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화재 취약 빈곤층 공동주택…복지선진국 日 숨겨진 민낯

입력 2018.02.0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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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 공동주택 화재…독거 노인 등 11명 사망

지난 1월 31일 늦은 밤 홋카이도 삿포로 시의 노인 생활보호수급자 자립지원 시설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불길과 연기는 불과 10분 새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소방차 40여 대가 긴급 출동해 진화에 나섰지만, 거센 불길과 유독가스 때문에 구조대원들이 건물 내부로 쉽게 진입하지 못했다. 건물은 결국 전소했다. 거주자 16명 가운데 11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저소득층 노인들이었다.


참사가 난 곳은 오갈 데가 없거나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 빈곤층 주거시설이었다. 3층짜리 여관 건물을 개조해, 2004년부터 입주자들과 임대 계약을 맺었다. 1, 2층에 개인실을 촘촘히 마련했고, 식당과 욕실은 공동 사용했다.

빈곤층의 보금자리…위험을 감수하고 살았는데


한 달에 3만 6천엔 가량, 우리 돈 35만원 가량을 받고, 하숙집처럼 식사를 제공했다. 취업 지원 등은 물론 병원 등을 오가기 위한 교통편도 제공했다. 취약 계층의 마지막 피난처 역할을 했지만, 낡은 목조 건물 자체는 화재에 취약했다. 전문가들은 복도를 따라 좌우에 작은 방이 들어선 구조 때문에 불길과 연기가 급속히 번진 것으로 추정했다.


법규에 따라 건물에 소화기는 배치돼 있었지만, 방화용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소규모 시설이라 의무 사항이 아니었다. 피난 훈련도 비상시 대피 매뉴얼도 없었다.

대피경로를 안내하는 '유도등'이 설치돼 있었지만, 파손된 채로 수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화재 당시 가까스로 탈출한 주민은 '경보기가 울렸지만, 정전으로 복도가 깜깜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창문에 설치된 방범용 목제 격자시설도 대피와 구조의 방해물이 됐다. 더구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다수였지만, 야간에는 상주 직원이 없었다.


참사 나흘 뒤인 2월 4일, 공동주택을 운영해온 업체의 부대표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형 참사가 발생한 데 대해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소방 시설이 취약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금의 여유가 없어, 법적 허용 범위 안에서 시설을 운영했다고 해명했다.

반복되는 비극…취약계층 거주시설 대형 화재

오래된 목조 건물이 많은 일본이다. 화재도 잦고 인명 피해도 잦다. 선진국일수록 기본적인 안전 규제가 강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각지대와 허점은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이다.

최근 11명의 생명을 앗아간 삿포로 공동주택 화재 사고는 방재 선진국, 복지 선진국을 자처해온 일본 사회의 숨겨진 민낯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실제로 일본에서 노인 등 취약계층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이나 시설에서 불이나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13년 2월 나가사키의 공동주거시설 '그룹홈'에서 불이 나 70대 이상 여성 5명이 숨졌다. 2015년 5월엔 가와사키 시의 간이숙박시설이 전소하면서 80대 노인 등 남성 11명이 숨졌다. 2017년 5월 기타큐슈 시에서는 일용직 노동자 등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불이나 80대 노인 등 남성 6명이 숨졌다. 불과 석 달 뒤에는 아키타 현의 아파트에서 불이나 70대 노인 등 5명이 숨졌다.

빈곤층 거주 시설…재정난으로 방재 시설 취약

빈곤층에 거주시설을 지원하는 단체나 회사는 만성적인 자금난 때문에 최소한의 법적 안전 규정만 간신히 맞추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화재가 발생한 시설의 운영회사가 관할하는 또 다른 공동주택의 경우 입주자는 250명에 이르지만, 이를 지원하는 직원은 7명밖에 없었다. 직원 1명이 사실상 수십 명을 담당해야 하는 열악한 구조라는 것이다.


일본 '노숙자 지원 전국 네트워크'는 긴급 강연회를 열고, '친인척이 없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시설이나 아파트 등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 화재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면서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네트워크 측은 특히 '빈곤층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재정난 때문에, 방화시설이 취약한 낡은 목제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장 취약시설에 스프링클러라도 설치하기 위한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거 빈곤층 문제 심각…도쿄에만 하루 4천 명, 인터넷 카페 등 전전


높은 임대료로 악명이 높은 일본의 도시에서 주거 빈곤층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그나마 열악하더라도 안정적인 주거지조차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인터넷 카페 등에서 숙식하는 사람들이 도쿄 도내에서만 하루 4,000명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도쿄도가 2016년 1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도내에 있는 '24시간 인터넷 카페'나 '만화 카페' 등의 점포 200여 곳과 이용자 900여 명을 대상으로 거주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평일 도내 인터넷 카페 등에서 숙식하는 사람은 하루 평균 만 5천여 명으로, 이 가운데 약 4천여 명은 ''숙식할 주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주거 빈곤층의 97.5%는 남성이었고, 나이별로는 30대 38.6%, 50대가 28.9%로 집계됐다. 이들은 언제든 더 열악한 주거시설로 떨어질 위험에 노출돼 있다. 실제로 이들이 인터넷 카페에 머물지 않을 때는, 길거리나 패스트푸드점을 전전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도쿄의 유효구인배율은 '2'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적으로 구직자 한 사람당 일자리가 두 개씩 돌아갈 만큼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안정적 주거지를 유지할 만큼 양질의 일자리가 충분한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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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07 12:02:55
    특파원 리포트
빈곤층 공동주택 화재…독거 노인 등 11명 사망

지난 1월 31일 늦은 밤 홋카이도 삿포로 시의 노인 생활보호수급자 자립지원 시설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불길과 연기는 불과 10분 새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소방차 40여 대가 긴급 출동해 진화에 나섰지만, 거센 불길과 유독가스 때문에 구조대원들이 건물 내부로 쉽게 진입하지 못했다. 건물은 결국 전소했다. 거주자 16명 가운데 11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저소득층 노인들이었다.


참사가 난 곳은 오갈 데가 없거나 돌봐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전형적 빈곤층 주거시설이었다. 3층짜리 여관 건물을 개조해, 2004년부터 입주자들과 임대 계약을 맺었다. 1, 2층에 개인실을 촘촘히 마련했고, 식당과 욕실은 공동 사용했다.

빈곤층의 보금자리…위험을 감수하고 살았는데


한 달에 3만 6천엔 가량, 우리 돈 35만원 가량을 받고, 하숙집처럼 식사를 제공했다. 취업 지원 등은 물론 병원 등을 오가기 위한 교통편도 제공했다. 취약 계층의 마지막 피난처 역할을 했지만, 낡은 목조 건물 자체는 화재에 취약했다. 전문가들은 복도를 따라 좌우에 작은 방이 들어선 구조 때문에 불길과 연기가 급속히 번진 것으로 추정했다.


법규에 따라 건물에 소화기는 배치돼 있었지만, 방화용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소규모 시설이라 의무 사항이 아니었다. 피난 훈련도 비상시 대피 매뉴얼도 없었다.

대피경로를 안내하는 '유도등'이 설치돼 있었지만, 파손된 채로 수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화재 당시 가까스로 탈출한 주민은 '경보기가 울렸지만, 정전으로 복도가 깜깜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창문에 설치된 방범용 목제 격자시설도 대피와 구조의 방해물이 됐다. 더구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다수였지만, 야간에는 상주 직원이 없었다.


참사 나흘 뒤인 2월 4일, 공동주택을 운영해온 업체의 부대표가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형 참사가 발생한 데 대해 죄송하다'고 머리를 숙였다. 소방 시설이 취약했다는 지적에 대해, 자금의 여유가 없어, 법적 허용 범위 안에서 시설을 운영했다고 해명했다.

반복되는 비극…취약계층 거주시설 대형 화재

오래된 목조 건물이 많은 일본이다. 화재도 잦고 인명 피해도 잦다. 선진국일수록 기본적인 안전 규제가 강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각지대와 허점은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이다.

최근 11명의 생명을 앗아간 삿포로 공동주택 화재 사고는 방재 선진국, 복지 선진국을 자처해온 일본 사회의 숨겨진 민낯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실제로 일본에서 노인 등 취약계층이 거주하는 공동주택이나 시설에서 불이나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13년 2월 나가사키의 공동주거시설 '그룹홈'에서 불이 나 70대 이상 여성 5명이 숨졌다. 2015년 5월엔 가와사키 시의 간이숙박시설이 전소하면서 80대 노인 등 남성 11명이 숨졌다. 2017년 5월 기타큐슈 시에서는 일용직 노동자 등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불이나 80대 노인 등 남성 6명이 숨졌다. 불과 석 달 뒤에는 아키타 현의 아파트에서 불이나 70대 노인 등 5명이 숨졌다.

빈곤층 거주 시설…재정난으로 방재 시설 취약

빈곤층에 거주시설을 지원하는 단체나 회사는 만성적인 자금난 때문에 최소한의 법적 안전 규정만 간신히 맞추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화재가 발생한 시설의 운영회사가 관할하는 또 다른 공동주택의 경우 입주자는 250명에 이르지만, 이를 지원하는 직원은 7명밖에 없었다. 직원 1명이 사실상 수십 명을 담당해야 하는 열악한 구조라는 것이다.


일본 '노숙자 지원 전국 네트워크'는 긴급 강연회를 열고, '친인척이 없는 노인들이 거주하는 시설이나 아파트 등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 화재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면서 사회 전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네트워크 측은 특히 '빈곤층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재정난 때문에, 방화시설이 취약한 낡은 목제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장 취약시설에 스프링클러라도 설치하기 위한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거 빈곤층 문제 심각…도쿄에만 하루 4천 명, 인터넷 카페 등 전전


높은 임대료로 악명이 높은 일본의 도시에서 주거 빈곤층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그나마 열악하더라도 안정적인 주거지조차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인터넷 카페 등에서 숙식하는 사람들이 도쿄 도내에서만 하루 4,000명에 이른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도쿄도가 2016년 1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도내에 있는 '24시간 인터넷 카페'나 '만화 카페' 등의 점포 200여 곳과 이용자 900여 명을 대상으로 거주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평일 도내 인터넷 카페 등에서 숙식하는 사람은 하루 평균 만 5천여 명으로, 이 가운데 약 4천여 명은 ''숙식할 주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주거 빈곤층의 97.5%는 남성이었고, 나이별로는 30대 38.6%, 50대가 28.9%로 집계됐다. 이들은 언제든 더 열악한 주거시설로 떨어질 위험에 노출돼 있다. 실제로 이들이 인터넷 카페에 머물지 않을 때는, 길거리나 패스트푸드점을 전전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도쿄의 유효구인배율은 '2'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적으로 구직자 한 사람당 일자리가 두 개씩 돌아갈 만큼 일손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안정적 주거지를 유지할 만큼 양질의 일자리가 충분한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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