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2) 아파트, 높아지는만큼 평평해지는 삶

입력 2016.09.23 (10:19) 수정 2016.09.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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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을 갖기 시작한 아파트?

다양한 아파트의 이름도 이렇게 기발하고 재치있는 시의 소재가 될 수 있군요. 그런데 이 시를 곰곰이 읽다보면 아파트가 단순히 기억하기 좋으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값에 분양하고 또 거래하기 위한 건설회사들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것도 이내 간파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언제부턴가 아파트나 주상복합, 다세대 주택까지 집단 주거 시설들은 모두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있습니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이름, 중후하고 격조 있는 이름,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첨단을 자랑하는 이름, 글로발 시대의 선두주자라는 듯 외래어로 지어진 이름, 어떤 아파트나 주상복합 건물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나 예술품의 명성을 슬쩍 빌어오기도 합니다

정말 시인의 말처럼 이런 아파트에 살면 입주자들도 마음이 푸르러지고,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이 편한 세상에 사는 환희에 겨울 듯합니다. 문제는 아파트의 이름과 현실의 생활이 엇나가는 순간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파산하거나 실직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할 때, 더 이상 아파트의 이름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아파트의 이름은 아파트를 팔아 이윤을 챙기는 건설업자의 돈벌이 전략일 뿐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 생활패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미소가 미움으로'. '푸르지오'가 '흐리지오'로, 자칫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언어유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파트가 갖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함의를 들춰내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탁월한 묘사가 됩니다.

그 화려하고 우아한 이름은 더 이상 아파트의 본질이 아니지만, 아파트의 위치와 평수 그리고 브랜드 가치는 적어도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등장한 계급의 척도가 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과 신분이 정해진 봉건사회나 왕조사회는 붕괴된 지 오래지만, 아파트는 그 붕괴된 자리에서 좀비처럼 솟아나 강력한 신분 상징으로 우뚝 섰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동네 어느 브랜드의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본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규정되고 자리 매겨집니다. 이런 천박한 물신주의 세태는 가진 것 변변치 않고 수입도 시원찮은 시인들의 예리한 감수성에 크나큰 상처를 입힙니다. 자신이 당할 모욕이나 무시는 '향기로운 관을 쓰고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들까지 이 넘지 못한 벽 앞에 눈물짓는 데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파트로 이사하는 벅찬 꿈은커녕, 당장 물난리로 난장판이 된 집 수리에도 정신이 없는 가난한 시인은, 친구들이 다 이사 가는 아파트로 우리는 언제 가느냐고 투정을 부리는 아들 녀석 앞에 말문이 막힙니다. 그래도 간신히 수리를 끝낸 집에서 아내와 아들을 꼭 끌어안고 세상 어느 아파트보다 멋진 집 한 채를 짓습니다. 폭우도 쓸어갈 수 없는 사랑, 태풍에도 끄떡없는 사랑으로 단단히 얽어맨 집을 짓습니다. 더없이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세 사람은 모처럼 푹 잠들었겠습니다.

추위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다

아파트라는 집단 거주 시설의 출현은 멀리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61년 마포에 지어진 '마포 아파트'를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의 출발로 봅니다. 전통적인 우리의 가옥은 기와이던 초가이던 사실 주거환경 자체로 보자면 불편하고 생활하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조입니다.


어릴 적 제가 살던 기와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방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연탄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어머님을 괴롭혔습니다. 걸핏하면 끊어지는 수돗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 엉성한 단열재 탓이기도 했지만 한겨울에는 방안의 물이 얼 정도로 가혹한 추위에 시달려야 했고, 여름철에는 후끈 달아오른 벽채와 지붕 탓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이야 건축 공법이나 설계도 좋아져 개인주택에 사는 불편함이 크게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파트에 비해서는 여전히 거주자들은 발품과 손품을 많이 팔아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장기간 집을 비우기도 쉽지 않았고, 식구가 단촐한 집들은 도둑이나 강도가 들지 않을까 늘 불안합니다. 아파트의 등장은 이런 재래식 단독주택이 지닌 불편함을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특히 가사노동에 시달린 주부들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거시적으로도 아파트는 적잖은 기여를 했습니다. 국토의 면적이 9만 8,000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70% 가까이가 산림입니다. 여기에다 절대농지와 그린벨트, 공업 용지 등을 뺀다면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그야말로 손바닥 만합니다. 만일 단독주택으로 주택 보급률을 100%까지 끌어올리려 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거나,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집이 들어서는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단독주택에 들어가는 전기와 수도 가스 등 막대한 에너지를 생각할 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에너지 효율 면에서도 아파트의 이점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명확한 지정학적 한계 아래서 국토 이용의 효율을 높이면서도 가능한 한 많은 국민들에게 내집 마련을 해줄 수 있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파트였던 것이지요.

서구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주로 도시로 한꺼번에 몰려든 산업노동자들에게 대량으로 주거지를 만들어 주기 위해 건축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기 회현동에 들어선 '미쿠니 아파트' , 충정로에 '토요다 아파트' 등이 소규모로 들어섰고, 해방 이후에에 공원과 녹지, 운동장을 갖춤으로써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커뮤니티 안에서 쇼핑과 레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파트 내부 설계 역시 획기적이었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아궁이식 부엌 대신 입식 부엌을 만들었습니다. 주거패턴에서 '근대화'와 '생활혁명'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1970년대 강남 개발붐과 궤를 같이 하면서 반포와 여의도, 압구정과 잠실 등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1가구 1주택의 꿈을 실현시켜주겠다면서 분당과 일산, 평촌과 산본 등 이른바 서울 외곽에 신도시 200만호 건설이라는 인류 초유의 매머드 아파트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1990년대부터는 더 높이 더 화려하게 아파트를 짓는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시대가 열렸습니다. 2002년 도곡동에 들어선 타워팰리스는 더 높이 더 웅장하게 경쟁을 벌이는 고층아파트 건축의 정점이자 상징이기도 합니다.


1978년에만 해도 불과 5.2%였던 아파트 주거비율은 1990년 28%로 폭등합니다. 이런 추세는 이어져서 95년에는 41%, 2000년에는 48%, 2005년에는 53%, 2010년에는 55%까지 오르더니 지난해에는 59.9%까지 올랐습니다. 여기에 다세대 주택을 포함하면 공동주택에 사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70%를 넘습니다. 사람들의 주거 공간은 이제 지상과 땅 속에 이어 하늘까지 점령한 것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전차, 아파트

그러나 아파트는 긍정적인 기능만큼이나 우리 사회에 엄청난 부작용과 후유증을 낳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먹거리와 잠자리 그리고 휴식의 공간이었던 집이 재산의 증식을 위한 도구, 사는 곳이라는 의미보다는 사고팔면서 이윤을 남기는 재테크의 가장 큰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주거의 아이콘이 욕망의 아이콘이 된 것이지요. 프랑스의 건축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이런 대한민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서구의 아파트가 노동자들을 위한 국민주택으로 기획된데 반해, 한국의 아파트는 독재정권이 재벌과 손잡고 이루어낸 '한국적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아파트는 거대한 건설사들이 자본을 축적해 더 큰 비즈니스로 뛰어드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고, 정권으로서도 보다 쾌적한 주거를 원하던 서민들의 욕구도 충족시키고 고도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조건이었던 내수 진작 차원에서도 대규모 아파트 건설은 절실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대규모 아파트를 짓게 되면 자연히 시멘트와 철강, 유리 등 자본재 산업도 활기를 띠고 가구, 커튼, 벽지, 가전제품과 같은 소비재, 그리고 이삿짐, 주변 식당, 쇼핑몰 같은 유통 서비스 산업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에서 막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이때문에 우리나라의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그것도 고층, 초고층으로 뻗어올라간 이유는 단순히 국토면적이 좁아서가 아니라, 용적률을 최대한 높여 이윤을 극대치로 뽑아내려는 건설사와 정부의 이해가 만든 합작품이라는 비판을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가와 매매가의 변천을 보면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퍽 일리있어 보입니다. 서울 고급 아파트이 상징이라는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가 분양된 것은 1980년, 당시 분양가는 평당 68만원, 31평형의 가격은 2,000만원 정도였습니다 지금 은마아파트 31평형의 매매가는 12억원 안팎입니다. 그러니까 36년만에 60배가 오른 것이지요

아파트 값의 상승은 강남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서울의 경우 올해 8월말 기준 3.3㎡당 평균 분양가격은 2,074만원이었습니다. 지난해 8월 말이 1,841만원이었으니까 1년 만에 무려 13% 가량이 뛴 것입니다. 불황이 깊다고도 하고, 아파트 미분양 물량이 늘고 있다고도 하고, 이대로 가면 일본식 부동산 버블 붕괴가 온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어찌된 셈인지 아파트 분양가는 해가 갈수록 치솟고, 전국 곳곳에서 여전히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춤해졌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여전히 전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재산증식 수단이었고,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를 사고, 또 빚을 늘려서라도 더 큰 아파트로 옮겨가는 투기적 구매 광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습니다. 미등기 전매, 딱지 되팔기, 위장전입, 떴다방...온갖 기상천외한 불법과 탈법이 판을 쳤고, 인기지역의 분양권을 따내기 위해 사나흘 장사진을 치는 광경은 별로 희귀하지도 않았습니다.

핑론가 김윤수는 이런 아파트 공간을 '인공낙원'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비극적 속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높아지는 주거 공간, 평평해지는 삶

1960년대 이후 불과 반세기만에 아파트는 의식주 같은 일상적 삶의 형태 뿐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같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 가치관과 세계관 같은 의식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급격한 핵가족화, 도시화 현상과 맞물려 아파트의 삶이 가져온 이런 변화는 자연 예리한 촉수를 가진 시인들의 관심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옷장의 서랍처럼 칸칸이 들어찬 저 미지의 공간에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호기심과 상상력이 발동합니다.


시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아파트에 살면서 너무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을 수시로 받습니다. 언제부턴가 밤하늘의 별도 달도 쳐다보지 않게 됐고, 가을 바람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일도 없습니다. 자연에서 시심을 키우고 자연을 언어로 녹여 재현하고, 끝내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을 또다른 원로 시인에게도 도시 아파트의 생활은 여간 애닯지 않습니다. 어쩌다 잘못 날아든 여치의 울음소리가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삭막한 시멘트 덩어리 아파트에서 아무리 목이 터져라 울어본들 여치는 밥 한 술 얻을 수 없을 테지요. 어쩌면 이 시인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여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풀과 나무와 꽃과 흙을 이웃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불빛과 소음과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자신의 처지가 연상되지 않았을까요?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또 인간의 삶을 아파트 구조 만큼이나 평평하게 만듭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단독주택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어릴 적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청소년기까지 비록 허름했지만 30평 정도 되는 단독 기와집에 살았습니다. 안방과 마루 건넌방이 있었고 작은 마당을 지나 사랑방이 있었는데요, 그 작은 마당에는 반층쯤 되는 높이의 장독대와 그 장독대 밑으로 반지하쯤 되는 광이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멀찌감치 외딴 곳에 떨어져 있었지요. 안방에는 한 평 정도 되는 벽장이 있었고, 부엌 위에도 작은 다락이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마당이었지만 채송화도 있었고 봉숭아와 해바라기 나팔꽃도 철따라 피어났구요.


작게 분할된 공간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은밀한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었지요. 겨울밤 화장실을 가는 일은 가장 떨리는 일이었고, 캄캄한 벽장에 올라가 어머니가 숨겨 놓으셨던 곶감이나 꿀을 훔쳐 먹을 때는 짜릿했습니다. 한여름에서 광에 들어가면 서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고 장독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이 설렜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지금도 해가 뉘엿뉘엿 지던 겨울 저녁 장독대를 뒤덮었던 새하얀 눈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파트는 각자의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높이과 깊이, 넓이와 굴절을 모두 밀어냈습니다. 넓찍한 단일 공간을 평면으로 분할해 지극히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귀신이 나올듯한 벽장도 사라졌고, 집에서는 가장 높았던 장독대도 없어졌습니다. 탁월했던 문학 비평가 김현 선생님은 이런 아파트의 삶이 두터워야 할 인간의 삶을 얇게 만들었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두께는 곧 집의 두께라는 설명입니다. 김현 선생님은 이런 아파트에서 살다보면 직업과 성별 나이, 취향에 관계없이 모두가 유사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취미와 행동도 같은 획일적 인간상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갈 때까지 간 아파트를 탈출해 다시 흙냄새 나고 풀벌레 소리 들리고, 처마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고 싶다는 도시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감히 아파트를 탈주해 대자연 속에 단독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작가 김서령의 표현에 따르면 " 새 울음에 아침 잠이 깨고, 뜰에 감꽃이 떨어지고, 초여름에 앵두가 열리고, 창으로 인동꽃 향이 스며드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좀 주춤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파트 신화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아파트를 장만하고 또 넓은 아파트로 옮겨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 혹은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사회적 풍조, 사람을 그가 사는 아파트로 미루어 규정하는 속물적 사고가 끈질기게 살아 있습니다. 이제 아파트를 우리가 사는 집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주거 공간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날로 발전하는 건축공법에 힘입어 단독주택에서의 삶도 여간 편리하고 쾌적하지 않습니다.


아파트 주술에서 벗어나 김현 선생님의 표현대로 너무 얇아진 삶을 다시 살찌워야겠습니다. 당장에 단독주택으로 갈 수 없다면 부단히 의식을 일깨우고 실천에 옮겨 가능하면 두터운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틈나는 대로 아파트를 벗어나 자연 속을 걷고, 아파트 안에서도 개성이 숨쉬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저도 나무와 화초를 가꿔 베란다를 숲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카알라일의 말대로 '인류의 모든 지혜가 잠들어있는 책'으로 방 하나를 지혜의 숲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파트에 걸린 과부하를 덜어주는 일, 아파트를 살아가는 공간 본래의 기능으로만 돌려주는 일, 그것이 결국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로 이끄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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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2) 아파트, 높아지는만큼 평평해지는 삶
    • 입력 2016-09-23 10:19:14
    • 수정2016-09-23 10:25:39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인격을 갖기 시작한 아파트?

다양한 아파트의 이름도 이렇게 기발하고 재치있는 시의 소재가 될 수 있군요. 그런데 이 시를 곰곰이 읽다보면 아파트가 단순히 기억하기 좋으라고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값에 분양하고 또 거래하기 위한 건설회사들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것도 이내 간파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언제부턴가 아파트나 주상복합, 다세대 주택까지 집단 주거 시설들은 모두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있습니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이름, 중후하고 격조 있는 이름,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첨단을 자랑하는 이름, 글로발 시대의 선두주자라는 듯 외래어로 지어진 이름, 어떤 아파트나 주상복합 건물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나 예술품의 명성을 슬쩍 빌어오기도 합니다

정말 시인의 말처럼 이런 아파트에 살면 입주자들도 마음이 푸르러지고,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이 편한 세상에 사는 환희에 겨울 듯합니다. 문제는 아파트의 이름과 현실의 생활이 엇나가는 순간입니다. 사업을 하다가 파산하거나 실직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할 때, 더 이상 아파트의 이름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저 아파트의 이름은 아파트를 팔아 이윤을 챙기는 건설업자의 돈벌이 전략일 뿐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 생활패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미소가 미움으로'. '푸르지오'가 '흐리지오'로, 자칫 유치하게 들릴 수 있는 언어유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파트가 갖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함의를 들춰내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탁월한 묘사가 됩니다.

그 화려하고 우아한 이름은 더 이상 아파트의 본질이 아니지만, 아파트의 위치와 평수 그리고 브랜드 가치는 적어도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등장한 계급의 척도가 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과 신분이 정해진 봉건사회나 왕조사회는 붕괴된 지 오래지만, 아파트는 그 붕괴된 자리에서 좀비처럼 솟아나 강력한 신분 상징으로 우뚝 섰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동네 어느 브랜드의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본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규정되고 자리 매겨집니다. 이런 천박한 물신주의 세태는 가진 것 변변치 않고 수입도 시원찮은 시인들의 예리한 감수성에 크나큰 상처를 입힙니다. 자신이 당할 모욕이나 무시는 '향기로운 관을 쓰고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들까지 이 넘지 못한 벽 앞에 눈물짓는 데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파트로 이사하는 벅찬 꿈은커녕, 당장 물난리로 난장판이 된 집 수리에도 정신이 없는 가난한 시인은, 친구들이 다 이사 가는 아파트로 우리는 언제 가느냐고 투정을 부리는 아들 녀석 앞에 말문이 막힙니다. 그래도 간신히 수리를 끝낸 집에서 아내와 아들을 꼭 끌어안고 세상 어느 아파트보다 멋진 집 한 채를 짓습니다. 폭우도 쓸어갈 수 없는 사랑, 태풍에도 끄떡없는 사랑으로 단단히 얽어맨 집을 짓습니다. 더없이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세 사람은 모처럼 푹 잠들었겠습니다.

추위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다

아파트라는 집단 거주 시설의 출현은 멀리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961년 마포에 지어진 '마포 아파트'를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의 출발로 봅니다. 전통적인 우리의 가옥은 기와이던 초가이던 사실 주거환경 자체로 보자면 불편하고 생활하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조입니다.


어릴 적 제가 살던 기와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선 방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연탄을 갈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어머님을 괴롭혔습니다. 걸핏하면 끊어지는 수돗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 엉성한 단열재 탓이기도 했지만 한겨울에는 방안의 물이 얼 정도로 가혹한 추위에 시달려야 했고, 여름철에는 후끈 달아오른 벽채와 지붕 탓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지금이야 건축 공법이나 설계도 좋아져 개인주택에 사는 불편함이 크게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파트에 비해서는 여전히 거주자들은 발품과 손품을 많이 팔아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장기간 집을 비우기도 쉽지 않았고, 식구가 단촐한 집들은 도둑이나 강도가 들지 않을까 늘 불안합니다. 아파트의 등장은 이런 재래식 단독주택이 지닌 불편함을 획기적으로 개선했고, 특히 가사노동에 시달린 주부들에게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거시적으로도 아파트는 적잖은 기여를 했습니다. 국토의 면적이 9만 8,000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70% 가까이가 산림입니다. 여기에다 절대농지와 그린벨트, 공업 용지 등을 뺀다면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그야말로 손바닥 만합니다. 만일 단독주택으로 주택 보급률을 100%까지 끌어올리려 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거나,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집이 들어서는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단독주택에 들어가는 전기와 수도 가스 등 막대한 에너지를 생각할 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에너지 효율 면에서도 아파트의 이점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명확한 지정학적 한계 아래서 국토 이용의 효율을 높이면서도 가능한 한 많은 국민들에게 내집 마련을 해줄 수 있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파트였던 것이지요.

서구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주로 도시로 한꺼번에 몰려든 산업노동자들에게 대량으로 주거지를 만들어 주기 위해 건축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기 회현동에 들어선 '미쿠니 아파트' , 충정로에 '토요다 아파트' 등이 소규모로 들어섰고, 해방 이후에에 공원과 녹지, 운동장을 갖춤으로써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커뮤니티 안에서 쇼핑과 레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파트 내부 설계 역시 획기적이었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아궁이식 부엌 대신 입식 부엌을 만들었습니다. 주거패턴에서 '근대화'와 '생활혁명'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1970년대 강남 개발붐과 궤를 같이 하면서 반포와 여의도, 압구정과 잠실 등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1가구 1주택의 꿈을 실현시켜주겠다면서 분당과 일산, 평촌과 산본 등 이른바 서울 외곽에 신도시 200만호 건설이라는 인류 초유의 매머드 아파트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1990년대부터는 더 높이 더 화려하게 아파트를 짓는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시대가 열렸습니다. 2002년 도곡동에 들어선 타워팰리스는 더 높이 더 웅장하게 경쟁을 벌이는 고층아파트 건축의 정점이자 상징이기도 합니다.


1978년에만 해도 불과 5.2%였던 아파트 주거비율은 1990년 28%로 폭등합니다. 이런 추세는 이어져서 95년에는 41%, 2000년에는 48%, 2005년에는 53%, 2010년에는 55%까지 오르더니 지난해에는 59.9%까지 올랐습니다. 여기에 다세대 주택을 포함하면 공동주택에 사는 인구는 전체 인구의 70%를 넘습니다. 사람들의 주거 공간은 이제 지상과 땅 속에 이어 하늘까지 점령한 것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전차, 아파트

그러나 아파트는 긍정적인 기능만큼이나 우리 사회에 엄청난 부작용과 후유증을 낳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먹거리와 잠자리 그리고 휴식의 공간이었던 집이 재산의 증식을 위한 도구, 사는 곳이라는 의미보다는 사고팔면서 이윤을 남기는 재테크의 가장 큰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주거의 아이콘이 욕망의 아이콘이 된 것이지요. 프랑스의 건축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이런 대한민국을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서구의 아파트가 노동자들을 위한 국민주택으로 기획된데 반해, 한국의 아파트는 독재정권이 재벌과 손잡고 이루어낸 '한국적 발전 모델의 압축적 표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아파트는 거대한 건설사들이 자본을 축적해 더 큰 비즈니스로 뛰어드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고, 정권으로서도 보다 쾌적한 주거를 원하던 서민들의 욕구도 충족시키고 고도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조건이었던 내수 진작 차원에서도 대규모 아파트 건설은 절실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대규모 아파트를 짓게 되면 자연히 시멘트와 철강, 유리 등 자본재 산업도 활기를 띠고 가구, 커튼, 벽지, 가전제품과 같은 소비재, 그리고 이삿짐, 주변 식당, 쇼핑몰 같은 유통 서비스 산업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에서 막대한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이때문에 우리나라의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그것도 고층, 초고층으로 뻗어올라간 이유는 단순히 국토면적이 좁아서가 아니라, 용적률을 최대한 높여 이윤을 극대치로 뽑아내려는 건설사와 정부의 이해가 만든 합작품이라는 비판을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가와 매매가의 변천을 보면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퍽 일리있어 보입니다. 서울 고급 아파트이 상징이라는 강남구 대치동의 은마아파트가 분양된 것은 1980년, 당시 분양가는 평당 68만원, 31평형의 가격은 2,000만원 정도였습니다 지금 은마아파트 31평형의 매매가는 12억원 안팎입니다. 그러니까 36년만에 60배가 오른 것이지요

아파트 값의 상승은 강남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서울의 경우 올해 8월말 기준 3.3㎡당 평균 분양가격은 2,074만원이었습니다. 지난해 8월 말이 1,841만원이었으니까 1년 만에 무려 13% 가량이 뛴 것입니다. 불황이 깊다고도 하고, 아파트 미분양 물량이 늘고 있다고도 하고, 이대로 가면 일본식 부동산 버블 붕괴가 온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어찌된 셈인지 아파트 분양가는 해가 갈수록 치솟고, 전국 곳곳에서 여전히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춤해졌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파트는 여전히 전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재산증식 수단이었고, 빚을 내서라도 아파트를 사고, 또 빚을 늘려서라도 더 큰 아파트로 옮겨가는 투기적 구매 광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습니다. 미등기 전매, 딱지 되팔기, 위장전입, 떴다방...온갖 기상천외한 불법과 탈법이 판을 쳤고, 인기지역의 분양권을 따내기 위해 사나흘 장사진을 치는 광경은 별로 희귀하지도 않았습니다.

핑론가 김윤수는 이런 아파트 공간을 '인공낙원'이라고 비판하면서 그 비극적 속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높아지는 주거 공간, 평평해지는 삶

1960년대 이후 불과 반세기만에 아파트는 의식주 같은 일상적 삶의 형태 뿐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같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 가치관과 세계관 같은 의식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급격한 핵가족화, 도시화 현상과 맞물려 아파트의 삶이 가져온 이런 변화는 자연 예리한 촉수를 가진 시인들의 관심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옷장의 서랍처럼 칸칸이 들어찬 저 미지의 공간에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 호기심과 상상력이 발동합니다.


시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아파트에 살면서 너무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을 수시로 받습니다. 언제부턴가 밤하늘의 별도 달도 쳐다보지 않게 됐고, 가을 바람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일도 없습니다. 자연에서 시심을 키우고 자연을 언어로 녹여 재현하고, 끝내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을 또다른 원로 시인에게도 도시 아파트의 생활은 여간 애닯지 않습니다. 어쩌다 잘못 날아든 여치의 울음소리가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삭막한 시멘트 덩어리 아파트에서 아무리 목이 터져라 울어본들 여치는 밥 한 술 얻을 수 없을 테지요. 어쩌면 이 시인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여치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풀과 나무와 꽃과 흙을 이웃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불빛과 소음과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자신의 처지가 연상되지 않았을까요?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또 인간의 삶을 아파트 구조 만큼이나 평평하게 만듭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단독주택에 살았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어릴 적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청소년기까지 비록 허름했지만 30평 정도 되는 단독 기와집에 살았습니다. 안방과 마루 건넌방이 있었고 작은 마당을 지나 사랑방이 있었는데요, 그 작은 마당에는 반층쯤 되는 높이의 장독대와 그 장독대 밑으로 반지하쯤 되는 광이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멀찌감치 외딴 곳에 떨어져 있었지요. 안방에는 한 평 정도 되는 벽장이 있었고, 부엌 위에도 작은 다락이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마당이었지만 채송화도 있었고 봉숭아와 해바라기 나팔꽃도 철따라 피어났구요.


작게 분할된 공간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은밀한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었지요. 겨울밤 화장실을 가는 일은 가장 떨리는 일이었고, 캄캄한 벽장에 올라가 어머니가 숨겨 놓으셨던 곶감이나 꿀을 훔쳐 먹을 때는 짜릿했습니다. 한여름에서 광에 들어가면 서늘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고 장독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음이 설렜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지금도 해가 뉘엿뉘엿 지던 겨울 저녁 장독대를 뒤덮었던 새하얀 눈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파트는 각자의 공간들이 가지고 있는 높이과 깊이, 넓이와 굴절을 모두 밀어냈습니다. 넓찍한 단일 공간을 평면으로 분할해 지극히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귀신이 나올듯한 벽장도 사라졌고, 집에서는 가장 높았던 장독대도 없어졌습니다. 탁월했던 문학 비평가 김현 선생님은 이런 아파트의 삶이 두터워야 할 인간의 삶을 얇게 만들었다고 개탄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두께는 곧 집의 두께라는 설명입니다. 김현 선생님은 이런 아파트에서 살다보면 직업과 성별 나이, 취향에 관계없이 모두가 유사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취미와 행동도 같은 획일적 인간상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갈 때까지 간 아파트를 탈출해 다시 흙냄새 나고 풀벌레 소리 들리고, 처마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고 싶다는 도시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감히 아파트를 탈주해 대자연 속에 단독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작가 김서령의 표현에 따르면 " 새 울음에 아침 잠이 깨고, 뜰에 감꽃이 떨어지고, 초여름에 앵두가 열리고, 창으로 인동꽃 향이 스며드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좀 주춤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파트 신화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아파트를 장만하고 또 넓은 아파트로 옮겨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 혹은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사회적 풍조, 사람을 그가 사는 아파트로 미루어 규정하는 속물적 사고가 끈질기게 살아 있습니다. 이제 아파트를 우리가 사는 집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주거 공간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날로 발전하는 건축공법에 힘입어 단독주택에서의 삶도 여간 편리하고 쾌적하지 않습니다.


아파트 주술에서 벗어나 김현 선생님의 표현대로 너무 얇아진 삶을 다시 살찌워야겠습니다. 당장에 단독주택으로 갈 수 없다면 부단히 의식을 일깨우고 실천에 옮겨 가능하면 두터운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틈나는 대로 아파트를 벗어나 자연 속을 걷고, 아파트 안에서도 개성이 숨쉬는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저도 나무와 화초를 가꿔 베란다를 숲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카알라일의 말대로 '인류의 모든 지혜가 잠들어있는 책'으로 방 하나를 지혜의 숲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파트에 걸린 과부하를 덜어주는 일, 아파트를 살아가는 공간 본래의 기능으로만 돌려주는 일, 그것이 결국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로 이끄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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