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했던 미술관들이 왜 ‘셀카’를 허용했을까?

입력 2016.06.17 (15:28) 수정 2016.06.2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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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를 빌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대유행으로 남녀노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인증'은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특히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셀카는 자신을 대중에게 표현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장기화되는 불황 속에 특히 관람객 수 저하로 근심에 빠진 문화계에서는 인증샷과 셀카를 용한 탈출구 찾기에 나섰다. 전통적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됐던 미술관에서 적극적으로 촬영을 장려하고 인스타그램 이벤트까지 진행하게 된 것이다.

‘장 폴 고티에’전의 관람객들이 셀카를 찍고 있다.‘장 폴 고티에’전의 관람객들이 셀카를 찍고 있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 중인 '장 폴 고티에' 전시회에 가면 여기저기서 찰칵하는 카메라 촬영음을 들을 수 있다.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꾸며놓은 멋진 무대 앞에서 관람객들은 너도 나도 휴대폰을 꺼내 촬영에 몰두한다.

패션계의 이단아로 유명한 작가가 한국에서 여는 첫 전시라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데, 전시의 중반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비결은 따로 있었다.

전시장 내부에서 자유롭게 사진 촬영을 허용한 데 이어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전시회에서 찍은 관람객들의 셀카는 곧장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등 SNS로 직행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들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가 저절로 입소문을 내줬다. 전시회의 멋진 조명과 특색 있는 전시물들은 멋진 사진을 만들어냈고 보는 이들에게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에는 ‘#장 폴 고티에전’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사진이 8천개 넘게 올라와있다.인스타그램에는 ‘#장 폴 고티에전’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사진이 8천개 넘게 올라와있다.


현재 진행 중인 '장 폴 고티에전'에 관련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수를 보면 8천개를 넘어섰다. 해시태그는 게시물에 다는 일종의 꼬리표로 핵심이 되는 단어나 문구 앞에 '해시'(#) 기호를 붙여 나타낸다. 해시태그를 통해 관련 게시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얼마전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화제가 된 전시회는 바로 한남동 디뮤지엄의 '아홉개의 빛, 아홉개의 감성'전이었다. 빛을 사용하는 '라이트 아트' 전시였는데, 사진 찍기 좋은 전시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해시태그가 붙은 사진만 10만 6천개가 넘었다. 전시물뿐만 아니라 셀카 등인증샷이 특히 눈에 많이 띄었다.

또 대림미술관은 선도적으로 칼 라거펠트,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 등에서 사진 촬영을 허용하면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수가 18만건에 이른다. 팔로워도 3만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울시립미술관이나 한가람미술관 등 다른 미술관(5000건 안팎)과 비교해 압도적이다.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SNS에 올라온 대림미술관 인증샷SNS에 올라온 대림미술관 인증샷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 따르면 "셀카를 찍는 것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가 기억할 만한 경험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심리"라고 분석했다. 인스타그램 등에 사진을 공유하면서 기억의 이미지화 작업도 이뤄진다. 페이스북에서는 몇 년 전에 올렸던 사진을 보여주며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주기적으로 해주는데, 과거의 앨범을 들춰보는 것 마냥 내가 이랬었구나 회상하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또 셀카의 공유는 나의 경험을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은 물론 경험의 '경쟁'에 나서게 만든다. 타인의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나도 한번 가볼까라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과거 감상에만 치중하던 미술관들이 적극적으로 사진 촬영을 통한 홍보에 나선 것도 이런 사회적 트렌드 때문이다.



이탈리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다비드상 촬영을 허용한 뒤 올라온 사진들이탈리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다비드상 촬영을 허용한 뒤 올라온 사진들


외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미 진행됐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2014년부터 엄격하게 금지해온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관람객의 플래시 세례가 집중된 곳은 단연 1층 중앙홀에 자리잡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으로 일반인은 물론 휴 잭맨 같은 유명인의 셀카도 SNS에 돌아다니고 있다.

미술관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됐던 이유는 작품의 보호와 저작권 문제, 타인의 관람을 방해한다는 이유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 불황으로 미술관에 대한 정부 지원이 줄자 차라리 입장객 수를 늘리고 여기서 얻은 예산으로 복원이나 보존에 대한 재원을 마련하자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도 지난해부터 작품을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사진 촬영을 허락하기로 했다. 단 셀카봉은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루브르 박물관, 미국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 10대 미술관 중 9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결국 대세는 '포토 프리'(photo free)이며 우리나라 미술관들도 이러한 추세를 점차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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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6-17 15:28:36
    • 수정2016-06-20 15:55:55
    취재K
'나는 인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의 명제를 빌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대유행으로 남녀노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인증'은 이제 일상이 돼버렸다. 특히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셀카는 자신을 대중에게 표현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장기화되는 불황 속에 특히 관람객 수 저하로 근심에 빠진 문화계에서는 인증샷과 셀카를 용한 탈출구 찾기에 나섰다. 전통적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됐던 미술관에서 적극적으로 촬영을 장려하고 인스타그램 이벤트까지 진행하게 된 것이다.

‘장 폴 고티에’전의 관람객들이 셀카를 찍고 있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 중인 '장 폴 고티에' 전시회에 가면 여기저기서 찰칵하는 카메라 촬영음을 들을 수 있다. 패션쇼의 런웨이처럼 꾸며놓은 멋진 무대 앞에서 관람객들은 너도 나도 휴대폰을 꺼내 촬영에 몰두한다.

패션계의 이단아로 유명한 작가가 한국에서 여는 첫 전시라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데, 전시의 중반이 지나도록 인기가 식지 않는 비결은 따로 있었다.

전시장 내부에서 자유롭게 사진 촬영을 허용한 데 이어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전시회에서 찍은 관람객들의 셀카는 곧장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등 SNS로 직행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친구들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가 저절로 입소문을 내줬다. 전시회의 멋진 조명과 특색 있는 전시물들은 멋진 사진을 만들어냈고 보는 이들에게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에는 ‘#장 폴 고티에전’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사진이 8천개 넘게 올라와있다.

현재 진행 중인 '장 폴 고티에전'에 관련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수를 보면 8천개를 넘어섰다. 해시태그는 게시물에 다는 일종의 꼬리표로 핵심이 되는 단어나 문구 앞에 '해시'(#) 기호를 붙여 나타낸다. 해시태그를 통해 관련 게시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얼마전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화제가 된 전시회는 바로 한남동 디뮤지엄의 '아홉개의 빛, 아홉개의 감성'전이었다. 빛을 사용하는 '라이트 아트' 전시였는데, 사진 찍기 좋은 전시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해시태그가 붙은 사진만 10만 6천개가 넘었다. 전시물뿐만 아니라 셀카 등인증샷이 특히 눈에 많이 띄었다.

또 대림미술관은 선도적으로 칼 라거펠트,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 등에서 사진 촬영을 허용하면서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수가 18만건에 이른다. 팔로워도 3만명 정도로 늘어났다. 서울시립미술관이나 한가람미술관 등 다른 미술관(5000건 안팎)과 비교해 압도적이다.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SNS에 올라온 대림미술관 인증샷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 따르면 "셀카를 찍는 것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기가 기억할 만한 경험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심리"라고 분석했다. 인스타그램 등에 사진을 공유하면서 기억의 이미지화 작업도 이뤄진다. 페이스북에서는 몇 년 전에 올렸던 사진을 보여주며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주기적으로 해주는데, 과거의 앨범을 들춰보는 것 마냥 내가 이랬었구나 회상하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또 셀카의 공유는 나의 경험을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은 물론 경험의 '경쟁'에 나서게 만든다. 타인의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나도 한번 가볼까라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과거 감상에만 치중하던 미술관들이 적극적으로 사진 촬영을 통한 홍보에 나선 것도 이런 사회적 트렌드 때문이다.



이탈리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다비드상 촬영을 허용한 뒤 올라온 사진들

외국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미 진행됐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2014년부터 엄격하게 금지해온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관람객의 플래시 세례가 집중된 곳은 단연 1층 중앙홀에 자리잡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으로 일반인은 물론 휴 잭맨 같은 유명인의 셀카도 SNS에 돌아다니고 있다.

미술관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됐던 이유는 작품의 보호와 저작권 문제, 타인의 관람을 방해한다는 이유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 불황으로 미술관에 대한 정부 지원이 줄자 차라리 입장객 수를 늘리고 여기서 얻은 예산으로 복원이나 보존에 대한 재원을 마련하자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도 지난해부터 작품을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사진 촬영을 허락하기로 했다. 단 셀카봉은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루브르 박물관, 미국 뉴욕의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등 세계 10대 미술관 중 9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결국 대세는 '포토 프리'(photo free)이며 우리나라 미술관들도 이러한 추세를 점차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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