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호랑이는 어떻게 사라졌나?

입력 2015.12.14 (14:37) 수정 2015.12.1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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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호랑이를 다룬 영화 대호(大虎)의 개봉을 앞두고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 시절 성행했다는 호랑이 사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1925년, 조선 최고의 전리품인 호랑이 가죽에 매혹된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가 지리산의 산군(山君)인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잡기 위해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을 영입하면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실제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호랑이가 간간히 출몰했고, 사냥도 행해졌다 전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호환(虎患)이 자주 발생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 호랑이 출몰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들면서 야생 동물들과 부딪혔고, 이 때문에 호환이 나라의 큰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10년에는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전국에서 호환으로 죽은 사람이 140명에 달했다.

호식총호식총

▲ 호식총 사진이다. 예전에 호랑이나 표범의 공격을 받아 죽으면 창귀가 된다 하여 피해를 막기 위해 특이한 형태의 돌무덤인 호식총을 만들었다. 시신을 수습한 자리에 돌무덤을 쌓고 시루를 얹은 후 가락을 꽂고 근처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호랑이의 출몰로 피해가 심해지자 조선은 호랑이 사냥부대인 착호군(捉虎軍)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조선 성종 때는 착호군 규모가 440명에 달할 정도로 확대됐다. 그만큼 호랑이 출몰 때문에 주민들이 불안감이 높았다는 얘기다.

이들 착호군은 샤냥에 나설 때 주변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구렵군(몰이꾼)으로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원성도 샀다고 한다.

착호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호환은 끊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국가는 호랑이를 잡아 바치는 신분을 평민으로 올려주고, 평민은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 호랑이 사냥을 적극 장려했다.

산지 개간으로 터전을 잃은 호랑이는 인간들의 사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개체수는 급감하기 시작했다. 조선말에만 해도 서울의 야산에서도 나타났던 호랑이는 1900년대 들어서는 터전을 잃고 백두산 쪽으로 넘어가거나, 전라도 섬 지방 일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호랑이 사냥에 관련돼 사진과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1900년대 초 호랑이 사냥을 했던 서양인들에 의한 것이다.

이들의 기록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점이 호랑이 사냥 장소가 주로 전라남도 해안 일대라는 점이다. 조선의 호랑이하면 백두산이나 지리산을 연상시키는 통념과는 많이 다르다.

1900년대 초 중국과 한국 등에서 호랑이 사냥을 왔던 영국인 포드 바클레이는 ‘만주호랑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보면 그는 목포의 비녀산, 즉 현재의 양을산에서 호랑이를 잡았다.

호랑이 사냥호랑이 사냥

▲ 포드 바클레이가 목포의 비녀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고 찍은 모습


바클레이가 잡은 호랑이 사진을 보면 크기가 크지 않은 어린 개체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볼 때 목포 일대에 호랑이가 다량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더구나 목포의 양을산은 숲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작은 야산이다. 이런 야산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한반도 서남 해안에 적지 않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다른 서양인들도 전라남도 해안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인 의사 스미스(W. L Smith)도 석 달 동안 목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호랑이 세 마리를 잡았고, 영국 외교관인 린들리(F. Lindley) 역시 목포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

▲ 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 몰이꾼으로 추정되는 세 명이 화승총을 들고 있다. 섬인 진도에서 호랑이 사냥했다는 서양인들의 기록이 몇 군데 나온다. 1900년대초 바클레이의 목격담으로는 진도에서 4마리를 봤다고 하는데, 최대 10마리 안팎이 살았을 것을 추정된다.


이처럼 조선의 호랑이가 남쪽까지 내려온 것은 조선시대 농지 확장 정책으로 터전을 잃으면서 사람이 드물고, 노루 등 먹이가 풍부했던 진도 등 섬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클레이는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호랑이가 한반도의 남부보다 북부에 훨씬 더 많이 서식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다른 영국인 사냥꾼과 여행자들의 경험도 그렇고,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북쪽에서 호랑이를 발견하는 게 남쪽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

서양인들이 사냥 기록을 남겨 놓아 주로 호랑이 사냥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반도 호랑이 사냥의 주역은 조선인들이었다.

바클레이도 당시 조선인들의 호랑이 사냥이 매우 성행했다고 증언한다.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에는 (조선인의) 호랑이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

호랑이 사냥 성공호랑이 사냥 성공

▲ 일제 강점기 금강 개발로 거부가 됐던 최창학이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 뒤 찍은 사진이다. 최창학은 해방 이후 백범 김구선생에게 자신의 소유인 경교장을 빌려준 인물이다.


특히 조선인 중에는 화승총을 이용한 사냥외에도 독극물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 시대 때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호랑이 사냥이 많아져 일제가 이를 금지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과 외국인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호랑이 사냥에 나섰을까.

당시 기록과 사진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호랑이 모피는 비싸게 거래됐고, 특히 외국인들은 한반도 호랑이 가죽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영화 대호에서도 일본 고관 마에조노가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은 조선 최고의 전리품인 호랑이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다.

호랑이 가죽호랑이 가죽

▲ 전란 중이던 1951년 부산 국제시장에서 팔리던 호랑이 가죽 사진이다. 피난민이 소지하고 있던 호랑이 가죽이 매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호랑이 사냥이 이뤄지던 시절, 호랑이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을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바클레이의 목격담이다.

“내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식이 마을 노인에게 알려지자 호랑이 사체는 잡은 자리에서 완전히 팔려나갔다. 노인들이 도착하자 거의 곧바로 내장을 발라낸 뒤 한 컵 될까 하는 복부에 남은 신성한 체액을 나눠 먹을 권위를 가진 여섯 명이 누구냐를 놓고 지루한 언쟁이 시작됐다. 이것이 합의되자 내장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사진 자료를 보면 북한에서는 1970년대까지 호랑이 사냥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잡힌 호랑이북한에서 잡힌 호랑이

▲ 북한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이다.


사실 한반도에 호랑이 보다 더 흔했던 것은 표범(amur leopard)이다.

20세기 초까지 표범은 한반도에 흔했다. 1930년대 한반도를 여행한 서양인 라우텐사치(Lautensach)는 표범이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에 흔한 편이며, 겨울철에 표범 사냥이 행해진다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 통계에 의하면 1915~1916년, 1919~1924년, 1933~1942년의 표범 공식 포획수는 각각 136, 385, 103마리가 된다.

이처럼 흔하던 표범이 사라진 것은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남획 때문이었는데, 표범은 값비싼 가죽과 한약재로 쓰이면 사냥꾼의 표적이 됐다.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1925년 표범의 가죽 1장 가격은 50~150원으로 이는 쌀 10가마를 살 수 있는 큰 돈 이었다.

한말 정장을 한 관료들의 모습한말 정장을 한 관료들의 모습

▲ 구한말 정장을 한 관료들의 모습이다. 관료들의 발밑에 표범 가죽이 깔렸다.


해방 이후에도 표범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계속 포획됐다.

1959년 12월 무주에서 멧돼지 올무에 걸린 표범을 잡은 것을 비롯, 62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수컷 1마리, 63년 지리산에서 암컷 1마리가 생포되기도 했다.

사또의 행차 모습사또의 행차 모습

▲ 사또의 행차 모습이다. 표범 가죽을 깔고 있는데, 뒤에 기댄 가죽은 호랑 가죽으로도 보인다.


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

▲ 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의 모습이다.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호랑이와 표범. 간간히 맹수의 발자국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는 증언은 나오고 있지만 한반도에서 맹수가 남아 있다는 증거는 현재로선 없다.

기록상으로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의 발견된 호랑이다. 조선 범은 1996년 4월 자취를 감춘 이후 공식적 멸종이 발표됐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진 2015년 현재 한반도에서 최상위의 포식자는 무엇일까.

국립환경과학원의 추적 조사 결과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는 담비(Yellow-Throated Marten)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체 수컷의 무게가 3kg에 불과한 족제비과의 담비는 귀여운 외모와는 걸 맞지 않게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멧돼지와 노루, 고라니 같이 자기보다 몸 집이 큰 동물도 3~5마리가 파상 공격을 펼쳐 잡아 먹는 ‘의외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담비담비

▲ 담비


[사진 자료=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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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호랑이는 어떻게 사라졌나?
    • 입력 2015-12-14 14:37:49
    • 수정2015-12-14 15:57:47
    사회
조선의 호랑이를 다룬 영화 대호(大虎)의 개봉을 앞두고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 시절 성행했다는 호랑이 사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최민식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1925년, 조선 최고의 전리품인 호랑이 가죽에 매혹된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가 지리산의 산군(山君)인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잡기 위해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을 영입하면서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실제로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호랑이가 간간히 출몰했고, 사냥도 행해졌다 전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호환(虎患)이 자주 발생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 호랑이 출몰이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산을 개간해 밭을 만들면서 야생 동물들과 부딪혔고, 이 때문에 호환이 나라의 큰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10년에는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전국에서 호환으로 죽은 사람이 140명에 달했다.

호식총
▲ 호식총 사진이다. 예전에 호랑이나 표범의 공격을 받아 죽으면 창귀가 된다 하여 피해를 막기 위해 특이한 형태의 돌무덤인 호식총을 만들었다. 시신을 수습한 자리에 돌무덤을 쌓고 시루를 얹은 후 가락을 꽂고 근처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호랑이의 출몰로 피해가 심해지자 조선은 호랑이 사냥부대인 착호군(捉虎軍)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사냥에 나섰다. 조선 성종 때는 착호군 규모가 440명에 달할 정도로 확대됐다. 그만큼 호랑이 출몰 때문에 주민들이 불안감이 높았다는 얘기다.

이들 착호군은 샤냥에 나설 때 주변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구렵군(몰이꾼)으로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원성도 샀다고 한다.

착호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호환은 끊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국가는 호랑이를 잡아 바치는 신분을 평민으로 올려주고, 평민은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 호랑이 사냥을 적극 장려했다.

산지 개간으로 터전을 잃은 호랑이는 인간들의 사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개체수는 급감하기 시작했다. 조선말에만 해도 서울의 야산에서도 나타났던 호랑이는 1900년대 들어서는 터전을 잃고 백두산 쪽으로 넘어가거나, 전라도 섬 지방 일대로 들어왔다고 한다.

호랑이 사냥에 관련돼 사진과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1900년대 초 호랑이 사냥을 했던 서양인들에 의한 것이다.

이들의 기록을 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점이 호랑이 사냥 장소가 주로 전라남도 해안 일대라는 점이다. 조선의 호랑이하면 백두산이나 지리산을 연상시키는 통념과는 많이 다르다.

1900년대 초 중국과 한국 등에서 호랑이 사냥을 왔던 영국인 포드 바클레이는 ‘만주호랑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보면 그는 목포의 비녀산, 즉 현재의 양을산에서 호랑이를 잡았다.

호랑이 사냥
▲ 포드 바클레이가 목포의 비녀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고 찍은 모습


바클레이가 잡은 호랑이 사진을 보면 크기가 크지 않은 어린 개체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볼 때 목포 일대에 호랑이가 다량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더구나 목포의 양을산은 숲이 그다지 울창하지 않은 작은 야산이다. 이런 야산에 호랑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한반도 서남 해안에 적지 않은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 다른 서양인들도 전라남도 해안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했다고 전해진다.

미국인 의사 스미스(W. L Smith)도 석 달 동안 목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호랑이 세 마리를 잡았고, 영국 외교관인 린들리(F. Lindley) 역시 목포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
▲ 1900년대초 진도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 몰이꾼으로 추정되는 세 명이 화승총을 들고 있다. 섬인 진도에서 호랑이 사냥했다는 서양인들의 기록이 몇 군데 나온다. 1900년대초 바클레이의 목격담으로는 진도에서 4마리를 봤다고 하는데, 최대 10마리 안팎이 살았을 것을 추정된다.


이처럼 조선의 호랑이가 남쪽까지 내려온 것은 조선시대 농지 확장 정책으로 터전을 잃으면서 사람이 드물고, 노루 등 먹이가 풍부했던 진도 등 섬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클레이는 저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호랑이가 한반도의 남부보다 북부에 훨씬 더 많이 서식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다른 영국인 사냥꾼과 여행자들의 경험도 그렇고,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북쪽에서 호랑이를 발견하는 게 남쪽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

서양인들이 사냥 기록을 남겨 놓아 주로 호랑이 사냥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반도 호랑이 사냥의 주역은 조선인들이었다.

바클레이도 당시 조선인들의 호랑이 사냥이 매우 성행했다고 증언한다.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에는 (조선인의) 호랑이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

호랑이 사냥 성공
▲ 일제 강점기 금강 개발로 거부가 됐던 최창학이 호랑이 사냥에 성공한 뒤 찍은 사진이다. 최창학은 해방 이후 백범 김구선생에게 자신의 소유인 경교장을 빌려준 인물이다.


특히 조선인 중에는 화승총을 이용한 사냥외에도 독극물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 시대 때는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한 호랑이 사냥이 많아져 일제가 이를 금지했다.

그렇다면 조선인들과 외국인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호랑이 사냥에 나섰을까.

당시 기록과 사진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호랑이 모피는 비싸게 거래됐고, 특히 외국인들은 한반도 호랑이 가죽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영화 대호에서도 일본 고관 마에조노가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은 조선 최고의 전리품인 호랑이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다.

호랑이 가죽
▲ 전란 중이던 1951년 부산 국제시장에서 팔리던 호랑이 가죽 사진이다. 피난민이 소지하고 있던 호랑이 가죽이 매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호랑이 사냥이 이뤄지던 시절, 호랑이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을은 난리가 났다고 한다.

바클레이의 목격담이다.

“내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소식이 마을 노인에게 알려지자 호랑이 사체는 잡은 자리에서 완전히 팔려나갔다. 노인들이 도착하자 거의 곧바로 내장을 발라낸 뒤 한 컵 될까 하는 복부에 남은 신성한 체액을 나눠 먹을 권위를 가진 여섯 명이 누구냐를 놓고 지루한 언쟁이 시작됐다. 이것이 합의되자 내장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사진 자료를 보면 북한에서는 1970년대까지 호랑이 사냥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잡힌 호랑이
▲ 북한에서 잡힌 호랑이 사진이다.


사실 한반도에 호랑이 보다 더 흔했던 것은 표범(amur leopard)이다.

20세기 초까지 표범은 한반도에 흔했다. 1930년대 한반도를 여행한 서양인 라우텐사치(Lautensach)는 표범이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에 흔한 편이며, 겨울철에 표범 사냥이 행해진다고 적고 있다. 일제 강점기 통계에 의하면 1915~1916년, 1919~1924년, 1933~1942년의 표범 공식 포획수는 각각 136, 385, 103마리가 된다.

이처럼 흔하던 표범이 사라진 것은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남획 때문이었는데, 표범은 값비싼 가죽과 한약재로 쓰이면 사냥꾼의 표적이 됐다.

조선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1925년 표범의 가죽 1장 가격은 50~150원으로 이는 쌀 10가마를 살 수 있는 큰 돈 이었다.

한말 정장을 한 관료들의 모습
▲ 구한말 정장을 한 관료들의 모습이다. 관료들의 발밑에 표범 가죽이 깔렸다.


해방 이후에도 표범은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계속 포획됐다.

1959년 12월 무주에서 멧돼지 올무에 걸린 표범을 잡은 것을 비롯, 62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수컷 1마리, 63년 지리산에서 암컷 1마리가 생포되기도 했다.

사또의 행차 모습
▲ 사또의 행차 모습이다. 표범 가죽을 깔고 있는데, 뒤에 기댄 가죽은 호랑 가죽으로도 보인다.


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
▲ 표범 가죽이 깔린 사인교를 타고 있는 양반의 모습이다.


지금은 사라진 한국의 호랑이와 표범. 간간히 맹수의 발자국과 비슷한 것을 보았다는 증언은 나오고 있지만 한반도에서 맹수가 남아 있다는 증거는 현재로선 없다.

기록상으로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의 발견된 호랑이다. 조선 범은 1996년 4월 자취를 감춘 이후 공식적 멸종이 발표됐다.

그렇다면 호랑이와 표범이 사라진 2015년 현재 한반도에서 최상위의 포식자는 무엇일까.

국립환경과학원의 추적 조사 결과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는 담비(Yellow-Throated Marten)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체 수컷의 무게가 3kg에 불과한 족제비과의 담비는 귀여운 외모와는 걸 맞지 않게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멧돼지와 노루, 고라니 같이 자기보다 몸 집이 큰 동물도 3~5마리가 파상 공격을 펼쳐 잡아 먹는 ‘의외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담비
▲ 담비


[사진 자료=사단법인 한국범보전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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