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왜 여인 치맛단에 편지를 썼을까?

입력 2017.07.0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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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경기도 수원의 한 건물주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범상치 않은 고문헌을 발견하고 자신의 폐품과 맞바꾼다.

2년 뒤, KBS 'TV쇼 진품명품'(2006년 4월 2일 방송)에 등장한 이 고문헌이 진품으로 밝혀지면서 전문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서·해서 등 정약용의 다양한 서체를 연구할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당시 감정가 1억 원을 받았다.


당시 감정위원들이 밝혀낸 고문헌은 '다산시문집' 등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다.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치맛단에 적은 것으로, 노을 '하(霞)'와 치마 '피(帔)'를 써 노을빛 치마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학자가 여인의 치맛단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치마는 누구의 것일까.

[연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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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학가이자 건축가, 행정가이면서 탁월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그는 1801년(순조 1년) 전남 강진으로 1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천주교와 그 교도들을 탄압한 신유박해 때, 천주교와 관련한 게 문제가 된 것이다.

정약용이 유배를 떠날 때,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19살, 16살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였지만, 두 아들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인식 탓에 과거를 볼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정약용은 그럴수록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벼슬길이 막힌 폐족의 자식이라도 세상에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유배 중에도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며 하피첩에 폐족의 자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담았다. 하피첩에 유독 망한 가문을 뜻하는 '폐족(廢族)'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왜 하필 치맛단이었을까.

지난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언론에 공개한 하피첩(보물 제1683-2호). 하피첩을 만들 때 사용한 치마에 바느질 흔적(빨간 원안)이 남아있다.지난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언론에 공개한 하피첩(보물 제1683-2호). 하피첩을 만들 때 사용한 치마에 바느질 흔적(빨간 원안)이 남아있다.

하피첩의 앞 장에는 "내가 탐진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는 말이 적혀 있다. 부인 홍 씨가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함께 했던 때를 잊지 말고 힘든 시기를 같이 이겨내자"는 의미로 결혼 예복이던 훈염(纁袡)을 보내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은 부인 홍 씨의 치마를 사용해 유배 중 시집간 딸의 행복을 기원하는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를 그렸다.

'매화쌍조도'는 두 마리 새가 한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딸이 두 마리 새처럼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았다.

'매화쌍조도'에 따르면 하피첩은 총 네 첩으로 제작됐지만, 현재 발견된 하피첩은 3권뿐이다. 하피첩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두 첩에 '을(乙)'과 '정(丁)'이라는 글자가 발견돼 갑을병정(甲乙兵丁)의 순서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KBS '천상의 컬렉션'(7월 1일 방송, KBS 1TV)에서 하피첩을 소개한 배우 공형진은 "붉은 치맛단에 써 내려간 정약용의 필적에서 아버지의 절절함을 느낄 수 있다. 같은 아버지로서 정약용의 마음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붉은 매화와 흰 매화 10폭 병풍, 천상열차분야지도, 정약용 필적 하피첩(사진 왼쪽부터) 붉은 매화와 흰 매화 10폭 병풍, 천상열차분야지도, 정약용 필적 하피첩

이날 방송에서 뮤지컬 배우 김소현은 고려의 천문학자 류방택이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배우 김수로는 조선의 마지막 '대(大)'화가 오원 장승업이 그린 '붉은 매화와 흰 매화 10폭 병풍'을 소개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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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은 왜 여인 치맛단에 편지를 썼을까?
    • 입력 2017-07-04 08:01:09
    방송·연예
2004년 경기도 수원의 한 건물주는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범상치 않은 고문헌을 발견하고 자신의 폐품과 맞바꾼다.

2년 뒤, KBS 'TV쇼 진품명품'(2006년 4월 2일 방송)에 등장한 이 고문헌이 진품으로 밝혀지면서 전문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서·해서 등 정약용의 다양한 서체를 연구할 자료로서의 가치가 인정돼 당시 감정가 1억 원을 받았다.


당시 감정위원들이 밝혀낸 고문헌은 '다산시문집' 등에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帔帖)'이다.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치맛단에 적은 것으로, 노을 '하(霞)'와 치마 '피(帔)'를 써 노을빛 치마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학자가 여인의 치맛단에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치마는 누구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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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학가이자 건축가, 행정가이면서 탁월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그는 1801년(순조 1년) 전남 강진으로 1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천주교와 그 교도들을 탄압한 신유박해 때, 천주교와 관련한 게 문제가 된 것이다.

정약용이 유배를 떠날 때,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19살, 16살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였지만, 두 아들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인식 탓에 과거를 볼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정약용은 그럴수록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벼슬길이 막힌 폐족의 자식이라도 세상에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유배 중에도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며 하피첩에 폐족의 자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담았다. 하피첩에 유독 망한 가문을 뜻하는 '폐족(廢族)'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왜 하필 치맛단이었을까.

지난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언론에 공개한 하피첩(보물 제1683-2호). 하피첩을 만들 때 사용한 치마에 바느질 흔적(빨간 원안)이 남아있다.
하피첩의 앞 장에는 "내가 탐진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는 말이 적혀 있다. 부인 홍 씨가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함께 했던 때를 잊지 말고 힘든 시기를 같이 이겨내자"는 의미로 결혼 예복이던 훈염(纁袡)을 보내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은 부인 홍 씨의 치마를 사용해 유배 중 시집간 딸의 행복을 기원하는 '매화쌍조도(梅花雙鳥圖)'를 그렸다.

'매화쌍조도'는 두 마리 새가 한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딸이 두 마리 새처럼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았다.

'매화쌍조도'에 따르면 하피첩은 총 네 첩으로 제작됐지만, 현재 발견된 하피첩은 3권뿐이다. 하피첩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두 첩에 '을(乙)'과 '정(丁)'이라는 글자가 발견돼 갑을병정(甲乙兵丁)의 순서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KBS '천상의 컬렉션'(7월 1일 방송, KBS 1TV)에서 하피첩을 소개한 배우 공형진은 "붉은 치맛단에 써 내려간 정약용의 필적에서 아버지의 절절함을 느낄 수 있다. 같은 아버지로서 정약용의 마음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붉은 매화와 흰 매화 10폭 병풍, 천상열차분야지도, 정약용 필적 하피첩
이날 방송에서 뮤지컬 배우 김소현은 고려의 천문학자 류방택이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배우 김수로는 조선의 마지막 '대(大)'화가 오원 장승업이 그린 '붉은 매화와 흰 매화 10폭 병풍'을 소개했다.

[프로덕션2] 박성희 kbs.psh@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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