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40) LP의 부활, 되찾은 노래의 날개

입력 2017.06.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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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소환하는 LP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뭔지 모를 슬픔과 연민이 가슴 가득 안개처럼 번집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아마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시인의 어머니는 화장품을 어깨에 둘러메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목이 터져라 화장품을 사라고 외쳐대셨던 모양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인은 다락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오디오와 턴테이블이 놓였던 흔적을 발견합니다. 그 턴테이블 위에서 날카로운 바늘이 나이테처럼 파인 홈을 긁을 때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왔던 옛날을 떠올립니다. 낡은 턴테이블과 그 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던 LP판은 시인의 뇌리 속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네에서 싸움도 마다않고 바늘처럼 뾰족하게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바늘 같았던 어머니 덕에 어른이 된 지금, 자신이 바늘이 되어 고단한 삶의 나이테를 빙글빙글 돌려보겠노라고 말합니다.

상처 난 홈에서 지지직 지지직 들려오는 끓는 소리가 고단하셨던 어머니가 흥얼거리던 노래처럼 정겹게 들려옵니다. 그렇게 귀에 거슬리던 어머니의 거친 넋두리도, 레코드판의 잡음도 추억 속에서는 더없이 그립고 눈물 납니다.

그런가 하면 레코드판을 이렇게 추억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시인은 화랑에 그림을 감상하러 갔다가 목판의 나이테를 보고는 레코드판의 홈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바늘이 되어 그 레코드판 위의 노래를 읽어가고 또 왈츠를 추기도 합니다. 그러던 시인은 나이테 한 켠에 박힌 옹이를 발견하고는 흔히 '스크래치'라고 하는 레코드판의 흠집을 연상합니다. 다시 무언가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춰버린 자신의 힘겨운 삶을 떠올립니다. 마치 이 옹이가 배꼽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꼽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온갖 영양분을 공급받았던 생명줄이지만, 이 세상에 나올 때는 반드시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 배꼽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레코드판의 흠집이 크면 클수록 노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바늘은 지지직 지지직 파열음을 내면서 제자리를 돌아야 합니다. 목판의 나이테에서 검은 레코드판의 홈을 떠올리고, 나이테의 옹이에서 레코드 판의 흠집을 연상하고 그 단단한 흠집 때문에 춤추듯 돌아가지 않는 자신의 고장 난 인생을 떠올립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이란 게 정말 레코드판처럼 단순한 궤도를 빙글빙글 도는 따분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로 흠집에 걸려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이 있어서일까요? 시인의 슬픔은 그냥 슬픔이 아니라 노래로 토해내는 슬픔, 춤으로 승화시킨 슬픔이어서 그런지 견딜만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의 기억은 무언가를 매개로 발화합니다. 매개 없이 저절로 발화하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문득 길을 가다가 쇼윈도에 비친 구두나 옷, 혹은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눈 가득 들어오는 인상적인 대목에서 점화합니다. 수제비나 국수 등 음식을 먹다가 먹거리에 얽힌 어린 시절의 궁핍이나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혹은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도 가물가물하던 옛사랑이나 이별의 경험이 반추되고는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강력한 울림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음악이 아닌가 합니다. 김승희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음악은 마치 '옷을 박음질한 솔기가 뜯어지듯' 주르륵, 견고하게 닫혀있던 기억의 문을 갈라 그 안에 잠들어있던 온갖 기억을 생생하게 깨웁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거나, 카페에서 차 한잔을 마시다가도 문득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음악 소리를 듣게 되면 반드시 음악을 에워쌌던 과거의 특정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요즘의 음악은 첨단의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음원을 흘려 듣거나 다운로드 받아서 듣는 방식이어서 그야말로 순수한 무형의 선율만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검은 비닐에 홈을 판 LP나 카세트테이프 혹은 CD와 같은 유형의 매체가 음악을 담고 있어서 추억을 소환하는 힘이 더욱 강렬했습니다.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시각과 청각이 한꺼번에 작동하니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기억하시나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절해의 고도 감옥에서 주인공 앤디(팀 로빈스)는 어느 날 교도관 몰래 아름다운 노래를 틉니다. 까만 LP판 위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중창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가 교도소 운동장에 울려 퍼집니다. 웅성거리던 죄수들은 모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 가장 거룩하고 장엄한 음악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LP를 틀지 않고 디지털 음원을 틀었다면 얼마나 맥이 빠질까요?

사라진 LP, 되살아온 LP


1970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오디오도 LP도 대부분의 집에는 없었던 시절이었고 저희 집에도 당연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놀러 간 옆집 동네 형님 집에서 둔탁한 턴테이블 위, 빙글빙글 돌아가는 LP 레코드판 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어찌나 신기하고 멋진 음악이었던지 지금도 그 LP판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미국의 팝그룹 CCR의 노래를 담은 불법 복제판이었습니다. '목화밭'(cotton field)과 '누가 비를 멈출 것인가'(Who'll stop the rain) 같은 노래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CCR의 노래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팬이 되었고, LP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버지를 졸라 천일사에서 나오는 별표 전축을 드디어 집에서 들을 수 있었고, 부지런히 LP판을 사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재킷도 근사하고 음질도 뛰어났던 라이센스 판을 사고 싶었지만 얇은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해적판'이라는 불법 복제판을 잔뜩 샀습니다. 그래도 새 판을 들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설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밤중 방의 불을 꺼놓고 오직 턴테이블 위 빙글빙글 돌아가는 검은 판에 눈과 귀를 집중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머리를 짓누르던 공부의 부담도, 막연하던 미래의 두려움도 사라지고 오직 선율 안에서 행복했습니다. 노래를 고래고래 따라 부르기도 하고, 멜랑콜리해져서 훌쩍거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라디오에서는 좀처럼 듣지 못하던 인기가수의 비인기 곡들 가운데 멋진 곡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더욱 컸고요. 지금도 'JUNK'와 '시인, 기도, 그리고 약속'이라는 노래가 담겨 있던 존 덴버의 해적판을 잊지 못합니다.

때로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탐나는 LP판을 슬쩍 집어오기도 했습니다 초콜렛색 재킷에 '불꽃놀이'(Fireworks)라는 글자가 굵게 새겨져 있던 맹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의 음반에는 얼마나 멋진 연주들이 들어있었는지요. LP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의 세계에 입문했던 7080세대 가운데는 저와 같이 LP 레코드판을 사러 음악사와 전파사를 뒤지고 다닌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게 100g 안팎에 앞뒤로 30분씩 1시간 분량을 담았던 이 검은 레코드판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부피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데다 아무리 곱게 다룬다 해도 여기저기 긁히고 휘어져 음원이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바늘도 걸핏하면 닳기 일쑤고 습도와 온도에도 민감해 보관이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구동하는 턴테이블을 옮길 수 없어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면서 듣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80년대로 기억합니다만 카세트테이프가 나오면서 한차례 타격을 입은 LP는 90년대 들어 더욱 간편한 CD와 MP3가 대세가 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성음과 지구 오아시스 도레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음반 제작사는 도미노로 문을 닫았고, 마침내 2004년 서라벌 레코드사가 문을 닫으면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더는 이 땅에서 살아날 것 같지 않던 LP는 그러나 최근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LP의 귀환을 알린 곳은 중장년과 노년세대를 상대로 다시 문을 연 LP 카페들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음원 시대에 기이하게도 이 불편한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라졌던 LP 카페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끓는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원두를 볶고 그라인더로 갈아 마시는 드립 커피를 찾듯이 육중한 재킷을 꺼내 비닐을 벗기고 먼지를 닦고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번거로움을 재미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다 편리하게!'를 모토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패턴과 문화를 역류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상상력연구소 김용섭 소장은 "사람들이 이제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남다는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LP를 틀어주는 서비스에서 한발 더 나아가 뮤직박스를 다시 꾸미고, 머리 희끗한 초로의 디제이가 뮤직박스 작은 창으로 건네받는 신청곡을 감미로운 해설에 실어 들려주는 복고풍 음악다방도 생겨났습니다. 정말 팝송 가사처럼 세상만사가 둥글둥글 LP판처럼 돌고 도는가 봅니다.

LP음반 판매량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교보문고의 음반 판매장인 핫트랙스의 경우 2016년 음반 판매량은 2015년보다 무려 68%나 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열풍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도 다시 LP를 제작하는 회사가 올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동안은 국내 가수의 음반이라 해도 체코나 독일에 가서 길게는 반년이나 걸려 제작을 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LP 붐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일기 시작한 LP 바람으로 매출액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전 세계의 LP 판매액은 6천5백만 달러, 2011년에는 1억 천4백만 달러, 2013년에는 2억 2천4백만 달러, 2014년에는 3억 4천7백만 달러, 2015년에는 4억 천6백만 달러나 됐습니다. 지난해만도 전 세계적으로 무려 3천200만 장의 LP 음반이 팔려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전체 음원 시장에서 LP 음반이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불과하니 성장 가능성은 큽니다.

우리나라에서 LP 음반 시장을 주도하는 층은 뚜렷하게 갈립니다. 한 부류는 과거의 LP 음질을 그리워하는 중장년층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첨단의 디지털 음원이 몸에 뱄을 것 같은 젊은 세대들입니다. 이들의 취미를 겨냥해 새로운 노래를 내놓은 아이돌 그룹은 LP 재킷을 음원과 함께 발매하기도 합니다.


저도 최근 생일선물로 요즘 복각돼 나오는 LP판을 선물 받았습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홈도 깊이 파이고 무게도 두 배 정도 되는 묵직한 재킷이었는데, 가격은 4만 5천 원이라니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음반을 걸어보니 무언가 뿌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신의 고매함을 강조해도 몸이 피와 살, 뼈와 물로 돼 있는 물질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런 물성(物性)이 주는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힘은 강렬합니다.음악을 형체도 없는 음원으로 들을 때와 저 검은 판이 묵직한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가고 다시 날카로운 바늘에 의해서 제 몸을 긁히면서 뿜어내는 장중하면서도 섬세하고 고우면서도 격정적인 선율을 들을 때 느끼는 감동은 확연히 다릅니다.

선율뿐이 아닙니다. 재킷에 새겨진 지휘자와 단원들이 이 곡을 녹음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했던 땀과 시간, 그리고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고뇌와 환희도 오롯이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첨단 디지털 기술에 무임승차해서 작곡자와 연주자에게 아무런 감흥도 감사의 마음도 없이 듣는 음악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저는 교향곡을 듣는 내내 재킷을 두 손으로 들고 어루만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 음악가와 연주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어떤 시인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노래를 검은 레코드판에서 끄집어낸 것은 바늘도 턴테이블도 오디오도 아니고 삶, 그것도 온 마음을 다한 곡진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러고 보니 노래는 마법사입니다. 때로 인간의 흥분과 비탄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선물일 때도 있고, 반대로 반정부군의 총부리처럼 인간을 파괴와 광기로 나아가게 하는 선동제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것이 차가운 예술이건 뜨거운 예술이건 시인의 말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불후의 명곡'이나 '나는 가수다' 등을 들을 때 시청자의 살갗에 소름이 돋게 하는 노래는 그것이 발라드이든 록이든 트로트이든 가수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혼신의 힘으로 부르는 노래여야만 하지요.

나만의 음악, 획일화된 문화를 벗어나는 신호탄


LP 음반을 흔히 아날로그적 감성이라고 말합니다. 디지털로 상징되는 천편일률 감성과 대비되는 아날로그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 LP 음반입니다. 디지털 음원도 어떤 기기로 듣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니 더욱 유사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LP 음반은 음반의 보관 상태와 녹음 수준, 바늘의 마모 상태, 턴테이블의 회전 속도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음질이 구현되니 어떻게 보면 듣는 사람만큼의 음악이 재현되는 셈입니다.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닌 개성 만점의 음악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디지털 산업의 총아 스티브 잡스도 정작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LP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디지털과 아날로그 음질 간에는 정말 뚜렷한 차이가 있는 걸까요? 사실 신경을 곧추세우고 들어도 아날로그로 재현하는 소리와 디지털로 재현하는 소리를 구별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음악을 들어온 매니아들은 확연히 구별된다고 주장합니다. 오디오 전문가 남우선 씨는 그의 저서 <나쁜 음악보고서>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생음악을 활어에 비유한다면, 아날로그 방식의 LP는 싱싱한 생선회, CD는 통조림, MP3는 육즙이 다 빠져나간 건포다."

기발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이런 비유를 든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즉 "디지털 음원은 잡음까지도 다 잘라내고 실재음의 극히 일부만 기록하기 때문에 깨끗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몸의 자율신경계는 그것을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소리로 파악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근육의 활성화 정도가 떨어지고 정신의 자율조절 기능과 항상성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류가 수십만 년 들어온 자연의 소리에는 다양한 소음이 섞여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디지털 음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든 음이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되는 과정에서 MP3 등의 압축 포맷방식으로는 원음을 5% 밖에 담아내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디지털은 '죽음의 소리', 아날로그는 '생명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LP와 턴테이블의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음악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인 인간이 생명에 해로운 것을 떨쳐내리는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음반전문가는 LP 부활에 대해 소비자들인 음악을 디지털로 소비하면서도 소유는 아날로그로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러니까 '소비(消費)로서의 음악'과 '소장(所藏)으로서의 음악'으로 양극화된다는 것이지요.

가로세로 30cm의 LP 음반을 집어 들고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을 올려놓은 행위를 마치 종교에서 제의를 치르는 감격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LP 마니아면서 문화평론가이신 김갑수 선생님도 이렇게 LP를 예찬합니다.


그러고 보니 책도 그렇군요.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책을 볼 때와 부피를 지닌 책을 손으로 만져가면서 볼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메일을 모니터 상에서 열어보는 편지와 봉투를 뜯고 두 손으로 종이를 받쳐 들고 읽어내려가는 편지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LP의 부활을 계기로 사라진 아날로그 감성의 복원 도미노가 일어나길

오랫동안 LP를 잊고 살았던 저도 2년 전, 다시 턴테이블을 사고 LP를 한장 두장 모으고 있습니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앰프의 스위치를 켜고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놓습니다. 적막한 밤에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는 니니로쏘(Nini Rosso)의 트럼펫 연주 '밤하늘의 트럼펫'(Il Silenzio)를 듣기도 하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걸어놓기도 합니다. 송창식 선생님의 '밤눈'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더운 여름도 시원해집니다.

LP를 들으면서 곰곰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LP 말고도 산업화와 기계화, 디지털화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아날로그적 가치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동네 멋쟁이 아저씨들이 드나들던 수제 양복점, 우아한 드레스가 진열돼 있던 의상실, 수십 년 갈고 닦은 장인들의 손길이 빚어낸 구두점, 어릴 적 가장 먹고 싶었던 센베 과자를 굽던 동네 제과점,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적어 내려가던 손편지, 하늘 가득 눈부신 생명의 발을 쳐놓았던 국숫집, 무, 배추를 담은 비닐 봉투에 정과 사랑을 덤으로 듬뿍 얹어주는 전통시장…

보다 빨리, 보다 많이, 보다 값싸게를 외치는 기계화와 디지털 세상에 밀려 하나둘 자취를 감춘 이 소중한 것들이 LP가 부활하면서 함께 부활하기를 빌어봅니다. 비록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아날로그만이 간직한 따스한 온기를 다시 차가운 세상에 뿌려주기를 소망합니다. 편리와 속도와 효율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결과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라고, 이사 다니면서 거추장스럽다고 LP와 턴테이블을 버리신 분이나, 음악을 듣는 과정이 번거롭다고 LP를 외면했던 분들이 계신다면 한번 큰 맘 먹고 LP를 다시 곁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되돌아온 LP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을 줄 테니까요.

저도 제 곁에서 떠나보냈던 LP, 다시 돌아온 LP가 좋아 시 한 편 써봤습니다. 여러분도 LP를 들으며 그리운 이에게 손편지 한 줄 써보시지 않겠습니까?


[연관 기사] [임병걸의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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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40) LP의 부활, 되찾은 노래의 날개
    • 입력 2017-06-13 18:09:58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추억을 소환하는 LP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뭔지 모를 슬픔과 연민이 가슴 가득 안개처럼 번집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닥치는 대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아마 가장이었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시인의 어머니는 화장품을 어깨에 둘러메고 골목골목을 누비며 목이 터져라 화장품을 사라고 외쳐대셨던 모양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인은 다락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오디오와 턴테이블이 놓였던 흔적을 발견합니다. 그 턴테이블 위에서 날카로운 바늘이 나이테처럼 파인 홈을 긁을 때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왔던 옛날을 떠올립니다. 낡은 턴테이블과 그 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던 LP판은 시인의 뇌리 속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네에서 싸움도 마다않고 바늘처럼 뾰족하게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바늘 같았던 어머니 덕에 어른이 된 지금, 자신이 바늘이 되어 고단한 삶의 나이테를 빙글빙글 돌려보겠노라고 말합니다.

상처 난 홈에서 지지직 지지직 들려오는 끓는 소리가 고단하셨던 어머니가 흥얼거리던 노래처럼 정겹게 들려옵니다. 그렇게 귀에 거슬리던 어머니의 거친 넋두리도, 레코드판의 잡음도 추억 속에서는 더없이 그립고 눈물 납니다.

그런가 하면 레코드판을 이렇게 추억하는 시인도 있습니다.


시인은 화랑에 그림을 감상하러 갔다가 목판의 나이테를 보고는 레코드판의 홈을 떠올립니다. 시인은 바늘이 되어 그 레코드판 위의 노래를 읽어가고 또 왈츠를 추기도 합니다. 그러던 시인은 나이테 한 켠에 박힌 옹이를 발견하고는 흔히 '스크래치'라고 하는 레코드판의 흠집을 연상합니다. 다시 무언가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춰버린 자신의 힘겨운 삶을 떠올립니다. 마치 이 옹이가 배꼽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꼽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온갖 영양분을 공급받았던 생명줄이지만, 이 세상에 나올 때는 반드시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 배꼽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레코드판의 흠집이 크면 클수록 노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바늘은 지지직 지지직 파열음을 내면서 제자리를 돌아야 합니다. 목판의 나이테에서 검은 레코드판의 홈을 떠올리고, 나이테의 옹이에서 레코드 판의 흠집을 연상하고 그 단단한 흠집 때문에 춤추듯 돌아가지 않는 자신의 고장 난 인생을 떠올립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이란 게 정말 레코드판처럼 단순한 궤도를 빙글빙글 도는 따분한 것 같기도 하고, 때로 흠집에 걸려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이 있어서일까요? 시인의 슬픔은 그냥 슬픔이 아니라 노래로 토해내는 슬픔, 춤으로 승화시킨 슬픔이어서 그런지 견딜만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의 기억은 무언가를 매개로 발화합니다. 매개 없이 저절로 발화하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문득 길을 가다가 쇼윈도에 비친 구두나 옷, 혹은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눈 가득 들어오는 인상적인 대목에서 점화합니다. 수제비나 국수 등 음식을 먹다가 먹거리에 얽힌 어린 시절의 궁핍이나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혹은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도 가물가물하던 옛사랑이나 이별의 경험이 반추되고는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강력한 울림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음악이 아닌가 합니다. 김승희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음악은 마치 '옷을 박음질한 솔기가 뜯어지듯' 주르륵, 견고하게 닫혀있던 기억의 문을 갈라 그 안에 잠들어있던 온갖 기억을 생생하게 깨웁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거나, 카페에서 차 한잔을 마시다가도 문득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음악 소리를 듣게 되면 반드시 음악을 에워쌌던 과거의 특정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요즘의 음악은 첨단의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음원을 흘려 듣거나 다운로드 받아서 듣는 방식이어서 그야말로 순수한 무형의 선율만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검은 비닐에 홈을 판 LP나 카세트테이프 혹은 CD와 같은 유형의 매체가 음악을 담고 있어서 추억을 소환하는 힘이 더욱 강렬했습니다.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강렬한 시각과 청각이 한꺼번에 작동하니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기억하시나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절해의 고도 감옥에서 주인공 앤디(팀 로빈스)는 어느 날 교도관 몰래 아름다운 노래를 틉니다. 까만 LP판 위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중창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가 교도소 운동장에 울려 퍼집니다. 웅성거리던 죄수들은 모두 얼어붙은 듯 멈춰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 가장 거룩하고 장엄한 음악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LP를 틀지 않고 디지털 음원을 틀었다면 얼마나 맥이 빠질까요?

사라진 LP, 되살아온 LP


1970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오디오도 LP도 대부분의 집에는 없었던 시절이었고 저희 집에도 당연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저는 우연히 놀러 간 옆집 동네 형님 집에서 둔탁한 턴테이블 위, 빙글빙글 돌아가는 LP 레코드판 소리를 처음 들었습니다. 어찌나 신기하고 멋진 음악이었던지 지금도 그 LP판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미국의 팝그룹 CCR의 노래를 담은 불법 복제판이었습니다. '목화밭'(cotton field)과 '누가 비를 멈출 것인가'(Who'll stop the rain) 같은 노래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CCR의 노래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팬이 되었고, LP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버지를 졸라 천일사에서 나오는 별표 전축을 드디어 집에서 들을 수 있었고, 부지런히 LP판을 사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재킷도 근사하고 음질도 뛰어났던 라이센스 판을 사고 싶었지만 얇은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해적판'이라는 불법 복제판을 잔뜩 샀습니다. 그래도 새 판을 들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이 설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밤중 방의 불을 꺼놓고 오직 턴테이블 위 빙글빙글 돌아가는 검은 판에 눈과 귀를 집중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머리를 짓누르던 공부의 부담도, 막연하던 미래의 두려움도 사라지고 오직 선율 안에서 행복했습니다. 노래를 고래고래 따라 부르기도 하고, 멜랑콜리해져서 훌쩍거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라디오에서는 좀처럼 듣지 못하던 인기가수의 비인기 곡들 가운데 멋진 곡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더욱 컸고요. 지금도 'JUNK'와 '시인, 기도, 그리고 약속'이라는 노래가 담겨 있던 존 덴버의 해적판을 잊지 못합니다.

때로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 탐나는 LP판을 슬쩍 집어오기도 했습니다 초콜렛색 재킷에 '불꽃놀이'(Fireworks)라는 글자가 굵게 새겨져 있던 맹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의 음반에는 얼마나 멋진 연주들이 들어있었는지요. LP를 통해 본격적으로 음악의 세계에 입문했던 7080세대 가운데는 저와 같이 LP 레코드판을 사러 음악사와 전파사를 뒤지고 다닌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게 100g 안팎에 앞뒤로 30분씩 1시간 분량을 담았던 이 검은 레코드판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부피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데다 아무리 곱게 다룬다 해도 여기저기 긁히고 휘어져 음원이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바늘도 걸핏하면 닳기 일쑤고 습도와 온도에도 민감해 보관이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구동하는 턴테이블을 옮길 수 없어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면서 듣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80년대로 기억합니다만 카세트테이프가 나오면서 한차례 타격을 입은 LP는 90년대 들어 더욱 간편한 CD와 MP3가 대세가 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성음과 지구 오아시스 도레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던 음반 제작사는 도미노로 문을 닫았고, 마침내 2004년 서라벌 레코드사가 문을 닫으면서 이 땅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더는 이 땅에서 살아날 것 같지 않던 LP는 그러나 최근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습니다. LP의 귀환을 알린 곳은 중장년과 노년세대를 상대로 다시 문을 연 LP 카페들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음원 시대에 기이하게도 이 불편한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라졌던 LP 카페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끓는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원두를 볶고 그라인더로 갈아 마시는 드립 커피를 찾듯이 육중한 재킷을 꺼내 비닐을 벗기고 먼지를 닦고 턴테이블에 올려놓는 번거로움을 재미로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다 편리하게!'를 모토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패턴과 문화를 역류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날카로운 상상력연구소 김용섭 소장은 "사람들이 이제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남다는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LP를 틀어주는 서비스에서 한발 더 나아가 뮤직박스를 다시 꾸미고, 머리 희끗한 초로의 디제이가 뮤직박스 작은 창으로 건네받는 신청곡을 감미로운 해설에 실어 들려주는 복고풍 음악다방도 생겨났습니다. 정말 팝송 가사처럼 세상만사가 둥글둥글 LP판처럼 돌고 도는가 봅니다.

LP음반 판매량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교보문고의 음반 판매장인 핫트랙스의 경우 2016년 음반 판매량은 2015년보다 무려 68%나 늘었다고 합니다. 이런 열풍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도 다시 LP를 제작하는 회사가 올해 문을 열었습니다. 그동안은 국내 가수의 음반이라 해도 체코나 독일에 가서 길게는 반년이나 걸려 제작을 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LP 붐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독일 등 선진국에서 일기 시작한 LP 바람으로 매출액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전 세계의 LP 판매액은 6천5백만 달러, 2011년에는 1억 천4백만 달러, 2013년에는 2억 2천4백만 달러, 2014년에는 3억 4천7백만 달러, 2015년에는 4억 천6백만 달러나 됐습니다. 지난해만도 전 세계적으로 무려 3천200만 장의 LP 음반이 팔려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전체 음원 시장에서 LP 음반이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불과하니 성장 가능성은 큽니다.

우리나라에서 LP 음반 시장을 주도하는 층은 뚜렷하게 갈립니다. 한 부류는 과거의 LP 음질을 그리워하는 중장년층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첨단의 디지털 음원이 몸에 뱄을 것 같은 젊은 세대들입니다. 이들의 취미를 겨냥해 새로운 노래를 내놓은 아이돌 그룹은 LP 재킷을 음원과 함께 발매하기도 합니다.


저도 최근 생일선물로 요즘 복각돼 나오는 LP판을 선물 받았습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었습니다. 과거에 비해 홈도 깊이 파이고 무게도 두 배 정도 되는 묵직한 재킷이었는데, 가격은 4만 5천 원이라니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음반을 걸어보니 무언가 뿌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신의 고매함을 강조해도 몸이 피와 살, 뼈와 물로 돼 있는 물질임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런 물성(物性)이 주는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힘은 강렬합니다.음악을 형체도 없는 음원으로 들을 때와 저 검은 판이 묵직한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가고 다시 날카로운 바늘에 의해서 제 몸을 긁히면서 뿜어내는 장중하면서도 섬세하고 고우면서도 격정적인 선율을 들을 때 느끼는 감동은 확연히 다릅니다.

선율뿐이 아닙니다. 재킷에 새겨진 지휘자와 단원들이 이 곡을 녹음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했던 땀과 시간, 그리고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고뇌와 환희도 오롯이 전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첨단 디지털 기술에 무임승차해서 작곡자와 연주자에게 아무런 감흥도 감사의 마음도 없이 듣는 음악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저는 교향곡을 듣는 내내 재킷을 두 손으로 들고 어루만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 음악가와 연주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어떤 시인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노래를 검은 레코드판에서 끄집어낸 것은 바늘도 턴테이블도 오디오도 아니고 삶, 그것도 온 마음을 다한 곡진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러고 보니 노래는 마법사입니다. 때로 인간의 흥분과 비탄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선물일 때도 있고, 반대로 반정부군의 총부리처럼 인간을 파괴와 광기로 나아가게 하는 선동제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것이 차가운 예술이건 뜨거운 예술이건 시인의 말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나요? '불후의 명곡'이나 '나는 가수다' 등을 들을 때 시청자의 살갗에 소름이 돋게 하는 노래는 그것이 발라드이든 록이든 트로트이든 가수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혼신의 힘으로 부르는 노래여야만 하지요.

나만의 음악, 획일화된 문화를 벗어나는 신호탄


LP 음반을 흔히 아날로그적 감성이라고 말합니다. 디지털로 상징되는 천편일률 감성과 대비되는 아날로그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 LP 음반입니다. 디지털 음원도 어떤 기기로 듣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니 더욱 유사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LP 음반은 음반의 보관 상태와 녹음 수준, 바늘의 마모 상태, 턴테이블의 회전 속도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음질이 구현되니 어떻게 보면 듣는 사람만큼의 음악이 재현되는 셈입니다.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고유성을 지닌 개성 만점의 음악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디지털 산업의 총아 스티브 잡스도 정작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LP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디지털과 아날로그 음질 간에는 정말 뚜렷한 차이가 있는 걸까요? 사실 신경을 곧추세우고 들어도 아날로그로 재현하는 소리와 디지털로 재현하는 소리를 구별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음악을 들어온 매니아들은 확연히 구별된다고 주장합니다. 오디오 전문가 남우선 씨는 그의 저서 <나쁜 음악보고서>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생음악을 활어에 비유한다면, 아날로그 방식의 LP는 싱싱한 생선회, CD는 통조림, MP3는 육즙이 다 빠져나간 건포다."

기발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이런 비유를 든 데는 근거가 있습니다. 즉 "디지털 음원은 잡음까지도 다 잘라내고 실재음의 극히 일부만 기록하기 때문에 깨끗한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몸의 자율신경계는 그것을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소리로 파악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근육의 활성화 정도가 떨어지고 정신의 자율조절 기능과 항상성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류가 수십만 년 들어온 자연의 소리에는 다양한 소음이 섞여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디지털 음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모든 음이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되는 과정에서 MP3 등의 압축 포맷방식으로는 원음을 5% 밖에 담아내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디지털은 '죽음의 소리', 아날로그는 '생명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LP와 턴테이블의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음악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인 인간이 생명에 해로운 것을 떨쳐내리는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음반전문가는 LP 부활에 대해 소비자들인 음악을 디지털로 소비하면서도 소유는 아날로그로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그러니까 '소비(消費)로서의 음악'과 '소장(所藏)으로서의 음악'으로 양극화된다는 것이지요.

가로세로 30cm의 LP 음반을 집어 들고 턴테이블에 걸고 바늘을 올려놓은 행위를 마치 종교에서 제의를 치르는 감격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LP 마니아면서 문화평론가이신 김갑수 선생님도 이렇게 LP를 예찬합니다.


그러고 보니 책도 그렇군요.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책을 볼 때와 부피를 지닌 책을 손으로 만져가면서 볼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메일을 모니터 상에서 열어보는 편지와 봉투를 뜯고 두 손으로 종이를 받쳐 들고 읽어내려가는 편지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LP의 부활을 계기로 사라진 아날로그 감성의 복원 도미노가 일어나길

오랫동안 LP를 잊고 살았던 저도 2년 전, 다시 턴테이블을 사고 LP를 한장 두장 모으고 있습니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앰프의 스위치를 켜고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놓습니다. 적막한 밤에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는 니니로쏘(Nini Rosso)의 트럼펫 연주 '밤하늘의 트럼펫'(Il Silenzio)를 듣기도 하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걸어놓기도 합니다. 송창식 선생님의 '밤눈'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더운 여름도 시원해집니다.

LP를 들으면서 곰곰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는 LP 말고도 산업화와 기계화, 디지털화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아날로그적 가치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동네 멋쟁이 아저씨들이 드나들던 수제 양복점, 우아한 드레스가 진열돼 있던 의상실, 수십 년 갈고 닦은 장인들의 손길이 빚어낸 구두점, 어릴 적 가장 먹고 싶었던 센베 과자를 굽던 동네 제과점,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적어 내려가던 손편지, 하늘 가득 눈부신 생명의 발을 쳐놓았던 국숫집, 무, 배추를 담은 비닐 봉투에 정과 사랑을 덤으로 듬뿍 얹어주는 전통시장…

보다 빨리, 보다 많이, 보다 값싸게를 외치는 기계화와 디지털 세상에 밀려 하나둘 자취를 감춘 이 소중한 것들이 LP가 부활하면서 함께 부활하기를 빌어봅니다. 비록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아날로그만이 간직한 따스한 온기를 다시 차가운 세상에 뿌려주기를 소망합니다. 편리와 속도와 효율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결과만이 가치의 척도는 아니라고, 이사 다니면서 거추장스럽다고 LP와 턴테이블을 버리신 분이나, 음악을 듣는 과정이 번거롭다고 LP를 외면했던 분들이 계신다면 한번 큰 맘 먹고 LP를 다시 곁으로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되돌아온 LP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을 줄 테니까요.

저도 제 곁에서 떠나보냈던 LP, 다시 돌아온 LP가 좋아 시 한 편 써봤습니다. 여러분도 LP를 들으며 그리운 이에게 손편지 한 줄 써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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