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30) 사라지는 이발소, “손님 마음도 돌보던 곳”

입력 2017.02.15 (15:47) 수정 2017.02.1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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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추억이 느릿한 정담 사이로 흐르는 곳

요즘 이발소 가보신 적 있나요?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멋쟁이 신사들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드나들던 이발소가 도무지 간판 구경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김영환이라는 단골 시인이 드나들던 성우 이용원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서울역 서쪽으로 언덕을 오르다 보면 만리동 고개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오랜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고 비바람의 굵은 주름살이 선명한 이발소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남루한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4평의 공간. 바로 이곳이 현존하는 이발소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는 성우 이용원입니다.

시간도 이곳에서는 비껴가는 걸까요? 1927년 문을 열어 3대째 90년을 이어가는 성우 이용원은 단골 시인의 표현대로 느릿하게 주고받는 손님과 이발사의 정담이 낡은 의자 가득 쌓이고 그 추억 사이로 세월도 느긋한 정담만큼이나 쉬엄쉬엄 흐릅니다.

이곳을 가보지 못했지만, KBS가 올 초 신년특집으로 만든 오래된 서울의 풍경 다큐 속에 비친 성우 이용원의 모습은 어릴 적 서울 이태원의 달동네에 있었던 이발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허름한 입구 밖에는 이발소임을 알리는 기다란 삼색등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특유의 냄새가 나를 반깁니다. 비누의 향긋한 내음과 난롯가에서 말라가는 수건이 풍기는 약간 쉰 듯한 냄새가 뒤섞여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킵니다. 싸구려 꽃무늬 벽지로 단장한 벽에는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하는 조잡한 서양화의 복제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숲에 예쁜 나무건물, 온갖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혹은 밀레의 만종 포스터가 걸려 있기도 하고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덕담을 적은 액자가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어미 돼지가 대여섯 마리의 새끼 돼지에 젖을 물리는 그림이 있는 이발소도 있었고,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같은 시 구절이 쓰여 있기도 했습니다.

푹신한 의자는 여기저기 녹이 슬고 더러는 내장이 드러나 이발소의 연륜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화단에 물을 주는 데 쓰는 조리개가 두세 개 있고 벽에는 맨들맨들한 가죽 벨트가 걸려 있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그 가죽에 길쭉한 면도칼을 쓱쓱 갈면서 오만한 턱수염과의 전쟁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집니다. 정말 그 예리한 칼로 턱수염이 잘려나갈 때 손님들의 마음에서도 탐욕이 깎여 나가고 혹독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무뎌지고 메말라진 정서도 되살아났을까요?


이발소에서는 또 큼지막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간 노래가 멋들어지게 나왔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소 아저씨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매만지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비누 거품처럼 술술 풀어놓고 손님들도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받은 설움과 넋두리를 풀며 맞장구를 칩니다. 집에서 구독하지 못하는 스포츠 신문을 마음껏 보는 재미도,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성인 주간잡지를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는 이발소지만 말끔히 머리를 깎고 시원하게 머리까지 감고 나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머리를 감으면서 눈을 꼭 감는 일이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숨도 막혔고요. 한층 깔끔해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좀 낯설어진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면서 멋쩍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발사, 구만 개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예술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을 유난히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 탓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은 아주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큰 결례이고, 머리카락을 아무 데나 버리는 것도 금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하거나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남자들은 삭발을 하기도 합니다. 여성들도 머리 모양에 변화를 줄 때는 무언가 삶에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단순한 미용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발도 몸을 가꾸는 서비스 업종의 하나지만 이발사는 그 하얀 가운이 상징하듯 손톱을 다듬는다거나 피부를 마사지하는 것과는 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서양에서도 이발사는 외과의사를 겸했고, 이발소가 간단한 수술을 하는 병원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발소를 상징하는 삼색등이 동맥, 정맥, 붕대를 상징해서 빨강, 파랑, 흰색이라고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한 시인은 이발사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준관 시인은 어릴 적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푸시킨의 시를 떠올립니다.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그 시구처럼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속였지만, 그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아이들의 머리를 성탄절에 트리로 장식하는 나무처럼 아름답게 다듬어주겠다고도 말합니다. 서툴지만 정성껏 놀리는 가위, 정말 당나귀 귀처럼 생긴 그 가위 소리가 내장이 튀어나온 낡은 스프링 의자만큼이나 구겨진 사람들의 삶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인들이 쓰는 시도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이발사의 가위 소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손님들의 거친 수염을 예리한 칼로 썩썩 깎아나가는 이발사의 그 정교한 솜씨를 보면서 이발사처럼 언어를 날카롭게 벼리고, 또 군더더기 없이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구만 개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예술가'라니, 멋진 표현입니다. 정말 이발사 아저씨들이 달랑 가위 하나 빗 한 자루를 가지고 탱자나무 울타리 같던 제 더부룩한 곱슬머리를 말끔하게 다듬어주실 때면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아차 하면 베기에 십상인 무른 피부에는 전혀 상처를 주지 않고 억센 수염을 썩썩 도려내는 이발사 아저씨들의 하얀 손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정말 '미다스의 손'입니다. 얼굴 가득 범벅된 흰 비누 거품을 구름이라 표현한 것도 재밌고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 천지인 이 세상에서 '모가지'를 겁 없이 내밀고 맡길 수 있는 곳. 그러고 보니 정말 믿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곳도 이발소로군요. 하긴, 이발소에서는 잘난 사람도 권세가 높은 사람도 예외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또 무시무시한 칼날에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 이발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면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시를 쓰다 보면 이 말도 빼기 아깝고 저 표현도 멋지고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보면 시는 누더기가 되고 맙니다. 이발사 아저씨가 깔끔하게 수염을 밀어내듯이 '언어의 구두쇠'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다짐에 백 퍼센트! 공감합니다.

사라져 가는 이발소, 늘어나는 미용실

이발소는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단발은 위생적이고 집무상 편리하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행정개혁과 국민생활향상의 견지에서 맨 먼저 그 수범을 신민 앞에 내려 보이셨다. 대한 국민인 자는 근엄히 이 성지(聖旨)를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

1895년 11월 13일 당시 대한제국의 임시 내부대신 유길준이 내린 고시입니다. 같은 달 15일 고종과 세자가 머리를 자르고, 16일에는 관료와 군인들이 머리를 자르고, 17일에는 이른바 단발령이 전국에 내려졌습니다. 이발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1년 서울 인사동에 유양호 라는 이발사가 '동흥 이발소'라는 상호로 처음 이발소를 열었습니다. 서민들에게는 신기하기도 해서일까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장사는 제법 잘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단발령이 내려지고 이발소가 바로 생기지 않았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전국 곳곳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죽을지언정 머리를 자를 수 없다는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살로 항의하는 유생들도 잇따르자 1897년 고종은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민간 자율에 맡기고 맙니다. 신체와 머리카락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만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라는 유교 사상이 워낙 뿌리 깊었던 탓이겠습니다.

이후 이발소는 급격히 늘어나 1975년 이발소는 2만 9천713개나 됐습니다. 그러나 이발소는 1980년대 들어 두 차례 정도의 큰 충격파가 몰려오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남성들 사이에 장발 문화가 유행하면서 이발소 대신 미용원으로 향하는 발길이 잦아진 것이었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이나 '병태와 영자'같은 1970년대 젊은이들의 로맨스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머리를 더부룩하게 길렀다 이른바 '장발 단속'에 걸린 청년들이 줄행랑을 치는 장면이 나오지요. 젊은 남성들 사이에 긴 머리가 유행하면서 이발소를 찾는 사람은 줄어들었습니다.

또 한차례의 타격은 이른바 '퇴폐이발소' 파동이었습니다. 머리만 깎던 이발소가,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불어닥친 성의 상품화, 향락 바람을 타고 퇴폐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멀쩡한 이발소까지 도매금으로 불온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고 이발소를 들어가면서 '머리를 깎는 곳인지' 물어봐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통계를 보면 이발소는 1975년 전국에 2만 9천713 군데가 있었지만 2014년에는 만 9천678 곳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해마다 3% 안팎으로 계속 줄고 있으니 지금은 더 줄었겠지요. 반면 같은 기간 미용실은 만 6천330 군데에서 무려 10만 7천761 곳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불과 40년 만에 이발소는 3분의 2로 줄어든 반면 미용실은 6배 이상 늘었다는 얘깁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발소는 요금을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설을 좀 번듯하게 해서 눈높이가 한층 높아진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요구도 수용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최근에 서울 강남 등지를 중심으로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게 시설을 꾸미고 미용실과 경쟁을 하는 이발소가 생겨나고는 있지만, 대세를 뒤집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발소의 쓸쓸한 퇴장은 시인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시는 한때 엘리트 계층은 물론 서민들에게도 사랑받는 장르였었지요. 누구나 시 몇 편쯤은 외우기도 하고 예쁜 시집을 가슴에 품고 시인이 된 듯한 설렘으로 잠 못 이루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이제는 좀처럼 시집을 사는 일도 없고 한 줄 시가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지도 못합니다. 폐가처럼 허물어지는 이발소와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시집의 쓸쓸한 운명을 동병상련의 눈길로 바라보는 시인도 있습니다.


1970년대 안방을 강타했던 KBS 드라마 '여로'를 기억하시는지요? 이 여로의 주인공, 앞니 빠지고 칠부 바지 걸친 덜 떨어진 영구처럼 시집이나 이발소나 값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자동화와 기계화를 통해 대량생산을 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재바르게 고객을 겨냥한 멋진 사훈을 써 붙이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서 시도 이발도 소신껏 밀고 갑니다. 녹슨 바리깡이 되고, 내장이 터져 나오는 스프링 의자가 될 때 되더라도 쓸만한 단어 하나 찾느라 마음을 졸이고 머리를 쥐어뜯는 시인. 손님은 오지 않는데 저 혼자 흥분해 끓고 있는 주전자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이발소 아저씨와 어둠이 자꾸 짙어가는 시의 저녁 무렵이 오버랩되며 다가옵니다.

이발소를 잊고 산 지 오래된 여러분! 이 달에는 한번 알록달록 시간이 돌고 돌아가는 이발소의 삼색등을 타고 젊은 날로 돌아가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구름처럼 포근한 비누 거품 속에서 스스로 잠에 빠져 아련한 추억에도 잠겨보시고요.

90년 동안 만리동 언덕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성우 이용원의 이발사 67살 이남열 할아버지는 다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발은 단순히 머리만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마음까지 돌보는 것이다"

당장 이발소에 가서 덥수룩하게 자란 욕망도 좀 다듬고 거칠어진 감정도 매끈하게 손질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연관기사] ☞ [임병걸의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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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30) 사라지는 이발소, “손님 마음도 돌보던 곳”
    • 입력 2017-02-15 15:47:29
    • 수정2017-02-15 17:32:45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빛바랜 추억이 느릿한 정담 사이로 흐르는 곳

요즘 이발소 가보신 적 있나요? 예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멋쟁이 신사들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드나들던 이발소가 도무지 간판 구경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김영환이라는 단골 시인이 드나들던 성우 이용원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서울역 서쪽으로 언덕을 오르다 보면 만리동 고개를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오랜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고 비바람의 굵은 주름살이 선명한 이발소가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남루한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4평의 공간. 바로 이곳이 현존하는 이발소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는 성우 이용원입니다.

시간도 이곳에서는 비껴가는 걸까요? 1927년 문을 열어 3대째 90년을 이어가는 성우 이용원은 단골 시인의 표현대로 느릿하게 주고받는 손님과 이발사의 정담이 낡은 의자 가득 쌓이고 그 추억 사이로 세월도 느긋한 정담만큼이나 쉬엄쉬엄 흐릅니다.

이곳을 가보지 못했지만, KBS가 올 초 신년특집으로 만든 오래된 서울의 풍경 다큐 속에 비친 성우 이용원의 모습은 어릴 적 서울 이태원의 달동네에 있었던 이발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허름한 입구 밖에는 이발소임을 알리는 기다란 삼색등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삐걱대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특유의 냄새가 나를 반깁니다. 비누의 향긋한 내음과 난롯가에서 말라가는 수건이 풍기는 약간 쉰 듯한 냄새가 뒤섞여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킵니다. 싸구려 꽃무늬 벽지로 단장한 벽에는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하는 조잡한 서양화의 복제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숲에 예쁜 나무건물, 온갖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혹은 밀레의 만종 포스터가 걸려 있기도 하고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덕담을 적은 액자가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어미 돼지가 대여섯 마리의 새끼 돼지에 젖을 물리는 그림이 있는 이발소도 있었고,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같은 시 구절이 쓰여 있기도 했습니다.

푹신한 의자는 여기저기 녹이 슬고 더러는 내장이 드러나 이발소의 연륜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화단에 물을 주는 데 쓰는 조리개가 두세 개 있고 벽에는 맨들맨들한 가죽 벨트가 걸려 있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그 가죽에 길쭉한 면도칼을 쓱쓱 갈면서 오만한 턱수염과의 전쟁을 앞두고 결연한 의지를 다집니다. 정말 그 예리한 칼로 턱수염이 잘려나갈 때 손님들의 마음에서도 탐욕이 깎여 나가고 혹독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무뎌지고 메말라진 정서도 되살아났을까요?


이발소에서는 또 큼지막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간 노래가 멋들어지게 나왔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소 아저씨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매만지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비누 거품처럼 술술 풀어놓고 손님들도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받은 설움과 넋두리를 풀며 맞장구를 칩니다. 집에서 구독하지 못하는 스포츠 신문을 마음껏 보는 재미도,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성인 주간잡지를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는 이발소지만 말끔히 머리를 깎고 시원하게 머리까지 감고 나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머리를 감으면서 눈을 꼭 감는 일이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숨도 막혔고요. 한층 깔끔해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좀 낯설어진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면서 멋쩍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발사, 구만 개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예술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몸을 유난히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 탓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은 아주 소중한 의미를 지닙니다.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것은 큰 결례이고, 머리카락을 아무 데나 버리는 것도 금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하거나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남자들은 삭발을 하기도 합니다. 여성들도 머리 모양에 변화를 줄 때는 무언가 삶에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단순한 미용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발도 몸을 가꾸는 서비스 업종의 하나지만 이발사는 그 하얀 가운이 상징하듯 손톱을 다듬는다거나 피부를 마사지하는 것과는 다른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서양에서도 이발사는 외과의사를 겸했고, 이발소가 간단한 수술을 하는 병원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발소를 상징하는 삼색등이 동맥, 정맥, 붕대를 상징해서 빨강, 파랑, 흰색이라고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한 시인은 이발사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이준관 시인은 어릴 적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푸시킨의 시를 떠올립니다.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지 말라던 그 시구처럼 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을 속였지만, 그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아이들의 머리를 성탄절에 트리로 장식하는 나무처럼 아름답게 다듬어주겠다고도 말합니다. 서툴지만 정성껏 놀리는 가위, 정말 당나귀 귀처럼 생긴 그 가위 소리가 내장이 튀어나온 낡은 스프링 의자만큼이나 구겨진 사람들의 삶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인들이 쓰는 시도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이발사의 가위 소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손님들의 거친 수염을 예리한 칼로 썩썩 깎아나가는 이발사의 그 정교한 솜씨를 보면서 이발사처럼 언어를 날카롭게 벼리고, 또 군더더기 없이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구만 개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예술가'라니, 멋진 표현입니다. 정말 이발사 아저씨들이 달랑 가위 하나 빗 한 자루를 가지고 탱자나무 울타리 같던 제 더부룩한 곱슬머리를 말끔하게 다듬어주실 때면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아차 하면 베기에 십상인 무른 피부에는 전혀 상처를 주지 않고 억센 수염을 썩썩 도려내는 이발사 아저씨들의 하얀 손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정말 '미다스의 손'입니다. 얼굴 가득 범벅된 흰 비누 거품을 구름이라 표현한 것도 재밌고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 천지인 이 세상에서 '모가지'를 겁 없이 내밀고 맡길 수 있는 곳. 그러고 보니 정말 믿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곳도 이발소로군요. 하긴, 이발소에서는 잘난 사람도 권세가 높은 사람도 예외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또 무시무시한 칼날에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합니다. 이발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다면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시를 쓰다 보면 이 말도 빼기 아깝고 저 표현도 멋지고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보면 시는 누더기가 되고 맙니다. 이발사 아저씨가 깔끔하게 수염을 밀어내듯이 '언어의 구두쇠'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다짐에 백 퍼센트! 공감합니다.

사라져 가는 이발소, 늘어나는 미용실

이발소는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단발은 위생적이고 집무상 편리하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행정개혁과 국민생활향상의 견지에서 맨 먼저 그 수범을 신민 앞에 내려 보이셨다. 대한 국민인 자는 근엄히 이 성지(聖旨)를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

1895년 11월 13일 당시 대한제국의 임시 내부대신 유길준이 내린 고시입니다. 같은 달 15일 고종과 세자가 머리를 자르고, 16일에는 관료와 군인들이 머리를 자르고, 17일에는 이른바 단발령이 전국에 내려졌습니다. 이발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01년 서울 인사동에 유양호 라는 이발사가 '동흥 이발소'라는 상호로 처음 이발소를 열었습니다. 서민들에게는 신기하기도 해서일까요?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장사는 제법 잘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단발령이 내려지고 이발소가 바로 생기지 않았을까요? 잘 아시다시피 전국 곳곳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죽을지언정 머리를 자를 수 없다는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살로 항의하는 유생들도 잇따르자 1897년 고종은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민간 자율에 맡기고 맙니다. 신체와 머리카락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만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라는 유교 사상이 워낙 뿌리 깊었던 탓이겠습니다.

이후 이발소는 급격히 늘어나 1975년 이발소는 2만 9천713개나 됐습니다. 그러나 이발소는 1980년대 들어 두 차례 정도의 큰 충격파가 몰려오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첫 번째는 남성들 사이에 장발 문화가 유행하면서 이발소 대신 미용원으로 향하는 발길이 잦아진 것이었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이나 '병태와 영자'같은 1970년대 젊은이들의 로맨스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머리를 더부룩하게 길렀다 이른바 '장발 단속'에 걸린 청년들이 줄행랑을 치는 장면이 나오지요. 젊은 남성들 사이에 긴 머리가 유행하면서 이발소를 찾는 사람은 줄어들었습니다.

또 한차례의 타격은 이른바 '퇴폐이발소' 파동이었습니다. 머리만 깎던 이발소가,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불어닥친 성의 상품화, 향락 바람을 타고 퇴폐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멀쩡한 이발소까지 도매금으로 불온한 눈초리를 받아야 했고 이발소를 들어가면서 '머리를 깎는 곳인지' 물어봐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통계를 보면 이발소는 1975년 전국에 2만 9천713 군데가 있었지만 2014년에는 만 9천678 곳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해마다 3% 안팎으로 계속 줄고 있으니 지금은 더 줄었겠지요. 반면 같은 기간 미용실은 만 6천330 군데에서 무려 10만 7천761 곳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불과 40년 만에 이발소는 3분의 2로 줄어든 반면 미용실은 6배 이상 늘었다는 얘깁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발소는 요금을 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설을 좀 번듯하게 해서 눈높이가 한층 높아진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요구도 수용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최근에 서울 강남 등지를 중심으로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게 시설을 꾸미고 미용실과 경쟁을 하는 이발소가 생겨나고는 있지만, 대세를 뒤집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이발소의 쓸쓸한 퇴장은 시인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시는 한때 엘리트 계층은 물론 서민들에게도 사랑받는 장르였었지요. 누구나 시 몇 편쯤은 외우기도 하고 예쁜 시집을 가슴에 품고 시인이 된 듯한 설렘으로 잠 못 이루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이제는 좀처럼 시집을 사는 일도 없고 한 줄 시가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지도 못합니다. 폐가처럼 허물어지는 이발소와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시집의 쓸쓸한 운명을 동병상련의 눈길로 바라보는 시인도 있습니다.


1970년대 안방을 강타했던 KBS 드라마 '여로'를 기억하시는지요? 이 여로의 주인공, 앞니 빠지고 칠부 바지 걸친 덜 떨어진 영구처럼 시집이나 이발소나 값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자동화와 기계화를 통해 대량생산을 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재바르게 고객을 겨냥한 멋진 사훈을 써 붙이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서 시도 이발도 소신껏 밀고 갑니다. 녹슨 바리깡이 되고, 내장이 터져 나오는 스프링 의자가 될 때 되더라도 쓸만한 단어 하나 찾느라 마음을 졸이고 머리를 쥐어뜯는 시인. 손님은 오지 않는데 저 혼자 흥분해 끓고 있는 주전자를 우두커니 바라보는 이발소 아저씨와 어둠이 자꾸 짙어가는 시의 저녁 무렵이 오버랩되며 다가옵니다.

이발소를 잊고 산 지 오래된 여러분! 이 달에는 한번 알록달록 시간이 돌고 돌아가는 이발소의 삼색등을 타고 젊은 날로 돌아가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구름처럼 포근한 비누 거품 속에서 스스로 잠에 빠져 아련한 추억에도 잠겨보시고요.

90년 동안 만리동 언덕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성우 이용원의 이발사 67살 이남열 할아버지는 다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발은 단순히 머리만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마음까지 돌보는 것이다"

당장 이발소에 가서 덥수룩하게 자란 욕망도 좀 다듬고 거칠어진 감정도 매끈하게 손질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연관기사] ☞ [임병걸의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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