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毒)이 된 당근…대학재정지원사업

입력 2016.08.1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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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PRIME), 링크(LINK), 코어(CORE), 에이스(ACE)...

언뜻 들어 무엇을 말하는 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에다 CK, WE-UP, 평단 사업까지...

무슨 암호도 아니고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이다.

이것들은 다름 아닌,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학재정지원사업’의 이름들이다.

재정지원사업은 많게는 백억 원이 넘는 돈이 지원된다. 대학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자금인 것이다.

사실 대학들은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정책으로 국가장학금 제도가 실시된 이후 각 대학의 등록금은 사실상 동결 상태이다.



전국 4년제 사립대의 등록금 수입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전체 수입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인 ‘등록금 의존율’은 2010년 62.6%에서 2014년 54.7%로 7.9%포인트 줄었다.

부족한 부분은 국고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지난해부터 대학구조조정으로 정원 축소가 진행되면서 등록금 수입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각 대학들이 교육부 재정지원사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올해 주요 대학재정지원사업은 모두 9개이다. 이번 이화여대 사태로 주목받은 평생교육 단과대학(평단) 사업을 비롯해 산업연계교육 선도대학(프라임 · PRIME) 사업, 대학인문역량강화(코어 · CORE) 사업 등이다. 올 한해에만 지원 예산이 모두 1조 5천억 원에 이른다.

한 푼이 아쉬운 대학으로선 이들 사업에 기를 쓰고 달려들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지원 사업들을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지난 5월, 21개 대학을 선정한 프라임 사업이 대표적이다. 총 예산이 2천여억 원인 프라임 사업은 대규모 대학 정원 조정사업으로 3.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정부는 이 사업과 대학특성화사업(CK) 등을 통해 정원 조정 및 감축을 이끌어냈다.

이밖에도 등록금 동결·인하, 총장 직선제 폐지, 졸업생 취업률 제고 등 여러 요구 사항도 역시 재정 지원을 매개로 관철시켜 왔다. 돈을 가지고 교육을 통제하는 모양새이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졸업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졸업증서 반납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졸업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졸업증서 반납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 집행이 구성원과의 소통이나 합리적 의사결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번 이화여대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제를 키운 것은 총장을 비롯한 학교 당국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이었다.

현행 입시제도와는 다르게 전형이 치러지는 단과대학 설립은 대학 구성원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시간의 부족함만을 내세워 별다른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대학 특성화 사업이나 프라임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일부 대학들이 일방적으로 특정학과를 폐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정문에 모여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정문에 모여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화여대 사태는 우리 대학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많은 대학들은 평생교육 단과대학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평생교육원을 두고 있다. 또 비슷한 학과와 전공을 가진 전문대학, 사이버대학, 방송통신대학 등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교육기관들의 독자적인 존재 가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수립해 다급하게 추진해 나갔다.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의 경우 참여가 저조하자 5월에 추가 선정 공고를 내 7월 15일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사업 공고가 난 뒤 한두 달 안에 사업 계획서를 내야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교수·학생 등 구성원들과 사업 참여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무리하게 사업 추진에 나섰다가 큰 반발을 사고 결국은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학생들이 점거 농성중인 대학 본관 앞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추진 철회를 밝히고 있다.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학생들이 점거 농성중인 대학 본관 앞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추진 철회를 밝히고 있다.


최근 돈에 목이 마른 일부 대학들은 각자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다 해 보자는 식으로 아무 사업에나 뛰어들고 있다. 이른바 ‘예산 따먹기’식 사업 추진이다.

이러다 보니 수년 동안 연구중심 인력 양성에 자원을 투입했던 대학이 뜬금없이 취업역량 강화 사업을 유치한다고 덤비는 게 요즘 대학 현실이다.

또 실적 달성을 위해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거나 보여주기식 결과물 창출을 위해 정작 중요한 기초 교육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

이쯤 되면 대학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시행하는 재정지원사업은 당근이 아니라 독(毒)이 된다.

교육 당국은 이제부터라도 재정지원사업이 당초 정책 목표를 실질적으로 달성하고 있는 지 냉철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연간 1조 5천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사업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고등 교육의 문제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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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10 18:18:14
    취재K
프라임(PRIME), 링크(LINK), 코어(CORE), 에이스(ACE)...

언뜻 들어 무엇을 말하는 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에다 CK, WE-UP, 평단 사업까지...

무슨 암호도 아니고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이다.

이것들은 다름 아닌,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학재정지원사업’의 이름들이다.

재정지원사업은 많게는 백억 원이 넘는 돈이 지원된다. 대학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자금인 것이다.

사실 대학들은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2012년 이명박 정부의 ‘반값 등록금’ 정책으로 국가장학금 제도가 실시된 이후 각 대학의 등록금은 사실상 동결 상태이다.



전국 4년제 사립대의 등록금 수입은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전체 수입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인 ‘등록금 의존율’은 2010년 62.6%에서 2014년 54.7%로 7.9%포인트 줄었다.

부족한 부분은 국고 보조금으로 충당한다. 지난해부터 대학구조조정으로 정원 축소가 진행되면서 등록금 수입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각 대학들이 교육부 재정지원사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올해 주요 대학재정지원사업은 모두 9개이다. 이번 이화여대 사태로 주목받은 평생교육 단과대학(평단) 사업을 비롯해 산업연계교육 선도대학(프라임 · PRIME) 사업, 대학인문역량강화(코어 · CORE) 사업 등이다. 올 한해에만 지원 예산이 모두 1조 5천억 원에 이른다.

한 푼이 아쉬운 대학으로선 이들 사업에 기를 쓰고 달려들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지원 사업들을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지난 5월, 21개 대학을 선정한 프라임 사업이 대표적이다. 총 예산이 2천여억 원인 프라임 사업은 대규모 대학 정원 조정사업으로 3.6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정부는 이 사업과 대학특성화사업(CK) 등을 통해 정원 조정 및 감축을 이끌어냈다.

이밖에도 등록금 동결·인하, 총장 직선제 폐지, 졸업생 취업률 제고 등 여러 요구 사항도 역시 재정 지원을 매개로 관철시켜 왔다. 돈을 가지고 교육을 통제하는 모양새이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졸업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졸업증서 반납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 집행이 구성원과의 소통이나 합리적 의사결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번 이화여대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제를 키운 것은 총장을 비롯한 학교 당국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이었다.

현행 입시제도와는 다르게 전형이 치러지는 단과대학 설립은 대학 구성원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시간의 부족함만을 내세워 별다른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대학 특성화 사업이나 프라임 사업 추진 과정에서 이러한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일부 대학들이 일방적으로 특정학과를 폐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정문에 모여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며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이화여대 사태는 우리 대학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많은 대학들은 평생교육 단과대학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평생교육원을 두고 있다. 또 비슷한 학과와 전공을 가진 전문대학, 사이버대학, 방송통신대학 등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 교육기관들의 독자적인 존재 가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수립해 다급하게 추진해 나갔다. 평생교육 단과대학 사업의 경우 참여가 저조하자 5월에 추가 선정 공고를 내 7월 15일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사업 공고가 난 뒤 한두 달 안에 사업 계획서를 내야하기 때문에 애초부터 교수·학생 등 구성원들과 사업 참여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무리하게 사업 추진에 나섰다가 큰 반발을 사고 결국은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학생들이 점거 농성중인 대학 본관 앞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추진 철회를 밝히고 있다.

최근 돈에 목이 마른 일부 대학들은 각자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다 해 보자는 식으로 아무 사업에나 뛰어들고 있다. 이른바 ‘예산 따먹기’식 사업 추진이다.

이러다 보니 수년 동안 연구중심 인력 양성에 자원을 투입했던 대학이 뜬금없이 취업역량 강화 사업을 유치한다고 덤비는 게 요즘 대학 현실이다.

또 실적 달성을 위해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거나 보여주기식 결과물 창출을 위해 정작 중요한 기초 교육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다.

이쯤 되면 대학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시행하는 재정지원사업은 당근이 아니라 독(毒)이 된다.

교육 당국은 이제부터라도 재정지원사업이 당초 정책 목표를 실질적으로 달성하고 있는 지 냉철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연간 1조 5천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아니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사업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할 고등 교육의 문제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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