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새벽벨이 울립니다”

입력 2016.05.13 (16:44) 수정 2016.05.1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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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박스'. 꼭 입양의 날이 아니더라도 뉴스에서 한 번쯤은 접하셨을 단어죠. 갓 태어난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가는 부모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긴 폐쇄회로 화면을 보면서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을까’생각해왔습니다. 뉴스를 만들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 다큐멘터리 '드롭박스'를 보게 된 뒤로는 이 상자를 통해 '살 수 있게 된' 아기의 아름다운 눈망울들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일단 생명은 살려야 한다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앞선 진리를 생각해보게 하는 다큐입니다.



지난 2009년, 이종락 목사는 가로 70㎝, 높이 60㎝, 깊이 45㎝짜리 '베이비박스'를 직접 설계하고 만듭니다. 이 상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지금은 이 목사의 아들이 된 '온유'를 발견하고 나서입니다. 지난 2008년,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새벽, 이 목사는 교회 앞 주차장에 버려져 있던 '온유'를 만납니다. 겉옷도 걸치지 않은 아기가 피부가 퍼렇게 돼서 추위에 떨고 있었고,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다면…'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체코의 한 시설에 ‘베이비박스’라는 게 설치됐단 뉴스를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설치를 하고 난 뒤에도 아이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러나 2009년 겨울 이후 오늘까지 6년간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는 946명. 이틀에 한 번꼴입니다. 대부분 미숙아나 장애아들. 98%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 가운데 갈 곳을 찾지 못한 9명의 중증 장애아들은 이 목사가 직접 입양해 키우고 있습니다. 이 예쁜 아이들 곁에 놓여있던 부모의 편지들도 그대로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저히 키울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아기가 장애가 있습니다. 계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제발 찾지 마세요.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찾지 말아 주십시오."



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건 친아들 은만(29) 씨 덕분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골반 뼈가 부러진 상태로 태어난 은만 씨. 의사는 포기하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은만 씨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은만이는 나의 스승이에요. 은만이를 통해서 귀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을 그때 알았어요 ”



이 같은 사연이 담긴 8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지난 2013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영화과 학생 12명이 만들었습니다.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미국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500만 관객이 봤습니다. '제9회 샌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에서 가장 정의로운 영화상을 수상했고, '제3회 밴쿠버기독영화제' 등에도 공식 초청됐습니다.



지난 10일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개막식 참석차 한국을 찾은 미국의 '학생 감독'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5분짜리 졸업작품을 찍으러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고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찍다 보니 30분이 되고 40분이 되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촬영한 2년.



'실제의 상황'들로 채워진 140분짜리 다큐를 우연히 본 미국 유명 영화배급사에서 78분으로 줄여 극장 상영을 하자고 했고 학생들은 이제 감독을 넘어 다큐의 주인공 아기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상금 전액과 이 영화의 상영 수익으로 베이비박스 아기들의 분유와 기저귀, 미혼모를 지원하는 후원단체 '킨드리드 이미지'를 세운 겁니다. 해외의 젊은 영화인들이 이 같은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 '베이비 박스’앞에서 이 목사를 만났습니다. 몇 달간 계속된 거절 끝에 미국의 학생들에 다큐를 찍을 수 있도록 허락했고, 이제는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합니다.



베이비박스에서 아기를 꺼내는 내부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보내오는 아이들 옷과 생필품들이 베이비박스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상자 속 아기들은 112지구대 조사 후 구청과 보호소 등을 거쳐 보육원으로 가고 입양됩니다. 매주 월요일, 목요일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후원인들의 보호 속에 아기들은 자라고 있습니다.



영아 유기를 방조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들 가운데에서도 목사님은 그저 '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베이비박스가 없으면 지금 아이들이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 아니죠. 태어난 생명들이 완전하게 보호받는 이 나라가 되면 당연히 철거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됩니다."



상자 옆에는 볼펜과 메모지가 있습니다. 편지 한 통 없이 아기를 두고 부리나케 달아나는 부모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부디 아기를 위해 생일과 특징 몇 가지라도 적어두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오늘도 새벽 벨이 울립니다. 열이 나진 않는지, 편지는 있는지 확인합니다.



이 다큐영화의 제목은 '드롭박스'입니다. 무언가를 '던져버리는', '넣어버리는' 상자라는 뜻이죠. '드롭박스'를 통해 다시 태어난 아기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 이 '생명 상자'의 무게가 느껴지실 겁니다. 이 목사의 바람대로 이 생명 상자가 '상징적으로만 남는' 그 어느 날이 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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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도 새벽벨이 울립니다”
    • 입력 2016-05-13 16:44:06
    • 수정2016-05-13 17:36:23
    취재K
'베이비박스'. 꼭 입양의 날이 아니더라도 뉴스에서 한 번쯤은 접하셨을 단어죠. 갓 태어난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두고 가는 부모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긴 폐쇄회로 화면을 보면서 '어떻게 부모가 그럴 수 있을까’생각해왔습니다. 뉴스를 만들면서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다 다큐멘터리 '드롭박스'를 보게 된 뒤로는 이 상자를 통해 '살 수 있게 된' 아기의 아름다운 눈망울들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일단 생명은 살려야 한다는,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앞선 진리를 생각해보게 하는 다큐입니다. 지난 2009년, 이종락 목사는 가로 70㎝, 높이 60㎝, 깊이 45㎝짜리 '베이비박스'를 직접 설계하고 만듭니다. 이 상자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지금은 이 목사의 아들이 된 '온유'를 발견하고 나서입니다. 지난 2008년,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새벽, 이 목사는 교회 앞 주차장에 버려져 있던 '온유'를 만납니다. 겉옷도 걸치지 않은 아기가 피부가 퍼렇게 돼서 추위에 떨고 있었고,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다면…'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체코의 한 시설에 ‘베이비박스’라는 게 설치됐단 뉴스를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설치를 하고 난 뒤에도 아이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러나 2009년 겨울 이후 오늘까지 6년간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는 946명. 이틀에 한 번꼴입니다. 대부분 미숙아나 장애아들. 98%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 가운데 갈 곳을 찾지 못한 9명의 중증 장애아들은 이 목사가 직접 입양해 키우고 있습니다. 이 예쁜 아이들 곁에 놓여있던 부모의 편지들도 그대로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저히 키울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아기가 장애가 있습니다. 계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제발 찾지 마세요.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찾지 말아 주십시오." 이 일을 할 수 있게 된 건 친아들 은만(29) 씨 덕분이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골반 뼈가 부러진 상태로 태어난 은만 씨. 의사는 포기하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은만 씨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은만이는 나의 스승이에요. 은만이를 통해서 귀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을 그때 알았어요 ” 이 같은 사연이 담긴 8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지난 2013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영화과 학생 12명이 만들었습니다. 반응은 엄청났습니다. 미국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500만 관객이 봤습니다. '제9회 샌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에서 가장 정의로운 영화상을 수상했고, '제3회 밴쿠버기독영화제' 등에도 공식 초청됐습니다. 지난 10일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개막식 참석차 한국을 찾은 미국의 '학생 감독'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5분짜리 졸업작품을 찍으러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고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찍다 보니 30분이 되고 40분이 되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촬영한 2년. '실제의 상황'들로 채워진 140분짜리 다큐를 우연히 본 미국 유명 영화배급사에서 78분으로 줄여 극장 상영을 하자고 했고 학생들은 이제 감독을 넘어 다큐의 주인공 아기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상금 전액과 이 영화의 상영 수익으로 베이비박스 아기들의 분유와 기저귀, 미혼모를 지원하는 후원단체 '킨드리드 이미지'를 세운 겁니다. 해외의 젊은 영화인들이 이 같은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는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 '베이비 박스’앞에서 이 목사를 만났습니다. 몇 달간 계속된 거절 끝에 미국의 학생들에 다큐를 찍을 수 있도록 허락했고, 이제는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라고 말합니다. 베이비박스에서 아기를 꺼내는 내부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보내오는 아이들 옷과 생필품들이 베이비박스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상자 속 아기들은 112지구대 조사 후 구청과 보호소 등을 거쳐 보육원으로 가고 입양됩니다. 매주 월요일, 목요일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후원인들의 보호 속에 아기들은 자라고 있습니다. 영아 유기를 방조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들 가운데에서도 목사님은 그저 '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베이비박스가 없으면 지금 아이들이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 아니죠. 태어난 생명들이 완전하게 보호받는 이 나라가 되면 당연히 철거를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됩니다." 상자 옆에는 볼펜과 메모지가 있습니다. 편지 한 통 없이 아기를 두고 부리나케 달아나는 부모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부디 아기를 위해 생일과 특징 몇 가지라도 적어두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오늘도 새벽 벨이 울립니다. 열이 나진 않는지, 편지는 있는지 확인합니다. 이 다큐영화의 제목은 '드롭박스'입니다. 무언가를 '던져버리는', '넣어버리는' 상자라는 뜻이죠. '드롭박스'를 통해 다시 태어난 아기들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 이 '생명 상자'의 무게가 느껴지실 겁니다. 이 목사의 바람대로 이 생명 상자가 '상징적으로만 남는' 그 어느 날이 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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