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놀라게 한 ‘육군의 전설’ 쓸쓸히 잠들다

입력 2016.02.04 (11:54) 수정 2016.02.0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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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박정인


1973년 북한의 기습사격으로 우리 군이 다치자, 대응 포 사격에 나서 북한군 80여명을 사상시킨 '육군의 전설' 박정인 장군(예비역 육군 준장)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육군사관학교 6기인 박 장군은 3사단장이던 1973년 3월 7일 운명을 바꾸는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분계선(MDL) 푯말 정비작업을 하고 귀대하던 우리 군인에 대해 북한이 기습 사격을 가했다. 황모 대위와 김모 하사 등 2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들을 구출하려던 우리 군을 향해 북한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강력한 응징을 지시한다.

155mm 곡사포와 105mm 곡사포를 동원해 표적인 인민군 559 GP를 강타하고, 우리에게 불법 사격을 가했던 적 보병 배치 선에 포탄을 작렬시켰다. 황 대위와 김 하사를 안전지대로 구출하기 위해 연막탄을 발사하고 철수 작전을 전개했다.

이 때의 응징으로 북한군은 80여명 가량이 다치거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훗 날 귀순한 북한군은 당시 포탄이 명중해 3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박 장군의 응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박 장군은 사단 내 모든 트럭을 동원해 라이트를 켠 채 DMZ 남한 한계선까지 진출시켰고, 일부는 중앙 분계선 남단까지 진출시켰다.

북한에는 비상이 걸렸다. 우리 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김일성은 전군 비상 및 동원령을 냈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박정인박정인


우리 군의 강력한 대응에 북한군은 추가 도발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사건으로 박 장군은 군을 떠나야 했다.

그해 4월 군은 상부의 허락없이 임의로 대응 사격을 했다는 이유로 박 장군을 보직해임했고, 5개월 뒤 그는 전역했다. 그는 이임사에서 "북진 통일의 성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단장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박 장군은 이후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북한에 대한 원칙적인 대응을 강조했다.

그는 "북한은 강(强)에는 약(弱)으로, 약에는 강으로 대응하는 집단"이라며 북한군의 도발에는 강력한 응징을 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해왔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터졌을 때 언론 인터뷰를 통해 우리 군이 너무 나약하다고 비판했다.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으로 1946년 함흥반공학생 사건에 연루돼 김일성 정권에 수배당하자 월남했다. 전역후 군사편찬위원장을 지냈다.

그의 외아들인 홍건(63) 씨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육사를 나와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박 장군의 손자 선욱(31) 씨도 육사 출신 현역 대위다. 박 대위의 쌍둥이 남동생도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5일 오전 8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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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 놀라게 한 ‘육군의 전설’ 쓸쓸히 잠들다
    • 입력 2016-02-04 11:54:18
    • 수정2016-02-04 11:57:32
    사회
박정인


1973년 북한의 기습사격으로 우리 군이 다치자, 대응 포 사격에 나서 북한군 80여명을 사상시킨 '육군의 전설' 박정인 장군(예비역 육군 준장)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육군사관학교 6기인 박 장군은 3사단장이던 1973년 3월 7일 운명을 바꾸는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분계선(MDL) 푯말 정비작업을 하고 귀대하던 우리 군인에 대해 북한이 기습 사격을 가했다. 황모 대위와 김모 하사 등 2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들을 구출하려던 우리 군을 향해 북한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강력한 응징을 지시한다.

155mm 곡사포와 105mm 곡사포를 동원해 표적인 인민군 559 GP를 강타하고, 우리에게 불법 사격을 가했던 적 보병 배치 선에 포탄을 작렬시켰다. 황 대위와 김 하사를 안전지대로 구출하기 위해 연막탄을 발사하고 철수 작전을 전개했다.

이 때의 응징으로 북한군은 80여명 가량이 다치거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훗 날 귀순한 북한군은 당시 포탄이 명중해 3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박 장군의 응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박 장군은 사단 내 모든 트럭을 동원해 라이트를 켠 채 DMZ 남한 한계선까지 진출시켰고, 일부는 중앙 분계선 남단까지 진출시켰다.

북한에는 비상이 걸렸다. 우리 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김일성은 전군 비상 및 동원령을 냈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박정인


우리 군의 강력한 대응에 북한군은 추가 도발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 사건으로 박 장군은 군을 떠나야 했다.

그해 4월 군은 상부의 허락없이 임의로 대응 사격을 했다는 이유로 박 장군을 보직해임했고, 5개월 뒤 그는 전역했다. 그는 이임사에서 "북진 통일의 성업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단장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박 장군은 이후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 북한에 대한 원칙적인 대응을 강조했다.

그는 "북한은 강(强)에는 약(弱)으로, 약에는 강으로 대응하는 집단"이라며 북한군의 도발에는 강력한 응징을 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해왔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이 터졌을 때 언론 인터뷰를 통해 우리 군이 너무 나약하다고 비판했다.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으로 1946년 함흥반공학생 사건에 연루돼 김일성 정권에 수배당하자 월남했다. 전역후 군사편찬위원장을 지냈다.

그의 외아들인 홍건(63) 씨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육사를 나와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박 장군의 손자 선욱(31) 씨도 육사 출신 현역 대위다. 박 대위의 쌍둥이 남동생도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5일 오전 8시 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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