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황소’와 ‘길 떠나는 가족’의 사연

입력 2016.04.23 (09:02) 수정 2016.04.23 (09:04)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중섭의 '황소' 그림과 부암동 서울미술관

서울미술관 전경서울미술관 전경


이중섭의 1953년 작 ‘황소’는 힘차게 발을 내딛는 황소의 몸짓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중섭의 소 그림 가운데 가히 대표작이라 부를 만합니다(아래 사진). 이 작품이 2010년에 서울옥션 경매에 나와 큰 화제가 됐습니다. 긴 세월에도 최상급으로 평가될 만큼 보존 상태도 좋아서 경매 최고가를 경신할 거란 기대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해와 올해 김환기의 작품이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연달아 경신했지요. 하지만 국내 경매로만 한정해서 보면 당시까지 최고가는 2007년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세운 45억 2천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미술 시장의 유례없는 호황 속에 탄생한 이 기록은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을 정도로 일대 사건이었지요. 그 뒤로 3년이 지난 2010년에 이중섭의 ‘황소’가 경매에 나왔으니 제법 기대를 모았던 겁니다. 침체에 빠진 미술 시장이 부진의 늪을 탈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최종 낙찰가는 예상을 크게 밑도는 35억 6천만 원이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적은 금액이 결코 아닙니다만) 미술계가 최대 호황을 맞은 2007, 8년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거죠. 깊은 불황이 다시 확인됐습니다.

이중섭 ‘황소’ 1953, 종이에 유채, 35.5x52cm, 개인 소장이중섭 ‘황소’ 1953, 종이에 유채, 35.5x52cm, 개인 소장


[연관기사] ☞ 이중섭 ‘황소’ 최고가 기록 못 넘겨

그렇다면 이중섭의 ‘황소’를 과연 누가 가져갔을까, 모두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사석에서 ‘황소’의 소장자를 만났습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의 설립자 안병광 회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최근 서울미술관에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렸죠. KBS 9시 뉴스를 통해 소개해드린 바 있는데요, 이 전시의 대표작이 바로 이중섭의 ‘황소’였습니다.

[연관기사] ☞ ‘탄생 100주년’ 인간 이중섭의 발자취

안병광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중섭의 ‘황소’를 손에 넣게 된 흥미진진한 사연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약회사 말단 영업사원 시절인 1983년의 어느 날, 시내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액자가게 앞에 서 있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황소 한 마리가 있더랍니다. 처음엔 뭐 저렇게 생겼나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묘한 끌림이 있었다는군요. 그래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선뜻 그림을 샀습니다. 이중섭의 ‘황소’였어요. 물론 진짜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지만요.

미술이라고는 까맣게 모르던 젊은 샐러리맨의 첫 미술품 소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 뒤로 진짜 황소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인사동 골목을 돌며 작품의 소재를 수소문해보기도 했답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살던 시절엔 이중섭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었던 시인 구상 선생과 윗집 아랫집에 살면서 가까이 지냈다고 해요. 이 만남이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에 눈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소를 향한 열망은 점점 더 강해졌지요. 그러다 2010년, 그토록 연모하던 이중섭의 <황소>가 드디어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30년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기회가 온 거죠.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20.7×50cm, 종이에 유채, 1954년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20.7×50cm, 종이에 유채, 1954년


이중섭의 ‘황소’ 그림에는 극적인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2010년에 한 방송사가 ‘황소’의 소장자를 직접 만납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사정은 이랬습니다.

소장자 박태현 씨는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의 전시회에서 그림 석 점을 쌀 10가마를 주고 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중섭 화백이 나중에 찾아와선 가족을 그린 작품은 애들 주려고 그린 거라고, 다른 그림으로 바꿔줄 테니 돌려달라고 사정을 하더랍니다. 이중섭 화백이 그토록 돌려받고 싶었던 그림이 바로 ‘길 떠나는 가족’입니다(위 사진).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의 작품인데요. 그때 이중섭 화백이 대신 내놓은 작품이 바로 ‘황소’였다는 겁니다. 그 뒤로 긴 세월이 지나 소장자 박 씨가 ‘황소’를 경매에 내놓았고, 그토록 원했던 안병광 회장에게 드디어 기회가 옵니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죠. 안 회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다른 이중섭의 작품을 그림값 일부로 내놓습니다. 바로 그 작품이 ‘길 떠나는 가족’이었던 겁니다.

두 작품이 수십 년 간격으로 두고 두 번이나 주인을 서로 맞바꾼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지요. 안 회장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림을 마침내 손에 넣었고, 이중섭의 ‘황소’는 부암동 서울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 됐습니다.

석파정은 조선 후기의 세도가였던 김흥근의 별장이었습니다. 이 집이 마음에 든 흥선대원군이 꾀를 내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그 뒤로 폐허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안병광 회장이 서울미술관 대지와 함께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보수한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석파정은 조선 후기의 세도가였던 김흥근의 별장이었습니다. 이 집이 마음에 든 흥선대원군이 꾀를 내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그 뒤로 폐허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안병광 회장이 서울미술관 대지와 함께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보수한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04.사진)석파정

2012년에 문을 연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흥선대원군의 자취가 서려 있는 석파정과 함께 부암동 최고의 명소입니다. 흔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사립 미술관(박물관)으로 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호림박물관이 꼽는데요.

아직 거기까진 미치지 못해도 근현대 미술품으로 범위를 한껏 좁혀 본다면 서울미술관 역시 꽤 자랑할 만한 소장품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관 초기부터 주요 소장품을 상설 전시해오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요.

미술관은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 아닌 까닭에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역시 특정 개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술관을 운영하는 재단이 소장품을 소유하기 때문에 작품 하나하나가 공공의 재산이자,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미술관 설립을 돈깨나 있는 사람들의 호사 취미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미술관은 돈을 벌기도 어렵습니다. 관람객들이 내는 입장료 수입이 충분하거나, 뜻있는 분들의 기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운영 자체가 쉽지 않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주는 미술관(박물관)의 존재는 참으로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자달항아리, 국보 제309호, 조선 시대, 높이 44cm 몸통지름 4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백자달항아리, 국보 제309호, 조선 시대, 높이 44cm 몸통지름 4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미술관의 생명은 소장품입니다. 자체 소장품의 양과 질에 따라 그 미술관의 품격과 명성이 달라집니다. 최근 어느 기업 미술관 전시를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전시 담당자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저희 소장품이 없어서 전부 빌리러 다니느라 너무 힘들더라고요.”

짱짱한 유물이 몇 점 있으면 든든할 텐데, 그게 안 되니까 다른 미술관(박물관), 기업, 개인 소장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빌려달라고 부탁을 해야 합니다. 특히 개인 소장자들을 설득하는 게 까다로워서 몇 번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작품을 빌려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립 미술관(박물관) 가운데 자체 소장품으로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소장품을 매번 바꿔가면서 상설 전시를 하는 곳은 더더욱 드뭅니다.

앞서 소개한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호림박물관은 국보급 유물의 보물창고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들입니다. 그래서 소장품만 가지고도 상설전은 물론 다양한 기획전까지 수시로 열 수 있는 겁니다.

위 사진 속 유물은 국보 제309호로 지정된 백자 달항아리입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자랑하는 국보급 소장품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는 명품 중의 명품이지요. 이런 힘 있는 유물이 있으면 관람객은 알아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0×45.5cm, 간송미술관 소장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0×45.5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의 대표 유물 가운데 하나인 신윤복의 ‘미인도’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립 미술관(박물관)에는 어떤 유물들이 소장돼 있을까요? 또, 그런 귀중한 문화재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모았을까요? 취재차 미술관과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드는 저 역시도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요. 얼마 전에 <박물관 보는 법>이란 손바닥 크기의 작은 책에서 그런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초보자용 박물관 입문서입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이모저모를 쉽고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이 한 권만 읽어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바라보는 안목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한 간송 전형필 선생 같은 존경할 만한 분들의 삶과 업적에 자연히 관심을 두게 되지요. 미술관과 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는 빛나는 유물들은 결단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닙니다.

국가가 제 기능을 못 하던 시절, 문화나 예술 따위에 관심을 쏟을 여력조차 없는 정부를 대신해서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고 사 모은 건 바로 능력 있는 개인들과 깨어 있는 지성들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립 미술관(박물관)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까. 아래에 소개해드리는 책에서 그 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충렬 <간송 전형필>(김영사, 2010)
문화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선각자 간송 전형필 선생의 평전입니다. 1938년 8월 29일 간송 선생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박물관 보화각은 오늘날 간송미술관으로 그 굳건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 후기 회화로는 드물게 국보 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등 우리 문화재의 보물창고로 불러도 손색이 없지요.

엄혹하기 짝이 없었던 일제강점기라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온몸으로 지켜낸 간송 선생의 무용담 같은 이야기들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우리 문화 예술 분야를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을 꼽는 자리에서 간송 선생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위인입니다. 책을 읽고 나면 선생의 그 고결한 정신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백자청화매죽문호, 조선 15세기, 전체 높이 29.2cm, 입지름 10.8cm, 밑지름 14.0cm, 국보 222호, 호림박물관 소장 백자청화매죽문호, 조선 15세기, 전체 높이 29.2cm, 입지름 10.8cm, 밑지름 14.0cm, 국보 222호, 호림박물관 소장



호림박물관 엮음 <호림, 문화재의 숲을 거닐다>(눌와, 2012)
다른 미술관, 박물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호림박물관은 별격의 소장품 컬렉션을 보유한 숨은 진주 같은 곳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평생 모은 유물과 개인재산을 털어 박물관을 설립한 호림 윤장섭 선생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하시는 분으로도 널리 알려졌지요. 언론의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 대인으로서의 면모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호림박물관에는 조선 청화백자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백자청화매죽문호(위 사진)를 포함해 국보 8건과 보물 46건 등 문화재 1만 5천여 점이 소장돼 있습니다. 서울 관악구와 강남에 전시장 두 곳을 운영하며 대단히 수준 높은 소장품 전과 기획전을 해마다 열고 있습니다.

호림박물관의 30년 역사를 정리한 이 책 역시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윤장섭 회장을 대신해서 박물관 관계자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십시일반 글과 정성을 보태서 만든 겁니다. 호림 소장품 가운데 저는 삼국시대 금동탄생불(아래 사진)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금동탄생불, 삼국 6세기, 높이 22.0cm, 보물 808호, 호림박물관 소장금동탄생불, 삼국 6세기, 높이 22.0cm, 보물 808호, 호림박물관 소장



안병광 <마침내 미술관>(북스코프, 2012)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 회장은 책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미술이 아니었다면 저는 문화와 예술이 인간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모른 채, 밥벌이만 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미술은 저에게 인생에는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일상이 실은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지를, 내 주위 사람과 그들의 삶이 알고 보면 더없이 여리고 외롭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비로소 저는 미술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을 취재하는 제게 이보다 더 미술의 가치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문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표 소장품인 이중섭의 ‘황소’를 필두로 서울미술관의 주요 소장품들을 소개하면서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 이력과 사연을 책의 갈피에 집어넣었습니다.



이종선 <리 컬렉션>(김영사, 2016)
지금도 짙은 베일에 싸여 있는 호암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아버지 이병철 회장과 아들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수집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습니다. 저자는 20여 년 동안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을 두 삼성 회장의 곁에서 주도한 삼성 미술관 내부의 핵심 인물입니다.

삼성미술관은 공히 국내 사립 미술관 최대,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겸재 정선의 저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백제 금동대탑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벅찰 만큼 손에 꼽는 명품이 즐비합니다. 용인 호암미술관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에 국보 37건과 보물 115건 등 국보급 문화재 152건이 소장돼 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낼 수 있는 인물이 당사자들을 포함해 극소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책 자체는 상당한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공개의 수위를 조절한 흔적이 역력한 데다 저자의 이유 있는 자부심이 때론 지나친 자만심으로 읽히는 것 같아 적잖은 거부감도 생깁니다. 그런 점을 십분 고려하고 읽는다면 여러모로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이중섭의 ‘황소’와 ‘길 떠나는 가족’의 사연
    • 입력 2016-04-23 09:02:42
    • 수정2016-04-23 09:04:04
    컬처 스토리
이중섭의 '황소' 그림과 부암동 서울미술관 서울미술관 전경 이중섭의 1953년 작 ‘황소’는 힘차게 발을 내딛는 황소의 몸짓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중섭의 소 그림 가운데 가히 대표작이라 부를 만합니다(아래 사진). 이 작품이 2010년에 서울옥션 경매에 나와 큰 화제가 됐습니다. 긴 세월에도 최상급으로 평가될 만큼 보존 상태도 좋아서 경매 최고가를 경신할 거란 기대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해와 올해 김환기의 작품이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연달아 경신했지요. 하지만 국내 경매로만 한정해서 보면 당시까지 최고가는 2007년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가 세운 45억 2천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미술 시장의 유례없는 호황 속에 탄생한 이 기록은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을 정도로 일대 사건이었지요. 그 뒤로 3년이 지난 2010년에 이중섭의 ‘황소’가 경매에 나왔으니 제법 기대를 모았던 겁니다. 침체에 빠진 미술 시장이 부진의 늪을 탈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최종 낙찰가는 예상을 크게 밑도는 35억 6천만 원이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적은 금액이 결코 아닙니다만) 미술계가 최대 호황을 맞은 2007, 8년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거죠. 깊은 불황이 다시 확인됐습니다. 이중섭 ‘황소’ 1953, 종이에 유채, 35.5x52cm, 개인 소장 [연관기사] ☞ 이중섭 ‘황소’ 최고가 기록 못 넘겨 그렇다면 이중섭의 ‘황소’를 과연 누가 가져갔을까, 모두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사석에서 ‘황소’의 소장자를 만났습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서울미술관의 설립자 안병광 회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최근 서울미술관에서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렸죠. KBS 9시 뉴스를 통해 소개해드린 바 있는데요, 이 전시의 대표작이 바로 이중섭의 ‘황소’였습니다. [연관기사] ☞ ‘탄생 100주년’ 인간 이중섭의 발자취 안병광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중섭의 ‘황소’를 손에 넣게 된 흥미진진한 사연을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약회사 말단 영업사원 시절인 1983년의 어느 날, 시내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액자가게 앞에 서 있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황소 한 마리가 있더랍니다. 처음엔 뭐 저렇게 생겼나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묘한 끌림이 있었다는군요. 그래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선뜻 그림을 샀습니다. 이중섭의 ‘황소’였어요. 물론 진짜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지만요. 미술이라고는 까맣게 모르던 젊은 샐러리맨의 첫 미술품 소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 뒤로 진짜 황소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인사동 골목을 돌며 작품의 소재를 수소문해보기도 했답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살던 시절엔 이중섭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었던 시인 구상 선생과 윗집 아랫집에 살면서 가까이 지냈다고 해요. 이 만남이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에 눈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황소를 향한 열망은 점점 더 강해졌지요. 그러다 2010년, 그토록 연모하던 이중섭의 <황소>가 드디어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30년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기회가 온 거죠.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20.7×50cm, 종이에 유채, 1954년 이중섭의 ‘황소’ 그림에는 극적인 사연이 얽혀 있습니다. 2010년에 한 방송사가 ‘황소’의 소장자를 직접 만납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사정은 이랬습니다. 소장자 박태현 씨는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의 전시회에서 그림 석 점을 쌀 10가마를 주고 사들입니다. 그런데 이중섭 화백이 나중에 찾아와선 가족을 그린 작품은 애들 주려고 그린 거라고, 다른 그림으로 바꿔줄 테니 돌려달라고 사정을 하더랍니다. 이중섭 화백이 그토록 돌려받고 싶었던 그림이 바로 ‘길 떠나는 가족’입니다(위 사진).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이중섭의 작품인데요. 그때 이중섭 화백이 대신 내놓은 작품이 바로 ‘황소’였다는 겁니다. 그 뒤로 긴 세월이 지나 소장자 박 씨가 ‘황소’를 경매에 내놓았고, 그토록 원했던 안병광 회장에게 드디어 기회가 옵니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죠. 안 회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다른 이중섭의 작품을 그림값 일부로 내놓습니다. 바로 그 작품이 ‘길 떠나는 가족’이었던 겁니다. 두 작품이 수십 년 간격으로 두고 두 번이나 주인을 서로 맞바꾼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지요. 안 회장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그림을 마침내 손에 넣었고, 이중섭의 ‘황소’는 부암동 서울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 됐습니다. 석파정은 조선 후기의 세도가였던 김흥근의 별장이었습니다. 이 집이 마음에 든 흥선대원군이 꾀를 내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 그 뒤로 폐허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안병광 회장이 서울미술관 대지와 함께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보수한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췄습니다.(04.사진)석파정 2012년에 문을 연 부암동 서울미술관은 흥선대원군의 자취가 서려 있는 석파정과 함께 부암동 최고의 명소입니다. 흔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사립 미술관(박물관)으로 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호림박물관이 꼽는데요. 아직 거기까진 미치지 못해도 근현대 미술품으로 범위를 한껏 좁혀 본다면 서울미술관 역시 꽤 자랑할 만한 소장품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관 초기부터 주요 소장품을 상설 전시해오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지요. 미술관은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 아닌 까닭에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역시 특정 개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미술관을 운영하는 재단이 소장품을 소유하기 때문에 작품 하나하나가 공공의 재산이자, 우리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미술관 설립을 돈깨나 있는 사람들의 호사 취미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게다가 미술관은 돈을 벌기도 어렵습니다. 관람객들이 내는 입장료 수입이 충분하거나, 뜻있는 분들의 기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운영 자체가 쉽지 않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주는 미술관(박물관)의 존재는 참으로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자달항아리, 국보 제309호, 조선 시대, 높이 44cm 몸통지름 42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미술관의 생명은 소장품입니다. 자체 소장품의 양과 질에 따라 그 미술관의 품격과 명성이 달라집니다. 최근 어느 기업 미술관 전시를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전시 담당자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저희 소장품이 없어서 전부 빌리러 다니느라 너무 힘들더라고요.” 짱짱한 유물이 몇 점 있으면 든든할 텐데, 그게 안 되니까 다른 미술관(박물관), 기업, 개인 소장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빌려달라고 부탁을 해야 합니다. 특히 개인 소장자들을 설득하는 게 까다로워서 몇 번을 찾아가 사정사정해서 작품을 빌려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립 미술관(박물관) 가운데 자체 소장품으로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소장품을 매번 바꿔가면서 상설 전시를 하는 곳은 더더욱 드뭅니다. 앞서 소개한 삼성미술관 리움과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호림박물관은 국보급 유물의 보물창고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들입니다. 그래서 소장품만 가지고도 상설전은 물론 다양한 기획전까지 수시로 열 수 있는 겁니다. 위 사진 속 유물은 국보 제309호로 지정된 백자 달항아리입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자랑하는 국보급 소장품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히는 명품 중의 명품이지요. 이런 힘 있는 유물이 있으면 관람객은 알아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0×45.5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의 대표 유물 가운데 하나인 신윤복의 ‘미인도’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립 미술관(박물관)에는 어떤 유물들이 소장돼 있을까요? 또, 그런 귀중한 문화재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모았을까요? 취재차 미술관과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드는 저 역시도 그런 세세한 내용까지는 사실 잘 몰랐는데요. 얼마 전에 <박물관 보는 법>이란 손바닥 크기의 작은 책에서 그런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초보자용 박물관 입문서입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이모저모를 쉽고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이 한 권만 읽어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바라보는 안목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한 간송 전형필 선생 같은 존경할 만한 분들의 삶과 업적에 자연히 관심을 두게 되지요. 미술관과 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는 빛나는 유물들은 결단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닙니다. 국가가 제 기능을 못 하던 시절, 문화나 예술 따위에 관심을 쏟을 여력조차 없는 정부를 대신해서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고 사 모은 건 바로 능력 있는 개인들과 깨어 있는 지성들이었습니다. 최고의 사립 미술관(박물관)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까. 아래에 소개해드리는 책에서 그 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충렬 <간송 전형필>(김영사, 2010) 문화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선각자 간송 전형필 선생의 평전입니다. 1938년 8월 29일 간송 선생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박물관 보화각은 오늘날 간송미술관으로 그 굳건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 후기 회화로는 드물게 국보 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등 우리 문화재의 보물창고로 불러도 손색이 없지요. 엄혹하기 짝이 없었던 일제강점기라는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온몸으로 지켜낸 간송 선생의 무용담 같은 이야기들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우리 문화 예술 분야를 대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을 꼽는 자리에서 간송 선생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위인입니다. 책을 읽고 나면 선생의 그 고결한 정신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백자청화매죽문호, 조선 15세기, 전체 높이 29.2cm, 입지름 10.8cm, 밑지름 14.0cm, 국보 222호, 호림박물관 소장 호림박물관 엮음 <호림, 문화재의 숲을 거닐다>(눌와, 2012) 다른 미술관, 박물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호림박물관은 별격의 소장품 컬렉션을 보유한 숨은 진주 같은 곳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평생 모은 유물과 개인재산을 털어 박물관을 설립한 호림 윤장섭 선생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하시는 분으로도 널리 알려졌지요. 언론의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 대인으로서의 면모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호림박물관에는 조선 청화백자 가운데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백자청화매죽문호(위 사진)를 포함해 국보 8건과 보물 46건 등 문화재 1만 5천여 점이 소장돼 있습니다. 서울 관악구와 강남에 전시장 두 곳을 운영하며 대단히 수준 높은 소장품 전과 기획전을 해마다 열고 있습니다. 호림박물관의 30년 역사를 정리한 이 책 역시 본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윤장섭 회장을 대신해서 박물관 관계자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십시일반 글과 정성을 보태서 만든 겁니다. 호림 소장품 가운데 저는 삼국시대 금동탄생불(아래 사진)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금동탄생불, 삼국 6세기, 높이 22.0cm, 보물 808호, 호림박물관 소장 안병광 <마침내 미술관>(북스코프, 2012) 서울미술관 설립자 안병광 회장은 책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미술이 아니었다면 저는 문화와 예술이 인간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모른 채, 밥벌이만 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미술은 저에게 인생에는 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일상이 실은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감추고 있는지를, 내 주위 사람과 그들의 삶이 알고 보면 더없이 여리고 외롭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비로소 저는 미술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미술을 취재하는 제게 이보다 더 미술의 가치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문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표 소장품인 이중섭의 ‘황소’를 필두로 서울미술관의 주요 소장품들을 소개하면서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된 이력과 사연을 책의 갈피에 집어넣었습니다. 이종선 <리 컬렉션>(김영사, 2016) 지금도 짙은 베일에 싸여 있는 호암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아버지 이병철 회장과 아들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수집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습니다. 저자는 20여 년 동안 삼성가의 미술품 수집을 두 삼성 회장의 곁에서 주도한 삼성 미술관 내부의 핵심 인물입니다. 삼성미술관은 공히 국내 사립 미술관 최대,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겸재 정선의 저 유명한 ‘인왕제색도’와 백제 금동대탑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벅찰 만큼 손에 꼽는 명품이 즐비합니다. 용인 호암미술관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에 국보 37건과 보물 115건 등 국보급 문화재 152건이 소장돼 있을 정도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낼 수 있는 인물이 당사자들을 포함해 극소수라는 점을 생각하면 책 자체는 상당한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공개의 수위를 조절한 흔적이 역력한 데다 저자의 이유 있는 자부심이 때론 지나친 자만심으로 읽히는 것 같아 적잖은 거부감도 생깁니다. 그런 점을 십분 고려하고 읽는다면 여러모로 흥미롭고 유익한 책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2024 파리 올림픽 배너 이미지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