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eye] “관계 회복하려면 역사 알아야”

입력 2015.10.31 (08:44) 수정 2015.10.3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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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이었습니다.

안 의사는 1909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데, 거사의 첫 번째 이유가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이토의 죄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등에 대한 자료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한일 관계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게 이들이 나선 이유입니다.

도쿄 윤석구 특파원이 소개합니다.

<리포트>

지난 8일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선 명성황후 120주기 추도제가 열렸습니다.

참가자들 중엔 멀리 일본 구마모토에서 찾아온 특별한 손님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주로 역사 교사 출신인 이들은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사죄하는 뜻으로 시민모임을 만들어 벌써 10년째 추도제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역 초등학교를 방문해 어린 학생들과 뜻깊은 교류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녹취> 후루사와(명성황후를 생각하는 시민모임 회장) : "일본이 절대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일본 큐슈 구마모토현,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지닌 곳입니다.

고대 백제 사람들이 이곳에 건너와 문물을 전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근거지이기도 합니다.

명성황후 추도제에 다녀온 구마모토 시민 회원들이 정리 모임을 열었습니다.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한일관계 역사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모임 회보도 발간하고 있습니다.

<녹취> 모리모토(명성황후를 생각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 : "한일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선 우선 가장 아픈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다음 단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벽에 걸어놓은 명성황후 시해 관련자 48명의 명단을 살펴보면 붉은색 표시를 한 구마모토 출신자가 21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20년 넘게 이들의 행적을 조사해온 가이 도시오씨는 그 배경에 구마모토 출신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란 인물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가이 도시오(지역 역사연구자) : "아다치는 일본 외무성의 지원으로 서울에 한성신보사를 설립했습니다."

신문 발행비용이나 직원 급료 등이 모두 외무성 기밀비였습니다.

취재진은 관련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구마모토 신문박물관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엔 일본의 조선침략 비밀정보기관 역할을 했던 한성신보 건물 앞에서 구마모토 출신 일본인 직원들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바로 명성황후 시해 때 궁궐에 난입했던 자들입니다.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시를 받아 궁궐 난입을 주도했던 아다치의 사진이 자랑스런 지역 인물로 전시돼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직을 은퇴한 가히 씨는 재직 시절 명성황후 사건을 묻는 한 재일교포 여학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줄곧 구마모토 출신 관련자들의 행적을 조사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일본에 돌아와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내무대신이 된 아다치를 비롯해 대부분 출세가도를 달린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녹취> 가이 도시오(지역 역사연구자) : "나 한사람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반드시 명성황후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이 씨는 일본사회가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역사의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며 집 근처 아소산 국립공원으로 취재진을 안내했습니다.

아소 화산 입구 언덕엔 궁궐 난입자 중 한 명인 마츠무라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문엔 그가 아소산을 일본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데 공헌했다는 설명과 함께 “조선에 가서 동료들과 함께 민비사건에 관여했다”는 내용이 마치 공적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녹취> 가이 도시오(지역 역사연구자) :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것은 엄청난 범죄입니다. 그런데 마치 큰 공을 세운 것처럼 잘못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가히 씨는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아야만 한일 간 우호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될 수 있다며,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혀 널리 알리는 일에 힘을 다하겠다고 말합니다.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재판에서 거사의 첫 번째 이유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를 제시하며 그 정당성을 밝혔습니다.

일본 북동부 미야기현의 작은 도시 쿠리하라.

시가지에서 떨어진 한적한 마을 도로 옆에 뜻밖에도 ‘안중근 기념비’라고 적힌 한글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선 사찰 다이린지 법당 안에는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한 일본인의 영정이 놓여 있습니다.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됐던 5개월 동안 간수로 근무했던 헌병 치바 도시치씨입니다.

수감 중 안 의사 모습에 깊이 감명 받은 치바씨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 절에 안 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셔놓고 평생 명복을 빌었습니다.

<녹취> 사이토(다이린지 주지) : "치바 씨는 일본인으로서 안 의사에게 사죄했고, 안 의사는 사형 직전 그에게 붓글씨를 써 줬습니다."

법당 안엔 치바 씨가 평생 소중히 간직했던 안 의사의 유묵,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글이 걸려 있습니다.

사이토 스님은 40년 가까이 매일 향을 피워 두 사람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녹취> 사이토(다이린지 주지) : "두 사람의 인연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인식도 중요하지만 우선 인간으로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 한일 간 평화와 협력을 위해 중요합니다."

사이토 스님의 오랜 노력을 통해 일본의 작은 절 다이린지는 한일 교류의 원점과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갖게 됐습니다.

절 경내엔 안중근 의사와 치바씨가 한일간 장벽을 넘어 맺은 우정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절 뒤뜰에 자리 잡은 치바씨 묘비엔 사형 당시 31살이던 안중근 의사와 25살의 군인 치바씨 사이의 인연이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사이토 스님은 한일 관계의 진전을 위해선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마음을 열고 서로 교류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안 의사와 치바 씨의 인연을 널리 알리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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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eye] “관계 회복하려면 역사 알아야”
    • 입력 2015-10-31 09:38:36
    • 수정2015-10-31 10:23:20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 의거일이었습니다.

안 의사는 1909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데, 거사의 첫 번째 이유가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이토의 죄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등에 대한 자료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한일 관계의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는 먼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게 이들이 나선 이유입니다.

도쿄 윤석구 특파원이 소개합니다.

<리포트>

지난 8일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선 명성황후 120주기 추도제가 열렸습니다.

참가자들 중엔 멀리 일본 구마모토에서 찾아온 특별한 손님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주로 역사 교사 출신인 이들은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사죄하는 뜻으로 시민모임을 만들어 벌써 10년째 추도제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역 초등학교를 방문해 어린 학생들과 뜻깊은 교류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녹취> 후루사와(명성황후를 생각하는 시민모임 회장) : "일본이 절대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일본 큐슈 구마모토현,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지닌 곳입니다.

고대 백제 사람들이 이곳에 건너와 문물을 전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근거지이기도 합니다.

명성황후 추도제에 다녀온 구마모토 시민 회원들이 정리 모임을 열었습니다.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한일관계 역사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모임 회보도 발간하고 있습니다.

<녹취> 모리모토(명성황후를 생각하는 시민모임 사무국장) : "한일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선 우선 가장 아픈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다음 단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벽에 걸어놓은 명성황후 시해 관련자 48명의 명단을 살펴보면 붉은색 표시를 한 구마모토 출신자가 21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20년 넘게 이들의 행적을 조사해온 가이 도시오씨는 그 배경에 구마모토 출신인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란 인물이 핵심 역할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가이 도시오(지역 역사연구자) : "아다치는 일본 외무성의 지원으로 서울에 한성신보사를 설립했습니다."

신문 발행비용이나 직원 급료 등이 모두 외무성 기밀비였습니다.

취재진은 관련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구마모토 신문박물관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엔 일본의 조선침략 비밀정보기관 역할을 했던 한성신보 건물 앞에서 구마모토 출신 일본인 직원들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바로 명성황후 시해 때 궁궐에 난입했던 자들입니다.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시를 받아 궁궐 난입을 주도했던 아다치의 사진이 자랑스런 지역 인물로 전시돼 있습니다.

고등학교 교직을 은퇴한 가히 씨는 재직 시절 명성황후 사건을 묻는 한 재일교포 여학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줄곧 구마모토 출신 관련자들의 행적을 조사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일본에 돌아와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내무대신이 된 아다치를 비롯해 대부분 출세가도를 달린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녹취> 가이 도시오(지역 역사연구자) : "나 한사람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반드시 명성황후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이 씨는 일본사회가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역사의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있다며 집 근처 아소산 국립공원으로 취재진을 안내했습니다.

아소 화산 입구 언덕엔 궁궐 난입자 중 한 명인 마츠무라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문엔 그가 아소산을 일본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데 공헌했다는 설명과 함께 “조선에 가서 동료들과 함께 민비사건에 관여했다”는 내용이 마치 공적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녹취> 가이 도시오(지역 역사연구자) :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것은 엄청난 범죄입니다. 그런데 마치 큰 공을 세운 것처럼 잘못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가히 씨는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아야만 한일 간 우호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될 수 있다며,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혀 널리 알리는 일에 힘을 다하겠다고 말합니다.

지난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재판에서 거사의 첫 번째 이유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죄를 제시하며 그 정당성을 밝혔습니다.

일본 북동부 미야기현의 작은 도시 쿠리하라.

시가지에서 떨어진 한적한 마을 도로 옆에 뜻밖에도 ‘안중근 기념비’라고 적힌 한글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안내판을 따라 들어선 사찰 다이린지 법당 안에는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한 일본인의 영정이 놓여 있습니다.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됐던 5개월 동안 간수로 근무했던 헌병 치바 도시치씨입니다.

수감 중 안 의사 모습에 깊이 감명 받은 치바씨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 절에 안 의사 영정과 위패를 모셔놓고 평생 명복을 빌었습니다.

<녹취> 사이토(다이린지 주지) : "치바 씨는 일본인으로서 안 의사에게 사죄했고, 안 의사는 사형 직전 그에게 붓글씨를 써 줬습니다."

법당 안엔 치바 씨가 평생 소중히 간직했던 안 의사의 유묵,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글이 걸려 있습니다.

사이토 스님은 40년 가까이 매일 향을 피워 두 사람의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녹취> 사이토(다이린지 주지) : "두 사람의 인연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인식도 중요하지만 우선 인간으로서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 한일 간 평화와 협력을 위해 중요합니다."

사이토 스님의 오랜 노력을 통해 일본의 작은 절 다이린지는 한일 교류의 원점과 같은 역사적 상징성을 갖게 됐습니다.

절 경내엔 안중근 의사와 치바씨가 한일간 장벽을 넘어 맺은 우정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절 뒤뜰에 자리 잡은 치바씨 묘비엔 사형 당시 31살이던 안중근 의사와 25살의 군인 치바씨 사이의 인연이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

사이토 스님은 한일 관계의 진전을 위해선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마음을 열고 서로 교류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안 의사와 치바 씨의 인연을 널리 알리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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