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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재계는 어떻게 ‘공포’를 팔았나…집단소송제의 추억
입력 2017.03.04 (13:19) 수정 2017.03.07 (14:33) 취재후·사건후
2007년 ELS(주가연계증권) 상품에 가입한 김 모 씨는 만기상환일에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안정적이던 KB금융(기초자산) 주가가 갑자기 크게 떨어져 투자금의 25%를 손해 본 겁니다. 누군가가 KB금융 주식을 대량으로 싼값에 팔았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해당 상품의 운용사인 도이치뱅크였습니다.

김 씨 등 피해자 6명이 소송을 제기한 지 5년이 지난 올해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도이치뱅크가 돈을 적게 돌려주려고 주가를 떨어뜨린 사실을 인정해 손해를 배상하도록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비용과 시간 등의 문제로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가 450여 명이나 됩니다. 이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판결의 효력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습니다. 이번 소송이 '증권집단소송'이었기 때문입니다.

6명 소송이 464명에 효력...집단소송제의 힘

6명의 소송으로 464명이 손해를 배상받게 된 건 집단소송제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증권집단소송제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소액투자자 보호를 위해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재계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표류하다 참여정부 때인 2005년 들어서야 시행됐습니다.

당시 재계는 증권집단소송제를 도입하면 "파파라치 같은 전문 소송꾼들이 소액주주를 부추겨 소송을 남발"할 거라고 우려했습니다.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지고 도산이 속출할 수 있다"고도 걱정했습니다.

"기업소송 천국서 사업 못 해...매년 40개 기업 피해"

여야 정치권이 수년간의 논쟁과 협의를 거쳐 여러 규제 장치를 덧붙여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재계의 우려와 공포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시행을 한 달 앞둔 2004년 12월 한 경제신문이 재계의 우려를 반영해 작성한 기사의 제목은 "기업소송 천국서 사업 못 해"였습니다.

시행 직후인 2005년 2월 전경련과 상장사협의회 등 재계 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연간 40개 기업이 제소당해 1천7백억 원대 피해를 볼 것"이라는 구체적인 전망치가 등장했습니다.

재계는 여전히 소송 남발의 우려가 크다며 규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호소했고, 반대편에서는 규제가 지나치게 강해서 문제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 실린 좌담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하나의 제도를 놓고 달라도 너무 달랐던 진단. 당시에는 어느 쪽이 잘못된 진단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증권집단소송제가 시행된지 12년이 지났습니다. 소송은 얼마나 남발됐을까요? 우량기업은 얼마나 휘청거렸을까요?

12년 동안 9건...소송 허가받는 데만 3~5년

지난 12년 동안 제기된 증권집단소송은 모두 합쳐 9건으로 집계됐습니다. 연간으로 보면 가장 많았던 해가 2건이고, 5년 동안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지난 12년의 기록을 놓고 보면, 어느 쪽 진단이 잘못됐는지 명확해진 셈입니다. 집단소송제가 시행될 당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소액투자자가 수천만 원에 이르는 인지대를 부담해야 하고,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소송이 시작되는 등 규제가 지나쳐 소송 제기 자체가 어려워졌다고 재계와 정반대의 우려를 표시한 바 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집단소송을 하기 위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내는 데만 3~5년이 걸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부실을 숨긴 채 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해 수만 명에게 피해를 준 '동양그룹 사태'와 관련해 집단소송 2건이 제기된 게 2014년인데, 집단소송을 허가할지 말지에 대한 최종 판단조차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도이치뱅크 주가조작 사건 역시 소를 제기한 지 4년 만에 법원이 소송할 수 있도록 허가해줘 5년째가 되어서야 1심 판결이 내려진 겁니다. 그나마 1심 판결이라도 나온 것 자체가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소송 남발이 '불가피하다'고까지 표현했던 재계의 장담 섞인 우려, 연간 40건씩 소송이 제기될 거라던 공포 섞인 전망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이번엔 '상법 개정안' 공포...타당한가, 과장됐나

10여 년 전 '증권집단소송제 공포'를 외쳤던 재계가 요즘 다시 '공포'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국회에서 심의 중인 상법 개정안에 대한 공포입니다.

국회의원 122명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다중대표소송제와 전자투표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 법안'이라는 이름을 내걸어 대선 공약으로 채택한 뒤 폐기했던 방안과 대동소이합니다.

재벌 총수가 '황제 경영'으로 다른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기업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소액주주들이 더 수월하게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상법 개정안을 놓고 벌어지는 공방의 '프레임'은 10여 년 전 증권집단소송제 도입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재계는 상법이 개정되면 외국 투기자본 등에 의해 경영권이 위협받게 돼 기업의 정상적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하소연합니다. 쇠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되는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자는 겁니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재계가 현실화되기 어려운 경영권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상법이 개정되어도 '황제 경영'을 최소한도로 견제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하나의 법안에 대해 달라도 너무 다른 진단. 다양한 해외 사례와 이론적 시뮬레이션까지 동반된 양측의 논리 싸움은 언론을 통해 최근 한 달가량 치열하게 전개돼왔습니다.

10여 년 전 집단소송제 공방이 그러했듯이, 상법 개정안의 내용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반인들이 양측의 논리 싸움에서 어느 쪽 진단이 잘못됐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제도를 시행하고 10년쯤은 흘러야 실증적 판가름이 가능하겠지만,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불투명해 현재로선 판가름의 기회 자체가 주어질지 의문입니다.

증권집단소송제 도입 당시 재계가 팔았던 '공포'가 과장됐음이 결과적으로 드러났다 해서, 상법 개정안 공방에서도 재계가 과장된 공포를 팔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타당한 우려와 과장된 공포를 현명하게 가려내지 못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도입한 증권집단소송제가 유명무실해진 과정은 찬찬히 되새겨볼 일입니다.
  • [취재후] 재계는 어떻게 ‘공포’를 팔았나…집단소송제의 추억
    • 입력 2017-03-04 13:19:44
    • 수정2017-03-07 14:33:56
    취재후·사건후
2007년 ELS(주가연계증권) 상품에 가입한 김 모 씨는 만기상환일에 황당한 일을 겪었습니다. 안정적이던 KB금융(기초자산) 주가가 갑자기 크게 떨어져 투자금의 25%를 손해 본 겁니다. 누군가가 KB금융 주식을 대량으로 싼값에 팔았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해당 상품의 운용사인 도이치뱅크였습니다.

김 씨 등 피해자 6명이 소송을 제기한 지 5년이 지난 올해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도이치뱅크가 돈을 적게 돌려주려고 주가를 떨어뜨린 사실을 인정해 손해를 배상하도록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비용과 시간 등의 문제로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가 450여 명이나 됩니다. 이 분들은 어떻게 될까요? 판결의 효력은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습니다. 이번 소송이 '증권집단소송'이었기 때문입니다.

6명 소송이 464명에 효력...집단소송제의 힘

6명의 소송으로 464명이 손해를 배상받게 된 건 집단소송제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증권집단소송제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소액투자자 보호를 위해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재계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표류하다 참여정부 때인 2005년 들어서야 시행됐습니다.

당시 재계는 증권집단소송제를 도입하면 "파파라치 같은 전문 소송꾼들이 소액주주를 부추겨 소송을 남발"할 거라고 우려했습니다.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지고 도산이 속출할 수 있다"고도 걱정했습니다.

"기업소송 천국서 사업 못 해...매년 40개 기업 피해"

여야 정치권이 수년간의 논쟁과 협의를 거쳐 여러 규제 장치를 덧붙여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재계의 우려와 공포는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시행을 한 달 앞둔 2004년 12월 한 경제신문이 재계의 우려를 반영해 작성한 기사의 제목은 "기업소송 천국서 사업 못 해"였습니다.

시행 직후인 2005년 2월 전경련과 상장사협의회 등 재계 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연간 40개 기업이 제소당해 1천7백억 원대 피해를 볼 것"이라는 구체적인 전망치가 등장했습니다.

재계는 여전히 소송 남발의 우려가 크다며 규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호소했고, 반대편에서는 규제가 지나치게 강해서 문제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 실린 좌담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하나의 제도를 놓고 달라도 너무 달랐던 진단. 당시에는 어느 쪽이 잘못된 진단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증권집단소송제가 시행된지 12년이 지났습니다. 소송은 얼마나 남발됐을까요? 우량기업은 얼마나 휘청거렸을까요?

12년 동안 9건...소송 허가받는 데만 3~5년

지난 12년 동안 제기된 증권집단소송은 모두 합쳐 9건으로 집계됐습니다. 연간으로 보면 가장 많았던 해가 2건이고, 5년 동안은 한 건도 없었습니다.


지난 12년의 기록을 놓고 보면, 어느 쪽 진단이 잘못됐는지 명확해진 셈입니다. 집단소송제가 시행될 당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소액투자자가 수천만 원에 이르는 인지대를 부담해야 하고,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소송이 시작되는 등 규제가 지나쳐 소송 제기 자체가 어려워졌다고 재계와 정반대의 우려를 표시한 바 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집단소송을 하기 위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내는 데만 3~5년이 걸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부실을 숨긴 채 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해 수만 명에게 피해를 준 '동양그룹 사태'와 관련해 집단소송 2건이 제기된 게 2014년인데, 집단소송을 허가할지 말지에 대한 최종 판단조차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도이치뱅크 주가조작 사건 역시 소를 제기한 지 4년 만에 법원이 소송할 수 있도록 허가해줘 5년째가 되어서야 1심 판결이 내려진 겁니다. 그나마 1심 판결이라도 나온 것 자체가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소송 남발이 '불가피하다'고까지 표현했던 재계의 장담 섞인 우려, 연간 40건씩 소송이 제기될 거라던 공포 섞인 전망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이번엔 '상법 개정안' 공포...타당한가, 과장됐나

10여 년 전 '증권집단소송제 공포'를 외쳤던 재계가 요즘 다시 '공포'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국회에서 심의 중인 상법 개정안에 대한 공포입니다.

국회의원 122명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다중대표소송제와 전자투표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 법안'이라는 이름을 내걸어 대선 공약으로 채택한 뒤 폐기했던 방안과 대동소이합니다.

재벌 총수가 '황제 경영'으로 다른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기업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소액주주들이 더 수월하게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상법 개정안을 놓고 벌어지는 공방의 '프레임'은 10여 년 전 증권집단소송제 도입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재계는 상법이 개정되면 외국 투기자본 등에 의해 경영권이 위협받게 돼 기업의 정상적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하소연합니다. 쇠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되는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자는 겁니다.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재계가 현실화되기 어려운 경영권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상법이 개정되어도 '황제 경영'을 최소한도로 견제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하나의 법안에 대해 달라도 너무 다른 진단. 다양한 해외 사례와 이론적 시뮬레이션까지 동반된 양측의 논리 싸움은 언론을 통해 최근 한 달가량 치열하게 전개돼왔습니다.

10여 년 전 집단소송제 공방이 그러했듯이, 상법 개정안의 내용조차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반인들이 양측의 논리 싸움에서 어느 쪽 진단이 잘못됐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제도를 시행하고 10년쯤은 흘러야 실증적 판가름이 가능하겠지만,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불투명해 현재로선 판가름의 기회 자체가 주어질지 의문입니다.

증권집단소송제 도입 당시 재계가 팔았던 '공포'가 과장됐음이 결과적으로 드러났다 해서, 상법 개정안 공방에서도 재계가 과장된 공포를 팔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타당한 우려와 과장된 공포를 현명하게 가려내지 못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도입한 증권집단소송제가 유명무실해진 과정은 찬찬히 되새겨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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