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테러공포’ 속 부활하는 日 ‘공모죄’ 법안

입력 2017.02.1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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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가칭 '테러 등 준비죄 법안', 이른바 '공모죄 법안'이 논란을 빚고 있다. 2명 이상이 중대 범죄를 준비하기만 해도 처벌하겠다는 취지인데,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을 막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문제의 법안은 이미 여러 차례 무산된 것을 아베 정부가 올해 초부터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정부·여당은 2020년 도쿄 올림픽 등 국제 행사를 앞두고 증가하는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모죄 법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야당과 재야 법조계 등은 인권 탄압과 비판여론 봉쇄 등 오남용의 우려가 크다며 반대하고 있다.

일본도 테러 공포?

일본의 대테러 훈련 모습일본의 대테러 훈련 모습

지난 1월 29일 일본 JR도쿄역 앞 거리에서 경시청 등이 주관하는 테러 대응 훈련이 열렸다. 훈련이 실시된 곳은 2월 26일로 예정된 도쿄 마라톤 대회의 골인 지점이었다.

도쿄 마라톤은 요미우리 신문사 등이 개최하는 일본 최대의 시민 마라톤 행사이다. 훈련은 행사 당일 골인 지점의 시설을 모의로 설치해 놓고, 가상의 테러범을 제압하는 내용으로 실시됐다. 3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훈련이었다.

먼저 관광객을 가장한 모의 테러범이 행사장에 접근해, 폭탄이 가방을 놓고 사라졌다. 이를 발견한 행사 주최 즉 직원들이 즉시 관객들을 대피시켰다. 경시청 폭발물 처리반은 특수 장비를 이용해 폭탄을 들어 올린 뒤, 폭발물 처리 차량에 옮겨 실었다.


이후, 모의 테러범 2명이 총기를 난사하며 나타나자마자, 긴급대응부대(ERT)가 투입됐다. 저격용 총과 방탄 방패 등으로 무장한 경찰병력, 그리고 잘 훈련된 경찰견이 투입돼 테러범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각종 훈련이 일상화된 나라이지만, 이날 대테러 훈련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서 대형 국제행사가 잇따른 예정인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예상외의 장소에서 예상을 벗어난 테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려는 당연하다. 그런데 테러 대응을 내세우며 추진하는 법안이 논란을 낳고 있다.

테러준비죄? 공모죄?...정부비판도 중요범죄?

'테러 등 준비죄 법안'은 중대 범죄를 모의만 해도 처벌하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처벌이 가능하다. 과거 3차례나 발의됐지만,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중대 범죄의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경찰 등 '공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일반 시민 누구나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반발이 크자, 이번에는 처벌 대상이 되는 범죄를 기존의 '공모죄'에서 '테러 등 준비죄'로 바꾸었다. (일본 언론은 그래도 '공모죄'라는 표현을 널리 쓰고 있다.) 중대 범죄의 적용 대상도 당초 600여 개에서 대폭 줄이기로 했다. 또 범죄 모의 단계가 아닌 실행 준비 단계에서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범죄를 포함시킬 수 있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 등 정부에 비판적인 재야단체의 활동을 제약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실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관련해 극우 세력 일각에서 근거 없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범죄가 일어날 것 같다는 주관적 판단만으로 전화나 이메일 도청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변호사들, 공모법 반대하며 거리로...

테러 등 준비죄 법안 반대 집회테러 등 준비죄 법안 반대 집회

정부·여당이 순수한 의도를 강조하고 있어도, 반대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와 형법학자, 변호사단체 등은 '준비 행위' 등의 판단이 수사 기관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뤄질 경우, 법 적용 대상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변호사연합회는 공모죄의 위험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겠다며 거리로 나섰다. 지난 1월 도쿄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신주쿠 역 앞에서 가두 홍보전을 벌이기도 했다.

변호사연합회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일본 형법의 기본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데 악용될 가능성이다. 도청 등이 일상화될 수 있고, 파업 등 쟁의 행위 중 벌어지는 돌발 행위를 중대범죄로 판단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체결한 '국제조직범죄 방지에 관한 UN 협약'에 '중대범죄'와 관련한 '공모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협약 비준을 위한 공모죄 법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변호사연합회는 한국과 일본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공모죄 법안이 있어야 협약을 비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협약 내용의 일부를 유보하거나 이른바 '해석 선언(각 국가의 상황에 맞춰 조약의 내용을 해석하는 일방적 선언)'에 의해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일본에는 이미 심각한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에 대해 '예비죄', '준비죄' 등이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성의 헛발질…법무상이 사과는 했지만…

집권 연립여당의 법안 통과 의지는 확고하다. 그러나 법안 상정 단계부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론이 나쁘지 않은 만큼 비판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네다 일본 법무상가네다 일본 법무상

그런데 법무성이 중의원 예산위를 앞두고 헛발질을 했다. '공모죄'의 구성 요건을 엄격히 하는 것과 관련해, 일단 법안부터 제출한 뒤 법무 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의 문서를 낸 것이다. 물론 여당과의 법안 협의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당은 이것을 법안을 내기 전에는 질문도 꺼내지 말라는 요구로 받아들였다. 민진당은 '질문 봉쇄' 의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현행 법제도로 대응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체적 사례를 요구하고 나섰다. 더 나아가 야당은 가네다 법무상의 사퇴를 요구했다.

가뜩이나 비판 여론 잠재우기에 심혈을 기울여온 여당도 아연실색했다. 자민당의 닛카이 간사장도 '정부가 긴장감을 갖고 국회에 대응해달라'고 요청했다. 실수를 하면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도 했다.

가네다 법무상은 '법안 제출 뒤 논의해야 한다'는 문서를 철회하고 사과했다. 국회의 심의 주제에 주문을 낼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는 문서였다고 시인했다. '매우 부적절'한 일로서 '반성하고 있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사퇴요구는 거부했다.

정부·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논란의 법안은 통과될 것이다. 법안에 비판적인 시민단체는 이를 '시민사회의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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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2-16 18:34:34
    특파원 리포트
일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가칭 '테러 등 준비죄 법안', 이른바 '공모죄 법안'이 논란을 빚고 있다. 2명 이상이 중대 범죄를 준비하기만 해도 처벌하겠다는 취지인데, 시민사회의 건전한 비판을 막는 데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문제의 법안은 이미 여러 차례 무산된 것을 아베 정부가 올해 초부터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정부·여당은 2020년 도쿄 올림픽 등 국제 행사를 앞두고 증가하는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모죄 법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야당과 재야 법조계 등은 인권 탄압과 비판여론 봉쇄 등 오남용의 우려가 크다며 반대하고 있다.

일본도 테러 공포?

일본의 대테러 훈련 모습
지난 1월 29일 일본 JR도쿄역 앞 거리에서 경시청 등이 주관하는 테러 대응 훈련이 열렸다. 훈련이 실시된 곳은 2월 26일로 예정된 도쿄 마라톤 대회의 골인 지점이었다.

도쿄 마라톤은 요미우리 신문사 등이 개최하는 일본 최대의 시민 마라톤 행사이다. 훈련은 행사 당일 골인 지점의 시설을 모의로 설치해 놓고, 가상의 테러범을 제압하는 내용으로 실시됐다. 3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훈련이었다.

먼저 관광객을 가장한 모의 테러범이 행사장에 접근해, 폭탄이 가방을 놓고 사라졌다. 이를 발견한 행사 주최 즉 직원들이 즉시 관객들을 대피시켰다. 경시청 폭발물 처리반은 특수 장비를 이용해 폭탄을 들어 올린 뒤, 폭발물 처리 차량에 옮겨 실었다.


이후, 모의 테러범 2명이 총기를 난사하며 나타나자마자, 긴급대응부대(ERT)가 투입됐다. 저격용 총과 방탄 방패 등으로 무장한 경찰병력, 그리고 잘 훈련된 경찰견이 투입돼 테러범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각종 훈련이 일상화된 나라이지만, 이날 대테러 훈련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서 대형 국제행사가 잇따른 예정인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예상외의 장소에서 예상을 벗어난 테러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우려는 당연하다. 그런데 테러 대응을 내세우며 추진하는 법안이 논란을 낳고 있다.

테러준비죄? 공모죄?...정부비판도 중요범죄?

'테러 등 준비죄 법안'은 중대 범죄를 모의만 해도 처벌하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처벌이 가능하다. 과거 3차례나 발의됐지만,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중대 범죄의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경찰 등 '공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일반 시민 누구나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반발이 크자, 이번에는 처벌 대상이 되는 범죄를 기존의 '공모죄'에서 '테러 등 준비죄'로 바꾸었다. (일본 언론은 그래도 '공모죄'라는 표현을 널리 쓰고 있다.) 중대 범죄의 적용 대상도 당초 600여 개에서 대폭 줄이기로 했다. 또 범죄 모의 단계가 아닌 실행 준비 단계에서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범죄를 포함시킬 수 있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 등 정부에 비판적인 재야단체의 활동을 제약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실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관련해 극우 세력 일각에서 근거 없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범죄가 일어날 것 같다는 주관적 판단만으로 전화나 이메일 도청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변호사들, 공모법 반대하며 거리로...

테러 등 준비죄 법안 반대 집회
정부·여당이 순수한 의도를 강조하고 있어도, 반대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와 형법학자, 변호사단체 등은 '준비 행위' 등의 판단이 수사 기관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뤄질 경우, 법 적용 대상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 변호사연합회는 공모죄의 위험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겠다며 거리로 나섰다. 지난 1월 도쿄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신주쿠 역 앞에서 가두 홍보전을 벌이기도 했다.

변호사연합회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일본 형법의 기본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데 악용될 가능성이다. 도청 등이 일상화될 수 있고, 파업 등 쟁의 행위 중 벌어지는 돌발 행위를 중대범죄로 판단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체결한 '국제조직범죄 방지에 관한 UN 협약'에 '중대범죄'와 관련한 '공모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협약 비준을 위한 공모죄 법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변호사연합회는 한국과 일본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공모죄 법안이 있어야 협약을 비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다. 협약 내용의 일부를 유보하거나 이른바 '해석 선언(각 국가의 상황에 맞춰 조약의 내용을 해석하는 일방적 선언)'에 의해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일본에는 이미 심각한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에 대해 '예비죄', '준비죄' 등이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성의 헛발질…법무상이 사과는 했지만…

집권 연립여당의 법안 통과 의지는 확고하다. 그러나 법안 상정 단계부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론이 나쁘지 않은 만큼 비판의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네다 일본 법무상
그런데 법무성이 중의원 예산위를 앞두고 헛발질을 했다. '공모죄'의 구성 요건을 엄격히 하는 것과 관련해, 일단 법안부터 제출한 뒤 법무 위원회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의 문서를 낸 것이다. 물론 여당과의 법안 협의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야당은 이것을 법안을 내기 전에는 질문도 꺼내지 말라는 요구로 받아들였다. 민진당은 '질문 봉쇄' 의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현행 법제도로 대응이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체적 사례를 요구하고 나섰다. 더 나아가 야당은 가네다 법무상의 사퇴를 요구했다.

가뜩이나 비판 여론 잠재우기에 심혈을 기울여온 여당도 아연실색했다. 자민당의 닛카이 간사장도 '정부가 긴장감을 갖고 국회에 대응해달라'고 요청했다. 실수를 하면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도 했다.

가네다 법무상은 '법안 제출 뒤 논의해야 한다'는 문서를 철회하고 사과했다. 국회의 심의 주제에 주문을 낼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는 문서였다고 시인했다. '매우 부적절'한 일로서 '반성하고 있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사퇴요구는 거부했다.

정부·여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논란의 법안은 통과될 것이다. 법안에 비판적인 시민단체는 이를 '시민사회의 재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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