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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스페셜] 징용의 한 서린 ‘오키나와 아리랑’
입력 2017.08.19 (22:09) 수정 2017.08.19 (22:28)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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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는 공세에 나선 미군과 결사 항전을 외치는 일본군이 큰 인명 손실을 내며 부딪힌 곳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약 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끌려와 고초를 겪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관련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당시 징용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아리랑'이 아직도 구전돼 오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아리랑에 담긴 징용의 한, 이승철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가까이 더 가야하는 미야코 섬.

쪽빛 바다와 백사장.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인기 휴양지입니다.

하지만 70여 년 전 태평양 전쟁 말기 주민 6만 명인 이 섬에 일본군 3만명이 집결해 결사 항전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병참 지원을 위해 동원된 것은 한국에서 끌려온 징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13살이던 구다카 씨는 진지 만드는 작업을 같이 하던 조선 징용자들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구다카(미야코섬 주민) : "저기 텐트를 치고는 매일 일했죠. 아리랑을 불렀어요."

<녹취>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인터뷰> "이 근처 사람들은 다들 그 노래를 기억했죠 ... 근데 이제는 모두들 세상을 떠나서..."

아리랑은 지명으로도 남아 조선 징용자들이 물을 쓰던 부근은 지금도 '아리랑 강'이라 불립니다.

먼 이국땅에 '아리랑'의 기억을 남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어렵게 미야코 징용자들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소속 한국인 징용부대인 '특설 수상부대' 소속 101 중대.

군속이라는 이름으로 징용된 이들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380여 명.

71명은 사망기록으로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당시 숨진 이들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수수밭 한 가운데 자리잡은 우물.

물이 귀한 섬, 조선 징용자들이 파 준 우물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식수로 사용됐던 우물입니다.

우물 앞에는 조그만 제단이 차려져 우물을 판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히사마타(미야코섬 역사연구가) : "징용자들이 우물을 판다든지 동굴 진지를 만들고, 항구에서 위험한 작업들을 하다 희생됐다는 것이 미야코 섬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수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하자 주민들 또한 각종 노역에 동원돼야 했습니다.

주민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조선의 징용자, 그리고 조선 위안부에 대해 애틋한 마음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노래였습니다.

<인터뷰> 우에자토(미야코 섬 주민) : "정말 예쁘고 고운 위안소 조선 언니들이 어머니한테 매일 노래를 가르쳐 줬대요."

<녹취>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일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헤이헤이요 넘어간다."

오키나와 본섬에도 아리랑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군 자살 특공대가 사용했던 동굴입니다.

모두 강제징용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마쓰다 씨는 전쟁 말기 집이 징용자들의 합숙소로 이용됐습니다.

<인터뷰> 마쓰다(오키나와 주민) : "그러니까 '아이고 죽겠다'고 했어요. 그것만 기억나요."

<녹취>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나요. 한 발자욱도 못가서 발병난다."

<인터뷰> "그런데 이거 한국의 국가는 아니죠?"

무슨 노래인지는 몰랐어도 밤이면 들려오던 귀에 사무치던 아리랑 가락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전쟁이 끝난 뒤 만든 당시 특설 수상 부대 명부입니다.

한 중대 약 700명의 이름 아래 행방불명을 뜻하는 아니 불(不)자가 대부분 찍혀 있습니다.

<녹취> "다이부분 시보까. 다들 죽었을 거란 얘기네요"

그렇게 죽어갔지만 일한 대가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어떻게 됐는지 가족에게 연락이 전혀 없었던 듯 합니다."

그 중 한사람 권운선.

<녹취> "이쪽은 상주군이네요."

역시 행방불명 처리돼 있습니다.

권 씨의 아들인 권수청 씨를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생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커왔습니다.

<인터뷰> 권수청(고 권운선 씨 아들) : "사진이 하나도 없어가지고...이걸 사진 대신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요."

일본 정부는 전후 특별법을 만들어 행방 불명자를 모두 사망자로 인정하고 보훈 처리 등 일본인에 대해서는 국가적 지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등지에서 숨져간 조선 징용자는 해방 후 7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행방불명 상탭니다.

죽음조차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미군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오키나와전에서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4만 명이 숨졌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가장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마부니 언덕에 평화 공원을 만들고는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비에 새겨 넣었습니다.

<인터뷰> 사키야마(오키나와 주민) :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건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희생됐다는 거야."

수 십만의 희생자를 냈던 오키나와 전장 한복판에 끌려온 조선 사람만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히라다(오키나와 조선 징용 연구가) : "강제로 끌고와서는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심지어 아직도 숫자조차 확실히 하지 않고 있어요. 희생자가 많이 나왔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희생자를 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불과 460여 명만이 공식적으로 사망이 인정돼 비석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올해 징용 부대 소속이었던 권운선 씨 등 15명이 가족 등의 청원에 의해 이름을 새로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권수청(고 권운선씨 아들) : "거기서 돌아가셨으니 이름 석자라도...가봐야죠."

오키나와에서 만난 아리랑 가락.

바다 건너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부른, 한과 슬픔의 오키나와 아리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오키나와에서 이승철입니다.
  • [특파원 스페셜] 징용의 한 서린 ‘오키나와 아리랑’
    • 입력 2017-08-19 22:11:11
    • 수정2017-08-19 22:28:38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앵커 멘트>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는 공세에 나선 미군과 결사 항전을 외치는 일본군이 큰 인명 손실을 내며 부딪힌 곳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약 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끌려와 고초를 겪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관련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오키나와 현지에서는 당시 징용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아리랑'이 아직도 구전돼 오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아리랑에 담긴 징용의 한, 이승철 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오키나와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가까이 더 가야하는 미야코 섬.

쪽빛 바다와 백사장.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인기 휴양지입니다.

하지만 70여 년 전 태평양 전쟁 말기 주민 6만 명인 이 섬에 일본군 3만명이 집결해 결사 항전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병참 지원을 위해 동원된 것은 한국에서 끌려온 징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13살이던 구다카 씨는 진지 만드는 작업을 같이 하던 조선 징용자들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구다카(미야코섬 주민) : "저기 텐트를 치고는 매일 일했죠. 아리랑을 불렀어요."

<녹취>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인터뷰> "이 근처 사람들은 다들 그 노래를 기억했죠 ... 근데 이제는 모두들 세상을 떠나서..."

아리랑은 지명으로도 남아 조선 징용자들이 물을 쓰던 부근은 지금도 '아리랑 강'이라 불립니다.

먼 이국땅에 '아리랑'의 기억을 남긴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어렵게 미야코 징용자들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소속 한국인 징용부대인 '특설 수상부대' 소속 101 중대.

군속이라는 이름으로 징용된 이들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380여 명.

71명은 사망기록으로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당시 숨진 이들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수수밭 한 가운데 자리잡은 우물.

물이 귀한 섬, 조선 징용자들이 파 준 우물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식수로 사용됐던 우물입니다.

우물 앞에는 조그만 제단이 차려져 우물을 판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히사마타(미야코섬 역사연구가) : "징용자들이 우물을 판다든지 동굴 진지를 만들고, 항구에서 위험한 작업들을 하다 희생됐다는 것이 미야코 섬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수만 명의 일본군이 진주하자 주민들 또한 각종 노역에 동원돼야 했습니다.

주민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조선의 징용자, 그리고 조선 위안부에 대해 애틋한 마음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노래였습니다.

<인터뷰> 우에자토(미야코 섬 주민) : "정말 예쁘고 고운 위안소 조선 언니들이 어머니한테 매일 노래를 가르쳐 줬대요."

<녹취>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일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헤이헤이요 넘어간다."

오키나와 본섬에도 아리랑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군 자살 특공대가 사용했던 동굴입니다.

모두 강제징용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마쓰다 씨는 전쟁 말기 집이 징용자들의 합숙소로 이용됐습니다.

<인터뷰> 마쓰다(오키나와 주민) : "그러니까 '아이고 죽겠다'고 했어요. 그것만 기억나요."

<녹취>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나요. 한 발자욱도 못가서 발병난다."

<인터뷰> "그런데 이거 한국의 국가는 아니죠?"

무슨 노래인지는 몰랐어도 밤이면 들려오던 귀에 사무치던 아리랑 가락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전쟁이 끝난 뒤 만든 당시 특설 수상 부대 명부입니다.

한 중대 약 700명의 이름 아래 행방불명을 뜻하는 아니 불(不)자가 대부분 찍혀 있습니다.

<녹취> "다이부분 시보까. 다들 죽었을 거란 얘기네요"

그렇게 죽어갔지만 일한 대가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어떻게 됐는지 가족에게 연락이 전혀 없었던 듯 합니다."

그 중 한사람 권운선.

<녹취> "이쪽은 상주군이네요."

역시 행방불명 처리돼 있습니다.

권 씨의 아들인 권수청 씨를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생사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커왔습니다.

<인터뷰> 권수청(고 권운선 씨 아들) : "사진이 하나도 없어가지고...이걸 사진 대신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요."

일본 정부는 전후 특별법을 만들어 행방 불명자를 모두 사망자로 인정하고 보훈 처리 등 일본인에 대해서는 국가적 지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등지에서 숨져간 조선 징용자는 해방 후 7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행방불명 상탭니다.

죽음조차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미군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오키나와전에서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4만 명이 숨졌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가장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마부니 언덕에 평화 공원을 만들고는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비에 새겨 넣었습니다.

<인터뷰> 사키야마(오키나와 주민) :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건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희생됐다는 거야."

수 십만의 희생자를 냈던 오키나와 전장 한복판에 끌려온 조선 사람만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터뷰> 히라다(오키나와 조선 징용 연구가) : "강제로 끌고와서는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심지어 아직도 숫자조차 확실히 하지 않고 있어요. 희생자가 많이 나왔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희생자를 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불과 460여 명만이 공식적으로 사망이 인정돼 비석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올해 징용 부대 소속이었던 권운선 씨 등 15명이 가족 등의 청원에 의해 이름을 새로이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권수청(고 권운선씨 아들) : "거기서 돌아가셨으니 이름 석자라도...가봐야죠."

오키나와에서 만난 아리랑 가락.

바다 건너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부른, 한과 슬픔의 오키나와 아리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오키나와에서 이승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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