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부른 이름 ‘엄마’

입력 2016.06.09 (16:32) 수정 2016.06.09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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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 때부터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제가 어머니를 닮았는지 알고 싶어요."

올해 56살이 된 사라 사비다키스 씨. 한눈에 봐도 평범한 50대 한국인 여성과는 다른 외모. 쑥 들어간 눈과 날렵한 콧날은 서양인의 모습이지만 동그스름한 얼굴과 검은색 머리는 한국인, 사비다키스 씨는 혼혈인입니다.

그녀는 '엄마'를 찾으러 한국에 왔습니다. 사비다키스 씨는 "제 아버지는 미군이었고 제 어머니는 의정부의 부대 근처에 있는 클럽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0살까지 한국에서 살다 미국으로 입양된 사비다키스 씨에게 한국에서의 기억은 아픔이 먼저 떠오릅니다. "유년시절에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온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입양인들의 엄마를 찾아주는 일, 그리고 그 방법을 한국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입양인과 입양을 보낸 부모 사이 DNA 정보를 비교해 친부모를 찾는 길입니다.

DNA로 혼혈 입양인 친가족 찾는다

사비다키스 씨는 DNA 검사 비교를 통해 미군이었던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냈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를 통해 친척과 이복남매 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비다키스 씨는 "제 기록은 전부 위조돼 있었고 막다른 길에 봉착했죠. 남은 방법은 DNA밖에 없었어요. DNA로 아버지를 찾았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와서 DNA 검사를 받으세요. 누군가 자식이나 가족을 찾고 있다면 찾을 수 있어요! 가능합니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녀는 지난해 11월 같은 혼혈 입양인인 캐서린 킴 씨와 함께 뿌리 찾기를 돕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현재까지 미국에 있는 혼혈 입양인 1,000여 명의 DNA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지금은 해외 입양된 자녀보다는 입양 보낸 부모의 유전자 정보가 더 많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해외로 입양 보낸 한국인 부모의 유전자 정보를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미국에 있는 입양인과 한국의 친부모가 DNA를 비교해 서로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김도현 뿌리의 집 목사는 "가족들과 해외로 입양 간 입양인들이 재회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왜냐하면 이 유전자 검사는 1:1로 맞춰보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한 가족이 미국으로 입양 간 1,000여 명 이상의 입양인들하고 다 유전자 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며 DNA 비교의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한국계 혼혈인으로 미국에 입양된 기업가 토마스 클레멘트 박 씨가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사재 100만 달러를 들여 DNA 검사 비교 키트 1만개를 기증했습니다. 덕분에 사라 사비다키스 씨는 한국에 우선적으로 DNA 검사 비교 키트 300개를 들고 올 수 있었습니다.

'혼혈'이 '장애'였던 그 시절

혼혈 입양인들이 유전자 감식 비교를 해서라도 스스로 친부모를 찾아 나서고 있는데요, 그 이면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를 찾기 힘들다는 슬픈 사연이 숨어있습니다.

혼혈 입양인들의 친모는 대부분 기지촌 여성이었고 친부는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입니다. 그래서 출생신고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입양 기록은 다른 입양인들에 비해 더더욱 부실하거나 왜곡됐습니다.



권희정 인류학 박사는 "기지촌 여성이었다는 것 또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아이를 낳았다는 어려움이 중첩된 것 같다"고 혼혈 입양인들의 부모 찾기가 어려운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KBS 취재진이 입수한 혼혈 입양인에 대한 당시 정부 문서들을 한번 볼까요? 입양 아동들을 분류한 기록을 보면 혼혈인은 '장애'의 한 유형으로 분류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혈인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53년부터 65년까지는 혼혈인 집단 입양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955년에 정부가 나서 설립한 '아동 양호회'는 전국 혼혈아에 대한 양육과 보호 그리고 양자녀로 외국에 가는 혼혈아의 입적 수속을 취급했습니다.

권희정 박사는 "1954년 국무회의 자료 같은 걸 보면 해외 입양인은 원하는 외국 사람이 있으면 모두 보내라고 하는 자료가 나오고요. 바로 그 해 '한국 아동 양우회'라는게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혼혈 아동 입양인을 해외로 보내기 위한 어떤 절차를 담당하는 부서였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다 자란 혼혈 청소년들이 어쩔 수 없이 입양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이 라슨 씨는 입양 당시 무려 24살이었습니다. 한국 생활, 우리말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은 외국에서 더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혼혈 입양인들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이 안되는 상황. 이미 입양된 지 5~60년이 흐른 입양 1세대들이 한국에서 부모를 찾을 단서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 6살 때 입양을 간 혼혈 입양인 킴 크레이그 (한국 이름 민정희) 씨. 6살 무렵 고아원에 보내졌다가 미국으로 입양을 간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2번의 입양과 파양, 자신은 선택할 새도 없이 버림받고 또 어디론가 옮겨졌습니다.

그녀는 40여 년 평생, 자신을 버린 한국을 미워했지만 자신의 딸들이 뿌리를 알고 싶어 하면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킴 씨는 "한국과 한국인은 제 삶의 일부이고 부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를 만나면 말이 안 나올 것 같아요"라고 털어놨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온 한국. 하지만 킴 씨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옛 주소와 전화번호뿐이었습니다. 킴 씨는 "저한테 제공된 정보라고는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뿐이었어요. 어머니는 이름도 개명한 상태였어요"라며 아쉬워했습니다.

현재 킴 씨가 할 수 있는 건 미군 부대 일대를 찾아가 마지막 주소지를 들고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것뿐입니다. 그녀는 "화가 나요. 모든 정보를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요"라고 속상해합니다.

옛 주소라도 알고 있는 킴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입니다. 김도현 목사는 "혼혈 입양인들은 등록되지 않은 채로 살았던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 입양을 보내게 될 경우에 출생 등록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까 개인 정보를 다 특정하기 어렵다"고 실태를 전해줬습니다.

그래서 실제 입양인들이 부모 찾기에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입양인이 입양 정보를 공개해달라고 중앙입양원에 청구한 건 가운데 친부모의 소재지가 파악된 경우는 절반 정도. 이 가운데서도 친부모의 정보가 공개된 건 15%에 불과합니다. 결국 7명 중 1명 정도만 부모의 소재지를 파악해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셈입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소라미 변호사는 "친부모의 동의를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인데, 2~30년 전 기록만으로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관계 공공기관의 협조가 필수다. 하지만 관련 시행령에서 '요청할 수 있다' 정도로만 나와있고 입양기관은 민간기관이니까 협조가 잘 안 이뤄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부실한 기록에 의존해 더디게만 진행되는 친부모 찾기. 이제 혼혈 입양인에게는 사실상 DNA 검사가 마지막 희망입니다. DNA 검사를 통해 50년 만에 친어머니를 만난 신디 번스 씨의 사연이 지난 17일 미국 CBS 방송에 크게 보도되면서 DNA 검사 비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5,60년대 해외로 입양된 혼혈인은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2만여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의 나이는 대체로 5,60대, 부모 세대는 7,80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혼혈 입양인들이 눈물을 씻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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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6-06-09 17:42:48
    취재K
"50살 때부터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제가 어머니를 닮았는지 알고 싶어요."

올해 56살이 된 사라 사비다키스 씨. 한눈에 봐도 평범한 50대 한국인 여성과는 다른 외모. 쑥 들어간 눈과 날렵한 콧날은 서양인의 모습이지만 동그스름한 얼굴과 검은색 머리는 한국인, 사비다키스 씨는 혼혈인입니다.

그녀는 '엄마'를 찾으러 한국에 왔습니다. 사비다키스 씨는 "제 아버지는 미군이었고 제 어머니는 의정부의 부대 근처에 있는 클럽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업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0살까지 한국에서 살다 미국으로 입양된 사비다키스 씨에게 한국에서의 기억은 아픔이 먼저 떠오릅니다. "유년시절에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어요.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온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입양인들의 엄마를 찾아주는 일, 그리고 그 방법을 한국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입양인과 입양을 보낸 부모 사이 DNA 정보를 비교해 친부모를 찾는 길입니다.

DNA로 혼혈 입양인 친가족 찾는다

사비다키스 씨는 DNA 검사 비교를 통해 미군이었던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냈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를 통해 친척과 이복남매 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비다키스 씨는 "제 기록은 전부 위조돼 있었고 막다른 길에 봉착했죠. 남은 방법은 DNA밖에 없었어요. DNA로 아버지를 찾았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와서 DNA 검사를 받으세요. 누군가 자식이나 가족을 찾고 있다면 찾을 수 있어요! 가능합니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녀는 지난해 11월 같은 혼혈 입양인인 캐서린 킴 씨와 함께 뿌리 찾기를 돕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현재까지 미국에 있는 혼혈 입양인 1,000여 명의 DNA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지금은 해외 입양된 자녀보다는 입양 보낸 부모의 유전자 정보가 더 많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해외로 입양 보낸 한국인 부모의 유전자 정보를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미국에 있는 입양인과 한국의 친부모가 DNA를 비교해 서로를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김도현 뿌리의 집 목사는 "가족들과 해외로 입양 간 입양인들이 재회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왜냐하면 이 유전자 검사는 1:1로 맞춰보는 것이 아니고 한국의 한 가족이 미국으로 입양 간 1,000여 명 이상의 입양인들하고 다 유전자 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며 DNA 비교의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한국계 혼혈인으로 미국에 입양된 기업가 토마스 클레멘트 박 씨가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사재 100만 달러를 들여 DNA 검사 비교 키트 1만개를 기증했습니다. 덕분에 사라 사비다키스 씨는 한국에 우선적으로 DNA 검사 비교 키트 300개를 들고 올 수 있었습니다.

'혼혈'이 '장애'였던 그 시절

혼혈 입양인들이 유전자 감식 비교를 해서라도 스스로 친부모를 찾아 나서고 있는데요, 그 이면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모를 찾기 힘들다는 슬픈 사연이 숨어있습니다.

혼혈 입양인들의 친모는 대부분 기지촌 여성이었고 친부는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입니다. 그래서 출생신고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입양 기록은 다른 입양인들에 비해 더더욱 부실하거나 왜곡됐습니다.



권희정 인류학 박사는 "기지촌 여성이었다는 것 또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아이를 낳았다는 어려움이 중첩된 것 같다"고 혼혈 입양인들의 부모 찾기가 어려운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KBS 취재진이 입수한 혼혈 입양인에 대한 당시 정부 문서들을 한번 볼까요? 입양 아동들을 분류한 기록을 보면 혼혈인은 '장애'의 한 유형으로 분류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혼혈인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1953년부터 65년까지는 혼혈인 집단 입양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1955년에 정부가 나서 설립한 '아동 양호회'는 전국 혼혈아에 대한 양육과 보호 그리고 양자녀로 외국에 가는 혼혈아의 입적 수속을 취급했습니다.

권희정 박사는 "1954년 국무회의 자료 같은 걸 보면 해외 입양인은 원하는 외국 사람이 있으면 모두 보내라고 하는 자료가 나오고요. 바로 그 해 '한국 아동 양우회'라는게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혼혈 아동 입양인을 해외로 보내기 위한 어떤 절차를 담당하는 부서였어요"라고 설명했습니다.

 

다 자란 혼혈 청소년들이 어쩔 수 없이 입양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이 라슨 씨는 입양 당시 무려 24살이었습니다. 한국 생활, 우리말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은 외국에서 더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혼혈 입양인들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이 안되는 상황. 이미 입양된 지 5~60년이 흐른 입양 1세대들이 한국에서 부모를 찾을 단서를 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 6살 때 입양을 간 혼혈 입양인 킴 크레이그 (한국 이름 민정희) 씨. 6살 무렵 고아원에 보내졌다가 미국으로 입양을 간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2번의 입양과 파양, 자신은 선택할 새도 없이 버림받고 또 어디론가 옮겨졌습니다.

그녀는 40여 년 평생, 자신을 버린 한국을 미워했지만 자신의 딸들이 뿌리를 알고 싶어 하면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킴 씨는 "한국과 한국인은 제 삶의 일부이고 부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엄마를 만나면 말이 안 나올 것 같아요"라고 털어놨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온 한국. 하지만 킴 씨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옛 주소와 전화번호뿐이었습니다. 킴 씨는 "저한테 제공된 정보라고는 어머니로 추정되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와 주소뿐이었어요. 어머니는 이름도 개명한 상태였어요"라며 아쉬워했습니다.

현재 킴 씨가 할 수 있는 건 미군 부대 일대를 찾아가 마지막 주소지를 들고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하는 것뿐입니다. 그녀는 "화가 나요. 모든 정보를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요"라고 속상해합니다.

옛 주소라도 알고 있는 킴 씨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입니다. 김도현 목사는 "혼혈 입양인들은 등록되지 않은 채로 살았던 아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 경우에 입양을 보내게 될 경우에 출생 등록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까 개인 정보를 다 특정하기 어렵다"고 실태를 전해줬습니다.

그래서 실제 입양인들이 부모 찾기에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입양인이 입양 정보를 공개해달라고 중앙입양원에 청구한 건 가운데 친부모의 소재지가 파악된 경우는 절반 정도. 이 가운데서도 친부모의 정보가 공개된 건 15%에 불과합니다. 결국 7명 중 1명 정도만 부모의 소재지를 파악해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셈입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소라미 변호사는 "친부모의 동의를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인데, 2~30년 전 기록만으로 친부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관계 공공기관의 협조가 필수다. 하지만 관련 시행령에서 '요청할 수 있다' 정도로만 나와있고 입양기관은 민간기관이니까 협조가 잘 안 이뤄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부실한 기록에 의존해 더디게만 진행되는 친부모 찾기. 이제 혼혈 입양인에게는 사실상 DNA 검사가 마지막 희망입니다. DNA 검사를 통해 50년 만에 친어머니를 만난 신디 번스 씨의 사연이 지난 17일 미국 CBS 방송에 크게 보도되면서 DNA 검사 비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5,60년대 해외로 입양된 혼혈인은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2만여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의 나이는 대체로 5,60대, 부모 세대는 7,80대에 접어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혼혈 입양인들이 눈물을 씻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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