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역사 공연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입력 2015.10.19 (00:00) 수정 2015.10.19 (00: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빠 재미없어! 놀이 기구 타러 가자!" "응, 그전에 이것부터 볼까?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렇게 좁은 데서 살았어~" "..." "저 집은 옛날 양반들이 살았던 곳이야. 가보자!" "..."

"여기가 대조영 사극에서 나왔던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야. 세트장인데 멋있다! 그치?" "아빠 그런데 왜 전쟁은 하지 않아?" "드라마 촬영할 때 여기서 한 거야! 지금은 드라마가 끝났으니까 전투는 없고!" "..."

10년 정도 전인가 아이들과 나눴던 대화의 한 토막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아이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 시켜주기 위해 역사와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자만 신 났던 것 같다. 아이들은 언제나 심드렁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방문해 봤던 대부분의 역사 관련 관광지는 빈집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마당놀이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고 아주 운이 좋았을 때는 영화 촬영도 이뤄졌다. 하지만 그것들마저 아이들에게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세월이 흐른 뒤 특파원 부임을 앞둔 시점이었다. 한 선배 기자와 점심을 하면서 들었던 역사 테마파크 '퓌 뒤 푸'에 대한 정보는 기자의 눈을 크게 뜨게 했다.

■ 역사 전문 테마파크 ‘퓌 뒤 푸’

역사극 ‘승리의 표상’역사극 ‘승리의 표상’


'퓌 뒤 푸'는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380km 정도 떨어진 '방데'라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름의 기원은 그 지역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고성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을 찾은 첫날 기자는 벤허의 명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흉내 낸 원형 경기장에서였다. ('퓌 뒤 푸'에서는 2000년 만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원형 경기장이라고 말한다.) 때는 3세기 무렵 로마가 옛 프랑스 지역인 골 지방을 점령했을 때의 상황을 재현한 일종의 상황극이었다. 골족의 여인을 사랑한 로마의 장군 담양이 당시 골 총독이었던 '시저'를 배신하고 사랑한 연인을 위해 칼을 빼 든다. '시저'는 검투사와 싸움과 전차 경주에서 이기면 둘을 놓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때부터 담양 장군은 목숨을 걸고 검투사들과 싸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올 법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약속에 따라 쓰러지는 검투사들의 몸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고... 담양 장군도 위기에 처하지만 골족의 다른 노예들의 도움으로 검투사들을 모두 물리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차 경주. 네 필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당당히 입장하는 담양은 로마 장군 3명과 일합을 겨룬다. 비가 왔던 뒤라 경기장에는 빗물이 고여있다. 전차가 전속력으로 돌진하면서 진흙들이 이곳저곳으로 튄다. 매우 역동적인 모습이다. 꼴찌로 시작된 경주는 다섯 바퀴를 돌면서 경쟁자들을 한둘씩 제쳐간다. 이 과정에 한 전차는 바퀴가 빠지는 아찔한 장면도 연출한다. 앞서 말했던 영화 '벤허'의 장면이다.

이 공연에서 역사적인 사실은 무엇일까? 단 두 가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3세기 무렵 로마가 골 지역을 점령했다는 것과 로마 총독으로 '시저'가 와있었다는 것이다. 담양 이란 인물과 담양이 사랑했던 골 지역 여인도 모두가 창조된 인물이다.

또 하나의 공연을 살펴보자. 바로 '바이킹'이다. 10세기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어촌이 배경이다. 이 마을의 평화는 포악한 바이킹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파괴된다. 그 과정이 매우 현란하게 표현된다. 마을 앞 조그마한 강에는 바다에서 거슬러 올라온 바이킹 선이 극적으로 나타난다. 성이 불타고 망루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땅으로 떨어진다. 옆의 지붕에도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탄다. 그러다 갑자기 물밑에서 거대한 바이킹 선 한 척이 서서히 떠오른다. 물속에서 드러나는 배 위에 조각처럼 서 있던 바이킹들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런 혼란도 이 마을의 용감한 청년의 지혜와 힘으로 정리가 된다.

역사극 ‘바이킹’역사극 ‘바이킹’


이 공연은 바이킹이 프랑스까지 진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키포인트다. 청년에 의해 혼돈이 정리되는 것은 바이킹 문화가 프랑스의 문화로 흡수됐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롤로와 덴마크 출신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파리로부터 흐르는 센 강 하류의 양안에 정착하였고, 그로 인해 그 지역의 이름이 노르망디가 되었다고 한다.

'퓌 뒤 푸'에서는 이 같은 역사극 19개가 시간대별로 계속 펼쳐진다. 하나같이 역사적인 뼈대는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채우는 것은 상상력을 발휘한 새로운 것이다. 역사 왜곡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퓌 뒤 푸'의 대표 '니콜라 드 빌리에' 씨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역사극의 모티브가 되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다. 또한, 배우들의 입는 의복이며 무대가 되는 집 등의 모습은 상당한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역사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충분히 있음 직한 이야기로 채워넣는다고 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역사'와 상상의 산물인 일종의 '전설'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자리에서 역사의 엄숙주의를 들며 그와 논쟁할 마음이 없었다. 우선 그와 논쟁을 벌일 만큼 프랑스 역사에 해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자도 이미 몇 개의 역사극을 보고 난 뒤 큰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세한 역사적 정보보다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접근 방법을 선호하는 '퓌 뒤 푸'의 역사관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매년 4월부터 9월 말까지만 일 년에 6개월만 개장하는데도 지난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191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20%가 프랑스 언어와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한다. '퓌 뒤 푸'는 영국과 네덜란드와 러시아 등에 노하우를 수출한다고 한다.

■ 세계 최대의 역사 공연극 ‘씨네 쎄니’

'퓌 뒤 푸'와 늘 함께 거론되는 역사 공연극이 '씨네 쎄니'다. 지난 1977년에 현재 '퓌 뒤 푸'의 대표 '니콜라 드 빌리에' 씨의 아버지 '필립 드 빌리에' 씨가 이 방데 지역에 내려와서 완성한 공연이다.

방데 지역은 프랑스에서도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이 지역민들은 혁명군에 맞섰다. 그래서 수천 명이 죽는 대학살극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이 역사적 사실을 공연으로 만들었다. 78년에 초연된 공연은 2분 정도의 짧은 극이었다. 참여 인원도 6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8년 흐른 지금 '씨네 쎄니'는 세계 최대 공연으로 발전했다. 방데 지역민들이 혁명 당시 학살 때부터 세계 2차 대전까지의 역사적 고비들을 어떻게 넘겼는지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고성 앞 호수부터 객석까지 23만㎡의 넓이에서 펼쳐진다. 잠실 야구장 부지가 5만 9천500㎡라고 하니 4배 정도 큰 공연장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배우만 2천4백여 명이라고 한다. 또한, 음향과 조명 등 기술진과 자리안내자와 주차관리원까지 모두 3천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이 공연에 임하고 있다.

'씨네 쎄니'는 나그네(일종의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등을 설명하는데 처음부터 시선을 잡는 데 충분하다. 어둠이 깔린 공연장에서 핀 조명을 받고 나그네는 독백하면서 천천히 주인공 가족이 사는 집으로 걸어간다. 공연장 전체에 깨끗하게 전달되는 저음의 목소리가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온다. (찾아보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필립 피에르 페르낭 노와'라는 프랑스 배우인데 2006년에 작고한 분이다.) 나그네의 독백은 있지만, 전체 공연은 상징적인 미쟝센으로 진행된다. 혁명 전의 삶에서 혁명 시 학살당하는 역사적 장면 등이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 연기자들에 의해 표현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1차 대전 때 고성 '퓌 뒤 푸'가 파괴되고 2차 대전의 승리로 '자유'를 얻게 되면서 공연장은 축제의 장으로 마무리된다.

13년째 이 '씨네 쎄니'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나탈리 씨 가족을 만났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남편 알랭 씨와 17살 아들 윌리엄이다. 올해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의상과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씨네 쎄니'는 '퓌 뒤 푸'가 개장하는 동안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공연이 펼쳐진다. 2시간 동안 공연을 하고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매주 5~6시간은 투자를 해야 한다. 물론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한 푼의 출연료도 받지 않는다. 무엇이 이 가족들로 하여금 13년째 빠지지 않고 '씨네 쎄니'에 참여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연 자체가 주는 감동이라고 말했다. 공연 때마다 객석을 가득 채우는 만 4천여 명의 환호와 감동을 무대에서 직접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은 성스럽기까지 하다고 했다.

역사극역사극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자부심은 참여인들의 유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유대감은 기자가 공연 전 배우들이 준비하는 오두막을 찾았을 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0대 아이들과 50대 많게는 70대 노인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서로를 챙겨주고 있었다. 38년째 계속되는 이런 분위기는 'Puyfolais'(퓌폴레-'씨네 쎄니'에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일컫는 조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씨네 쎄니' 커플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 느껴졌다. 자원봉사자들이 공연을 통해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을 또 공연장으로 데리고 온다. 대를 이어 이 공연에 참여하는 가족이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기자가 만난 한 자원봉사자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사회적 관계망을 오프라인으로 실현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씨네 쎄니'라고 이야기를 했다. 일견 수긍되는 주장이었다.

■ ‘퓌 뒤 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숙제는?

과거 KBS 히트 드라마 가운데 '전설의 고향'이 있다. 지역마다 전해 내려오는 기이한 설화 등을 극화한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가 상당 기간 지속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지역마다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이야기가 지금은 어디서도 회자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그냥 책 속에 사장되고 있다.

지난해 영화 '명량'이 큰 인기를 끌었다. 성공 요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뼈대를 두고 그 빈틈에 채워진 창조적 작은 이야기들이 '명량'을 한국 영화 가운데 최대 관객 동원 영화 1위에 올린 원동력이다.

'전설의 고향'도 그렇고 '명량'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와 영화에서만 가능할까? 쉽진 않겠지만 '퓌 뒤 푸'식의 접근으로 우리 눈앞에 펼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실제로 '퓌 뒤 푸'에서는 바다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바다를 담은 실내 공연장을 건설하고 있다. (세계 최대 실내 공연장이라고 한다.) 역사라는 것이 어차피 기록된 것이라면 한줄 한줄 사이의 빈틈을 채워나가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몫은 아닐까? 과거 건축물을 모아놓은 민속촌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게 역사는 따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을 하면 어떨까? 역사적 정보를 모아놓은 박물관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선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눈으로 확인한 역동적인 역사적 사실로 인해 호기심이 자극된 아이들이 학교에서 또는 책에서 그 역사를 다시 공부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발상일까?

[연관 기사]

☞ [특파원 현장보고] [월드 리포트] 숨 막히는 지상 최대 공연 ‘역사 속으로’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취재후] 역사 공연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 입력 2015-10-19 00:00:20
    • 수정2015-10-19 00:00:51
    취재후·사건후
"아빠 재미없어! 놀이 기구 타러 가자!" "응, 그전에 이것부터 볼까?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렇게 좁은 데서 살았어~" "..." "저 집은 옛날 양반들이 살았던 곳이야. 가보자!" "..." "여기가 대조영 사극에서 나왔던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야. 세트장인데 멋있다! 그치?" "아빠 그런데 왜 전쟁은 하지 않아?" "드라마 촬영할 때 여기서 한 거야! 지금은 드라마가 끝났으니까 전투는 없고!" "..." 10년 정도 전인가 아이들과 나눴던 대화의 한 토막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아이들에게 역사의식을 고취 시켜주기 위해 역사와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다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자만 신 났던 것 같다. 아이들은 언제나 심드렁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방문해 봤던 대부분의 역사 관련 관광지는 빈집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마당놀이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고 아주 운이 좋았을 때는 영화 촬영도 이뤄졌다. 하지만 그것들마저 아이들에게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세월이 흐른 뒤 특파원 부임을 앞둔 시점이었다. 한 선배 기자와 점심을 하면서 들었던 역사 테마파크 '퓌 뒤 푸'에 대한 정보는 기자의 눈을 크게 뜨게 했다. ■ 역사 전문 테마파크 ‘퓌 뒤 푸’
역사극 ‘승리의 표상’
'퓌 뒤 푸'는 파리에서 서남쪽으로 380km 정도 떨어진 '방데'라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름의 기원은 그 지역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고성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을 찾은 첫날 기자는 벤허의 명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흉내 낸 원형 경기장에서였다. ('퓌 뒤 푸'에서는 2000년 만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원형 경기장이라고 말한다.) 때는 3세기 무렵 로마가 옛 프랑스 지역인 골 지방을 점령했을 때의 상황을 재현한 일종의 상황극이었다. 골족의 여인을 사랑한 로마의 장군 담양이 당시 골 총독이었던 '시저'를 배신하고 사랑한 연인을 위해 칼을 빼 든다. '시저'는 검투사와 싸움과 전차 경주에서 이기면 둘을 놓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때부터 담양 장군은 목숨을 걸고 검투사들과 싸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올 법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약속에 따라 쓰러지는 검투사들의 몸에서는 피가 터져 나오고... 담양 장군도 위기에 처하지만 골족의 다른 노예들의 도움으로 검투사들을 모두 물리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차 경주. 네 필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당당히 입장하는 담양은 로마 장군 3명과 일합을 겨룬다. 비가 왔던 뒤라 경기장에는 빗물이 고여있다. 전차가 전속력으로 돌진하면서 진흙들이 이곳저곳으로 튄다. 매우 역동적인 모습이다. 꼴찌로 시작된 경주는 다섯 바퀴를 돌면서 경쟁자들을 한둘씩 제쳐간다. 이 과정에 한 전차는 바퀴가 빠지는 아찔한 장면도 연출한다. 앞서 말했던 영화 '벤허'의 장면이다. 이 공연에서 역사적인 사실은 무엇일까? 단 두 가지만 역사적 사실이다. 3세기 무렵 로마가 골 지역을 점령했다는 것과 로마 총독으로 '시저'가 와있었다는 것이다. 담양 이란 인물과 담양이 사랑했던 골 지역 여인도 모두가 창조된 인물이다. 또 하나의 공연을 살펴보자. 바로 '바이킹'이다. 10세기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어촌이 배경이다. 이 마을의 평화는 포악한 바이킹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파괴된다. 그 과정이 매우 현란하게 표현된다. 마을 앞 조그마한 강에는 바다에서 거슬러 올라온 바이킹 선이 극적으로 나타난다. 성이 불타고 망루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땅으로 떨어진다. 옆의 지붕에도 불이 옮겨붙어 활활 탄다. 그러다 갑자기 물밑에서 거대한 바이킹 선 한 척이 서서히 떠오른다. 물속에서 드러나는 배 위에 조각처럼 서 있던 바이킹들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런 혼란도 이 마을의 용감한 청년의 지혜와 힘으로 정리가 된다.
역사극 ‘바이킹’
이 공연은 바이킹이 프랑스까지 진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키포인트다. 청년에 의해 혼돈이 정리되는 것은 바이킹 문화가 프랑스의 문화로 흡수됐다는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롤로와 덴마크 출신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파리로부터 흐르는 센 강 하류의 양안에 정착하였고, 그로 인해 그 지역의 이름이 노르망디가 되었다고 한다. '퓌 뒤 푸'에서는 이 같은 역사극 19개가 시간대별로 계속 펼쳐진다. 하나같이 역사적인 뼈대는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채우는 것은 상상력을 발휘한 새로운 것이다. 역사 왜곡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퓌 뒤 푸'의 대표 '니콜라 드 빌리에' 씨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역사극의 모티브가 되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다. 또한, 배우들의 입는 의복이며 무대가 되는 집 등의 모습은 상당한 고증을 거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역사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충분히 있음 직한 이야기로 채워넣는다고 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의 '역사'와 상상의 산물인 일종의 '전설'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자리에서 역사의 엄숙주의를 들며 그와 논쟁할 마음이 없었다. 우선 그와 논쟁을 벌일 만큼 프랑스 역사에 해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자도 이미 몇 개의 역사극을 보고 난 뒤 큰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세한 역사적 정보보다는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접근 방법을 선호하는 '퓌 뒤 푸'의 역사관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매년 4월부터 9월 말까지만 일 년에 6개월만 개장하는데도 지난해 이곳을 찾은 관광객이 191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가운데 20%가 프랑스 언어와 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한다. '퓌 뒤 푸'는 영국과 네덜란드와 러시아 등에 노하우를 수출한다고 한다. ■ 세계 최대의 역사 공연극 ‘씨네 쎄니’ '퓌 뒤 푸'와 늘 함께 거론되는 역사 공연극이 '씨네 쎄니'다. 지난 1977년에 현재 '퓌 뒤 푸'의 대표 '니콜라 드 빌리에' 씨의 아버지 '필립 드 빌리에' 씨가 이 방데 지역에 내려와서 완성한 공연이다. 방데 지역은 프랑스에서도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이 지역민들은 혁명군에 맞섰다. 그래서 수천 명이 죽는 대학살극이 일어났다. 학교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이 역사적 사실을 공연으로 만들었다. 78년에 초연된 공연은 2분 정도의 짧은 극이었다. 참여 인원도 6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38년 흐른 지금 '씨네 쎄니'는 세계 최대 공연으로 발전했다. 방데 지역민들이 혁명 당시 학살 때부터 세계 2차 대전까지의 역사적 고비들을 어떻게 넘겼는지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고성 앞 호수부터 객석까지 23만㎡의 넓이에서 펼쳐진다. 잠실 야구장 부지가 5만 9천500㎡라고 하니 4배 정도 큰 공연장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배우만 2천4백여 명이라고 한다. 또한, 음향과 조명 등 기술진과 자리안내자와 주차관리원까지 모두 3천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이 공연에 임하고 있다. '씨네 쎄니'는 나그네(일종의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역할)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등을 설명하는데 처음부터 시선을 잡는 데 충분하다. 어둠이 깔린 공연장에서 핀 조명을 받고 나그네는 독백하면서 천천히 주인공 가족이 사는 집으로 걸어간다. 공연장 전체에 깨끗하게 전달되는 저음의 목소리가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온다. (찾아보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필립 피에르 페르낭 노와'라는 프랑스 배우인데 2006년에 작고한 분이다.) 나그네의 독백은 있지만, 전체 공연은 상징적인 미쟝센으로 진행된다. 혁명 전의 삶에서 혁명 시 학살당하는 역사적 장면 등이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 연기자들에 의해 표현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1차 대전 때 고성 '퓌 뒤 푸'가 파괴되고 2차 대전의 승리로 '자유'를 얻게 되면서 공연장은 축제의 장으로 마무리된다. 13년째 이 '씨네 쎄니'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나탈리 씨 가족을 만났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남편 알랭 씨와 17살 아들 윌리엄이다. 올해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의상과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씨네 쎄니'는 '퓌 뒤 푸'가 개장하는 동안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공연이 펼쳐진다. 2시간 동안 공연을 하고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매주 5~6시간은 투자를 해야 한다. 물론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한 푼의 출연료도 받지 않는다. 무엇이 이 가족들로 하여금 13년째 빠지지 않고 '씨네 쎄니'에 참여하도록 만들었을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공연 자체가 주는 감동이라고 말했다. 공연 때마다 객석을 가득 채우는 만 4천여 명의 환호와 감동을 무대에서 직접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은 성스럽기까지 하다고 했다.
역사극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자부심은 참여인들의 유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유대감은 기자가 공연 전 배우들이 준비하는 오두막을 찾았을 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0대 아이들과 50대 많게는 70대 노인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서로를 챙겨주고 있었다. 38년째 계속되는 이런 분위기는 'Puyfolais'(퓌폴레-'씨네 쎄니'에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일컫는 조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씨네 쎄니' 커플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로 느껴졌다. 자원봉사자들이 공연을 통해서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을 또 공연장으로 데리고 온다. 대를 이어 이 공연에 참여하는 가족이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기자가 만난 한 자원봉사자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사회적 관계망을 오프라인으로 실현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씨네 쎄니'라고 이야기를 했다. 일견 수긍되는 주장이었다. ■ ‘퓌 뒤 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숙제는? 과거 KBS 히트 드라마 가운데 '전설의 고향'이 있다. 지역마다 전해 내려오는 기이한 설화 등을 극화한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가 상당 기간 지속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지역마다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이야기가 지금은 어디서도 회자되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그냥 책 속에 사장되고 있다. 지난해 영화 '명량'이 큰 인기를 끌었다. 성공 요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역사적 뼈대를 두고 그 빈틈에 채워진 창조적 작은 이야기들이 '명량'을 한국 영화 가운데 최대 관객 동원 영화 1위에 올린 원동력이다. '전설의 고향'도 그렇고 '명량'도 그렇고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와 영화에서만 가능할까? 쉽진 않겠지만 '퓌 뒤 푸'식의 접근으로 우리 눈앞에 펼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실제로 '퓌 뒤 푸'에서는 바다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바다를 담은 실내 공연장을 건설하고 있다. (세계 최대 실내 공연장이라고 한다.) 역사라는 것이 어차피 기록된 것이라면 한줄 한줄 사이의 빈틈을 채워나가는 것은 역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몫은 아닐까? 과거 건축물을 모아놓은 민속촌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에게 역사는 따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을 하면 어떨까? 역사적 정보를 모아놓은 박물관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선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눈으로 확인한 역동적인 역사적 사실로 인해 호기심이 자극된 아이들이 학교에서 또는 책에서 그 역사를 다시 공부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발상일까? [연관 기사] ☞ [특파원 현장보고] [월드 리포트] 숨 막히는 지상 최대 공연 ‘역사 속으로’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