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세기의 장례식…푸미폰 국왕은 어떻게 ‘태국의 아버지’가 됐을까?

입력 2017.10.27 (14:48) 수정 2017.10.2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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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세기의 장례식…푸미폰 국왕은 어떻게 ‘태국의 아버지’가 됐을까?

[특파원 리포트] 세기의 장례식…푸미폰 국왕은 어떻게 ‘태국의 아버지’가 됐을까?


70년 126일. 생전 세계 최장수 재위 기록을 세웠던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전 태국 국왕의 재임 기간이다. 그 긴 재임기간 내내 '태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태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아 온 푸미폰 전 국왕의 장례식이 10월 25일부터 닷새 일정으로 '세기의 장례식'이라는 말 그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식의 하이라이트는 26일 푸미폰 국왕의 시신이 담긴 관(The Royal Funeray Urn)이 길이 18미터, 높이 11.1미터의 금빛 '왕실 전차(the Great Victory Chariot)'에 실려 장례식이 열리는 사남 루엉 광장으로 운구된 뒤 화장되는 과정이었다. 운구 행렬에는 후계자인 와찌랄롱껀 현 국왕을 비롯해 군인과 승려 등 5천6백명이 참가해 2.5킬로미터의 화려한 장관을 연출했다. 시신이 담긴 관은 광장 중앙에 설치된 수미산(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형상화한 50미터 높이의 황금탑으로 옮겨져 26일 밤 화장됐다.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 중앙에 위치한 황금 탑. 푸미폰 전 국왕의 시신이 화장된 곳으로 수미산(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형상화 한 50m 높이의 건축물이다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 중앙에 위치한 황금 탑. 푸미폰 전 국왕의 시신이 화장된 곳으로 수미산(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형상화 한 50m 높이의 건축물이다
푸미폰 전 국왕의 시신이 화장되는 모습(출처:방콕 포스트)푸미폰 전 국왕의 시신이 화장되는 모습(출처:방콕 포스트)

1년 동안의 애도 기간을 거친 '세기의 장례식'

이번 장례식이 '세기의 장례식'으로 불리는 것은 무엇보다 태국에서 이번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들인 비용이나 인력, 기간 등에서 거의 국가적 동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은 1년간의 애도 기간 내내 태국 국민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사랑하는 왕을 잃은 슬픔'에 있다.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에서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자리를 지키며 운구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태국 추모객들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에서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자리를 지키며 운구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태국 추모객들

푸미폰 전 국왕이 태국 국민들에게 얼마 만큼의 사랑을 받았는지는 이번 장례식장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만나보면 쉽게 알수 있다. 25일부터 시작되는 장례식을 앞두고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 주변에는 일주일 전부터 장례식 현장과 최대한 가까운 자리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 장례식이 시작할 때까지 며칠이고 노숙을 한다. 기자가 장례식 전날 현장을 찾아 인터뷰한 한 여성 추모객은 시골에서 기차를 12시간 타고 왔으며 밤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지만 꼼짝않고 자리를 지켰다고 말했다. 한 60대 남성은 미국 뉴저지에서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날아왔다고 했다. 장례식 당일까지 푸미폰 전 국왕의 사진을 들고 딱딱한 도로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부'를 떠나 보내는 수 십만 명의 태국 국민들

국왕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26일에도 사남 루엉 광장과 인근 도로를 꽉 메운 태국 추모객들은 30도를 넘는 뙤약볕 속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운구 행렬을 향에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인터뷰를 한 태국 추모객들은 대부분 왕을 '아버지'로 지칭했고, 자신들을 '왕의 백성'이라고 말했다.

푸미폰 왕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태국 여성푸미폰 왕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태국 여성

70년 동안 통치하며 '태국의 아버지'가 된 이유는?

70년 넘게 왕의 자리를 지켜왔던 푸미폰 전 국왕은 어떻게 태국 국민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 태국은 오랜 왕정 이후 1930년부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태국 국민들은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왕을 단순한 입헌군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특히 1946년 즉위한 라마 9세, 푸미폰 전 국왕은 태국의 근대화를 거치면서도 오히려 왕과 왕실의 권위를 강화시킨 독특한 존재다.

푸미폰 국왕은 친형인 아난다 마히돈(라마 8세)이 스위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흘만에 침실에서 총상으로 사망하면서 19살의 나이에 사실상 준비 없이 왕이 되었다. 장례식날 만난 한 추모객은 푸미폰 국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 분은 왕이 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의 의무를 다 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푸미폰 아둔야뎃은 사진기를 들고 산간 벽지 마을과 소수민족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시골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 손을 잡고 얘기하는 사진이 많은데 특히 사진기를 메고 있거나 서류나 지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출처: Office of National Archives of Thailand출처: Office of National Archives of Thailand
출처: Office of National Archives of Thailand출처: Office of National Archives of Thailand
국왕으로서 태국 국민들에게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푸미폰 국왕은 이러한 밑바닥 사람들을 주로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농업, 수자원, 환경, 고용, 보건, 복지 등 분야에서 4천여 건이 넘는 로열 프로젝트(Royal Projects)를 실시한다. 실제로 아편 재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태국 고산족들에게 왕실 재산을 일부 털어 환금 작물을 개발해 보급함으로써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차츰 결실을 맺으면서 그는 1998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생애 동안 낙후된 지역에 사는 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왕실의 노력을 꾸준히 보여준 결과 태국 국민들은 푸미폰 국왕을 진정한 나라의 '아버지'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군부 쿠데타도 국왕의 승인 못 얻으면 실패

푸미폰 국왕이 얼마나 태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지는 그가 군부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등 격변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면 잘 알수 있다. 태국은 군부의 영향력이 강해 푸미폰 국왕의 재임 70년 동안 19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러나 푸미폰 국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쿠데타도 실패했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타넘 낏띠카쩐 총리가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하자 국왕은 군부의 폭력 중단과 타넘 총리의 사퇴를 촉구해 결국 타넘 총리는 외국으로 쫓겨나고 군부 쿠데타도 종식됐다. 1992년 민주화 시위 와중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찐다 끄라쁘라윤 사령관은 국왕앞에 무릎으로 기어와 국왕을 알현했으나 국왕의 꾸지람을 받고 결국 해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992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던 수친다 끄라쁘라윤(Suchinda Kraprayoon) (왼쪽에서 두번째) 육군 사령관이 푸미폰 전 국왕을 무릎꿇고 알현하고 있는 장면. 국왕의 인준을 받지 못해 수찐다의 쿠데타는 결국 실패했다.(출처: 태국 TV뉴스)1992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던 수친다 끄라쁘라윤(Suchinda Kraprayoon) (왼쪽에서 두번째) 육군 사령관이 푸미폰 전 국왕을 무릎꿇고 알현하고 있는 장면. 국왕의 인준을 받지 못해 수찐다의 쿠데타는 결국 실패했다.(출처: 태국 TV뉴스)
태국 국민들은 이런 국왕을 '아버지'라 부르며 신처럼 받들었고 덕분에 푸미폰 전 국왕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과는 다른 막강한 영향력을 누릴 수 있었다. 70년 동안 '태국의 아버지' 역할을 해 온 푸미폰 전 국왕은 이번 장례식을 통해 태국 국민들 곁을 떠났다. 이제 태국 국민들은 그 동안 모든 갈등과 불만의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태국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 '아버지'의 부재를 앞으로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추모객의 말처럼 말이다.

"그분(푸미폰 전 국왕)은 태국의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하늘에서 땅까지 모든 것(everything)이었습니다. 이제부터 태국이 어디로 어떻게 가게될 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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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7 14:48:53
    • 수정2017-10-27 18: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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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126일. 생전 세계 최장수 재위 기록을 세웠던 푸미폰 아둔야뎃(1927~2016) 전 태국 국왕의 재임 기간이다. 그 긴 재임기간 내내 '태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태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아 온 푸미폰 전 국왕의 장례식이 10월 25일부터 닷새 일정으로 '세기의 장례식'이라는 말 그대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식의 하이라이트는 26일 푸미폰 국왕의 시신이 담긴 관(The Royal Funeray Urn)이 길이 18미터, 높이 11.1미터의 금빛 '왕실 전차(the Great Victory Chariot)'에 실려 장례식이 열리는 사남 루엉 광장으로 운구된 뒤 화장되는 과정이었다. 운구 행렬에는 후계자인 와찌랄롱껀 현 국왕을 비롯해 군인과 승려 등 5천6백명이 참가해 2.5킬로미터의 화려한 장관을 연출했다. 시신이 담긴 관은 광장 중앙에 설치된 수미산(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형상화한 50미터 높이의 황금탑으로 옮겨져 26일 밤 화장됐다.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 중앙에 위치한 황금 탑. 푸미폰 전 국왕의 시신이 화장된 곳으로 수미산(고대 인도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을 형상화 한 50m 높이의 건축물이다푸미폰 전 국왕의 시신이 화장되는 모습(출처:방콕 포스트)
1년 동안의 애도 기간을 거친 '세기의 장례식'

이번 장례식이 '세기의 장례식'으로 불리는 것은 무엇보다 태국에서 이번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들인 비용이나 인력, 기간 등에서 거의 국가적 동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은 1년간의 애도 기간 내내 태국 국민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사랑하는 왕을 잃은 슬픔'에 있다.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에서 30도가 넘는 무더위에도 자리를 지키며 운구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태국 추모객들
푸미폰 전 국왕이 태국 국민들에게 얼마 만큼의 사랑을 받았는지는 이번 장례식장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만나보면 쉽게 알수 있다. 25일부터 시작되는 장례식을 앞두고 장례식장인 사남 루엉 광장 주변에는 일주일 전부터 장례식 현장과 최대한 가까운 자리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 장례식이 시작할 때까지 며칠이고 노숙을 한다. 기자가 장례식 전날 현장을 찾아 인터뷰한 한 여성 추모객은 시골에서 기차를 12시간 타고 왔으며 밤새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지만 꼼짝않고 자리를 지켰다고 말했다. 한 60대 남성은 미국 뉴저지에서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날아왔다고 했다. 장례식 당일까지 푸미폰 전 국왕의 사진을 들고 딱딱한 도로 위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부'를 떠나 보내는 수 십만 명의 태국 국민들

국왕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26일에도 사남 루엉 광장과 인근 도로를 꽉 메운 태국 추모객들은 30도를 넘는 뙤약볕 속에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운구 행렬을 향에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인터뷰를 한 태국 추모객들은 대부분 왕을 '아버지'로 지칭했고, 자신들을 '왕의 백성'이라고 말했다.

푸미폰 왕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태국 여성
70년 동안 통치하며 '태국의 아버지'가 된 이유는?

70년 넘게 왕의 자리를 지켜왔던 푸미폰 전 국왕은 어떻게 태국 국민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을까? 태국은 오랜 왕정 이후 1930년부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태국 국민들은 영국이나 일본과 같이 왕을 단순한 입헌군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특히 1946년 즉위한 라마 9세, 푸미폰 전 국왕은 태국의 근대화를 거치면서도 오히려 왕과 왕실의 권위를 강화시킨 독특한 존재다.

푸미폰 국왕은 친형인 아난다 마히돈(라마 8세)이 스위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흘만에 침실에서 총상으로 사망하면서 19살의 나이에 사실상 준비 없이 왕이 되었다. 장례식날 만난 한 추모객은 푸미폰 국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 분은 왕이 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의 의무를 다 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푸미폰 아둔야뎃은 사진기를 들고 산간 벽지 마을과 소수민족을 찾아 다니며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시골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 손을 잡고 얘기하는 사진이 많은데 특히 사진기를 메고 있거나 서류나 지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출처: Office of National Archives of Thailand출처: Office of National Archives of Thailand국왕으로서 태국 국민들에게 친밀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푸미폰 국왕은 이러한 밑바닥 사람들을 주로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농업, 수자원, 환경, 고용, 보건, 복지 등 분야에서 4천여 건이 넘는 로열 프로젝트(Royal Projects)를 실시한다. 실제로 아편 재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태국 고산족들에게 왕실 재산을 일부 털어 환금 작물을 개발해 보급함으로써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차츰 결실을 맺으면서 그는 1998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생애 동안 낙후된 지역에 사는 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왕실의 노력을 꾸준히 보여준 결과 태국 국민들은 푸미폰 국왕을 진정한 나라의 '아버지'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군부 쿠데타도 국왕의 승인 못 얻으면 실패

푸미폰 국왕이 얼마나 태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는지는 그가 군부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등 격변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면 잘 알수 있다. 태국은 군부의 영향력이 강해 푸미폰 국왕의 재임 70년 동안 19번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러나 푸미폰 국왕이 승인하지 않으면 쿠데타도 실패했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타넘 낏띠카쩐 총리가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하자 국왕은 군부의 폭력 중단과 타넘 총리의 사퇴를 촉구해 결국 타넘 총리는 외국으로 쫓겨나고 군부 쿠데타도 종식됐다. 1992년 민주화 시위 와중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찐다 끄라쁘라윤 사령관은 국왕앞에 무릎으로 기어와 국왕을 알현했으나 국왕의 꾸지람을 받고 결국 해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992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던 수친다 끄라쁘라윤(Suchinda Kraprayoon) (왼쪽에서 두번째) 육군 사령관이 푸미폰 전 국왕을 무릎꿇고 알현하고 있는 장면. 국왕의 인준을 받지 못해 수찐다의 쿠데타는 결국 실패했다.(출처: 태국 TV뉴스)태국 국민들은 이런 국왕을 '아버지'라 부르며 신처럼 받들었고 덕분에 푸미폰 전 국왕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과는 다른 막강한 영향력을 누릴 수 있었다. 70년 동안 '태국의 아버지' 역할을 해 온 푸미폰 전 국왕은 이번 장례식을 통해 태국 국민들 곁을 떠났다. 이제 태국 국민들은 그 동안 모든 갈등과 불만의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태국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 '아버지'의 부재를 앞으로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추모객의 말처럼 말이다.

"그분(푸미폰 전 국왕)은 태국의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하늘에서 땅까지 모든 것(everything)이었습니다. 이제부터 태국이 어디로 어떻게 가게될 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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