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본문 영역

상세페이지

부패한 서울을 정화시키는 ‘이 곳’
입력 2015.11.07 (07:16) 수정 2015.11.11 (17:10) 컬처 스토리
조선왕조 5백 년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서울에서, 아니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유서 깊은 땅 서울에서 최고의 문화유산 답사 장소를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곳만 고르라면, 여러분은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외국인 관광객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곳을 추천해줘야 할까요?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들이 몇 군데 있으실 겁니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궁궐 중의 궁궐’ 경복궁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창덕궁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오히려 외국 사람이 더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말 휴일만 되면 정말 미어터질 정도로 외국인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죠.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니까요.

서울에서만 30년을 살아온 저 역시 달리 뾰족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한데 답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답사 장소로 꼽히는 곳은 정작 따로 있더군요. 서울의 그 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딱 한 곳만을 골라야 한다면, 열 일 젖혀두고 반드시 꼭 한 번은 찾아가 봐야 할 그곳. 우리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선사하는 선대의 위대한 유산. 외국인들이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정서를 온몸으로 느끼고 기꺼이 감동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 그 첫 손으로 꼽히는 곳은 다름 아닌 ‘종묘(宗廟)’입니다.

종묘의 신로종묘의 신로

▲ 종묘의 신로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입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종묘 앞 광장을 빙 돌아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길 가운데 넓적한 돌을 죽 이어 붙인 세 줄기 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중에서 양옆보다 조금 더 높은 가운뎃길을 신로(神路)라 부릅니다. 신(神)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예로부터 사람이 밟지 못하게 했다는군요. 지금도 그 전통을 존중해 밟지 말아 달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서 있습니다.

혹시 조선 왕릉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 왕릉에 가도 똑같은 세 가닥 길이 나 있습니다. 역시 가운뎃길은 신로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지요. 신로의 오른쪽, 그러니까 동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 왼쪽(서쪽)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입니다. 한 번은 왕릉 취재를 갔다가 능지기분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넓적한 바위에 성큼 발을 올려놓았더니 얼른 내려오라는 겁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고요. 종묘나 왕릉에선 지금도 옛 절차와 법도를 지켜 제사를 지냅니다.

신로는 죽은 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길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밟지 말아 달라는 안내문을 읽은 뒤엔 그게 종묘 답사의 예의고 전통인가 보다, 하며 존중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신로는 종묘의 중심부로 길게 죽 이어집니다. 입구에서 신로를 따라가지 않고, 오른쪽 길로 꺾어 들어가면 망묘루(望廟樓),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종묘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향대청(香大廳) 건물이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향대청 전시관 안에는 종묘제례 때 사용되는 제기들을 모은 제사상 모형과 종묘 정전의 신주를 모신 태실(太室) 한 칸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서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제사상과 태실 모형제사상과 태실 모형

▲ 제사상과 태실 모형


텔레비전에서 대하사극을 보다 보면 임금님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신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런 대사를 토해냅니다. “소신, 종묘사직을 위해 충심을 다하겠나이다!” “종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옵니다!” 종사(宗社)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하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이처럼 조선시대에 ‘국가’나 진배없었습니다. 그만큼 지엄하고 신성한 의미를 지녔던 거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궐보다 먼저 종묘와 사직을 지었을 정도니까요.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에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구절이 있답니다. 수도를 건설할 때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는 규정인데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종묘가, 서쪽에 사직단이 세워진 겁니다.

오늘날 종묘의 면적은 18만 6,786평방미터에 이릅니다. 숫자로는 잘 와 닿지 않습니다만, 쉽게 말하면 그래도 조선시대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궁궐들이 일제강점기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데 비해 종묘는 비교적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종묘와 사직>의 저자들은 이를 두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종묘는 일본인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 임진왜란 때 종묘를 불 질러 잿더미를 만들었던 건 바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만약 종묘가 그 후손들에 의해 또 한 번 불태워졌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묘 지도종묘 지도

▲ 종묘 지도


향대청에서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임금과 세자가 목욕재계하는 공간인 재궁(齋宮)을 지나 종묘의 심장부라 할 정전(正殿)의 입구에 이르게 됩니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 서, 남쪽으로 세 곳이 나 있는데, 남쪽 문이 바로 신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입니다.

신문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국보 227호 종묘 정전의 장엄한 기세가 시선을 압도합니다. 카메라를 아무리 들이대도 절대 한 화면에 담을 수 없는 그 엄청난 규모에 실로 입이 떡 벌어집니다. ‘파노라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졌나 봅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정전은 정면 19칸, 측면 3칸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건축물입니다. 당연히 단일 목조건축물로 국내 최대 면적을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정전은 언제 지어진 걸까요?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에 처음 세워졌을 당시 종묘 정전은 태실 7칸짜리 건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공간이 부족해지자 1546년 명종 때 1차로 4칸을 늘려 11칸을 만듭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불을 질러 몽땅 타버리고 말았지요. 주저앉은 종묘를 11칸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건 1608년 광해군 때입니다. 이후 영조 때인 1726년에 다시 4칸을 늘려 15칸, 1836년 헌종 때 다시 4칸을 증축해 19칸이 됐습니다. 지금 우리가 종묘가 가면 만날 수 있는 정전은 바로 헌종 때인 1836년에 세워진 겁니다.

종묘 정전종묘 정전

▲ 종묘 정전


솔직히 저도 잘 몰랐습니다. 종묘 정전이 그토록 대단한 건물이라는 것을요. 전문가들이 입이 마르도록 상찬해 마지않는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의 핵심은 바로 돌로 평평하게 쌓아 만든 광활한 ‘월대’입니다. 가로 109미터, 세로 69미터나 되는 이 어마어마한 돌 마당의 아름다움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한 분은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 선생입니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선생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종묘 정전의 본질은 결코 건물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고.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非物質)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돌판들은 마치 땅에 새긴 지문처럼 보인다. (…) 바로 영혼의 공간이며 우리 자신을 영원히 질문하게 하는 본질적 공간이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에 우리가 가졌던 질문의 답이 보입니다. 앞으론 누가 다가와서 서울 최고의 문화유산 답사 장소를 선뜻 물어도 자신 있게 ‘종묘’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승효상 선생에 따르면 종묘에는 이런 깊은 뜻도 담겨 있습니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이 서울 안에, 그래도 부패한 서울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장소가 있으니 여기가 종묘이다.”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외국 건축가가 대체 누군가 궁금했는데 시라이 세이이치라는 일본의 건축가였더군요.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 역시 종묘를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하면서 “처음 봤을 때 숨이 탁 막혔다.”고 했습니다.

비단 이뿐일까요.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이 서울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직성이 풀린다는 바로 그곳이 바로 종묘입니다. 그래서 종묘는 외국인들이 오히려 더 열광하는 관광 명소가 됐습니다. 가까이 두고도 그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건 정작 우리 자신이었죠.

종묘 정전 앞 월대종묘 정전 앞 월대

▲ 종묘 정전 앞 월대


종묘 정전 앞 월대종묘 정전 앞 월대

▲ 종묘 정전 앞 월대


종묘 월대를 돌아 정전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열주 회랑입니다. 숭고함과 엄숙함이 깃든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소실점 방향이 가리키는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여기까지를 제대로 봤다면 종묘 정전이 주는 벅찬 감동에 겨워 이곳에 오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1995년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종묘 답사뿐 아니라 해마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종묘대제(宗廟大祭)도 꼭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종묘는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베트남에도 남아 있지만, 종묘에서 거행하는 의식이 남아 있는 건 종묘제례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1년에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겁니다.

종묘는 그 흔한 ‘현판’ 하나 없이, 화려하고 요란한 치장 없이, 소탈하고 담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금은 종묘 뒤편으로 휘돌아가는 호젓한 길이 막혀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종묘와 창덕궁을 갈라놓은 율곡로를 가까운 미래에 지하화하게 된다면 종묘와 창덕궁을 하나로 이어주었던 옛길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되겠지요. 산책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갈참나무 우거진 종묘 숲길을 가만가만 걸으며 가을이 내주는 정취에 흠뻑 취하고 볼 일입니다.

종묘 정전 열주 회랑종묘 정전 열주 회랑

▲ 종묘 정전 열주 회랑


※ 더 읽으면 좋은 책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책과함께, 2011)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 덕수궁·경희궁·종묘·칠궁>(수류산방, 2007)
박상진 <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
승효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컬처그라피, 2012)
유승훈 <문화유산 일번지>(글항아리, 2015)
  • 부패한 서울을 정화시키는 ‘이 곳’
    • 입력 2015-11-07 07:16:10
    • 수정2015-11-11 17:10:07
    컬처 스토리
조선왕조 5백 년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 숨 쉬는 서울에서, 아니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인 유서 깊은 땅 서울에서 최고의 문화유산 답사 장소를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곳만 고르라면, 여러분은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외국인 관광객에게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곳을 추천해줘야 할까요?

얼른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들이 몇 군데 있으실 겁니다.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궁궐 중의 궁궐’ 경복궁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창덕궁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오히려 외국 사람이 더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말 휴일만 되면 정말 미어터질 정도로 외국인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죠.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니까요.

서울에서만 30년을 살아온 저 역시 달리 뾰족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답니다. 한데 답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답사 장소로 꼽히는 곳은 정작 따로 있더군요. 서울의 그 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딱 한 곳만을 골라야 한다면, 열 일 젖혀두고 반드시 꼭 한 번은 찾아가 봐야 할 그곳. 우리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깊은 울림과 깨달음을 선사하는 선대의 위대한 유산. 외국인들이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정서를 온몸으로 느끼고 기꺼이 감동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 그 첫 손으로 꼽히는 곳은 다름 아닌 ‘종묘(宗廟)’입니다.

종묘의 신로종묘의 신로

▲ 종묘의 신로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입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종묘 앞 광장을 빙 돌아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길 가운데 넓적한 돌을 죽 이어 붙인 세 줄기 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중에서 양옆보다 조금 더 높은 가운뎃길을 신로(神路)라 부릅니다. 신(神)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예로부터 사람이 밟지 못하게 했다는군요. 지금도 그 전통을 존중해 밟지 말아 달라는 안내판이 곳곳에 서 있습니다.

혹시 조선 왕릉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 왕릉에 가도 똑같은 세 가닥 길이 나 있습니다. 역시 가운뎃길은 신로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지요. 신로의 오른쪽, 그러니까 동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 왼쪽(서쪽)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世子路)입니다. 한 번은 왕릉 취재를 갔다가 능지기분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넓적한 바위에 성큼 발을 올려놓았더니 얼른 내려오라는 겁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고요. 종묘나 왕릉에선 지금도 옛 절차와 법도를 지켜 제사를 지냅니다.

신로는 죽은 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길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밟지 말아 달라는 안내문을 읽은 뒤엔 그게 종묘 답사의 예의고 전통인가 보다, 하며 존중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신로는 종묘의 중심부로 길게 죽 이어집니다. 입구에서 신로를 따라가지 않고, 오른쪽 길로 꺾어 들어가면 망묘루(望廟樓),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 종묘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향대청(香大廳) 건물이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향대청 전시관 안에는 종묘제례 때 사용되는 제기들을 모은 제사상 모형과 종묘 정전의 신주를 모신 태실(太室) 한 칸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서 누구나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제사상과 태실 모형제사상과 태실 모형

▲ 제사상과 태실 모형


텔레비전에서 대하사극을 보다 보면 임금님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신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런 대사를 토해냅니다. “소신, 종묘사직을 위해 충심을 다하겠나이다!” “종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옵니다!” 종사(宗社)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하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은 이처럼 조선시대에 ‘국가’나 진배없었습니다. 그만큼 지엄하고 신성한 의미를 지녔던 거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궐보다 먼저 종묘와 사직을 지었을 정도니까요.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에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구절이 있답니다. 수도를 건설할 때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는 규정인데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종묘가, 서쪽에 사직단이 세워진 겁니다.

오늘날 종묘의 면적은 18만 6,786평방미터에 이릅니다. 숫자로는 잘 와 닿지 않습니다만, 쉽게 말하면 그래도 조선시대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궁궐들이 일제강점기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데 비해 종묘는 비교적 원형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종묘와 사직>의 저자들은 이를 두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종묘는 일본인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 임진왜란 때 종묘를 불 질러 잿더미를 만들었던 건 바로 일본인들이었습니다. 만약 종묘가 그 후손들에 의해 또 한 번 불태워졌다면 어땠을까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묘 지도종묘 지도

▲ 종묘 지도


향대청에서 조금만 더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임금과 세자가 목욕재계하는 공간인 재궁(齋宮)을 지나 종묘의 심장부라 할 정전(正殿)의 입구에 이르게 됩니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 서, 남쪽으로 세 곳이 나 있는데, 남쪽 문이 바로 신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입니다.

신문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국보 227호 종묘 정전의 장엄한 기세가 시선을 압도합니다. 카메라를 아무리 들이대도 절대 한 화면에 담을 수 없는 그 엄청난 규모에 실로 입이 떡 벌어집니다. ‘파노라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졌나 봅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정전은 정면 19칸, 측면 3칸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건축물입니다. 당연히 단일 목조건축물로 국내 최대 면적을 자랑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정전은 언제 지어진 걸까요?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에 처음 세워졌을 당시 종묘 정전은 태실 7칸짜리 건물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공간이 부족해지자 1546년 명종 때 1차로 4칸을 늘려 11칸을 만듭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불을 질러 몽땅 타버리고 말았지요. 주저앉은 종묘를 11칸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건 1608년 광해군 때입니다. 이후 영조 때인 1726년에 다시 4칸을 늘려 15칸, 1836년 헌종 때 다시 4칸을 증축해 19칸이 됐습니다. 지금 우리가 종묘가 가면 만날 수 있는 정전은 바로 헌종 때인 1836년에 세워진 겁니다.

종묘 정전종묘 정전

▲ 종묘 정전


솔직히 저도 잘 몰랐습니다. 종묘 정전이 그토록 대단한 건물이라는 것을요. 전문가들이 입이 마르도록 상찬해 마지않는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의 핵심은 바로 돌로 평평하게 쌓아 만든 광활한 ‘월대’입니다. 가로 109미터, 세로 69미터나 되는 이 어마어마한 돌 마당의 아름다움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한 분은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 선생입니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선생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종묘 정전의 본질은 결코 건물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고.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물질(非物質)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돌판들은 마치 땅에 새긴 지문처럼 보인다. (…) 바로 영혼의 공간이며 우리 자신을 영원히 질문하게 하는 본질적 공간이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에 우리가 가졌던 질문의 답이 보입니다. 앞으론 누가 다가와서 서울 최고의 문화유산 답사 장소를 선뜻 물어도 자신 있게 ‘종묘’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승효상 선생에 따르면 종묘에는 이런 깊은 뜻도 담겨 있습니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이 서울 안에, 그래도 부패한 서울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장소가 있으니 여기가 종묘이다.”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외국 건축가가 대체 누군가 궁금했는데 시라이 세이이치라는 일본의 건축가였더군요. 스페인의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 역시 종묘를 ‘아름다운 여인’에 비유하면서 “처음 봤을 때 숨이 탁 막혔다.”고 했습니다.

비단 이뿐일까요.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이 서울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직성이 풀린다는 바로 그곳이 바로 종묘입니다. 그래서 종묘는 외국인들이 오히려 더 열광하는 관광 명소가 됐습니다. 가까이 두고도 그 가치를 제대로 몰랐던 건 정작 우리 자신이었죠.

종묘 정전 앞 월대종묘 정전 앞 월대

▲ 종묘 정전 앞 월대


종묘 정전 앞 월대종묘 정전 앞 월대

▲ 종묘 정전 앞 월대


종묘 월대를 돌아 정전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열주 회랑입니다. 숭고함과 엄숙함이 깃든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소실점 방향이 가리키는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여기까지를 제대로 봤다면 종묘 정전이 주는 벅찬 감동에 겨워 이곳에 오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1995년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종묘 답사뿐 아니라 해마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종묘대제(宗廟大祭)도 꼭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종묘는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베트남에도 남아 있지만, 종묘에서 거행하는 의식이 남아 있는 건 종묘제례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1년에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겁니다.

종묘는 그 흔한 ‘현판’ 하나 없이, 화려하고 요란한 치장 없이, 소탈하고 담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지금은 종묘 뒤편으로 휘돌아가는 호젓한 길이 막혀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종묘와 창덕궁을 갈라놓은 율곡로를 가까운 미래에 지하화하게 된다면 종묘와 창덕궁을 하나로 이어주었던 옛길을 다시 밟을 수 있게 되겠지요. 산책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갈참나무 우거진 종묘 숲길을 가만가만 걸으며 가을이 내주는 정취에 흠뻑 취하고 볼 일입니다.

종묘 정전 열주 회랑종묘 정전 열주 회랑

▲ 종묘 정전 열주 회랑


※ 더 읽으면 좋은 책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책과함께, 2011)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3 - 덕수궁·경희궁·종묘·칠궁>(수류산방, 2007)
박상진 <궁궐의 우리나무>(눌와, 2001)
승효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컬처그라피, 2012)
유승훈 <문화유산 일번지>(글항아리, 2015)
kbs가 손수 골랐습니다. 네이버에서도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