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탄생 100년…현대사 뒤흔든 4대 도전

입력 2015.11.25 (11:15) 수정 2015.11.2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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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현대자동차 설립, 최초 국산차 포니 개발, 경부고속도로 건설, 민간인 최초 방북, 깜짝 대선출마…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삶을 들여다 보면 '한국 현대경제사' 곳곳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일들에 '해보기나 했냐'며 잇달아 도전했다. 소판 돈 70원을 들고 집을 나선 그는 그렇게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궜다. 25일 정주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현대사를 떠들썩하게 한 그의 4대 도전을 되짚어 봤다.

◆소떼 몰고 북으로

방북 소 운반 차량방북 소 운반 차량


☞ [그때 그 뉴스] 17년 전 ‘소떼’가 지나간 그 자리

1998년 6월 16일 황소 500마리를 실은 흰색 트럭 50대가 줄줄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갔다. 정주영과 함께였다. 프랑스 문예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로 표현했다.

정주영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1915년 태어났다. 그에게 방북이란 도전이자 귀향이기도 했다. 그는 "17세 때 소판 돈을 들고 상경했는데, 이제야 그 빚을 갚으러 찾아간다"고 말했다.

정주영의 방북은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이후 남북 교류는 급물살을 탔고, 같은 해 11월 첫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우리 힘으로 자동차 개발

포니와 정주영 회장포니와 정주영 회장


☞ [화제포착] 국산차 1호 포니, 문화재로 등록

정주영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면서 미국 포드를 합작 파트너로 삼았다. 현대는 국산 부품을 늘리길 원했지만, 시장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포드는 거절했다. 포드는 현대차의 수출지역 등 경영에 잇달아 몽니를 부렸고, 정주영은 포드와 결별하고 독자개발을 선택했다.

1975년 12월 나온 국내 첫 고유모델 '포니(pony)'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포니는 이듬해 에콰도르에 첫 수출됐고, 이후 캐나다, 미국 시장에 들어섰다.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라고 했다.

현재 현대차는 연간 판매량 800만대의 세계 5위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건설왕국 건설

경부고속도로 준공식경부고속도로 준공식


☞ [뉴스광장] 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 성장 이끈 대동맥 (2010.07.07)

현대건설·현대중공업을 통해 정주영은 건설사를 여러번 새로 썼다. 특히 19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만인 1970년 5월 완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정주영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비는 429억원으로 당시 국가 예산의 23.6%에 달했다. 현대건설을 필두로 16개 건설사가 참여했는데,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회사는 현대건설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시공사 대표를 맡았고, 전체 건설구간 429km 중 5분의 3을 맡았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정주영은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인부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경부고속도로는 건설 비용이 해외 고속도로 대비 10분의 1 수준으로 세계 고속도로 역사상 가장 저렴했고, 최단시일 완공이란 기록까지 남겼다.

이밖에도 정주영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항만공사,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 소양강 다목적댐 등 국내외 굵직한 공사들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 대선출마…유일한 실패 거론



☞ [뉴스9] 정주영 성공과 좌절의 일대기 (2001.03.22)

정주영에게 통일국민당 창당과 대선 출마는 '유일한 실패'로 거론된다. 그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와 경쟁을 벌였다.

대선 후보 정주영은 기발한 공약들을 발표해 시선을 끌었는데, 예를 들면 반값 아파트,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 입학정원 폐지,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국민학교·중학교 전면 무상급식 등이었다.

선거 결과 정주영은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이후 그는 1993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주영과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2001년 정주영이 타계한 뒤 빈소를 찾아 조문하며 '사후 화해'하기도 했다.

정주영이 만든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 등 범(汎)현대가 지난해 올린 매출 합계는 235조원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달한다. 그는 빈손으로 출발했지만, 위기를 도전으로 극복하며 현대경제사의 거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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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25 11:15:25
    • 수정2015-11-25 11:20:37
    사회
현대건설·현대자동차 설립, 최초 국산차 포니 개발, 경부고속도로 건설, 민간인 최초 방북, 깜짝 대선출마…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삶을 들여다 보면 '한국 현대경제사' 곳곳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일들에 '해보기나 했냐'며 잇달아 도전했다. 소판 돈 70원을 들고 집을 나선 그는 그렇게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궜다. 25일 정주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현대사를 떠들썩하게 한 그의 4대 도전을 되짚어 봤다.

◆소떼 몰고 북으로

방북 소 운반 차량


☞ [그때 그 뉴스] 17년 전 ‘소떼’가 지나간 그 자리

1998년 6월 16일 황소 500마리를 실은 흰색 트럭 50대가 줄줄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갔다. 정주영과 함께였다. 프랑스 문예비평가 기 소르망은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로 표현했다.

정주영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1915년 태어났다. 그에게 방북이란 도전이자 귀향이기도 했다. 그는 "17세 때 소판 돈을 들고 상경했는데, 이제야 그 빚을 갚으러 찾아간다"고 말했다.

정주영의 방북은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이후 남북 교류는 급물살을 탔고, 같은 해 11월 첫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우리 힘으로 자동차 개발

포니와 정주영 회장


☞ [화제포착] 국산차 1호 포니, 문화재로 등록

정주영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면서 미국 포드를 합작 파트너로 삼았다. 현대는 국산 부품을 늘리길 원했지만, 시장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포드는 거절했다. 포드는 현대차의 수출지역 등 경영에 잇달아 몽니를 부렸고, 정주영은 포드와 결별하고 독자개발을 선택했다.

1975년 12월 나온 국내 첫 고유모델 '포니(pony)'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포니는 이듬해 에콰도르에 첫 수출됐고, 이후 캐나다, 미국 시장에 들어섰다. 정주영은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國旗)"라고 했다.

현재 현대차는 연간 판매량 800만대의 세계 5위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했다.

◆건설왕국 건설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 [뉴스광장] 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 성장 이끈 대동맥 (2010.07.07)

현대건설·현대중공업을 통해 정주영은 건설사를 여러번 새로 썼다. 특히 1968년 2월 착공해 2년5개월만인 1970년 5월 완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정주영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비는 429억원으로 당시 국가 예산의 23.6%에 달했다. 현대건설을 필두로 16개 건설사가 참여했는데, 고속도로 건설 경험이 있는 회사는 현대건설뿐이었다.

현대건설은 시공사 대표를 맡았고, 전체 건설구간 429km 중 5분의 3을 맡았다. 완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정주영은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인부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경부고속도로는 건설 비용이 해외 고속도로 대비 10분의 1 수준으로 세계 고속도로 역사상 가장 저렴했고, 최단시일 완공이란 기록까지 남겼다.

이밖에도 정주영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항만공사,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 소양강 다목적댐 등 국내외 굵직한 공사들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 대선출마…유일한 실패 거론



☞ [뉴스9] 정주영 성공과 좌절의 일대기 (2001.03.22)

정주영에게 통일국민당 창당과 대선 출마는 '유일한 실패'로 거론된다. 그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와 경쟁을 벌였다.

대선 후보 정주영은 기발한 공약들을 발표해 시선을 끌었는데, 예를 들면 반값 아파트, 국가보안법 폐지, 대학 입학정원 폐지,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국민학교·중학교 전면 무상급식 등이었다.

선거 결과 정주영은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이후 그는 1993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주영과 내내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2001년 정주영이 타계한 뒤 빈소를 찾아 조문하며 '사후 화해'하기도 했다.

정주영이 만든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 등 범(汎)현대가 지난해 올린 매출 합계는 235조원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4%에 달한다. 그는 빈손으로 출발했지만, 위기를 도전으로 극복하며 현대경제사의 거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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