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단속’ 김정은…‘망령’까지 불러내며 충성 강요

입력 2017.04.06 (17:34) 수정 2017.04.0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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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기록영화 <당을 받드는 길에 인생의 영광이 있다>북한기록영화 <당을 받드는 길에 인생의 영광이 있다>

지난 달 31일 북한이 조선중앙텔레비전을 통해 방송한 기록영화의 타이틀 화면입니다. 여기서 '당'은 결국 누구일까요?

"최고영도자 김정은 동지의 그 위풍이 있기에 이땅의 혁명 전사들은 모두가 살아서 인생의 더없는 영광을 누리고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격정적 내레이션이 깔리는 화면 속 주인공, 바로 김정은입니다. 도열한 병사들이 김정은 한 사람만 바라보며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칩니다.
김정은의 군 시찰은 추위 속에서도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계속됩니다.

기록영화가 시작된 지 2분 30초 지점, 이때부터 아버지 김정일이 등장하는데요. 이후 55분 동안이나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활동상이 교차 편집됩니다.
김정은이 다시 '단독 주인공'이 되는 건 영화가 끝나기 8분 전부터입니다.

김일성과 리을설김일성과 리을설

이 기록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11명. 김씨 왕조 3명과 8명의 군부 인사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김정은을 빼고는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진 속 인물은 2015년 폐암으로 사망한 리을설인데요. 북한이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이른바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혁명 1세대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2대에 걸쳐 경호를 담당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1984년생인 김정은 혼자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끈끈한 인연입니다.

여기서 '편집의 마술'이 등장해 김정은을 김일성-김정일-리을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총 12분인 리을설 분량을 내용 순으로 대략 정리해봤습니다.

<김일성과 리을설> → <김일성과 리을설, 김정일과 리을설> → <김정일훈장을 수여받는 리을설> → <리을설과 김정은이 만난 영상> → <리을설 장례식에 참석한 김정은 > → <리을설 묘지에 흙을 넣어주는 김정은>의 흐름입니다.

1984년생(김정은)이 북한 군부의 뿌리격인 1921년생(리을설)과 끈끈한 인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할아버지·아버지 찬스'를 쓴 겁니다.

'천안함 폭침'의 주역으로 알려진 김격식·김명국 前 북한군 대장을 비롯한 기록영화 속 나머지 군부 인사들에 대한 내용도 대동소이합니다.

北 공화국 영웅들 사진北 공화국 영웅들 사진

북한은 왜 이 시점에, 죽은 사람들, '망령'들까지 호출해 이런 기록영화를 만들었을까요?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김정은이 '항일 빨치산' 출신들을 푸대접하고 (군부의) 젊은 세력만 대우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큽니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혁명 유자녀들을 쳐내고 있다는 소리도 돌고 있고요. (기록영화는) 김일성·김정일에 충성했던 사람들을 나(김정은)도 잘 보살피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일은 군부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별'(진급)에 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을 조금 못해도 자리를 줬다는 겁니다. 반면 김정은은 아무리 군부에서 잔뼈 굵고 영향력이 있어도 일을 못하면 즉각 인사조치를 하는 성향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는 젊은 충성 군인들로 채우고요.

하지만 어느 사회나 '기득권'의 위력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북한에서는 그게 소위 항일 빨치산 세력이고요.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이번 기록영화가 빨치산 출신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라는 색다른 견해를 내놨습니다.
"군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상황이지만 빨치산 세력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기득권만 누리려하지 않고 할 일 하고 나(김정은)에게 충성하면 챙겨주겠다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군부 단속'과 '군심 달래기', 그러니까 채찍과 당근의 의도가 담긴 영상물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늘(6일)도 "북한은 우리가 떠안고 있는 또 하나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대북 압박 수위를 높였죠.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북한은 지금 흐트러짐없는 '군부 일체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또, 북한의 목표인 '핵·경제 병진'을 위해서도 군부의 지지는 필수입니다.

"당과 수령을 위해 불타던 삶은 우리 혁명의 승리적 전쟁과 더불어 영원하려니 죽어도 잃지 않는 그 생은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께서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 11명을 불러낸 1시간 12분짜리 기록영화는 이같은 말들로 마무리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김정은에게 "받들어 총!"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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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부 단속’ 김정은…‘망령’까지 불러내며 충성 강요
    • 입력 2017-04-06 17:34:18
    • 수정2017-04-06 19:32:22
    취재K
북한기록영화 <당을 받드는 길에 인생의 영광이 있다>
지난 달 31일 북한이 조선중앙텔레비전을 통해 방송한 기록영화의 타이틀 화면입니다. 여기서 '당'은 결국 누구일까요?

"최고영도자 김정은 동지의 그 위풍이 있기에 이땅의 혁명 전사들은 모두가 살아서 인생의 더없는 영광을 누리고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격정적 내레이션이 깔리는 화면 속 주인공, 바로 김정은입니다. 도열한 병사들이 김정은 한 사람만 바라보며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칩니다.
김정은의 군 시찰은 추위 속에서도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계속됩니다.

기록영화가 시작된 지 2분 30초 지점, 이때부터 아버지 김정일이 등장하는데요. 이후 55분 동안이나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의 활동상이 교차 편집됩니다.
김정은이 다시 '단독 주인공'이 되는 건 영화가 끝나기 8분 전부터입니다.

김일성과 리을설
이 기록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11명. 김씨 왕조 3명과 8명의 군부 인사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김정은을 빼고는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진 속 인물은 2015년 폐암으로 사망한 리을설인데요. 북한이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이른바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혁명 1세대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죠.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 2대에 걸쳐 경호를 담당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1984년생인 김정은 혼자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끈끈한 인연입니다.

여기서 '편집의 마술'이 등장해 김정은을 김일성-김정일-리을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총 12분인 리을설 분량을 내용 순으로 대략 정리해봤습니다.

<김일성과 리을설> → <김일성과 리을설, 김정일과 리을설> → <김정일훈장을 수여받는 리을설> → <리을설과 김정은이 만난 영상> → <리을설 장례식에 참석한 김정은 > → <리을설 묘지에 흙을 넣어주는 김정은>의 흐름입니다.

1984년생(김정은)이 북한 군부의 뿌리격인 1921년생(리을설)과 끈끈한 인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할아버지·아버지 찬스'를 쓴 겁니다.

'천안함 폭침'의 주역으로 알려진 김격식·김명국 前 북한군 대장을 비롯한 기록영화 속 나머지 군부 인사들에 대한 내용도 대동소이합니다.

北 공화국 영웅들 사진
북한은 왜 이 시점에, 죽은 사람들, '망령'들까지 호출해 이런 기록영화를 만들었을까요?

북한 외교관 출신 탈북자,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김정은이 '항일 빨치산' 출신들을 푸대접하고 (군부의) 젊은 세력만 대우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큽니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혁명 유자녀들을 쳐내고 있다는 소리도 돌고 있고요. (기록영화는) 김일성·김정일에 충성했던 사람들을 나(김정은)도 잘 보살피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일은 군부로부터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별'(진급)에 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을 조금 못해도 자리를 줬다는 겁니다. 반면 김정은은 아무리 군부에서 잔뼈 굵고 영향력이 있어도 일을 못하면 즉각 인사조치를 하는 성향이라고 합니다. 그 자리는 젊은 충성 군인들로 채우고요.

하지만 어느 사회나 '기득권'의 위력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북한에서는 그게 소위 항일 빨치산 세력이고요.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이번 기록영화가 빨치산 출신들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라는 색다른 견해를 내놨습니다.
"군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상황이지만 빨치산 세력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기득권만 누리려하지 않고 할 일 하고 나(김정은)에게 충성하면 챙겨주겠다라는 메시지를 주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도 '군부 단속'과 '군심 달래기', 그러니까 채찍과 당근의 의도가 담긴 영상물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늘(6일)도 "북한은 우리가 떠안고 있는 또 하나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대북 압박 수위를 높였죠.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북한은 지금 흐트러짐없는 '군부 일체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또, 북한의 목표인 '핵·경제 병진'을 위해서도 군부의 지지는 필수입니다.

"당과 수령을 위해 불타던 삶은 우리 혁명의 승리적 전쟁과 더불어 영원하려니 죽어도 잃지 않는 그 생은 경애하는 원수님(김정은)께서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 11명을 불러낸 1시간 12분짜리 기록영화는 이같은 말들로 마무리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김정은에게 "받들어 총!"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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