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7) 달걀, 생명의 온기를 지닌 존엄한 먹거리

입력 2017.01.19 (16:3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달걀, 어린 시절 최고의 음식

지금이야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닭을 기르는 집을 보기 힘들어졌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농가에서는 집집마다 닭을 길렀습니다. 닭은 특별한 날 잡는 보양식이거나 가난한 집에서는 장날 내다 팔아 시인의 묘사처럼 학용품도 사고 신발도 사는 등 쏠쏠하게 생활에 보탬이 됐습니다. 암탉이 하루 한 알씩 둥지에 낳아놓는 달걀은 가족들의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요.


농촌에서 태어난 이 원로시인 역시 어릴 적 닭장에 닭이 갓 낳은 달걀을 발견했을 때의 그 흥분과 설렘을 잊지 못하나 봅니다. 늘 거대한 언어의 덤불 속에서 시어 하나 찾기 위해 낑낑대는 시인은 빨간 피도 묻어 있는 싱싱한 달걀을 보면서 자신의 시어(詩語)를 떠올립니다. 어미 닭의 온기에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온기까지 더해져 한없이 따스하고 매끄러운 달걀 같은 시를 쓸 수는 없을까? 시인들이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닭이 달걀을 낳거나 오랫동안 제 몸의 온기를 불어넣어 병아리를 탄생시키는 일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닭을 직접 키우는 농가는 아니어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달걀은 어떤 가정이든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상징하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식욕이 왕성한 학창 시절,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던 그 시절 언제나 안단테로 오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밥을 우아하게 덮고 있는 달걀부침! 보는 순간 입으로는 침이 꿀꺽 넘어가고, 젓가락을 드는 손가락에는 힘이 절로 들어가고, 가슴에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하나 가득 굅니다. 더러는 친구들에게 들키지 말고 먹으라고 달걀부침을 밥 위에 얹지 않고 도시락 밑에 깔아주는 어머님도 계셨습니다.

달걀이 반찬 중에 가장 맛있었던 한 어린아이는 이런 시를 썼군요.


하긴 졸린 눈을 부벼뜨고 밥상에 앉으면 입이 껄끄럽습니다. 딱딱한 반찬들은 목에 걸리고 시큼한 김치는 진저리가 나는데 달걀은 부드럽고 감미롭게 넘어가니 어떻게 다른 반찬에 젓가락이 가겠습니까? 손주가 달걀 말고 밥도 국도 다른 반찬도 골고루 먹고 튼튼하게 자라길 바라는 할머니의 내리사랑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제가 손주라도 입맛이 떨어지겠는데요.

어디 학생뿐입니까? 모처럼의 나들이에 가지고 가는 음식에서도, 열차 안에서 팔던 심심풀이 간식거리에서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술꾼들의 안주에서도 삶은 달걀이나 달걀 프라이는 빠지지 않는 효자음식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커피를 파는 다방에서조차 '모닝커피'라는 이름으로 달걀노른자를 커피에 떨궈주는 기상천외한 음식 문화가 있었으려고요.

지금이야 석유화합물로 만든 케이스나 판에 달걀을 담지만, 예전에는 볏짚으로 만든 망태에 10개씩 하얀 달걀을 소중하게 담아 선물을 하기도 했습니다. '꾸러미'라는 우리말은 어쩐지 달걀의 뽀얗고 어여쁜 모양과 썩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단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도 냉면이나 비빔국수 같은 음식이 나올 때 미끈한 몸통에 반달 같은 노른자를 품은 달걀이 안보이면 왠지 허전하고 서운합니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라면에도 계란이 풀어져 있어야 더 든든했고 떡국과 만두에도 실타래 같은 계란이 보이면 구미가 더 당깁니다. 막걸리나 소주 한잔 하러 포장마차나 허름한 선술집을 가서도 마땅히 떠오르는 안주가 없을 때는 우선 계란말이를 시키곤 합니다. 노릇노릇 구워진 계란 속에 파와 당근 양파 등이 빼곡히 박혀 있는 계란말이는 맛도 최고 영양도 최고입니다.

계란말이 한 접시면 소주 서너 병이 거뜬합니다. 달걀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식품이지만, 빵과 과자 국수와 만두 등 온갖 먹거리에 약방의 감초처럼 안 들어가는 데가 없으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달걀의 힘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가성비'가 달걀보다 높은 식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50g 안팎의 이 작은 달걀은 단백질과 칼슘, 인, 철, 칼륨, 비타민 등 몸에 좋은 영양소가 풍부해 완전식품이라고 불립니다. 열량은 100g 당 139kcal 정도, 삶은 달걀 두 개만 먹어도 한 끼 식사대용으로 거뜬합니다. 달걀의 단백질 성분은 쇠고기나 우유보다 순도가 높고, 노른자에는 풍부한 지방이 함유돼 있습니다. 여기에다 필수아미노산과 레시틴, 지질, 엽산, 각종 비타민 등이 풍부해 지방과 단백질 보충이 어려웠던 서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식품이었습니다.

요즘이야 풍부한 해산물과 육류 덕분에 오히려 지방이나 콜레스테롤을 과다 섭취하는 것이 도리어 문제가 되고 있어서 달걀도 도매금으로 경계 대상이 되고 있지만, 적당히 먹는다면 달걀은 가장 싼 값으로 양질의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식품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 불똥, 애꿎은 달걀값 폭등

온 국민의 식탁에 부담 없이 오르던 달걀값과 수급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조류 인플루엔자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양계장의 닭은 무차별 매몰 처분됐고, 이 여파로 달걀 생산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50일 남짓 기간에 무려 3천만 마리가 넘는 닭이 매몰 처리됐습니다. 사상 최악의 피해입니다. 전국에서 기르는 닭이 줄잡아 1억 5천만 마리니까 20%넘게 희생된 것입니다. 특히 달걀을 얻기 위해 기르는 산란계(産卵鷄)의 경우 전체의 3분의 1 가량인 2천3백만 마리가 죽었으니 달걀값이 뛰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생산되는 달걀은 4천3백만 개 정도인데, AI 파동으로 3천만 개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농수산물 유통공사의 분석을 보면, 달걀값은 30개 한 판의 경우 지난해 12월 7일 5,602원에서 올 1월 3일에는 8,389원으로 급등했고, 1월 13일에는 9,491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달걀 한 판에 만 원 시대가 된 셈입니다. 할 수 없이 정부는 미국산 달걀을 수입하고 있지만, 달걀 공급량 부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고, 운반비용이 많이 들어 값은 크게 내려가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소비되는 달걀은 얼마나 될까요? 줄잡아 3천5백만 개 정도입니다.


지난 1970년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00개 정도였습니다. 30년 뒤인 2000년에는 184개, 2010년에는 236개, 2015년에는 268개로 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균 사흘에 두 개 꼴로 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도 OECD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게 먹는 셈이라고 하니 1인당 300개 소비 시대도 곧 올 듯 합니다. 산란용 닭이 대량생산되면서 그동안 값은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지난 1985년에서 2015년까지 30년 동안 약 두 배 반 정도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서민들이 달걀을 즐겨 먹는 이유 중의 하나도 비교적 저렴한 값입니다.

산란닭과 달걀 그리고 병아리

그러나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주는 달걀의 생산 현장을 보면 이내 우리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산란닭의 경우 생육조건은 그야말로 가혹하고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최소한의 면적에서 최대한의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닭 1마리당 A4 용지 반장 분량의 비좁은 공간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알을 많이 낳게 하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으니 닭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이나 고온 등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갑니다.

집단 농장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닭을 놓아 먹이는 친환경 농장이나 농가의 닭은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어 AI를 이겨냅니다. 여름이면 닭장 온도가 급등하면서 폭염으로 죽어 나가는 닭의 숫자도 해마다 수백만 마리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례없이 더웠던 지난해 여름의 경우 무려 4백만 마리에 가까운 닭이 폐사했습니다.

사실 달걀은 생명체입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무기물질들을 배합해 기계로 척척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미닭이 품거나 인공으로 부화시키면 삐악삐악 앙증맞은 소리를 내면서 그 노란 털로 세상을 활보하는 존엄한 생명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AI 재앙을 계기로 오로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매몰돼 '생산성'이라는 비정한 용어로 최대한의 이윤을 높이려는 기업과 농가, 그리고 유통업자들의 생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장형 양계 시스템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근본적으로 전염병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연례행사로 떼죽음을 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사고방식과 생산양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끔찍한 재앙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인들은 오로지 인간의 돈벌이에 희생되는 달걀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김승희 시인은 냉장고를 열 때마다 더는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는 달걀들을 애도합니다.


살아있는 뭇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애정과 연민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싱싱한 달걀을 무심하게 장바구니에 담고 냉장고에 가득 찬 달걀을 보면서 가슴 뿌듯해 하고 맛있게 달걀을 먹으면서 느끼던 소소한 행복감에 덜컥 제동이 걸립니다. 냉장고를 무수히 열었어도 몸뚱이가 언 달걀들의 비명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시인은 이 세상에서도 저 냉장고의 달걀처럼 부화하지 못한 사람들의 꿈이 무수히 식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도 더 이상 햇살 쏟아지는 마당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냉장고 속 달걀들처럼 마음 놓고 세상을 활보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성찰합니다. 자본과 효율의 그물이 촘촘히 쳐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냉장고 속에 갇힌 존재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절망인데도 조용하고 초연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생각해 봅니다.


그런가 하면 달걀에서 따스한 연인의 숨결을 느끼는 시도 있습니다. 지금은 창백한 하얀 색의 달걀은 거의 사라졌고 노란 달걀이 대부분이니 그 둥글고 따스한 달걀에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자어인 '계란(鷄卵)'과 순수 우리말인 '달걀'을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뜻이랄 수 있는 기의(記意)는 동일하지만, 왠지 형식에 해당하는 기표(記表)는 사뭇 다릅니다. 계란보다는 '달걀'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정말 시인의 묘사처럼 부드럽고 따스합니다. 유성음인 'ㄹ'이 겹쳐서 그럴까요?

이제니 시인은 달걀의 부드러운 어감과 타원형의 갸름한 모양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마음을 떠올립니다. 그 마음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마음, 무언가 안심되는 마음인가 봅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어 고귀한 생명인 병아리를 만들듯, 자신의 애틋한 마음도 오랫동안 품어 사랑을 이루고 싶은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앞두고 달걀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달걀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생명체처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달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부터 봄, 풍요, 다산(多産) 등 보이지 않는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죽은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것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퍽 재미있습니다. '삶은 달걀'에서 '삶은'은 물에 '삶아놓은'(boiled) 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삶'(life)이라는 뜻일까요? 혹은 두 뜻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중의적인 표현일까요?

우리도 유한의 굴레를 벗어나기를

그런데 어떤 달걀은 병아리가 되고 어떤 달걀은 프라이가 될까요? 이런 재미있는 발상을 한 시도 있습니다.


빵! 터지지 않으시나요? 혹시 여러분도 한두 번쯤 이런 씁쓸한 체험을 하지 않으셨나요? 요즘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연애하는 남자와 '밀당'을 하다가 시 속의 주인공은 아마도 먼저 '채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상처가 얼마나 쓰리고 아플까요. 프라이팬에 심장을 달군 것처럼 화끈거리고 소금까지 뿌려진 것 같겠지요.

시인이 구분하는 병아리와 달걀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면 병아리이고, 수동적으로 타자의 선택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면 프라이가 되는 것입니다. 곰곰 생각하면 기발하고도 명쾌한 시인의 정의에 무릎이 쳐집니다. 인공부화기이든 어미닭이 품었든, 달걀이 병아리가 되려면 껍데기 안에 있는 병아리는 제 부리로 힘차게 달걀 껍데기를 쪼아 균열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달걀 껍데기를 탁 깨는 순간 그 달걀은 지글거리는 프라이팬 위로 떨어지는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이렇게 유쾌하게 그릴 수 있다면 실연도 슬픈 것만은 아니겠습니다.

어디 연애뿐일까요? 우리는 가정과 일, 수없이 맞닥뜨리는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운명을 결정할 것인가, 대세에 따라 혹은 타인의 선택에 따라갈 것인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모든 경우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자꾸 많아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시를 읽으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달걀이 부화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약 3주 정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어둠 속에서 인내하면서 핏줄과 신경, 다리와 날개를 만드는 달걀의 인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시인도 있습니다.


"강해지기 위해 뭉쳐져야 했다"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한 마리의 병아리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자꾸 좁아지는 어둠의 공간을 참아야 하고, 몸통의 서로 다른 부위들이 상호 압박하는 고통의 순간을 참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21일 동안 태양이 물속에 가라앉았다고 다시 떠오르면 마침내 달걀은 어둠을 뚫고 껍데기를 깨고 눈부신 병아리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겠지요. 태양보다 더 눈부신 노란 빛깔의 몸통으로 말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 달걀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유한한 신체를 지니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한계 속에서도 병아리가 되는 달걀처럼 무언가 꿈을 가지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외로움도 참아야 하고, 굴욕도 견뎌야 하고 때로 순간의 쾌락과 욕망도 억제해야 합니다. 한번 왔다 가는 세상인데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속절없이 프라이가 되는 삶을 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바로가기] ☞ [임병걸의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시리즈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7) 달걀, 생명의 온기를 지닌 존엄한 먹거리
    • 입력 2017-01-19 16:32:27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달걀, 어린 시절 최고의 음식

지금이야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닭을 기르는 집을 보기 힘들어졌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농가에서는 집집마다 닭을 길렀습니다. 닭은 특별한 날 잡는 보양식이거나 가난한 집에서는 장날 내다 팔아 시인의 묘사처럼 학용품도 사고 신발도 사는 등 쏠쏠하게 생활에 보탬이 됐습니다. 암탉이 하루 한 알씩 둥지에 낳아놓는 달걀은 가족들의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고요.


농촌에서 태어난 이 원로시인 역시 어릴 적 닭장에 닭이 갓 낳은 달걀을 발견했을 때의 그 흥분과 설렘을 잊지 못하나 봅니다. 늘 거대한 언어의 덤불 속에서 시어 하나 찾기 위해 낑낑대는 시인은 빨간 피도 묻어 있는 싱싱한 달걀을 보면서 자신의 시어(詩語)를 떠올립니다. 어미 닭의 온기에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온기까지 더해져 한없이 따스하고 매끄러운 달걀 같은 시를 쓸 수는 없을까? 시인들이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닭이 달걀을 낳거나 오랫동안 제 몸의 온기를 불어넣어 병아리를 탄생시키는 일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닭을 직접 키우는 농가는 아니어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달걀은 어떤 가정이든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상징하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식욕이 왕성한 학창 시절,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던 그 시절 언제나 안단테로 오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하얀 밥을 우아하게 덮고 있는 달걀부침! 보는 순간 입으로는 침이 꿀꺽 넘어가고, 젓가락을 드는 손가락에는 힘이 절로 들어가고, 가슴에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하나 가득 굅니다. 더러는 친구들에게 들키지 말고 먹으라고 달걀부침을 밥 위에 얹지 않고 도시락 밑에 깔아주는 어머님도 계셨습니다.

달걀이 반찬 중에 가장 맛있었던 한 어린아이는 이런 시를 썼군요.


하긴 졸린 눈을 부벼뜨고 밥상에 앉으면 입이 껄끄럽습니다. 딱딱한 반찬들은 목에 걸리고 시큼한 김치는 진저리가 나는데 달걀은 부드럽고 감미롭게 넘어가니 어떻게 다른 반찬에 젓가락이 가겠습니까? 손주가 달걀 말고 밥도 국도 다른 반찬도 골고루 먹고 튼튼하게 자라길 바라는 할머니의 내리사랑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제가 손주라도 입맛이 떨어지겠는데요.

어디 학생뿐입니까? 모처럼의 나들이에 가지고 가는 음식에서도, 열차 안에서 팔던 심심풀이 간식거리에서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술꾼들의 안주에서도 삶은 달걀이나 달걀 프라이는 빠지지 않는 효자음식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커피를 파는 다방에서조차 '모닝커피'라는 이름으로 달걀노른자를 커피에 떨궈주는 기상천외한 음식 문화가 있었으려고요.

지금이야 석유화합물로 만든 케이스나 판에 달걀을 담지만, 예전에는 볏짚으로 만든 망태에 10개씩 하얀 달걀을 소중하게 담아 선물을 하기도 했습니다. '꾸러미'라는 우리말은 어쩐지 달걀의 뽀얗고 어여쁜 모양과 썩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단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도 냉면이나 비빔국수 같은 음식이 나올 때 미끈한 몸통에 반달 같은 노른자를 품은 달걀이 안보이면 왠지 허전하고 서운합니다. 구수한 냄새와 함께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라면에도 계란이 풀어져 있어야 더 든든했고 떡국과 만두에도 실타래 같은 계란이 보이면 구미가 더 당깁니다. 막걸리나 소주 한잔 하러 포장마차나 허름한 선술집을 가서도 마땅히 떠오르는 안주가 없을 때는 우선 계란말이를 시키곤 합니다. 노릇노릇 구워진 계란 속에 파와 당근 양파 등이 빼곡히 박혀 있는 계란말이는 맛도 최고 영양도 최고입니다.

계란말이 한 접시면 소주 서너 병이 거뜬합니다. 달걀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식품이지만, 빵과 과자 국수와 만두 등 온갖 먹거리에 약방의 감초처럼 안 들어가는 데가 없으니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달걀의 힘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가성비'가 달걀보다 높은 식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50g 안팎의 이 작은 달걀은 단백질과 칼슘, 인, 철, 칼륨, 비타민 등 몸에 좋은 영양소가 풍부해 완전식품이라고 불립니다. 열량은 100g 당 139kcal 정도, 삶은 달걀 두 개만 먹어도 한 끼 식사대용으로 거뜬합니다. 달걀의 단백질 성분은 쇠고기나 우유보다 순도가 높고, 노른자에는 풍부한 지방이 함유돼 있습니다. 여기에다 필수아미노산과 레시틴, 지질, 엽산, 각종 비타민 등이 풍부해 지방과 단백질 보충이 어려웠던 서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식품이었습니다.

요즘이야 풍부한 해산물과 육류 덕분에 오히려 지방이나 콜레스테롤을 과다 섭취하는 것이 도리어 문제가 되고 있어서 달걀도 도매금으로 경계 대상이 되고 있지만, 적당히 먹는다면 달걀은 가장 싼 값으로 양질의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식품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 불똥, 애꿎은 달걀값 폭등

온 국민의 식탁에 부담 없이 오르던 달걀값과 수급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조류 인플루엔자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양계장의 닭은 무차별 매몰 처분됐고, 이 여파로 달걀 생산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50일 남짓 기간에 무려 3천만 마리가 넘는 닭이 매몰 처리됐습니다. 사상 최악의 피해입니다. 전국에서 기르는 닭이 줄잡아 1억 5천만 마리니까 20%넘게 희생된 것입니다. 특히 달걀을 얻기 위해 기르는 산란계(産卵鷄)의 경우 전체의 3분의 1 가량인 2천3백만 마리가 죽었으니 달걀값이 뛰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평균 생산되는 달걀은 4천3백만 개 정도인데, AI 파동으로 3천만 개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농수산물 유통공사의 분석을 보면, 달걀값은 30개 한 판의 경우 지난해 12월 7일 5,602원에서 올 1월 3일에는 8,389원으로 급등했고, 1월 13일에는 9,491원까지 치솟았습니다. 달걀 한 판에 만 원 시대가 된 셈입니다. 할 수 없이 정부는 미국산 달걀을 수입하고 있지만, 달걀 공급량 부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고, 운반비용이 많이 들어 값은 크게 내려가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 소비되는 달걀은 얼마나 될까요? 줄잡아 3천5백만 개 정도입니다.


지난 1970년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00개 정도였습니다. 30년 뒤인 2000년에는 184개, 2010년에는 236개, 2015년에는 268개로 늘었습니다. 그러니까 평균 사흘에 두 개 꼴로 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도 OECD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적게 먹는 셈이라고 하니 1인당 300개 소비 시대도 곧 올 듯 합니다. 산란용 닭이 대량생산되면서 그동안 값은 크게 오르지 않았습니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지난 1985년에서 2015년까지 30년 동안 약 두 배 반 정도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서민들이 달걀을 즐겨 먹는 이유 중의 하나도 비교적 저렴한 값입니다.

산란닭과 달걀 그리고 병아리

그러나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주는 달걀의 생산 현장을 보면 이내 우리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산란닭의 경우 생육조건은 그야말로 가혹하고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최소한의 면적에서 최대한의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닭 1마리당 A4 용지 반장 분량의 비좁은 공간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알을 많이 낳게 하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 잠을 제대로 재우지 않으니 닭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면역력이 떨어져 전염병이나 고온 등에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갑니다.

집단 농장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닭을 놓아 먹이는 친환경 농장이나 농가의 닭은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어 AI를 이겨냅니다. 여름이면 닭장 온도가 급등하면서 폭염으로 죽어 나가는 닭의 숫자도 해마다 수백만 마리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례없이 더웠던 지난해 여름의 경우 무려 4백만 마리에 가까운 닭이 폐사했습니다.

사실 달걀은 생명체입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무기물질들을 배합해 기계로 척척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미닭이 품거나 인공으로 부화시키면 삐악삐악 앙증맞은 소리를 내면서 그 노란 털로 세상을 활보하는 존엄한 생명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AI 재앙을 계기로 오로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매몰돼 '생산성'이라는 비정한 용어로 최대한의 이윤을 높이려는 기업과 농가, 그리고 유통업자들의 생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장형 양계 시스템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근본적으로 전염병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연례행사로 떼죽음을 당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사고방식과 생산양식이 개선되지 않는 한 끔찍한 재앙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인들은 오로지 인간의 돈벌이에 희생되는 달걀에 대해 연민의 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김승희 시인은 냉장고를 열 때마다 더는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는 달걀들을 애도합니다.


살아있는 뭇 생명체에 대한 시인의 무한한 애정과 연민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싱싱한 달걀을 무심하게 장바구니에 담고 냉장고에 가득 찬 달걀을 보면서 가슴 뿌듯해 하고 맛있게 달걀을 먹으면서 느끼던 소소한 행복감에 덜컥 제동이 걸립니다. 냉장고를 무수히 열었어도 몸뚱이가 언 달걀들의 비명을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시인은 이 세상에서도 저 냉장고의 달걀처럼 부화하지 못한 사람들의 꿈이 무수히 식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자신도 더 이상 햇살 쏟아지는 마당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냉장고 속 달걀들처럼 마음 놓고 세상을 활보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성찰합니다. 자본과 효율의 그물이 촘촘히 쳐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냉장고 속에 갇힌 존재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절망인데도 조용하고 초연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생각해 봅니다.


그런가 하면 달걀에서 따스한 연인의 숨결을 느끼는 시도 있습니다. 지금은 창백한 하얀 색의 달걀은 거의 사라졌고 노란 달걀이 대부분이니 그 둥글고 따스한 달걀에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은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자어인 '계란(鷄卵)'과 순수 우리말인 '달걀'을 가만히 되뇌어 봅니다. 뜻이랄 수 있는 기의(記意)는 동일하지만, 왠지 형식에 해당하는 기표(記表)는 사뭇 다릅니다. 계란보다는 '달걀'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정말 시인의 묘사처럼 부드럽고 따스합니다. 유성음인 'ㄹ'이 겹쳐서 그럴까요?

이제니 시인은 달걀의 부드러운 어감과 타원형의 갸름한 모양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마음을 떠올립니다. 그 마음은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마음, 무언가 안심되는 마음인가 봅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어 고귀한 생명인 병아리를 만들듯, 자신의 애틋한 마음도 오랫동안 품어 사랑을 이루고 싶은 것일까요?

그러고 보니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앞두고 달걀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려 선물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달걀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생명체처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달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부터 봄, 풍요, 다산(多産) 등 보이지 않는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죽은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 것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퍽 재미있습니다. '삶은 달걀'에서 '삶은'은 물에 '삶아놓은'(boiled) 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삶'(life)이라는 뜻일까요? 혹은 두 뜻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중의적인 표현일까요?

우리도 유한의 굴레를 벗어나기를

그런데 어떤 달걀은 병아리가 되고 어떤 달걀은 프라이가 될까요? 이런 재미있는 발상을 한 시도 있습니다.


빵! 터지지 않으시나요? 혹시 여러분도 한두 번쯤 이런 씁쓸한 체험을 하지 않으셨나요? 요즘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연애하는 남자와 '밀당'을 하다가 시 속의 주인공은 아마도 먼저 '채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상처가 얼마나 쓰리고 아플까요. 프라이팬에 심장을 달군 것처럼 화끈거리고 소금까지 뿌려진 것 같겠지요.

시인이 구분하는 병아리와 달걀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주체적으로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면 병아리이고, 수동적으로 타자의 선택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면 프라이가 되는 것입니다. 곰곰 생각하면 기발하고도 명쾌한 시인의 정의에 무릎이 쳐집니다. 인공부화기이든 어미닭이 품었든, 달걀이 병아리가 되려면 껍데기 안에 있는 병아리는 제 부리로 힘차게 달걀 껍데기를 쪼아 균열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달걀 껍데기를 탁 깨는 순간 그 달걀은 지글거리는 프라이팬 위로 떨어지는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이렇게 유쾌하게 그릴 수 있다면 실연도 슬픈 것만은 아니겠습니다.

어디 연애뿐일까요? 우리는 가정과 일, 수없이 맞닥뜨리는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운명을 결정할 것인가, 대세에 따라 혹은 타인의 선택에 따라갈 것인가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모든 경우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자꾸 많아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시를 읽으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달걀이 부화하는 데 필요한 기간은 약 3주 정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어둠 속에서 인내하면서 핏줄과 신경, 다리와 날개를 만드는 달걀의 인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시인도 있습니다.


"강해지기 위해 뭉쳐져야 했다"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한 마리의 병아리가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자꾸 좁아지는 어둠의 공간을 참아야 하고, 몸통의 서로 다른 부위들이 상호 압박하는 고통의 순간을 참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21일 동안 태양이 물속에 가라앉았다고 다시 떠오르면 마침내 달걀은 어둠을 뚫고 껍데기를 깨고 눈부신 병아리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겠지요. 태양보다 더 눈부신 노란 빛깔의 몸통으로 말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 달걀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유한한 신체를 지니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한계 속에서도 병아리가 되는 달걀처럼 무언가 꿈을 가지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외로움도 참아야 하고, 굴욕도 견뎌야 하고 때로 순간의 쾌락과 욕망도 억제해야 합니다. 한번 왔다 가는 세상인데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속절없이 프라이가 되는 삶을 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바로가기] ☞ [임병걸의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시리즈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