해요. 저는 현실 정치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려고 피똥을 싸며 고민합니다." 박춘섭은 온갖 수를 예상하는 노회함에, 배신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답게 뒤통수를 맞아도 허허 웃어넘기는 배짱이 있다. 또 무게감 있는 정치인답게 공천권을 무기로 협박하는 사무총장 백도현(장현성)에게 "나는 공천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정말 세상을 리드하고 끌어가는 사람들은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출구없는 정치를 하지 않아요. 그래야 격 있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우 인생도 그렇게 살았어요. '쪽팔리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주변에서 돈 많이 벌어 빌딩 올리는 친구들을 봐도 부럽지 않았어요. 제 마음속으로는 빌딩을 이미 수없이 지었기 때문이죠. 배역을 구걸하는 대신, 어떤 배역이 들어와도 해낼 수 있게 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듯, 배우의 권력은 시청자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 권력을 다시 시청자에게, 국민에게 돌려줘야한다는 것"이라며 "나는 시청자에게 받은 사랑을 다시 좋은 연기로 돌려 드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남은 10부에서 '어셈블리'는 박춘섭을 통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정치인 박춘섭이 선악을 떠나 품위를 지키면서 멋지게 정치를 하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싶습니다. 그럼으로써 시청자가 정치인의 모습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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