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수채화의 세계’

입력 2015.08.23 (08:58) 수정 2015.10.2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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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수채화의 세계

김건배라는 생소한 화가의 전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사실 긴가민가했습니다. 국내 화단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을 뿐 아니라, 유화도 아니고 수채화라니 처음엔 그냥 넘겨버릴까도 싶었지요. 하지만, 펜화가로 유명한 김영택 화백이 보내준 작품 이미지 파일을 보는 순간, 작품을 직접 봐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먼저 김건배 화백이 어떤 분인지 간략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침의 빛아침의 빛


김건배 화백의 전직은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당시 같은 광고대행사에서 일한 동료였던 펜화가 김영택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광고계 여기저기서 모셔가려고 혈안이 될 정도로 굉장히 잘 나가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정밀 일러스트 분야에선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고 하는 군요. 나중에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에 돈도 꽤 벌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광고계를 떠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광고 쪽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이곳저곳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안들을 모두 거절하고 그가 선택한 건 화가의 길이었습니다. 그것도 수채화가 말이죠. 화가에게 왜 수채화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수채화로 인물화를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미국에서 김건배 화백은 수채화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1999년부터 2002년 사이에 미국의 유명 아트페스티벌에서 수채화 부문 대상을 비롯해 대상만 17차례나 수상을 할 만큼 인정받는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쁨과 영광도 잠시.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2003년 말기 위암으로 위를 통째로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던 겁니다. 화가로서의 삶도 그게 끝인가 싶었답니다.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김건배 화백김건배 화백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흘러 2014년 화가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고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광고계 재직 시절 동료였던 김영택 화백이 그의 국내 첫 개인전 기획자로 나서 어렵게 마련한 개인전이었고, 펜화 취재로 안면이 있던 제게 이 화가를 취재해보라며 연락을 해온 거였습니다. 흔히 수채화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으로 ‘투명한 아름다움’을 첫 손에 꼽습니다. 불투명 기름 물감으로 대상을 짙게, 강렬하게 표현하는 유화 물감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특유의 맑고 투명한 느낌말입니다. 수성물감을 물에 녹여서 그리는 수채화는 학창 시절 미술시간에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본, 그래서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정작 순수미술계에서는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유화건 수채화건 그리는 재료나 방식의 차이로 우열을 가리는 건 한 마디로 우스운 일이란 점입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그런 편견에 젖어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겠습니다. 사실 미술기자로 제법 오래 일해 오면서 수채화 전시회를 취재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고, 대규모 수채화 전시회나 ‘수채화의 거장’이란 제목이 붙은 전시회는 보도 자료로든 그 무엇으로도 접해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고대고대


김건배 화백의 그림은 참 아름답습니다. 제가 취재를 위해 전시장에 머문 두어 시간 남짓 동안 보기 드물게 꽤 많은 관람객이 다녀갔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다들 감탄사를 연발하더군요. 더 놀라운 건 국내에서 수채화 그린다는 분들이 유독 많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낳은 천재 수채화가’란 별명이 붙었으니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할까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만난 어느 수채화가 한 분은 “이런 수채화는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김건배 화백의 수채화는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궁금했습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물감의 색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인물화의 핵심인 사람의 피부를 우리가 아는 살구색(살색이란 표현은 황인종을 연상시키는 인종 차별적 표현이라는 지적에 따라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물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여러 색을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냅니다. 가령, 파란색 물감을 바른 뒤 그 위에 노란색, 빨간색, 이렇게 덧바르면서 피부색이 구현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김건배 화백의 작품을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부에 파란색이 얹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화가가 직접 터득했다는 이 고유한 기법은 오랜 숙련과 시행착오 끝에 얻어진 것이라 합니다. 물감을 포개는 순서가 정확해야 하고, 물을 얼마나 섞느냐 하는 묽기도 맞춰야 하고, 먼저 바른 물감이 마른 정도까지 계산해야 한다니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투명 수채화는 분명 유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리허설리허설


김건배 화백의 그림 속 주인공은 한 결 같이 무대 위의 발레리나와 연주자들입니다. 왜 그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늘 화려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결과만을 봅니다. 그런 결과가 탄생하기까지의 길고 힘든 과정에는 주목하지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무대 뒤를 볼 기회는 더더욱 없죠. 저는 결과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화가는 그것이야말로 문화를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산을 그린다고 하면 산의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그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그림은 겉으로는 훌륭하게 멋지게 보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산의 본질을 그리지 못하면 그저 그런 풍경화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결국 인물을 그릴 때도 대상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기본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화가의 의도야 어떻든 그림을 보고 판단하는 건 관람객 개개인의 몫입니다. 그리고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방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전시장에 가서 직접 보는 겁니다. 김 화백이 미국에서 한창 그림을 그리던 시절, 한 발레리나의 아버지가 발레를 그만두는 딸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탄생한 것이 바로 아래 그림입니다. 틀에 박힌 초상화가 아니라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알리그라의 초상알리그라의 초상


이번에 소개해드릴 수채화가는 이미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선 꽤 이름이 알려진 윤위동 작가입니다. 30대 중반에 갓 접어든 이 젊은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건 지금껏 본 적 없는 ‘극사실주의 수채화’ 덕분인데요.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서 윤위동 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상당히 많은 자료가 올라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극사실 수채화 1극사실 수채화 1


윤 작가의 작업 방식은 말 그대로 끈기와 인내의 연속이라 부를 만합니다. 경기도 포천의 장흥아트파크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가 수채화를 그리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요. 그리는 방식에 대단한 비밀이 숨어있는 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리고 말리고 그리고 말리고 하는 식으로 하루 10시간씩 그림 앞에 앉아서 끈질기게 악착같이 그리는 겁니다. 윤 작가의 작품은 흔히 극사실주의 작품으로 소개되는 까닭은 이게 수채화야? 놀라버릴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생생합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도무지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입니다. 아주 가는 붓(세필)으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보통 인내심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작업이죠. 마침 저희가 취재차 작업실을 방문한 날은 인물 묘사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얼굴을 그리고 있었는데, 땀구멍까지 되살리는 그 도저한 붓질에는 그만 감탄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윤위동 작가윤위동 작가


젊은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왜 수채화였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그림 재능이 남달랐던 윤위동 작가는 대학 진학 때까지 여러 미술대회를 휩쓸며 화가의 꿈을 무럭무럭 키웠습니다. 미술대학에 진학해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배우는데 어느 날 지도교수가 물었답니다. “넌 뭐냐?” 어떤 길을 가겠느냐는 질문이었겠지요. 그때만 해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솔직히 몰랐던 윤 작가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수채화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주변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수채화라니. 쯧쯧. 미술을 전공한 분이라면 이런 반응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시겠지요. 회화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수채화를 하겠다니 누가 박수 치며 환영해 줬을까요. 하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윤 작가의 수채화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극사실주의 수채화’로 한껏 무르익었고, 대중적인 관심은 물론 컬렉터들에게도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됩니다. 큰 작품의 경우 완성하는 데 한 달 반에서 두 달은 꼬박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1년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아무리 해도 열 작품을 넘기가 어렵죠. 화가들에겐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만큼이나 시간에 대한 심적, 물적 압박이 상당합니다. 그래도 아직 젊다는 것이 작가에겐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입니다.

극사실 수채화 2극사실 수채화 2


한 번은 작품 세계에 변화를 줬다고 합니다. 작가로서 더 좋은 작품, 더 깊은 고민과 철학이 담긴 작품을 해보겠다는 욕심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교수들이나 평론가들로부터 받은 호평에 비해 컬렉터들은 도리어 작품을 외면하더라는 겁니다. 작품성과 대중성, 상품성이라는 가치를 조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걸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전업 작가의 고충도 십분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서 윤위동 작가는 다시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를 타고 나지 못해서 화가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는 모릅니다. 예술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도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화가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렴풋이나마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배부른 예술이란 게 있을까요. 제가 뉴스를 통해 화가들의 작업을 가급적 많이 소개하려는 이유는 ‘과정’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편안하게 감상하는 작품들이 처절한 예술적 고뇌의 산물임을, 어쩌다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조금이라도 알고 이해하고 나면 작품이 주는 의미와 감동은 더 깊어지게 될 테니까요. 윤위동 작가의 다음 전시가 무척이나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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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수채화의 세계’
    • 입력 2015-08-23 08:58:12
    • 수정2015-10-27 14:25:54
    컬처 스토리
(2) 우리가 몰랐던 놀라운 수채화의 세계

김건배라는 생소한 화가의 전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사실 긴가민가했습니다. 국내 화단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을 뿐 아니라, 유화도 아니고 수채화라니 처음엔 그냥 넘겨버릴까도 싶었지요. 하지만, 펜화가로 유명한 김영택 화백이 보내준 작품 이미지 파일을 보는 순간, 작품을 직접 봐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생겼습니다. 먼저 김건배 화백이 어떤 분인지 간략하게나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침의 빛


김건배 화백의 전직은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당시 같은 광고대행사에서 일한 동료였던 펜화가 김영택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광고계 여기저기서 모셔가려고 혈안이 될 정도로 굉장히 잘 나가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정밀 일러스트 분야에선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다고 하는 군요. 나중에 직접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에 돈도 꽤 벌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광고계를 떠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미국에 가서도 광고 쪽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이곳저곳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안들을 모두 거절하고 그가 선택한 건 화가의 길이었습니다. 그것도 수채화가 말이죠. 화가에게 왜 수채화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수채화로 인물화를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미국에서 김건배 화백은 수채화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1999년부터 2002년 사이에 미국의 유명 아트페스티벌에서 수채화 부문 대상을 비롯해 대상만 17차례나 수상을 할 만큼 인정받는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쁨과 영광도 잠시.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2003년 말기 위암으로 위를 통째로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던 겁니다. 화가로서의 삶도 그게 끝인가 싶었답니다.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김건배 화백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흘러 2014년 화가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고국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광고계 재직 시절 동료였던 김영택 화백이 그의 국내 첫 개인전 기획자로 나서 어렵게 마련한 개인전이었고, 펜화 취재로 안면이 있던 제게 이 화가를 취재해보라며 연락을 해온 거였습니다. 흔히 수채화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으로 ‘투명한 아름다움’을 첫 손에 꼽습니다. 불투명 기름 물감으로 대상을 짙게, 강렬하게 표현하는 유화 물감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특유의 맑고 투명한 느낌말입니다. 수성물감을 물에 녹여서 그리는 수채화는 학창 시절 미술시간에 누구나 한 번쯤 그려본, 그래서 누구에게나 친숙한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정작 순수미술계에서는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유화건 수채화건 그리는 재료나 방식의 차이로 우열을 가리는 건 한 마디로 우스운 일이란 점입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그런 편견에 젖어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겠습니다. 사실 미술기자로 제법 오래 일해 오면서 수채화 전시회를 취재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고, 대규모 수채화 전시회나 ‘수채화의 거장’이란 제목이 붙은 전시회는 보도 자료로든 그 무엇으로도 접해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고대


김건배 화백의 그림은 참 아름답습니다. 제가 취재를 위해 전시장에 머문 두어 시간 남짓 동안 보기 드물게 꽤 많은 관람객이 다녀갔습니다. 작품을 보면서 다들 감탄사를 연발하더군요. 더 놀라운 건 국내에서 수채화 그린다는 분들이 유독 많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낳은 천재 수채화가’란 별명이 붙었으니 도대체 뭐가 그리 대단할까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만난 어느 수채화가 한 분은 “이런 수채화는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김건배 화백의 수채화는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궁금했습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물감의 색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인물화의 핵심인 사람의 피부를 우리가 아는 살구색(살색이란 표현은 황인종을 연상시키는 인종 차별적 표현이라는 지적에 따라 더 이상 쓰지 않습니다.) 물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여러 색을 덧칠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냅니다. 가령, 파란색 물감을 바른 뒤 그 위에 노란색, 빨간색, 이렇게 덧바르면서 피부색이 구현되도록 한다는 겁니다. 김건배 화백의 작품을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부에 파란색이 얹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화가가 직접 터득했다는 이 고유한 기법은 오랜 숙련과 시행착오 끝에 얻어진 것이라 합니다. 물감을 포개는 순서가 정확해야 하고, 물을 얼마나 섞느냐 하는 묽기도 맞춰야 하고, 먼저 바른 물감이 마른 정도까지 계산해야 한다니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투명 수채화는 분명 유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리허설


김건배 화백의 그림 속 주인공은 한 결 같이 무대 위의 발레리나와 연주자들입니다. 왜 그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늘 화려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결과만을 봅니다. 그런 결과가 탄생하기까지의 길고 힘든 과정에는 주목하지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무대 뒤를 볼 기회는 더더욱 없죠. 저는 결과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기 시작했죠.” 화가는 그것이야말로 문화를 지탱하는 근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산을 그린다고 하면 산의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그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그림은 겉으로는 훌륭하게 멋지게 보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산의 본질을 그리지 못하면 그저 그런 풍경화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결국 인물을 그릴 때도 대상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기본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화가의 의도야 어떻든 그림을 보고 판단하는 건 관람객 개개인의 몫입니다. 그리고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방법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전시장에 가서 직접 보는 겁니다. 김 화백이 미국에서 한창 그림을 그리던 시절, 한 발레리나의 아버지가 발레를 그만두는 딸을 위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탄생한 것이 바로 아래 그림입니다. 틀에 박힌 초상화가 아니라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알리그라의 초상


이번에 소개해드릴 수채화가는 이미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선 꽤 이름이 알려진 윤위동 작가입니다. 30대 중반에 갓 접어든 이 젊은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건 지금껏 본 적 없는 ‘극사실주의 수채화’ 덕분인데요.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서 윤위동 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해보면 상당히 많은 자료가 올라와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극사실 수채화 1


윤 작가의 작업 방식은 말 그대로 끈기와 인내의 연속이라 부를 만합니다. 경기도 포천의 장흥아트파크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가 수채화를 그리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요. 그리는 방식에 대단한 비밀이 숨어있는 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리고 말리고 그리고 말리고 하는 식으로 하루 10시간씩 그림 앞에 앉아서 끈질기게 악착같이 그리는 겁니다. 윤 작가의 작품은 흔히 극사실주의 작품으로 소개되는 까닭은 이게 수채화야? 놀라버릴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생생합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도무지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입니다. 아주 가는 붓(세필)으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세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보통 인내심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작업이죠. 마침 저희가 취재차 작업실을 방문한 날은 인물 묘사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얼굴을 그리고 있었는데, 땀구멍까지 되살리는 그 도저한 붓질에는 그만 감탄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었습니다.

윤위동 작가


젊은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왜 수채화였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그림 재능이 남달랐던 윤위동 작가는 대학 진학 때까지 여러 미술대회를 휩쓸며 화가의 꿈을 무럭무럭 키웠습니다. 미술대학에 진학해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배우는데 어느 날 지도교수가 물었답니다. “넌 뭐냐?” 어떤 길을 가겠느냐는 질문이었겠지요. 그때만 해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솔직히 몰랐던 윤 작가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수채화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주변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수채화라니. 쯧쯧. 미술을 전공한 분이라면 이런 반응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시겠지요. 회화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수채화를 하겠다니 누가 박수 치며 환영해 줬을까요. 하지만,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윤 작가의 수채화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극사실주의 수채화’로 한껏 무르익었고, 대중적인 관심은 물론 컬렉터들에게도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됩니다. 큰 작품의 경우 완성하는 데 한 달 반에서 두 달은 꼬박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1년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은 아무리 해도 열 작품을 넘기가 어렵죠. 화가들에겐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만큼이나 시간에 대한 심적, 물적 압박이 상당합니다. 그래도 아직 젊다는 것이 작가에겐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입니다.

극사실 수채화 2


한 번은 작품 세계에 변화를 줬다고 합니다. 작가로서 더 좋은 작품, 더 깊은 고민과 철학이 담긴 작품을 해보겠다는 욕심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교수들이나 평론가들로부터 받은 호평에 비해 컬렉터들은 도리어 작품을 외면하더라는 겁니다. 작품성과 대중성, 상품성이라는 가치를 조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걸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전업 작가의 고충도 십분 이해가 되더군요. 그래서 윤위동 작가는 다시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재주를 타고 나지 못해서 화가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는 모릅니다. 예술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도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화가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렴풋이나마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배부른 예술이란 게 있을까요. 제가 뉴스를 통해 화가들의 작업을 가급적 많이 소개하려는 이유는 ‘과정’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전시장에서 편안하게 감상하는 작품들이 처절한 예술적 고뇌의 산물임을, 어쩌다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걸 조금이라도 알고 이해하고 나면 작품이 주는 의미와 감동은 더 깊어지게 될 테니까요. 윤위동 작가의 다음 전시가 무척이나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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