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서아프리카 최후의 노예항구 ‘바다그리(Badagry)’

입력 2017.02.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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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이후 광활한 대지, 금·은이 넘치는 이 기회의 땅으로 '정복자'를 표방한 유럽인들의 이주가 늘어났다.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노동력 공급이 시급했다. 신대륙에 앞서 개발된 아프리카 항로에 해답이 있었다.

흑인 노예가 '상품'으로서 유럽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건 1440년대부터다. 포르투갈의 헨리 왕자(Prince Henry)가 북아프리카 세우타(Ceuta)에 정착한 이래 백인들은 서아프리카를 차례차례 점령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세네갈·가나·나이지리아 등에 노예 항이 세워졌다.

마침내 1502년, 신대륙 아이티(Haiti)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끌려와 정착하게 된다. 이후 350년 이상 대서양을 오가며 벌어진 구대륙과 신대륙 간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다.

‘물건’으로 취급된 인간, 흑인 노예

17세기 바다그리에 수입된 대포 1문의 값은 노예 100명이었다.17세기 바다그리에 수입된 대포 1문의 값은 노예 100명이었다.

베냉(Benin)과 국경을 접한 곳에 나이지리아의 노예 무역항 바다그리(Badagry)가 있다. 1518년 노예 항으로 개발된 이래 1886년까지 해마다 노예를 1만 1,000명까지 수출했다.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 10명 가운데 3명은 바다그리 항을 통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대서양 연안 국가 가운데 마지막으로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는 브라질이다. 188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노예 해방이 이뤄졌다. 이 브라질에 마지막까지 노예를 공급하던 '젖줄'이 바다그리였다.

바다그리 해변에는 녹슨 대포 2문이 널브러져 있다.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기 흑인 납치를 위해 마을을 습격할 때 사용하던 무기다. 17세기 유럽에서 들여온 이 대포 1문의 값은 노예 100명이었다. 이후 영국 여왕은 이 대포 2문을 노예제 폐지 기념으로 바다그리에 하사한다. '치욕'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이 밖에도 노예의 상품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은 더 있다.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말 1필 당 교환 가능한 노예 수는 20명이었다. 16세기 이후 노예 수요가 폭증하자 노예 6~8명당 말 1필로 그 가치가 수직 상승했다.

바다그리에서의 노예 생활

신대륙으로 팔려나갈 바다그리 노예들의 값이 매겨지고 있다. 노예 상인들은 흑인들 목에 쇠사슬을 걸어 결박해 놨다.신대륙으로 팔려나갈 바다그리 노예들의 값이 매겨지고 있다. 노예 상인들은 흑인들 목에 쇠사슬을 걸어 결박해 놨다.

서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노예 수는 350여 년간 1,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220만 명 정도는 배에서 죽음을 맞았다. 배 한 척당 노예 6백 명이 화물처럼 촘촘히 실렸다. 흑인 노예들은 배에서 전염병에 걸리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굶주림도 심했다.

배에 타기 전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바다그리의 흑인들은 원래 '자유인'이었다. 유럽인들과 이들에게 포섭된 동족에 의해 납치된 뒤 노예가 됐다. 붙잡힌 뒤에는 바라쿤(Baracoon)이라는 감옥에 감금됐다. 5~6평 남짓한 공간에 40명이 갇혔다. 누울 공간조차 없었다.

온종일 노동을 해도 식사는 한 끼가 전부였다. 충분한 식사로 노예들이 힘을 갖게 되면 봉기가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노예상들이 식량 공급을 제한한 것이다. 노예상이 흑인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에 약한 독을 풀어 일부러 몸을 쇠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동이 끝난 뒤 노예들은 쇠사슬로 손과 발이 묶여 지냈다. 쇠로 된 목줄로 노예들을 결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죄도 없이 발등 위에 철심이 박히기도 했다.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는 삶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그리 노예 항로,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여정"

바다그리 해변의 기념비에 적힌 문구다. 기념비 뒤로는 대서양이 앞바다로 펼쳐져 있다. 5백 년 전 노예들도 분명 같은 풍경을 봤을 것이다. 때로는 부부조차 종착지가 다른 배를 탄 뒤 영영 헤어지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노예제 철폐 운동이 태동한 뒤, 19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유럽과 미국 등에서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바다그리 노예무역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공식 폐지된다. 아프리카 흑인들 스스로 쟁취한 자유가 아니었기에, 부작용은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경제 분석 전문기관 에 따르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 5곳 가운데 4곳에서는 '현대판 노예 노동'이 벌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이지리아와 케냐에서 특히 노예 노동 비중이 높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휴대전화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코발트 광산 노동에 다수의 흑인이 투입된다. 급여, 생활 조건, 근로 시간 등이 보장되지 않는 불법 노동이다. 착취를 통한 번영은 '물리적 감금'에서 '경제적 속박'으로 방식만 바뀌었을 뿐 교묘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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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서아프리카 최후의 노예항구 ‘바다그리(Badagry)’
    • 입력 2017-02-16 18:30:07
    특파원 리포트
1492년,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다. 이후 광활한 대지, 금·은이 넘치는 이 기회의 땅으로 '정복자'를 표방한 유럽인들의 이주가 늘어났다.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노동력 공급이 시급했다. 신대륙에 앞서 개발된 아프리카 항로에 해답이 있었다.

흑인 노예가 '상품'으로서 유럽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건 1440년대부터다. 포르투갈의 헨리 왕자(Prince Henry)가 북아프리카 세우타(Ceuta)에 정착한 이래 백인들은 서아프리카를 차례차례 점령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세네갈·가나·나이지리아 등에 노예 항이 세워졌다.

마침내 1502년, 신대륙 아이티(Haiti)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끌려와 정착하게 된다. 이후 350년 이상 대서양을 오가며 벌어진 구대륙과 신대륙 간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다.

‘물건’으로 취급된 인간, 흑인 노예

17세기 바다그리에 수입된 대포 1문의 값은 노예 100명이었다.
베냉(Benin)과 국경을 접한 곳에 나이지리아의 노예 무역항 바다그리(Badagry)가 있다. 1518년 노예 항으로 개발된 이래 1886년까지 해마다 노예를 1만 1,000명까지 수출했다.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 10명 가운데 3명은 바다그리 항을 통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대서양 연안 국가 가운데 마지막으로 노예제를 폐지한 국가는 브라질이다. 1888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노예 해방이 이뤄졌다. 이 브라질에 마지막까지 노예를 공급하던 '젖줄'이 바다그리였다.

바다그리 해변에는 녹슨 대포 2문이 널브러져 있다.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기 흑인 납치를 위해 마을을 습격할 때 사용하던 무기다. 17세기 유럽에서 들여온 이 대포 1문의 값은 노예 100명이었다. 이후 영국 여왕은 이 대포 2문을 노예제 폐지 기념으로 바다그리에 하사한다. '치욕'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이 밖에도 노예의 상품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은 더 있다.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말 1필 당 교환 가능한 노예 수는 20명이었다. 16세기 이후 노예 수요가 폭증하자 노예 6~8명당 말 1필로 그 가치가 수직 상승했다.

바다그리에서의 노예 생활

신대륙으로 팔려나갈 바다그리 노예들의 값이 매겨지고 있다. 노예 상인들은 흑인들 목에 쇠사슬을 걸어 결박해 놨다.
서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노예 수는 350여 년간 1,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220만 명 정도는 배에서 죽음을 맞았다. 배 한 척당 노예 6백 명이 화물처럼 촘촘히 실렸다. 흑인 노예들은 배에서 전염병에 걸리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굶주림도 심했다.

배에 타기 전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바다그리의 흑인들은 원래 '자유인'이었다. 유럽인들과 이들에게 포섭된 동족에 의해 납치된 뒤 노예가 됐다. 붙잡힌 뒤에는 바라쿤(Baracoon)이라는 감옥에 감금됐다. 5~6평 남짓한 공간에 40명이 갇혔다. 누울 공간조차 없었다.

온종일 노동을 해도 식사는 한 끼가 전부였다. 충분한 식사로 노예들이 힘을 갖게 되면 봉기가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노예상들이 식량 공급을 제한한 것이다. 노예상이 흑인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에 약한 독을 풀어 일부러 몸을 쇠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노동이 끝난 뒤 노예들은 쇠사슬로 손과 발이 묶여 지냈다. 쇠로 된 목줄로 노예들을 결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죄도 없이 발등 위에 철심이 박히기도 했다.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는 삶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바다그리 노예 항로,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여정"

바다그리 해변의 기념비에 적힌 문구다. 기념비 뒤로는 대서양이 앞바다로 펼쳐져 있다. 5백 년 전 노예들도 분명 같은 풍경을 봤을 것이다. 때로는 부부조차 종착지가 다른 배를 탄 뒤 영영 헤어지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노예제 철폐 운동이 태동한 뒤, 19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유럽과 미국 등에서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바다그리 노예무역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공식 폐지된다. 아프리카 흑인들 스스로 쟁취한 자유가 아니었기에, 부작용은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경제 분석 전문기관 에 따르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 5곳 가운데 4곳에서는 '현대판 노예 노동'이 벌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수준이 높은 나이지리아와 케냐에서 특히 노예 노동 비중이 높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휴대전화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코발트 광산 노동에 다수의 흑인이 투입된다. 급여, 생활 조건, 근로 시간 등이 보장되지 않는 불법 노동이다. 착취를 통한 번영은 '물리적 감금'에서 '경제적 속박'으로 방식만 바뀌었을 뿐 교묘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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