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과 시련의 68년…사진으로 본 힐러리의 인생

입력 2016.07.27 (12:01) 수정 2016.07.2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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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역사상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1947년 10월 시카고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 만 68세인 힐러리 클린턴은 변호사, 주지사 영부인, 퍼스트레이디, 상원 의원 ,국무 장관 등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마침내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라는 새 역사를 썼다.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이정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삶은 영광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걸어온 70년 가까운 인생 궤적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근 미국 CNN 방송이 공개한 사진과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중심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인생을 한번 뒤돌아 봤다.

어린 시절 부모, 남동생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1947년 10월 26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덤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덤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다.어린 시절 부모, 남동생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1947년 10월 26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덤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덤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다.


웰즐리 대학 시절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 1965년 매사추세츠 주의 사립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다. 클린턴은 졸업생 대표로 졸업식 연설을 하면서 여성, 인권 문제등에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내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웰즐리 대학 시절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 1965년 매사추세츠 주의 사립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다. 클린턴은 졸업생 대표로 졸업식 연설을 하면서 여성, 인권 문제등에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내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75년 10월 빌 클린턴과 결혼한 힐러리 클린턴·대학 졸업 후  예일대 로스쿨로 진학한 힐러리는 1971년 같은 로스쿨 1년 후배였던 아칸소 주 출신 빌 클린턴을 만난다. 빌 클린턴과 함께 졸업하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춘 그녀는 졸업 후 변호사 활동과 사회 참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1975년 10월 빌 클린턴과 결혼한 힐러리 클린턴·대학 졸업 후 예일대 로스쿨로 진학한 힐러리는 1971년 같은 로스쿨 1년 후배였던 아칸소 주 출신 빌 클린턴을 만난다. 빌 클린턴과 함께 졸업하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춘 그녀는 졸업 후 변호사 활동과 사회 참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아칸소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힐러리 클린턴. 1977년 초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 검찰총장에 당선된 이후  힐러리는 아칸소 주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연루된 워터게이트 탄핵 조사단 활동으로 워싱턴 정가와 첫 인연을 맺었다. 아칸소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힐러리 클린턴. 1977년 초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 검찰총장에 당선된 이후 힐러리는 아칸소 주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연루된 워터게이트 탄핵 조사단 활동으로 워싱턴 정가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1년 아칸소 주지사 취임식에서 활짝 웃고 있는 클린턴 부부와 딸 첼시. 1978년  남편 빌 클린턴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힐러리는 주지사의 부인이자 변호사로 아칸소 주의 유력 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녀는 이때 여러 투자로 재산을 불리기도 했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당선 이후 문제가 된 화이트워터 개발회사의 부동산 사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1991년 아칸소 주지사 취임식에서 활짝 웃고 있는 클린턴 부부와 딸 첼시. 1978년 남편 빌 클린턴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힐러리는 주지사의 부인이자 변호사로 아칸소 주의 유력 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녀는 이때 여러 투자로 재산을 불리기도 했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당선 이후 문제가 된 화이트워터 개발회사의 부동산 사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1993년 1월 백악관에 입성하는 힐러리 클린턴.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돼 1993년 1월 임기를 시작하자 그녀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녀는 영부인 시절 국정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국민 건강 보험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1993년 1월 백악관에 입성하는 힐러리 클린턴.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돼 1993년 1월 임기를 시작하자 그녀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녀는 영부인 시절 국정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국민 건강 보험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화이트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대배심 법정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영부인 시절 많은 시련도 겪어야 했다. 1996년 이른바 화이트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대배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화이트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대배심 법정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영부인 시절 많은 시련도 겪어야 했다. 1996년 이른바 화이트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대배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1998년 1월 클린턴 부부가 휴양지인 버진 아일랜드 해변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녀에게 영부인 시절, 아닌 전 인생에 걸쳐 가장 큰 시련은 르윈스키 스캔들이었다. 1998년 1월 초 클린턴 부부가 휴양지에서 다정하게 춤을 추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하지만 그달 말 빌 클린턴과  전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 추문이 불거졌다.1998년 1월 클린턴 부부가 휴양지인 버진 아일랜드 해변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녀에게 영부인 시절, 아닌 전 인생에 걸쳐 가장 큰 시련은 르윈스키 스캔들이었다. 1998년 1월 초 클린턴 부부가 휴양지에서 다정하게 춤을 추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하지만 그달 말 빌 클린턴과 전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 추문이 불거졌다.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스캔들이 불거진 직후 빌 클린턴은 처음에는 성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그해 8월 대배심 법정에서는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지만, 성관계는 갖지는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빌 클린턴은 위증과 법 집행 방해 혐의로 탄핵에 넘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하원 투표 부결로 경우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 때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 빌 클린턴에 대해서 변치 않는 믿음을 보여줬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2003년 자서전에서는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클린턴에게 매우 화났었다.”고 말했다.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스캔들이 불거진 직후 빌 클린턴은 처음에는 성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그해 8월 대배심 법정에서는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지만, 성관계는 갖지는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빌 클린턴은 위증과 법 집행 방해 혐의로 탄핵에 넘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하원 투표 부결로 경우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 때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 빌 클린턴에 대해서 변치 않는 믿음을 보여줬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2003년 자서전에서는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클린턴에게 매우 화났었다.”고 말했다.


2001년 상원 의원 자격으로 환경 자원 위원회에 처음 참석한 힐러리 클린턴. 2000년 민주당 인사들의 권유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 과반수의 지지로 당선됐다.2001년 상원 의원 자격으로 환경 자원 위원회에 처음 참석한 힐러리 클린턴. 2000년 민주당 인사들의 권유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 과반수의 지지로 당선됐다.


2001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상원 의원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9.11테러 공격으로 남편을 잃은 마렌 사카렛을 위로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 의원 첫해에 일어난 2001년 9월 11일 테러 참사 이후 복구를 위한 기금 조성에 노력해 214억 달러의 기금을 모집하는 데 이바지했다.2001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상원 의원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9.11테러 공격으로 남편을 잃은 마렌 사카렛을 위로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 의원 첫해에 일어난 2001년 9월 11일 테러 참사 이후 복구를 위한 기금 조성에 노력해 214억 달러의 기금을 모집하는 데 이바지했다.


2008년 오바마 선거운동 지원 유세에 나선 클린턴. 2008년 그녀는 첫 여성 대통령을 꿈꿨지만 젊은 오바마  후보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을 넘지 못했다. 당시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면서 남긴 연설은 많은 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뒷날에도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2008년 오바마 선거운동 지원 유세에 나선 클린턴. 2008년 그녀는 첫 여성 대통령을 꿈꿨지만 젊은 오바마 후보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을 넘지 못했다. 당시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면서 남긴 연설은 많은 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뒷날에도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2008년 12월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와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그녀는  2009년 1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오바마 1기 국무부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2008년 12월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와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그녀는 2009년 1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오바마 1기 국무부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10년 3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2010년 3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11년 5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 국가 안보 관계자들과 함께  오사마 빈 라덴 체포 작전을 지켜보고 있다.2011년 5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 국가 안보 관계자들과 함께 오사마 빈 라덴 체포 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2012년 9월 당시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리비아 벵가지 영사관 습격사건 희생자들의 운구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2012년 9.11일 리비아 벵가지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테러단체에 습격당한 사건은 대통령 출마 선언 이후 그녀를 괴롭혔던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국가의 상징인 영사관이 테러범에 공격당하도록 아무런 안전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미국 국민들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것이다.2012년 9월 당시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리비아 벵가지 영사관 습격사건 희생자들의 운구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2012년 9.11일 리비아 벵가지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테러단체에 습격당한 사건은 대통령 출마 선언 이후 그녀를 괴롭혔던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국가의 상징인 영사관이 테러범에 공격당하도록 아무런 안전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미국 국민들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2011년 10월 몰타를 방문한 이후 군사 비행기 안에서 블랙베리를 체크하고 있다. 2015년에 뉴욕 타임스는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 계정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클린턴은 이 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을 바꿔 ‘부정직하다’는 이미지가 확산했다. 최근 FBI는  법적으로는 면죄부를 줬지만, 클린턴이 국가 기밀을 다루는 과정에서 극도로 부주의했다고 비판했다. 이메일 스캔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가도에서 여전히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힐러리 클린턴이 2011년 10월 몰타를 방문한 이후 군사 비행기 안에서 블랙베리를 체크하고 있다. 2015년에 뉴욕 타임스는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 계정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클린턴은 이 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을 바꿔 ‘부정직하다’는 이미지가 확산했다. 최근 FBI는 법적으로는 면죄부를 줬지만, 클린턴이 국가 기밀을 다루는 과정에서 극도로 부주의했다고 비판했다. 이메일 스캔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가도에서 여전히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TV 토론에 앞서 샌더스와 함께  웃고 있다. 경선 최대 경쟁자였던 샌더스의 지지까지 확보한 힐러리 클린턴이 11월 본선에서도 이처럼 활짝 웃을 수 있을까?TV 토론에 앞서 샌더스와 함께 웃고 있다. 경선 최대 경쟁자였던 샌더스의 지지까지 확보한 힐러리 클린턴이 11월 본선에서도 이처럼 활짝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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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과 시련의 68년…사진으로 본 힐러리의 인생
    • 입력 2016-07-27 12:01:11
    • 수정2016-07-27 13:13:02
    취재K
미국 대선 역사상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1947년 10월 시카고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올해 나이 만 68세인 힐러리 클린턴은 변호사, 주지사 영부인, 퍼스트레이디, 상원 의원 ,국무 장관 등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마침내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대통령 후보라는 새 역사를 썼다.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또 다른 이정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의 삶은 영광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걸어온 70년 가까운 인생 궤적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최근 미국 CNN 방송이 공개한 사진과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중심으로 힐러리 클린턴의 인생을 한번 뒤돌아 봤다.

어린 시절 부모, 남동생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1947년 10월 26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덤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덤 사이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에서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했다.

웰즐리 대학 시절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 1965년 매사추세츠 주의 사립 여자대학인 웰즐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다. 클린턴은 졸업생 대표로 졸업식 연설을 하면서 여성, 인권 문제등에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내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75년 10월 빌 클린턴과 결혼한 힐러리 클린턴·대학 졸업 후  예일대 로스쿨로 진학한 힐러리는 1971년 같은 로스쿨 1년 후배였던 아칸소 주 출신 빌 클린턴을 만난다. 빌 클린턴과 함께 졸업하기 위해 졸업을 1년 늦춘 그녀는 졸업 후 변호사 활동과 사회 참여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아칸소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힐러리 클린턴. 1977년 초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 검찰총장에 당선된 이후  힐러리는 아칸소 주 유명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74년 닉슨 대통령이 연루된 워터게이트 탄핵 조사단 활동으로 워싱턴 정가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1년 아칸소 주지사 취임식에서 활짝 웃고 있는 클린턴 부부와 딸 첼시. 1978년  남편 빌 클린턴이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힐러리는 주지사의 부인이자 변호사로 아칸소 주의 유력 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녀는 이때 여러 투자로 재산을 불리기도 했는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당선 이후 문제가 된 화이트워터 개발회사의 부동산 사업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1993년 1월 백악관에 입성하는 힐러리 클린턴. 1992년 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돼 1993년 1월 임기를 시작하자 그녀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녀는 영부인 시절 국정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국민 건강 보험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화이트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대배심 법정에 출석하면서 기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영부인 시절 많은 시련도 겪어야 했다. 1996년 이른바 화이트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대배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해야 했다.

1998년 1월 클린턴 부부가 휴양지인 버진 아일랜드 해변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녀에게 영부인 시절, 아닌 전 인생에 걸쳐 가장 큰 시련은 르윈스키 스캔들이었다. 1998년 1월 초 클린턴 부부가 휴양지에서 다정하게 춤을 추고 있는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하지만 그달 말 빌 클린턴과  전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 추문이 불거졌다.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영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스캔들이 불거진 직후 빌 클린턴은 처음에는 성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그해 8월 대배심 법정에서는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지만, 성관계는 갖지는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빌 클린턴은 위증과 법 집행 방해 혐의로 탄핵에 넘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하원 투표 부결로 경우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사건이 진행될 때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 빌 클린턴에 대해서 변치 않는 믿음을 보여줬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2003년 자서전에서는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클린턴에게 매우 화났었다.”고 말했다.

2001년 상원 의원 자격으로 환경 자원 위원회에 처음 참석한 힐러리 클린턴. 2000년 민주당 인사들의 권유로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 과반수의 지지로 당선됐다.

2001년 10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상원 의원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9.11테러 공격으로 남편을 잃은 마렌 사카렛을 위로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 의원 첫해에 일어난 2001년 9월 11일 테러 참사 이후 복구를 위한 기금 조성에 노력해 214억 달러의 기금을 모집하는 데 이바지했다.

2008년 오바마 선거운동 지원 유세에 나선 클린턴. 2008년 그녀는 첫 여성 대통령을 꿈꿨지만 젊은 오바마  후보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을 넘지 못했다. 당시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면서 남긴 연설은 많은 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뒷날에도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2008년 12월 바이든 부통령 당선자와 힐러리 클린턴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그녀는  2009년 1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오바마 1기 국무부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2010년 3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11년 5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오바마 대통령, 국가 안보 관계자들과 함께  오사마 빈 라덴 체포 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2012년 9월 당시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이 리비아 벵가지 영사관 습격사건 희생자들의 운구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2012년 9.11일 리비아 벵가지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테러단체에 습격당한 사건은 대통령 출마 선언 이후 그녀를 괴롭혔던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국가의 상징인 영사관이 테러범에 공격당하도록 아무런 안전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미국 국민들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2011년 10월 몰타를 방문한 이후 군사 비행기 안에서 블랙베리를 체크하고 있다. 2015년에 뉴욕 타임스는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 계정을 사용했다고 보도했다. 클린턴은 이 사건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말을 바꿔 ‘부정직하다’는 이미지가 확산했다. 최근 FBI는  법적으로는 면죄부를 줬지만, 클린턴이 국가 기밀을 다루는 과정에서 극도로 부주의했다고 비판했다. 이메일 스캔들은 클린턴 대통령의 대선 가도에서 여전히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TV 토론에 앞서 샌더스와 함께  웃고 있다. 경선 최대 경쟁자였던 샌더스의 지지까지 확보한 힐러리 클린턴이 11월 본선에서도 이처럼 활짝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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