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만의 귀환…‘장진호 전사자’ 임 일병

입력 2016.04.21 (14:14) 수정 2016.04.2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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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에서 숨진 국군 병사의 유해가 66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주인공은 1950년 12월 숨진 고(故) 임병근 일병. 1930년 5월 태어난 임 일병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21살의 나이로 미 7사단에 카투사로 입대했고 그해 12월 6일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장진호 전투 중 미군 해병 제 1사단이 중공군의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 국가보훈처 블로그)장진호 전투 중 미군 해병 제 1사단이 중공군의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 국가보훈처 블로그)


적지인 북한 흥남에서 전사한 탓에 찾을 길이 없어 보였던 임 일병의 유해 발굴이 가능해진 것은 미군이 1996~2005년 벌였던 북한 지역 미군 유해발굴 작업 덕분이다.

북미 합의에 따라 이뤄진 이 작업을 통해 미국 '합동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사령부(JPAC)'는 전사자 유해들을 찾아냈고, 하와이에 있는 본부에서 정밀 감식작업을 거친 결과 유해 중 12구가 아시아계인 것을 확인했다.

한미 양국은 이들의 유해가 모두 국군 전사자라고 결론 내리고 2012년 5월 이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12구 가운데 2구가 고(故) 김용수 일병과 고(故) 이갑수 일병의 시신임을 확인하고 유족을 찾았지만, 나머지 10구에 대해서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유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한 결과 임 일병을 기억하는 조카 임현식(71) 씨를 찾아냈다. 그리고 유족들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대조한 결과, 임 일병의 유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귀국한 지 4년 만인 올 2월의 일이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고(故) 임병근 일병을 기리는 위로패와 태극기가 21일 부산에 거주 중인 임 일병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제공)6.25전쟁에서 전사한 고(故) 임병근 일병을 기리는 위로패와 태극기가 21일 부산에 거주 중인 임 일병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제공)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오늘(21일) 故 임병근 일병의 신원 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해 수습 당시 관을 덮은 태극기 등을 부산에 사는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입대한 임 일병이 장진호에서 사망해, 유해가 하와이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66년, 2만km가 넘는 거리를 돌아온 셈이다.

조카 임현식 씨는 4남 1녀 중 넷째인 임 일병이 다른 형제들 대신 자원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생전에 삼촌의 유해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가슴에 맺힌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임 씨는 또 "삼촌의 전사일을 몰라 9월 9일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제는 삼촌이 돌아가신 12월 6일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임 일병의 유해는 유가족 요청에 따라 오는 6월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인 이학기 대령이 고(故) 임병근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를 임 일병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제공)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인 이학기 대령이 고(故) 임병근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를 임 일병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제공)


임 일병과 함께 하와이에서 돌아온 나머지 유해 9구는 아직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유해발굴감식단 유해 보관소에 안치돼 있다.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비무장지대(DMZ) 북쪽에는 아직도 4만여 구의 호국 용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북한과 협의만 이뤄진다면 언제든지 호국 용사들의 유해를 발굴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한미 군 당국은 오는 28일에는 미 JPAC가 추가로 국군 전자사로 확인한 유해 15구를 국내 봉환하는 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 자리에서는 우리 군이 작년 11월 강원도 양구 백석산 일대에서 찾아낸 미군 유해 2구도 미국 측에 전달된다.

장진호 전투 (長津湖戰鬪 ·1950.11.27~12.11)

1950년 겨울,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 점령을 위해 동부전선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미국 1해병사단이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대규모 중공군에 포위되자 탈출을 위해 치른 전투. 6.25 전쟁에서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로 꼽힌다.

당시 미군은 중공군의 한반도 진출 여부나 대규모 군 투입 가능성을 낮게 봤지만, 미 1해병사단이 마주친 중공군의 규모는 12~13만 명에 달했다. 병력이 10분의 1에 불과했던 미 해병대는 영하 30도에 이르는 고산지대의 추위로 무기와 식량 조달에까지 어려움을 겪으며 동사자가 속출하는 난관에 빠졌다.

흥남철수작전.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의 남하 작전이 지연되기도 했다. (사진: 국가보훈처 홈페이지)흥남철수작전.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의 남하 작전이 지연되기도 했다. (사진: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하지만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의 남하 작전이 지연되기도 했다. 미 해병대와 함께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이 군함 190여 척을 이용해 남쪽으로 피난하는 흥남철수가 성공하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연관 기사] ☞ 65년 전 자유 향한 여정 '흥남 철수'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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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21 14:14:45
    • 수정2016-04-21 22: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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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장진호 전투'에서 숨진 국군 병사의 유해가 66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주인공은 1950년 12월 숨진 고(故) 임병근 일병. 1930년 5월 태어난 임 일병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21살의 나이로 미 7사단에 카투사로 입대했고 그해 12월 6일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장진호 전투 중 미군 해병 제 1사단이 중공군의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 국가보훈처 블로그) 적지인 북한 흥남에서 전사한 탓에 찾을 길이 없어 보였던 임 일병의 유해 발굴이 가능해진 것은 미군이 1996~2005년 벌였던 북한 지역 미군 유해발굴 작업 덕분이다. 북미 합의에 따라 이뤄진 이 작업을 통해 미국 '합동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사령부(JPAC)'는 전사자 유해들을 찾아냈고, 하와이에 있는 본부에서 정밀 감식작업을 거친 결과 유해 중 12구가 아시아계인 것을 확인했다. 한미 양국은 이들의 유해가 모두 국군 전사자라고 결론 내리고 2012년 5월 이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봉환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12구 가운데 2구가 고(故) 김용수 일병과 고(故) 이갑수 일병의 시신임을 확인하고 유족을 찾았지만, 나머지 10구에 대해서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유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한 결과 임 일병을 기억하는 조카 임현식(71) 씨를 찾아냈다. 그리고 유족들의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 대조한 결과, 임 일병의 유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귀국한 지 4년 만인 올 2월의 일이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고(故) 임병근 일병을 기리는 위로패와 태극기가 21일 부산에 거주 중인 임 일병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제공)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오늘(21일) 故 임병근 일병의 신원 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해 수습 당시 관을 덮은 태극기 등을 부산에 사는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했다.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입대한 임 일병이 장진호에서 사망해, 유해가 하와이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66년, 2만km가 넘는 거리를 돌아온 셈이다. 조카 임현식 씨는 4남 1녀 중 넷째인 임 일병이 다른 형제들 대신 자원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생전에 삼촌의 유해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가슴에 맺힌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임 씨는 또 "삼촌의 전사일을 몰라 9월 9일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제는 삼촌이 돌아가신 12월 6일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임 일병의 유해는 유가족 요청에 따라 오는 6월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인 이학기 대령이 고(故) 임병근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를 임 일병 조카 임현식 씨에게 전달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제공) 임 일병과 함께 하와이에서 돌아온 나머지 유해 9구는 아직도 가족을 찾지 못하고 유해발굴감식단 유해 보관소에 안치돼 있다. 이학기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은 "비무장지대(DMZ) 북쪽에는 아직도 4만여 구의 호국 용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북한과 협의만 이뤄진다면 언제든지 호국 용사들의 유해를 발굴할 준비가 돼 있다"라고 말했다. 한미 군 당국은 오는 28일에는 미 JPAC가 추가로 국군 전자사로 확인한 유해 15구를 국내 봉환하는 행사를 열 계획이다. 이 자리에서는 우리 군이 작년 11월 강원도 양구 백석산 일대에서 찾아낸 미군 유해 2구도 미국 측에 전달된다. 장진호 전투 (長津湖戰鬪 ·1950.11.27~12.11) 1950년 겨울,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 점령을 위해 동부전선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미국 1해병사단이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대규모 중공군에 포위되자 탈출을 위해 치른 전투. 6.25 전쟁에서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로 꼽힌다. 당시 미군은 중공군의 한반도 진출 여부나 대규모 군 투입 가능성을 낮게 봤지만, 미 1해병사단이 마주친 중공군의 규모는 12~13만 명에 달했다. 병력이 10분의 1에 불과했던 미 해병대는 영하 30도에 이르는 고산지대의 추위로 무기와 식량 조달에까지 어려움을 겪으며 동사자가 속출하는 난관에 빠졌다. 흥남철수작전.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의 남하 작전이 지연되기도 했다. (사진: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하지만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중공군의 남하 작전이 지연되기도 했다. 미 해병대와 함께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이 군함 190여 척을 이용해 남쪽으로 피난하는 흥남철수가 성공하는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연관 기사] ☞ 65년 전 자유 향한 여정 '흥남 철수' (201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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