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 할머니, 봄꽃에 홀렸네~

입력 2017.04.1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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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다 처녀들은 왜 가슴이 설렜을까. 주름은 깊고 손톱은 닳았는데, 어쩌자고 봄만 되면 기분이 처녀마냥 피어오를까.


올해도 어김없이 피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 경북 울진의 갑배마을 여인들은 꽃구경 가자는 말 대신 나물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산으로 오른다.

온 천지에 봄, 지천으로 봄빛. 고사리, 쑥부쟁이, 참나물, 오가피순, 가죽나물로 돋아나는 산골 여인들의 봄 이야기를 바구니마다 가득 따 담은 산나물 향기에 실어 전한다.

뒷산에 할미꽃이 피었다


진달래는 아직 만발하기 전이고 개나리도 활짝 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경북 울진 백암산 건너편 양지바른 기슭에 알록달록 꽃이 피었다. 할미꽃이다.

빛바랜 두렁에 돋아난 연초록 쑥을 캐러, 검불 위로 솟아오른 여린 고사리를 꺾으러, 갑배마을 할머니들이 알록달록 양지마다 앉았다.

아들에게 보낼 달래도 캐고, 딸에게 보낼 머위 잎도 뜯고, 손녀 좋아하는 두릅도 따는 할머니들. 자식에게 뭐라도 더 보내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껏 산나물을 뜯다가도 연분홍 진달래를 보면 눈길을 빼앗기고, 무덤가에 피어난 할미꽃에도 마음을 빼앗긴다.


나물 바구니만 옆에 끼면 엄마 손잡고 고갯길 넘던 어린 계집아이도 되고, 동무따라 나물 캐던 철부지 소녀도 된다. 할머니들은 칠십 년 넘게 설레는 봄을 맞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저 집 문 열렸나부터 봐”

햇볕 잘 드는 땅을 골라 마련한 산비탈 밭. 두 할머니가 고랑을 파서 이랑을 북돋우는 극젱이질을 한다.


"앞에서 끄는 저이가 영감인 셈이지. 내가 할마이고."

소처럼 앞에서 극젱이를 끌고 가는 사람은 차분조(77) 할머니, 뒤에서 극젱이 날이 깊이 박히도록 힘을 주는 사람은 김순자(74) 할머니다.


갑배마을에서도 소문난 짝꿍으로 통하는 두 할머니는 3년 차이를 두고 한 동네에 나란히 자리잡은 '아재-조카' 사이인 집에 시집을 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식 육남매 칠남매씩 낳아 키우고 영감님도 산으로 보내더니 이제는 앞서 가며 뒤에 가며 서로의 밭을 갈아준다.

종일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살지만 앞집 뒷집 서로 의지할 동무가 있는 할머니들은 새로 할 일이 생기는 이 봄이 여전히 반갑다.

“쓴 나물 데온 물이 고기도곤 맛이 있어”


젊은 시절엔 고개가 꺾이도록 산나물을 캐서 머리에 이고 왔었다. 그렇게 캐온 산나물은 먹을 게 없던 시절 식구들 양식이 됐고, 돈벌이가 없던 시절에는 다달이 내는 자식들 월사금도 됐다.

이제 쌀은 남아도는 시대가 되고 자식들은 도시에 나가 제 앞가림 하며 살기 바쁘지만, 갑배마을 할머니들은 여전히 산에 오른다. 쌀도 흔하고 고기도 흔해진 시대, 올해도 어김없이 산나물을 뜯으며 새로 찾아온 봄의 맛을, 그리운 고향의 맛을 자식들에게 보낸다.


고향에서 보내온 산나물 택배. 그 속엔 어머니의 설레는 봄이, 자식에 대한 연정이 고이 들어 있다. 배우 김영옥이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 공감-산나물 연정'은 4월 15일(토) 저녁 7시 10분 KBS TV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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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물’ 할머니, 봄꽃에 홀렸네~
    • 입력 2017-04-13 18:36:57
    방송·연예
봄마다 처녀들은 왜 가슴이 설렜을까. 주름은 깊고 손톱은 닳았는데, 어쩌자고 봄만 되면 기분이 처녀마냥 피어오를까.


올해도 어김없이 피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 경북 울진의 갑배마을 여인들은 꽃구경 가자는 말 대신 나물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산으로 오른다.

온 천지에 봄, 지천으로 봄빛. 고사리, 쑥부쟁이, 참나물, 오가피순, 가죽나물로 돋아나는 산골 여인들의 봄 이야기를 바구니마다 가득 따 담은 산나물 향기에 실어 전한다.

뒷산에 할미꽃이 피었다


진달래는 아직 만발하기 전이고 개나리도 활짝 피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경북 울진 백암산 건너편 양지바른 기슭에 알록달록 꽃이 피었다. 할미꽃이다.

빛바랜 두렁에 돋아난 연초록 쑥을 캐러, 검불 위로 솟아오른 여린 고사리를 꺾으러, 갑배마을 할머니들이 알록달록 양지마다 앉았다.

아들에게 보낼 달래도 캐고, 딸에게 보낼 머위 잎도 뜯고, 손녀 좋아하는 두릅도 따는 할머니들. 자식에게 뭐라도 더 보내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껏 산나물을 뜯다가도 연분홍 진달래를 보면 눈길을 빼앗기고, 무덤가에 피어난 할미꽃에도 마음을 빼앗긴다.


나물 바구니만 옆에 끼면 엄마 손잡고 고갯길 넘던 어린 계집아이도 되고, 동무따라 나물 캐던 철부지 소녀도 된다. 할머니들은 칠십 년 넘게 설레는 봄을 맞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저 집 문 열렸나부터 봐”

햇볕 잘 드는 땅을 골라 마련한 산비탈 밭. 두 할머니가 고랑을 파서 이랑을 북돋우는 극젱이질을 한다.


"앞에서 끄는 저이가 영감인 셈이지. 내가 할마이고."

소처럼 앞에서 극젱이를 끌고 가는 사람은 차분조(77) 할머니, 뒤에서 극젱이 날이 깊이 박히도록 힘을 주는 사람은 김순자(74) 할머니다.


갑배마을에서도 소문난 짝꿍으로 통하는 두 할머니는 3년 차이를 두고 한 동네에 나란히 자리잡은 '아재-조카' 사이인 집에 시집을 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식 육남매 칠남매씩 낳아 키우고 영감님도 산으로 보내더니 이제는 앞서 가며 뒤에 가며 서로의 밭을 갈아준다.

종일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살지만 앞집 뒷집 서로 의지할 동무가 있는 할머니들은 새로 할 일이 생기는 이 봄이 여전히 반갑다.

“쓴 나물 데온 물이 고기도곤 맛이 있어”


젊은 시절엔 고개가 꺾이도록 산나물을 캐서 머리에 이고 왔었다. 그렇게 캐온 산나물은 먹을 게 없던 시절 식구들 양식이 됐고, 돈벌이가 없던 시절에는 다달이 내는 자식들 월사금도 됐다.

이제 쌀은 남아도는 시대가 되고 자식들은 도시에 나가 제 앞가림 하며 살기 바쁘지만, 갑배마을 할머니들은 여전히 산에 오른다. 쌀도 흔하고 고기도 흔해진 시대, 올해도 어김없이 산나물을 뜯으며 새로 찾아온 봄의 맛을, 그리운 고향의 맛을 자식들에게 보낸다.


고향에서 보내온 산나물 택배. 그 속엔 어머니의 설레는 봄이, 자식에 대한 연정이 고이 들어 있다. 배우 김영옥이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 공감-산나물 연정'은 4월 15일(토) 저녁 7시 10분 KBS TV에서 방송된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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