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경전철, 자기실현적 예언의 실패

입력 2017.01.3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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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술집 사장이었던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90년대 중반 지역의 한 대학교 앞에서 술집을 열었다. 그 일대 가장 큰 규모의 주점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벽화 장식으로 내부를 꾸미고 값비싼 집기를 사들였다. 입소문만 나면 손님이 넘칠 것이라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그 대학 학생들은 주로 시내로 나가 술을 마셨다. 학교 앞은 식당이 없어 저녁을 먹기에도 불편했고 당구장이나 노래방도 없었다. 게다가 1년 중 절반 가까이는 방학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의 생활 패턴을 유심히 관찰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위험요소였다. 한 마디로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

난데없는 술집 이야기를 꺼낸 건 경전철 때문이다. 의정부 경전철 운영사가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 2012년 개통 이후 누적 적자가 4,24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계약대로 앞으로 25년 동안 운영할 경우 예상되는 적자는 1조 원이다. 정상적인 사업자라면 이런 일을 지속할 리 없다.

문제는 운영사가 파산했을 경우 의정부시가 지급해야 할 돈(해지 시 지급금)이다. 의정부시와 운영사가 맺은 실시 협약을 보면 이 돈은 2,000억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의정부시는 어떻게든 파산을 막겠다고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운영사가 파산한다면 매년 수백억 원의 세금을 쏟아 부어야 할 처지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시작은 잘못된 수요 예측이다. 의정부시와 운영사는 개통 첫해 하루 평균 이용객을 7만 9천 명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만 2천 명으로 15%에 불과했다. 지난해에도 승객은 3만 5천 명으로 예상치인 11만 9천 명에 한참 못 미친다.

다른 경전철도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하다. 김해-부산 경전철은 지난해 하루 평균 이용객이 5만 명을 돌파했지만 예측치는 21만 명이다. 용인 경전철은 개통 첫해 승객을 16만 명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5% 수준인 8천 명에 그쳤다.


엉터리 수요 예측의 실태는 이미 감사원 감사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예측 모델에서는 역사 반경 500m 내에서 역사에 접근하는 평균 시간을 2분 30초로 가정한다. 하지만 직선거리로 500m를 걸어도 7분이 걸린다. 평균은 최소한 3분 30초 이상이어야 한다. 역사에서 대기하는 시간과 도착역에서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경전철의 편의성을 과장한 것이다.

인구 증가와 진행 중인 개발 사업은 최상의 결과를 가정해 반영했다. 수요 예측엔 2020년 의정부시의 인구가 52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포함됐지만 2008년 이후 43만 명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수요를 예측하고 결정을 내렸다기보다는 이미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린 뒤 수요를 끼워 맞춘 셈이다. 이 위험한 자기실현적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다운받기] 경전철 건설사업 감사결과 보고서 [HWP]

다시 지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빚을 떠안은 채 1년 만에 장사를 접어야 했다. 수요 예측을 게을리 한 대가는 쓰디쓴 실패였다. 빚을 갚고 재기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선택과 결정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당연한 교훈을 얻었다. 그렇다면 파국으로 돌진하고 있는 경전철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수요예측 조사를 했던 한국교통연구원(KOTI)은 당시 만들었던 최종 보고서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분실했다는 것이다. 의정부시도 이 보고서를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엉터리 수요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진행하다가 파산에 직면했는데 그 엉터리 수요 예측 보고서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분실'이 아니라 '인멸'이다.

지난 24일 ‘의정부경전철 진실을 요구하는 시민모임’은 “경전철 실패 비용을 시민 세금으로 물어줄 수 없다”며 의정부시청 앞에서 경전철 파탄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지난 24일 ‘의정부경전철 진실을 요구하는 시민모임’은 “경전철 실패 비용을 시민 세금으로 물어줄 수 없다”며 의정부시청 앞에서 경전철 파탄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운영사는 적자를 못 견디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시는 파산을 막겠다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과거 경전철 사업을 추진했던 시장과 지역 정치인들은 묵묵부답이다. 결국 세금 내는 시민들에게 사업 실패의 책임이 돌아갈 것이다. 장밋빛 경전철 공약으로 표를 얻은 정치인들만 재미를 봤다. 그들에게 표를 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 셈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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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경전철, 자기실현적 예언의 실패
    • 입력 2017-01-31 09:03:20
    취재후·사건후
한때 술집 사장이었던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90년대 중반 지역의 한 대학교 앞에서 술집을 열었다. 그 일대 가장 큰 규모의 주점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벽화 장식으로 내부를 꾸미고 값비싼 집기를 사들였다. 입소문만 나면 손님이 넘칠 것이라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그 대학 학생들은 주로 시내로 나가 술을 마셨다. 학교 앞은 식당이 없어 저녁을 먹기에도 불편했고 당구장이나 노래방도 없었다. 게다가 1년 중 절반 가까이는 방학이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의 생활 패턴을 유심히 관찰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위험요소였다. 한 마디로 수요 예측에 실패했다.

난데없는 술집 이야기를 꺼낸 건 경전철 때문이다. 의정부 경전철 운영사가 결국 파산을 신청했다. 2012년 개통 이후 누적 적자가 4,24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계약대로 앞으로 25년 동안 운영할 경우 예상되는 적자는 1조 원이다. 정상적인 사업자라면 이런 일을 지속할 리 없다.

문제는 운영사가 파산했을 경우 의정부시가 지급해야 할 돈(해지 시 지급금)이다. 의정부시와 운영사가 맺은 실시 협약을 보면 이 돈은 2,000억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의정부시는 어떻게든 파산을 막겠다고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만약 운영사가 파산한다면 매년 수백억 원의 세금을 쏟아 부어야 할 처지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시작은 잘못된 수요 예측이다. 의정부시와 운영사는 개통 첫해 하루 평균 이용객을 7만 9천 명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만 2천 명으로 15%에 불과했다. 지난해에도 승객은 3만 5천 명으로 예상치인 11만 9천 명에 한참 못 미친다.

다른 경전철도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하다. 김해-부산 경전철은 지난해 하루 평균 이용객이 5만 명을 돌파했지만 예측치는 21만 명이다. 용인 경전철은 개통 첫해 승객을 16만 명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5% 수준인 8천 명에 그쳤다.


엉터리 수요 예측의 실태는 이미 감사원 감사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예측 모델에서는 역사 반경 500m 내에서 역사에 접근하는 평균 시간을 2분 30초로 가정한다. 하지만 직선거리로 500m를 걸어도 7분이 걸린다. 평균은 최소한 3분 30초 이상이어야 한다. 역사에서 대기하는 시간과 도착역에서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경전철의 편의성을 과장한 것이다.

인구 증가와 진행 중인 개발 사업은 최상의 결과를 가정해 반영했다. 수요 예측엔 2020년 의정부시의 인구가 52만 명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포함됐지만 2008년 이후 43만 명 수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수요를 예측하고 결정을 내렸다기보다는 이미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린 뒤 수요를 끼워 맞춘 셈이다. 이 위험한 자기실현적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다운받기] 경전철 건설사업 감사결과 보고서 [HWP]

다시 지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빚을 떠안은 채 1년 만에 장사를 접어야 했다. 수요 예측을 게을리 한 대가는 쓰디쓴 실패였다. 빚을 갚고 재기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선택과 결정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당연한 교훈을 얻었다. 그렇다면 파국으로 돌진하고 있는 경전철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수요예측 조사를 했던 한국교통연구원(KOTI)은 당시 만들었던 최종 보고서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분실했다는 것이다. 의정부시도 이 보고서를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엉터리 수요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진행하다가 파산에 직면했는데 그 엉터리 수요 예측 보고서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분실'이 아니라 '인멸'이다.

지난 24일 ‘의정부경전철 진실을 요구하는 시민모임’은 “경전철 실패 비용을 시민 세금으로 물어줄 수 없다”며 의정부시청 앞에서 경전철 파탄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운영사는 적자를 못 견디겠다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시는 파산을 막겠다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과거 경전철 사업을 추진했던 시장과 지역 정치인들은 묵묵부답이다. 결국 세금 내는 시민들에게 사업 실패의 책임이 돌아갈 것이다. 장밋빛 경전철 공약으로 표를 얻은 정치인들만 재미를 봤다. 그들에게 표를 준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 셈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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