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2인자로 부상?…‘8개 직함’ 최룡해

입력 2017.10.14 (08:08) 수정 2017.10.14 (08:33)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멘트>

최근 김정은 정권의 대규모 인사에서 권력 핵심으로 우뚝 선 인물이 있습니다.

이번에 2개를 추가해 무려 8개의 권력기관 직함을 거머쥔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룡해입니다.

사실상 권력 2인자가 된 게 아니냐는 의견과 1인 독재 국가에서 속단은 아직 이르다는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를 전면에 내세운 김정은의 의도도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클로즈업 북한> 이번 주에는 북한 권력 실세, 최룡해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평양 김일성 광장에 10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된지 20주년이 된 날을 기념하는 행사.

주석단의 주요 간부들을 대표해 마이크 앞에 선 인물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룡해다.

<녹취> "동지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영원히 충직하게 받들어 나아가는 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전사,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숭고한 도덕의리입니다.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만세! 만세!)"

바로 직전에 열렸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룡해는 당 중앙군사위원과 전문부서 부장 직 2개의 직함을 추가했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당·정·군을 아우르는 8개의 직함.

직위 숫자만 놓고 보면 9개의 감투를 쓴 김정은에 육박하며 역할과 위상이 대폭 강화됐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 "북한이 줄 수 있는 모든 권력기관에 다 진입을 했다. 이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1차적인 분석의 결과이긴 하지만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직지도부장일 가능성이 70%.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면서 선전선동부장이 됐을 가능성 30%. // 둘 중에 하나가 됐다고 하더라도 2인자의 자리를 확보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최룡해는 북한 권력의 핵심 축을 형성해온 이른바 항일 빨치산의 자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은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고 6.25 남침 때 북한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뒤 인민무력부장을 지내기도했다.

북한에선 최현을 김일성에 충성을 바친 인물로 선전하며 그를 주인공으로 그린 영화까지 시리즈로 제작했다.

<녹취> 北 영화 ‘민족과 운명’ : "(최현동무, 새벽에 떠나야 하는 사람이 왜 아직 여기 있소?) 하룻밤이라도 (김일성)장군님의 문전보초병이 되고 싶어 그럽니다."

여기에 1970년대 후계 경쟁에 나선 김정일을 최현이 전폭적으로 지원한 결과, 김씨 일가 2대에 걸친 공신이 됐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최현은 김일성의, 김일성 체제 탄생의 1등 공신이죠.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김정일의 계모였던 김성애의 후광을 얻고 김평일이 우세한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이 우세한 상황을 정리하는 데 빨치산 1세대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때 이제 최현이 앞장섰다는 평가가 주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에 있어서 최현은 사실은 절대적인 충성을 하고 김일성, 김정일 체제의 권력기반의 핵심을 형성을 하고 있다는 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거든요."

최룡해는 이같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일찌감치 당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주요 조직인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 위원장으로 1998년까지 활동했다.

대학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화제가 됐던 1989년 평양세계청년 축전의 개막 연설도 최룡해가 맡았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 "사회주의청년 동맹체의 비서라고 하는 직위가 여기서로 보면 그냥 장관급의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노동당의 후비대입니다. 후비대의 책임수장을 했고 김정일이가 주관하는 일체의 행사나 파티에 빠짐없이 참가를 했고 그리고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성과적으로 해서 김정일의 신임을 더 돈독하게 받았는데 최룡해 자체가 가장 장기가 있는 것이 행사를 아주 잘합니다. 특히 1호 행사라고 하는 김정일, 김정은 행사를 만드는 데 최룡해를 따라갈 만한 달인이 없습니다."

최룡해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0년, 3차 조선노동당 대표회의다.

김정은의 공식 데뷔 무대이기도 한 이 자리에서 최룡해는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와 함께 북한군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이어 김정은이 당 제 1 비서에 오르며 김정은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린 제 4차 노동당 대표자회의.

최룡해의 견장에 차수를 의미하는 큰 별 하나가 달렸다.

군부내 위상도 급상승한 것이다.

북한 선수들이 참가해 주목받았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최룡해는 국가체육지도위원장 자격으로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대남 담당 비서와 함께 폐막식에 전격 참석했다.

<녹취> 최룡해(2014년 인터뷰) : "체육이 다시 말하면은 조국 통일을 위한데서 앞섰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에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과 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하는 등 최룡해는 김정은 시대 들어 대외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하지만 이는 최룡해의 능력 보다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한 김정은의 용인술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은은 최룡해에게 실권을 부여하겠다 기보다는 최룡해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들을 상당 부분 채우고 있다고 봐야 돼요. 그러니까 최룡해를 통해서 김정은의 최대 취약점인 정치적인 정통성 문제, 특히 항일 빨치산 세력들에 대한 관리 이런 부분들에 대한 어떤 정책들을 시행을 하고 있다라고 봐야겠죠."

최룡해의 정치 이력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7년 청년동맹 뇌물 사건으로 직책에서 해임됐고, 2004년에도 또 한 번 비리 혐의로 권력에서 밀려났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당시 최룡해는 물론 아버지 최현의 위상까지 추락했다고 탈북민들은 전한다.

<인터뷰> 김일국(前 北노동당 39호실 근무/2015년 탈북) : "그 혁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최현, 최룡해에 대한 이미지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정말 나쁘게 평가됐고 또 그렇게 사람들이 나쁘게 봤고 그때는 거의 뭐 최룡해 놈이라고까지 이렇게 욕을 하면서 자리에 나왔었는데. 그때는 정말 거의 뭐 그냥 묻히는가 했었죠."

북한군 원수까지 지낸 리을설의 2015년 장례식 모습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 사회가 들썩인 건 리을설의 사망이 아니라 최룡해의 실각 때문이었다.

리을설 장의위원회 명단에서 최룡해가 빠진 것이다.

당시 최룡해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채 지방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이른바 혁명화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TV에 잡힌 그의 바짝 마른 다리는 그간의 고초를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수많은 북한 엘리트가 숙청됐음에도 최룡해는 오뚜기처럼 다시 돌아왔다.

여기엔 아버지의 후광과 함께 최룡해의 처세술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 "아버지 후광이 있어서 시작은 했지만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분명히 자신의 능력이고 야망이 있고 야심이 있는 사람이다. 뭔가 나는 해 보겠다는 사람이고 결국은 최룡해가 장성택하고도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장성택의 숙청에서 앞장을 섬으로써 결국은 김정은의 신임을 더 얻는 그런 결과까지 가져온 거죠."

올 들어 최룡해의 위상은 계속 강화돼왔다.

지난 4월 김일성 생일을 자축하는 대규모 열병식에서 최룡해가 연설을 했다.

해외 취재진 2백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일성 광장 주석단 앞에 선 것이다.

<녹취> 최룡해(北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미국의 새 행정부는 주권국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끊임없이 감행하면서 세계 평화와 안전을 엄중히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룡해에 대한 이같은 위상 강화의 배경에는 대북제재의 수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내부 통제와 결속이 필요한 김정은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장마당에 의존하는 경제체제에서 대북 제재 효과가 이제 장마당에 나타나길 시작하는 거죠. 물가들이 뛰게 되고 공급이 축소되고 시장에 혼란이 되게 되면 사실은 위기가 발생할 수 있죠. 그러면 사실 대내적인 차원에서 북한 체제 내부를 통제하고 결속시킬 그런 필요성이 더 커지는 거죠. 최룡해라고 하는 빨치산 세대. 북한 체제 결속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이념적인 상징적인 인물. 이런 인물들을 좀 더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 거죠."

위기 상황에서 중책들을 겸임하며 전방위적 역할을 부여받은 최룡해가 일각의 분석처럼 2인자가 됐다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은 김정은이 압도적인 위상을 과시하는 1인 독재체제인데다, 김정은의 동생이자 최근 당 정치국 후보위원까지 진입한 김여정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정치는 살아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최룡해가 빨치산 세대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세력권을 형성할지 혹은 김정은이 원하는 정도의 어떤 실용적인 능력을 실제로 발휘할지. 아니면은 실속없는 얼굴마담으로 그칠지는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여기에 권력 핵심들이 짧은 기간 추풍낙엽처럼 사라진 김정은식 공포정치, 또 장성택 숙청 당시에도 거론됐던 북한의 뿌리 깊은 조직 갈등 등도 최룡해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인터뷰> 김일국(前 北노동당 39호실 근무/2015년 탈북) : "현재 지금 최룡해가 가지고 있는 부서와 그 다음에 다른 조직부서들 간에 이제 밑에서 갈등이 일어나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그것이 사회적인 어떤 뭐, 소란이라든가 어떤 난동이라든가 이런 게 벌어질 때는 연대적 책임으로서 또한 언제든지 혁명화를 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강력한 대북 제재 상황에서 위기 속 기회를 잡게 된 최룡해.

그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실제 2인자의 권력을 차지 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클로즈업 북한] 2인자로 부상?…‘8개 직함’ 최룡해
    • 입력 2017-10-14 08:15:20
    • 수정2017-10-14 08:33:38
    남북의 창
<앵커 멘트>

최근 김정은 정권의 대규모 인사에서 권력 핵심으로 우뚝 선 인물이 있습니다.

이번에 2개를 추가해 무려 8개의 권력기관 직함을 거머쥔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룡해입니다.

사실상 권력 2인자가 된 게 아니냐는 의견과 1인 독재 국가에서 속단은 아직 이르다는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를 전면에 내세운 김정은의 의도도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클로즈업 북한> 이번 주에는 북한 권력 실세, 최룡해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평양 김일성 광장에 10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된지 20주년이 된 날을 기념하는 행사.

주석단의 주요 간부들을 대표해 마이크 앞에 선 인물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룡해다.

<녹취> "동지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위업을 영원히 충직하게 받들어 나아가는 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전사,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숭고한 도덕의리입니다.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 (만세! 만세!)"

바로 직전에 열렸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룡해는 당 중앙군사위원과 전문부서 부장 직 2개의 직함을 추가했다.

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당·정·군을 아우르는 8개의 직함.

직위 숫자만 놓고 보면 9개의 감투를 쓴 김정은에 육박하며 역할과 위상이 대폭 강화됐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 "북한이 줄 수 있는 모든 권력기관에 다 진입을 했다. 이런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1차적인 분석의 결과이긴 하지만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직지도부장일 가능성이 70%.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면서 선전선동부장이 됐을 가능성 30%. // 둘 중에 하나가 됐다고 하더라도 2인자의 자리를 확보한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최룡해는 북한 권력의 핵심 축을 형성해온 이른바 항일 빨치산의 자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은 일제강점기에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고 6.25 남침 때 북한군 지휘관으로 참전한 뒤 인민무력부장을 지내기도했다.

북한에선 최현을 김일성에 충성을 바친 인물로 선전하며 그를 주인공으로 그린 영화까지 시리즈로 제작했다.

<녹취> 北 영화 ‘민족과 운명’ : "(최현동무, 새벽에 떠나야 하는 사람이 왜 아직 여기 있소?) 하룻밤이라도 (김일성)장군님의 문전보초병이 되고 싶어 그럽니다."

여기에 1970년대 후계 경쟁에 나선 김정일을 최현이 전폭적으로 지원한 결과, 김씨 일가 2대에 걸친 공신이 됐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최현은 김일성의, 김일성 체제 탄생의 1등 공신이죠.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을 하는 과정에서도 김정일의 계모였던 김성애의 후광을 얻고 김평일이 우세한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이 우세한 상황을 정리하는 데 빨치산 1세대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그때 이제 최현이 앞장섰다는 평가가 주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에 있어서 최현은 사실은 절대적인 충성을 하고 김일성, 김정일 체제의 권력기반의 핵심을 형성을 하고 있다는 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거든요."

최룡해는 이같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일찌감치 당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주요 조직인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 위원장으로 1998년까지 활동했다.

대학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화제가 됐던 1989년 평양세계청년 축전의 개막 연설도 최룡해가 맡았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 "사회주의청년 동맹체의 비서라고 하는 직위가 여기서로 보면 그냥 장관급의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만 조선노동당의 후비대입니다. 후비대의 책임수장을 했고 김정일이가 주관하는 일체의 행사나 파티에 빠짐없이 참가를 했고 그리고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을 성과적으로 해서 김정일의 신임을 더 돈독하게 받았는데 최룡해 자체가 가장 장기가 있는 것이 행사를 아주 잘합니다. 특히 1호 행사라고 하는 김정일, 김정은 행사를 만드는 데 최룡해를 따라갈 만한 달인이 없습니다."

최룡해가 본격적으로 정치적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10년, 3차 조선노동당 대표회의다.

김정은의 공식 데뷔 무대이기도 한 이 자리에서 최룡해는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와 함께 북한군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이어 김정은이 당 제 1 비서에 오르며 김정은 시대의 본격 개막을 알린 제 4차 노동당 대표자회의.

최룡해의 견장에 차수를 의미하는 큰 별 하나가 달렸다.

군부내 위상도 급상승한 것이다.

북한 선수들이 참가해 주목받았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최룡해는 국가체육지도위원장 자격으로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대남 담당 비서와 함께 폐막식에 전격 참석했다.

<녹취> 최룡해(2014년 인터뷰) : "체육이 다시 말하면은 조국 통일을 위한데서 앞섰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여기에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과 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하는 등 최룡해는 김정은 시대 들어 대외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하지만 이는 최룡해의 능력 보다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한 김정은의 용인술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은은 최룡해에게 실권을 부여하겠다 기보다는 최룡해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들을 상당 부분 채우고 있다고 봐야 돼요. 그러니까 최룡해를 통해서 김정은의 최대 취약점인 정치적인 정통성 문제, 특히 항일 빨치산 세력들에 대한 관리 이런 부분들에 대한 어떤 정책들을 시행을 하고 있다라고 봐야겠죠."

최룡해의 정치 이력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1997년 청년동맹 뇌물 사건으로 직책에서 해임됐고, 2004년에도 또 한 번 비리 혐의로 권력에서 밀려났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당시 최룡해는 물론 아버지 최현의 위상까지 추락했다고 탈북민들은 전한다.

<인터뷰> 김일국(前 北노동당 39호실 근무/2015년 탈북) : "그 혁명화 과정을 거치면서 최현, 최룡해에 대한 이미지는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정말 나쁘게 평가됐고 또 그렇게 사람들이 나쁘게 봤고 그때는 거의 뭐 최룡해 놈이라고까지 이렇게 욕을 하면서 자리에 나왔었는데. 그때는 정말 거의 뭐 그냥 묻히는가 했었죠."

북한군 원수까지 지낸 리을설의 2015년 장례식 모습이다.

하지만 당시 북한 사회가 들썩인 건 리을설의 사망이 아니라 최룡해의 실각 때문이었다.

리을설 장의위원회 명단에서 최룡해가 빠진 것이다.

당시 최룡해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된 채 지방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이른바 혁명화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TV에 잡힌 그의 바짝 마른 다리는 그간의 고초를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공포정치에 수많은 북한 엘리트가 숙청됐음에도 최룡해는 오뚜기처럼 다시 돌아왔다.

여기엔 아버지의 후광과 함께 최룡해의 처세술이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인터뷰>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 "아버지 후광이 있어서 시작은 했지만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분명히 자신의 능력이고 야망이 있고 야심이 있는 사람이다. 뭔가 나는 해 보겠다는 사람이고 결국은 최룡해가 장성택하고도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장성택의 숙청에서 앞장을 섬으로써 결국은 김정은의 신임을 더 얻는 그런 결과까지 가져온 거죠."

올 들어 최룡해의 위상은 계속 강화돼왔다.

지난 4월 김일성 생일을 자축하는 대규모 열병식에서 최룡해가 연설을 했다.

해외 취재진 2백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일성 광장 주석단 앞에 선 것이다.

<녹취> 최룡해(北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미국의 새 행정부는 주권국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끊임없이 감행하면서 세계 평화와 안전을 엄중히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룡해에 대한 이같은 위상 강화의 배경에는 대북제재의 수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내부 통제와 결속이 필요한 김정은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장마당에 의존하는 경제체제에서 대북 제재 효과가 이제 장마당에 나타나길 시작하는 거죠. 물가들이 뛰게 되고 공급이 축소되고 시장에 혼란이 되게 되면 사실은 위기가 발생할 수 있죠. 그러면 사실 대내적인 차원에서 북한 체제 내부를 통제하고 결속시킬 그런 필요성이 더 커지는 거죠. 최룡해라고 하는 빨치산 세대. 북한 체제 결속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이념적인 상징적인 인물. 이런 인물들을 좀 더 부각시킬 필요가 있는 거죠."

위기 상황에서 중책들을 겸임하며 전방위적 역할을 부여받은 최룡해가 일각의 분석처럼 2인자가 됐다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지적도 있다.

북한은 김정은이 압도적인 위상을 과시하는 1인 독재체제인데다, 김정은의 동생이자 최근 당 정치국 후보위원까지 진입한 김여정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정치는 살아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최룡해가 빨치산 세대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세력권을 형성할지 혹은 김정은이 원하는 정도의 어떤 실용적인 능력을 실제로 발휘할지. 아니면은 실속없는 얼굴마담으로 그칠지는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여기에 권력 핵심들이 짧은 기간 추풍낙엽처럼 사라진 김정은식 공포정치, 또 장성택 숙청 당시에도 거론됐던 북한의 뿌리 깊은 조직 갈등 등도 최룡해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인터뷰> 김일국(前 北노동당 39호실 근무/2015년 탈북) : "현재 지금 최룡해가 가지고 있는 부서와 그 다음에 다른 조직부서들 간에 이제 밑에서 갈등이 일어나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그것이 사회적인 어떤 뭐, 소란이라든가 어떤 난동이라든가 이런 게 벌어질 때는 연대적 책임으로서 또한 언제든지 혁명화를 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강력한 대북 제재 상황에서 위기 속 기회를 잡게 된 최룡해.

그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실제 2인자의 권력을 차지 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