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테’의 비밀…구상나무 죽음을 밝혀라

입력 2017.02.05 (12:02) 수정 2017.02.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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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가로로 자르면 나타나는 동심원들, 나이테입니다. 봄에는 나무의 세포 분열이 왕성해 나무 색깔이 밝고 목질도 부드럽습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는 세포 분열이 더뎌지면서 색이 진하고 단단해집니다. 이 때문에 해마다 하나씩 나무에 동그란 원이 나타나지요. 이런 원의 개수를 세어 보면 나무 나이를 알 수 있다고 해서 이름도 나이테입니다. 하지만 나이테에는 '나이' 말고도 뜻밖의 비밀들이 숨어 있습니다.


속이 빈 관으로 나무에 구멍을 뚫고 빼내면 나이테 간격이 오롯이 드러난 나뭇조각이 빠져나옵니다. 들여다보면 나이테 두께가 해마다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성장 당시의 온도와 강수량 등 주변 환경에 따라 나무의 생장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이테 폭에 따라 그래프를 그리면 나무의 성장 과정이 좀 더 명확해지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독특한 나이테 패턴은 같은 장소에서 살았던 나무마다 비슷하게 공유하게 됩니다.


시기별로 조금씩 다른 나무의 목편을 비교하면 나이테 패턴이 겹치는 곳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이테 패턴을 비교하는 크로스 데이팅(cross-dating) 작업을 통해 현재의 나이테 패턴에서부터 수천 년 전의 먼 과거까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라도 나이테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요. 이렇게 만들어진 '나이테폭 연대기'는 과거 기후와 자연환경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됩니다. 이른바 '연륜연대학(年輪年代學)'입니다.

구상나무 고사목. 지리산 영신봉.구상나무 고사목. 지리산 영신봉.

지리산의 구상나무 군락지입니다. 하얗게 말라 죽어 있는 나무들이 빽빽합니다. 대부분 구상나무입니다. 한때 울창했던 푸른 숲이 이제는 나무의 무덤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이테는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국립공원연구원은 덕유산과 지리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 주목을 상대로 나이테폭 연대기를 작성했습니다. 나무에서 시료를 뽑아낸 뒤 나이테 폭과 산소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과거 150년(1864~2015년)까지 나이테 패턴을 연결한 거죠. 이렇게 구상나무의 과거 역사가 복원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왼쪽은 건강한 구상나무. 오른쪽은 죽어가는 구상나무왼쪽은 건강한 구상나무. 오른쪽은 죽어가는 구상나무

건강한 나무와 고사한 나무의 나이테를 비교하면 성장량이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빨간 줄로 표시된 건강한 나무는 비교적 일정한 성장량을 보이지만 파란 줄로 표시한 나무는 1970년을 전후로 해서 서서히 생육이 떨어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2006년 결국 생육을 멈춥니다. 죽은 겁니다. 구상나무 상당수가 이런 형태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습니다. 한순간 죽은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서서히 약해지며 죽어간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무의 생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기후 요인은 강수량과 온도입니다. 계절별로 생장량과 강수량의 함수관계를 분석한 도표를 보면 3월부터 5월까지 봄철 강수량이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봄철에 수분 흡수가 부족해지면 다른 계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 겁니다. 기온의 경우는 11월과 1, 3, 4, 8월의 온도가 성장에 중요하지만, 구상나무 고사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고사한 구상나무. 덕유산 향적봉.고사한 구상나무. 덕유산 향적봉.

국립공원연구원은 구상나무 집단 고사의 주된 원인을 봄철 수분 흡수 부족 때문으로 추정했습니다. 1) 겨울철 적설량이 적거나 2) 온도가 높아서 눈 녹는 시기가 빨라지고 3) 봄철 강수량까지 적은 상황이 장기간 지속돼 고사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상나무들은 어느 시점부터 물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을까요? 그 해답도 나이테에 숨어 있습니다.

건강한 구상나무 군락지. 지리산 세석평전.건강한 구상나무 군락지. 지리산 세석평전.

자연 상태에는 세 가지 형태의 산소동위원소가 물속에 녹아 있습니다. 이 동위원소의 구성 비율은 강수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이테 속 셀룰로스를 분석해 보면 나이테마다 각각 다른 비율의 산소동위원소가 남아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나이테 속에 남아 있는 산소동위원소로 그 시기의 강수량을 밝혀낼 수 있는 겁니다. 나이테가 시기별 강수량도 기록하고 있는 셈이죠.

구상나무 고사. 지리산 반야봉.구상나무 고사. 지리산 반야봉.

국립공원연구원은 올해부터 지리산 반야봉의 구상나무 고사목 100그루에 대해 나이테의 산소동위원소를 분석할 예정입니다. 나이테 속에 담긴 시기별 강수량과 나무 성장량의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거죠. 이 자료를 통해 구상나무의 더욱 정확한 사망 원인과 시기를 밝혀낼 계획입니다.

넘어진 구상나무. 지리산 반야봉.넘어진 구상나무. 지리산 반야봉.

줄기가 잘린 구상나무. 지리산 벽소령.줄기가 잘린 구상나무. 지리산 벽소령.

지리산과 덕유산 구상나무 군락지에는 넘어지거나 가지가 잘린 채 죽은 나무들도 많습니다. 서 있는 채 서서히 죽은 게 아니라 넘어지거나 부러져서 갑자기 죽은 겁니다. 태풍이나 돌풍 등 강한 바람이 원인입니다. 역시 기후변화로 태풍의 강도가 세진 영향이 있겠지요. 이렇게 죽은 구상나무도 나이테 속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넘어진 구상나무. 덕유산 향적봉.넘어진 구상나무. 덕유산 향적봉.


파란 실선으로 나타난 구상나무는 2011년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생육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러다 2011년 갑자기 성장이 멈추고 맙니다. 서서히 성장량이 줄어들다가 죽은 고사목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입니다. 태풍에 넘어지면서 뿌리가 노출돼 죽은 겁니다. 이처럼 나이테만 보아도 나무의 사망 원인이 드러납니다.

지리산 세석평전 구상나무림.지리산 세석평전 구상나무림.

결국, 구상나무 군락지 쇠퇴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봄철 부족한 수분 공급이나 태풍이지요. 모두 나이테가 드러낸 사실입니다. 이러니 나이테는 말 그대로 나무의 사연을 담고 있는 '블랙박스'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고사목들도 각각의 '블랙박스'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인 겁니다.

건강한 구상나무. 지리산 연하봉.건강한 구상나무. 지리산 연하봉.

구상나무는 우리나라가 자생지인 특산종입니다. 빙하기 때 한반도 전역에 퍼졌다가 기온이 오르면서 지금은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등 아고산 지역에서만 살아남았습니다. 아름다운 모양 때문에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구상나무의 자생 군락지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모두에서 군락지가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가 그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덕유산 구상나무림.덕유산 구상나무림.

이번 나이테 분석은 기후변화에 따른 구상나무의 말라죽는 과정을 좀 더 명확하게 밝혀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산소동위원소 분석은 수분 부족에 의한 사망 과정을 더욱 자세히 드러내겠지요. 연구 결과는 구상나무의 보전 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사진 및 그래프 자료 제공: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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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이테’의 비밀…구상나무 죽음을 밝혀라
    • 입력 2017-02-05 12:02:42
    • 수정2017-02-08 14:30:19
    취재K
나무를 가로로 자르면 나타나는 동심원들, 나이테입니다. 봄에는 나무의 세포 분열이 왕성해 나무 색깔이 밝고 목질도 부드럽습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는 세포 분열이 더뎌지면서 색이 진하고 단단해집니다. 이 때문에 해마다 하나씩 나무에 동그란 원이 나타나지요. 이런 원의 개수를 세어 보면 나무 나이를 알 수 있다고 해서 이름도 나이테입니다. 하지만 나이테에는 '나이' 말고도 뜻밖의 비밀들이 숨어 있습니다. 속이 빈 관으로 나무에 구멍을 뚫고 빼내면 나이테 간격이 오롯이 드러난 나뭇조각이 빠져나옵니다. 들여다보면 나이테 두께가 해마다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성장 당시의 온도와 강수량 등 주변 환경에 따라 나무의 생장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이테 폭에 따라 그래프를 그리면 나무의 성장 과정이 좀 더 명확해지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독특한 나이테 패턴은 같은 장소에서 살았던 나무마다 비슷하게 공유하게 됩니다. 시기별로 조금씩 다른 나무의 목편을 비교하면 나이테 패턴이 겹치는 곳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이테 패턴을 비교하는 크로스 데이팅(cross-dating) 작업을 통해 현재의 나이테 패턴에서부터 수천 년 전의 먼 과거까지 연결할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라도 나이테는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요. 이렇게 만들어진 '나이테폭 연대기'는 과거 기후와 자연환경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됩니다. 이른바 '연륜연대학(年輪年代學)'입니다. 구상나무 고사목. 지리산 영신봉. 지리산의 구상나무 군락지입니다. 하얗게 말라 죽어 있는 나무들이 빽빽합니다. 대부분 구상나무입니다. 한때 울창했던 푸른 숲이 이제는 나무의 무덤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이테는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국립공원연구원은 덕유산과 지리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 주목을 상대로 나이테폭 연대기를 작성했습니다. 나무에서 시료를 뽑아낸 뒤 나이테 폭과 산소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과거 150년(1864~2015년)까지 나이테 패턴을 연결한 거죠. 이렇게 구상나무의 과거 역사가 복원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왼쪽은 건강한 구상나무. 오른쪽은 죽어가는 구상나무 건강한 나무와 고사한 나무의 나이테를 비교하면 성장량이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빨간 줄로 표시된 건강한 나무는 비교적 일정한 성장량을 보이지만 파란 줄로 표시한 나무는 1970년을 전후로 해서 서서히 생육이 떨어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2006년 결국 생육을 멈춥니다. 죽은 겁니다. 구상나무 상당수가 이런 형태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습니다. 한순간 죽은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서서히 약해지며 죽어간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무의 생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기후 요인은 강수량과 온도입니다. 계절별로 생장량과 강수량의 함수관계를 분석한 도표를 보면 3월부터 5월까지 봄철 강수량이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봄철에 수분 흡수가 부족해지면 다른 계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 겁니다. 기온의 경우는 11월과 1, 3, 4, 8월의 온도가 성장에 중요하지만, 구상나무 고사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고사한 구상나무. 덕유산 향적봉. 국립공원연구원은 구상나무 집단 고사의 주된 원인을 봄철 수분 흡수 부족 때문으로 추정했습니다. 1) 겨울철 적설량이 적거나 2) 온도가 높아서 눈 녹는 시기가 빨라지고 3) 봄철 강수량까지 적은 상황이 장기간 지속돼 고사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상나무들은 어느 시점부터 물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을까요? 그 해답도 나이테에 숨어 있습니다. 건강한 구상나무 군락지. 지리산 세석평전. 자연 상태에는 세 가지 형태의 산소동위원소가 물속에 녹아 있습니다. 이 동위원소의 구성 비율은 강수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나이테 속 셀룰로스를 분석해 보면 나이테마다 각각 다른 비율의 산소동위원소가 남아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나이테 속에 남아 있는 산소동위원소로 그 시기의 강수량을 밝혀낼 수 있는 겁니다. 나이테가 시기별 강수량도 기록하고 있는 셈이죠. 구상나무 고사. 지리산 반야봉. 국립공원연구원은 올해부터 지리산 반야봉의 구상나무 고사목 100그루에 대해 나이테의 산소동위원소를 분석할 예정입니다. 나이테 속에 담긴 시기별 강수량과 나무 성장량의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거죠. 이 자료를 통해 구상나무의 더욱 정확한 사망 원인과 시기를 밝혀낼 계획입니다. 넘어진 구상나무. 지리산 반야봉. 줄기가 잘린 구상나무. 지리산 벽소령. 지리산과 덕유산 구상나무 군락지에는 넘어지거나 가지가 잘린 채 죽은 나무들도 많습니다. 서 있는 채 서서히 죽은 게 아니라 넘어지거나 부러져서 갑자기 죽은 겁니다. 태풍이나 돌풍 등 강한 바람이 원인입니다. 역시 기후변화로 태풍의 강도가 세진 영향이 있겠지요. 이렇게 죽은 구상나무도 나이테 속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넘어진 구상나무. 덕유산 향적봉. 파란 실선으로 나타난 구상나무는 2011년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생육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러다 2011년 갑자기 성장이 멈추고 맙니다. 서서히 성장량이 줄어들다가 죽은 고사목들과는 전혀 다른 패턴입니다. 태풍에 넘어지면서 뿌리가 노출돼 죽은 겁니다. 이처럼 나이테만 보아도 나무의 사망 원인이 드러납니다. 지리산 세석평전 구상나무림. 결국, 구상나무 군락지 쇠퇴 원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봄철 부족한 수분 공급이나 태풍이지요. 모두 나이테가 드러낸 사실입니다. 이러니 나이테는 말 그대로 나무의 사연을 담고 있는 '블랙박스'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고사목들도 각각의 '블랙박스'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인 겁니다. 건강한 구상나무. 지리산 연하봉. 구상나무는 우리나라가 자생지인 특산종입니다. 빙하기 때 한반도 전역에 퍼졌다가 기온이 오르면서 지금은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등 아고산 지역에서만 살아남았습니다. 아름다운 모양 때문에 외국에서는 크리스마스트리로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구상나무의 자생 군락지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한라산과 지리산, 덕유산 모두에서 군락지가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가 그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덕유산 구상나무림. 이번 나이테 분석은 기후변화에 따른 구상나무의 말라죽는 과정을 좀 더 명확하게 밝혀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산소동위원소 분석은 수분 부족에 의한 사망 과정을 더욱 자세히 드러내겠지요. 연구 결과는 구상나무의 보전 대책을 마련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사진 및 그래프 자료 제공: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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