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불길속에” vs “하늘에서 죽음이”, 사과 없이 과거 청산?

입력 2016.12.28 (11:45) 수정 2016.12.2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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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키는 숭고한 임무를 위해 전함 애리조나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어느 날 불길 속에서 죽었습니다. 한 명 한 명에 부모가 있고, 아내나 애인, 아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생각이 끊겨 버렸습니다. 이 엄숙한 사실을 새기며 나는 할 말을 잃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하와이 진주만 공습 75년만인 27일(현지시각) 공습 희생자 추도 시설인 애리조나 기념관을 참배한 뒤 행한 연설의 첫머리다.

미국 하와이주 진주만을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애리조나기념관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AP)미국 하와이주 진주만을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애리조나기념관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AP)

아베 총리는 이어 "여기서 시작된 전쟁이 앗아간 모든 용사의 목숨, 전쟁의 희생이 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영혼에 영겁의 애도의 정성을 바친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또 "우리는 전후(戰後·2차대전 이후)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고 법의 지배를 존중하고 부전(不戰)의 맹세를 견지했다"고 덧붙였다.

아베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부전의 맹세, 즉 다시는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밝혔지만, 일본의 2차대전 책임이나 이에 대한 사죄, 반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 국제사회의 반발이 예상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애리조나기념관이 바라보이는 킬로 피어에서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AP)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애리조나기념관이 바라보이는 킬로 피어에서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AP)

중국, "쇼를 하지 말고 침략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라"

중국은 아베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하기에 앞에서부터 침략 역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7일 정례브리핑에서 "진정으로 역사를 반성하는 것만이 화해를 실현하는 열쇠일 만큼 일본은 쇼하지 말고 침략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화 대변인은 “일본은 진주만에 있는 희생자의 영혼을 단순히 위로하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사과 발언을 뺀 보여주기식 행동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 추모공원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모 기념탑 앞에서 아베 일본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AP)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 추모공원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모 기념탑 앞에서 아베 일본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AP)

아베 일본 총리의 이번 진주만 방문은 지난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답방 성격으로 해석되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어느 날 아침에, 죽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고, 세계는 바뀌어 버렸습니다. 밝은 섬광과 불의 벽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그 자신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5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원자폭탄 희생자들의 추모 공원이 있는 히로시마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의 한 토막만 더 인용해보자.

"우리는 이 도시의 중심에 발을 딛고 서서 원자 폭탄이 폭발한 순간을 그려봐야만 합니다. 엄청난 모습에 놀라 넋이 나갔을 어린이들의 공포를 그려봐야만 합니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듯한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전의 전쟁들을 포함해, 세계 대전 정점의 참혹한 폭발에서 희생된 무고한 인명들에 대해 묵념해야 합니다. 앞으로 올 전쟁의 희생자들까지도…."

오바마 대통령은 이처럼 세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참상의 하나인 원자 폭탄 희생자들에 대해 추모를 하면서도 원폭 투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번 아베 일본 총리도 하와이 진주만 방문 과정에서 과거 침략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때로는 가해자였고 때로는 피해자였던 미국과 일본 두 나라가 사과 없이 상징인 장소를 서로 방문함으로써 '아픈 과거 청산'을 사실상 마무리한 셈이다.

아베 일본 총리가 "전쟁에서 싸우던 미국과 일본이 이제 깊고 강하게 맺어진 '희망의 동맹'이 됐으며 세계인에게 진주만이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선언을 하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제2차 대전 당시 적이었던 미·일 양국이 전쟁의 상처를 우애로 바꿔 동맹으로 발전시켰고,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한 미·일 동맹이 세계 평화의 근간"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시대, 미·일 관계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하와이 진주만에서 미·일 동맹을 재확인했지만, 다음 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으로 두 나라 관계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전망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아베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진주만을 방문한 것은 그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두 정상에게는 "상징적인 최고의 업적"지만, 앞으로 "이러한 접근법은 어느 때보다 더 시험받을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내달 취임하는 트럼프 당선인이 그동안 미·일 동맹을 경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온 데다 양국을 둘러싼 대외환경도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트럼프 당선인은 아베 총리가 공을 들여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했고, 일본의 무역장벽과 주일미군 주둔비 등에 대해서도 거듭 불만을 드러냈다. 또 트럼프 당선인이 북한의 핵무장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중국에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점도 미·일 두 나라 관계에 위험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외교협회의 일본 전문가 실라 스미스는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은 환영"하지만 "훨씬 더 적대적인 미·중 관계는 일본에는 난처한 일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아베 총리와 일본 관리들은 미·일 간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자고 트럼프 당선인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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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28 11:45:07
    • 수정2016-12-28 11:48:16
    취재K
"조국을 지키는 숭고한 임무를 위해 전함 애리조나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어느 날 불길 속에서 죽었습니다. 한 명 한 명에 부모가 있고, 아내나 애인, 아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생각이 끊겨 버렸습니다. 이 엄숙한 사실을 새기며 나는 할 말을 잃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이었던 하와이 진주만 공습 75년만인 27일(현지시각) 공습 희생자 추도 시설인 애리조나 기념관을 참배한 뒤 행한 연설의 첫머리다.

미국 하와이주 진주만을 방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애리조나기념관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AP)
아베 총리는 이어 "여기서 시작된 전쟁이 앗아간 모든 용사의 목숨, 전쟁의 희생이 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영혼에 영겁의 애도의 정성을 바친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또 "우리는 전후(戰後·2차대전 이후)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만들고 법의 지배를 존중하고 부전(不戰)의 맹세를 견지했다"고 덧붙였다.

아베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부전의 맹세, 즉 다시는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밝혔지만, 일본의 2차대전 책임이나 이에 대한 사죄, 반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아 국제사회의 반발이 예상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애리조나기념관이 바라보이는 킬로 피어에서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AP)
중국, "쇼를 하지 말고 침략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라"

중국은 아베 총리가 진주만을 방문하기에 앞에서부터 침략 역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를 강력히 요구한 바 있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7일 정례브리핑에서 "진정으로 역사를 반성하는 것만이 화해를 실현하는 열쇠일 만큼 일본은 쇼하지 말고 침략의 역사를 깊이 반성하라"고 촉구했다. 화 대변인은 “일본은 진주만에 있는 희생자의 영혼을 단순히 위로하면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사과 발언을 뺀 보여주기식 행동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 추모공원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모 기념탑 앞에서 아베 일본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AP)
아베 일본 총리의 이번 진주만 방문은 지난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답방 성격으로 해석되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어느 날 아침에, 죽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고, 세계는 바뀌어 버렸습니다. 밝은 섬광과 불의 벽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그 자신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5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원자폭탄 희생자들의 추모 공원이 있는 히로시마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의 한 토막만 더 인용해보자.

"우리는 이 도시의 중심에 발을 딛고 서서 원자 폭탄이 폭발한 순간을 그려봐야만 합니다. 엄청난 모습에 놀라 넋이 나갔을 어린이들의 공포를 그려봐야만 합니다. 침묵 속에서 들리는 듯한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전의 전쟁들을 포함해, 세계 대전 정점의 참혹한 폭발에서 희생된 무고한 인명들에 대해 묵념해야 합니다. 앞으로 올 전쟁의 희생자들까지도…."

오바마 대통령은 이처럼 세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참상의 하나인 원자 폭탄 희생자들에 대해 추모를 하면서도 원폭 투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번 아베 일본 총리도 하와이 진주만 방문 과정에서 과거 침략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때로는 가해자였고 때로는 피해자였던 미국과 일본 두 나라가 사과 없이 상징인 장소를 서로 방문함으로써 '아픈 과거 청산'을 사실상 마무리한 셈이다.

아베 일본 총리가 "전쟁에서 싸우던 미국과 일본이 이제 깊고 강하게 맺어진 '희망의 동맹'이 됐으며 세계인에게 진주만이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선언을 하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제2차 대전 당시 적이었던 미·일 양국이 전쟁의 상처를 우애로 바꿔 동맹으로 발전시켰고,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한 미·일 동맹이 세계 평화의 근간"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시대, 미·일 관계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하와이 진주만에서 미·일 동맹을 재확인했지만, 다음 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취임으로 두 나라 관계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전망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아베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진주만을 방문한 것은 그간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두 정상에게는 "상징적인 최고의 업적"지만, 앞으로 "이러한 접근법은 어느 때보다 더 시험받을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내달 취임하는 트럼프 당선인이 그동안 미·일 동맹을 경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온 데다 양국을 둘러싼 대외환경도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트럼프 당선인은 아베 총리가 공을 들여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했고, 일본의 무역장벽과 주일미군 주둔비 등에 대해서도 거듭 불만을 드러냈다. 또 트럼프 당선인이 북한의 핵무장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중국에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점도 미·일 두 나라 관계에 위험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외교협회의 일본 전문가 실라 스미스는 "중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은 환영"하지만 "훨씬 더 적대적인 미·중 관계는 일본에는 난처한 일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아베 총리와 일본 관리들은 미·일 간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자고 트럼프 당선인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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