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종 즉위 600주년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입력 2018.02.19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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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 교수 : 숙명여자대학교



□ 한상덕 / 진행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KBS <공감토론>입니다. 이 시간 진행을 맡고 있는 백운기 앵커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게 돼 오늘은 제가 대신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KBS 한상덕 기자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십니까?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지 분들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신지요. 올해는 워낙 한파가 기승을 부려서 날씨 이야기들도 많이 하셨을 것 같고요. 동계올림픽 개막식, 북한의 김영남, 김여정 등 손님과 남북 단일팀 이야기, 북한 응원단, 예술단 이야기 등으로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방선거를 앞둔 명절이다 보니까 정치 이야기도 참 많이 하셨을 텐데요. 오늘 KBS <공감토론>은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이라는 주제로 설특집 강연을 준비해 봤습니다. 올해는 세종대왕이 즉위하신 지 600주년이 되는 그런 해인데요.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펼친 세종대왕을 통해서 국가지도자가 어떻게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 보고 생각을 나눠보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KBS <공감토론> 시작하겠습니다.

□ 한상덕 / 진행
오늘 KBS <공감토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서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이라는 주제로 설특집 강연으로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참 많이 들어본 말씀이실 것입니다. 그만큼 국가지도자에게는 어떤 인재를 어떻게 등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그런 의미일 텐데요.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서 <외천본민 : 세종대왕의 바른정치> 저자이신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님과 함께 세종의 태평성대를 함께 한 숨은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추석에 이어서 이번 설에도 특강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죠. 신세돈 교수님, 스튜디오에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세요

□ 신세돈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한상덕 / 진행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천본민 글자 뜻을 보면 하늘을 두려워하고 그리고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 이런 뜻을 담은 제목인 것 같은데요. 신세돈 교수님 약력부터 먼저 소개를 해 드리면요. 신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중퇴하시고 미국 UCLA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은행과 삼성경제연구소를 거쳐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30년째 재직 중이신데요.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를 지내셨고, 금융감독원 자문교수단 금융소비자보호 분과위원장과 국민검사청구심의위원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사회에서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신 교수님, 먼저 처음 드는 느낌은 세종대왕의 연구에 대해서 천착하게 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 신세돈
그동안 우리는 경제가 제일 중요하다, 잘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1인당 3만 불까지 와 보니까 경제만 잘하고 반도체나 자동차만 잘 만들어 가지고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더라, 진짜 정치를 선진국스럽게 해야만 나라가 정말 제대로 된 나라가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몇 년 전에 하고 경제학자로서 경제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게 정치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 조선에 가장 훌륭한 정치를 하신 분이 누군가를 살펴보는 와중에 세종대왕이 30년 남짓 통치를 하시면서 정치는 이렇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조금 아시면, 특히 정치인들이 아시면 우리 정치가 한 두 단계, 세 단계 업그레이드되는데 저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경제학자로서 제가 지금 외람되게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정치다운 정치가 펼쳐졌던 태평성대가 세종대왕 시대였기에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를 하셨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 특강 주제가 <세종시대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이런 제목인데 올해는 특히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세종대왕께서 즉위하신지 600주년이 되는 그런 해라고 하더라고요.

□ 신세돈
그렇죠. 무술년이, 네, 딱 600주년.

□ 한상덕 / 진행
네, 오늘 강연주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해 주실 겁니까?

□ 신세돈
일단 아무리 세종대왕이 훌륭하시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훌륭한 인재가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정치가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도 그랬고 그 후에 나오는 모든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통령 혼자서 탁월하셔서 되는 게 아니고 그 주변에 정말 훌륭한 전문가들이 많이 뒷받침을 해 줘야 된다는 것을 세종대왕의 그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아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가 잘되려고 하면 대통령이나 어떤 특정한 인물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정치가 되는 것이다. 그 사례를 우리가 세종에게서 한번 찾아보자, 그런 취지로 이런 시간을 마련한 셈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께서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고 공부를 많이 한 그런 훌륭한 임금이라고 해도 천년에 다시 없는 그런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시지만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잘하고 다 할 수는 없는 그런 사정이었을 텐데 각계 전문가들을 이용해서 찬란한 그런 문화를 꽃 피우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세종 태평성대였는데. 그렇게 훌륭한 인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정치경제 분야에서 세종대왕의 그런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그런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다고 꼽으시겠습니까?

□ 신세돈
네, 일단 정치, 경제, 이 두 분야에 있어서는 우리가 황희정승과 허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황희는 우리가 많이 아는 편인데요. 허조라고 하는 분은 조금 이따 우리가 상세하게 들여다보겠지만 세종대왕 치하에서 이조판서를 10년 이상 하셨고요. 나중에는 정승까지 올라가긴 합니다마는, 황희정승이 세종대왕의 영의정이라고 하면 허조대감은 세종대왕의 영원한 이조판서다. 그래서 이 두 분이 정치와 경제를 거의 주도해 나갔다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정치와 경제의 쌍두마차다, 이렇게 볼 수 있겠군요?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황희정승과 허조정승이요. 많은 분들이 황희정승에 대해서는 다 어린 시절 위인전을 통해서 접한 사람들도 있고 많이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재상으로 허조라는 분에 대해서는 좀 부각이 덜 됐던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도 들고요. 어쨌든 황희정승은 24년간이나 정승자리에 있었고 19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했던 그런 인물인데 황희정승에 대해서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자세히 평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 신세돈
일단 굉장히 오래 사셨습니다. 90세까지 사셨고요.

□ 한상덕 / 진행
조선시대에 90세라고 그러면 지금으로 치면 한 100살도 넘게 산 걸로 봐야겠죠?

□ 신세돈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죠? 조선시대는 사람들이 굉장히 단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세종대왕의, 지금 오늘 소개하는 분들은 거의 70세, 80세, 90세까지 사셨어요. 그러니까 그때도 상당히 장수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다만, 평균수명이 짧았던 이유는 태어나서 얼마 만에 죽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수명이 조금 짧게 나타나는 것이지 그때도 보면 80세, 90세, 100세를 넘은 분들도 그때 많이 있기 때문에 황희정승의 90세는 조금 드물기는 하지만 90세까지 사셨고요. 그 기록에 보면 어릴 적부터 영특함이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 이분이 결국은 과거시험은 고려 때 했지만 고려가 망하면서 조금 은둔생활을 하다가 태조가 등용을 시켜서 태조 때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하는데 황희는 첫째 오래 사셨고 둘째 특징이 뭐냐 하면 매우 직언을 잘했습니다. 이분은 직언이라고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직언을 많이 한 분이고요. 그다음에 판단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고, 마지막으로 이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관용입니다. 굉장히 너그러웠고요. 그래서 나중에 사가들은 형벌을 너무 가볍게 해서 조금 흠이 가는 것 아닌가, 라는 이런 비평을 하기도 하는데 황희가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가 라고 하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사례가요. 이성계 있지 않습니까? 이성계 할머니가 계세요. 이성계 할머니의 묘를 순능이라고 했습니다. 이 순능이 어디 있느냐 하면 지금 함경북도하고 소련하고 중국하고 경계지역, 거기가 이성계의 본거지인데 거기에 할머니 묘가 있었는데 이성계가 이제 왕이 되니까 이 묘를 조금 남쪽으로 옮겨서 매우 호화롭게 능묘를 건설하는데 그 능묘 이름이 순능입니다. 그런데 황희가 이때 보니까 이 순능이 너무 호화롭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나라가 고려에서 이조로 넘어오는 이 초기에 임금도 아니고 임금의 할머니의 묘를 이렇게 호화롭게 해 가지고는 기강이 서겠는가, 이렇게 비판을 했다가 태조한테 쫓겨나는 그런 일도 있었고요. 또 한 번은 태조가, 선공감이라는 게 뭐냐 하면 궁궐 내에 있는 많은 공사 일을 하는 부서인데 이 선공감에 정난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모친상을 당해 가지고 상중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태조가 보니까 지금 궁궐 안에 너무 할 일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태조가 명을 해요. “정난 너는 한 일주일만 상을 하고 빨리 근무처로 돌아오라” 이렇게 명을 내렸거든요. 그런데 이 황희가 꼭지를 다는 겁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 궁궐을 수리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 그리고 다른 사람 많다. 정난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위공무원인데 이 사람이 어머니 모친상을 당했으면 3년을 다 치르고 기복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렇게 대들었다가 또 좌천하고,

□ 한상덕 / 진행
그렇게 왕에게 직언을 자꾸 하다 보면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좀 눈 밖에 나서 귀향을 자주 갔겠군요?

□ 신세돈
네, 귀향을 많이 갔는데요. 태조는 이성계는 이 사람을 굉장히 많이 찍었는데요. 그 옆에서 유심히 황희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누구냐, 이방원이었어요. 저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해서 나중에 이방원이 왕이 되고 나서 황희를 아주 본격적으로 등용을 해서 중용을 하면서 세종한테 “황희는 정말 쓸 만한 사람이니 이 사람을 믿고 등용을 해라” 이렇게 넘겨주게 되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에게 양해를 하면서 황희를 좀 중히 써라, 이렇게 유언을 했군요?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래서 황희는 세종대에 어떤 어떤 관직을 하게 됩니까?

□ 신세돈
그래서 이성계 때는 계속 쫓겨 다녔고요. 태종 때도 중요한 직책에 있었지만 주로 세자를 가르치는 직, 이런 쪽에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시킨 게 예조판서고요. 예조판서 바로 다음에는 강원도 관찰사, 왜냐하면 강원도 그때 흉년이 져 가지고 강원도 사람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재부사, 이게 군사직인데요. 대사헌, 우찬성, 이조판서를 거쳐서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신지 8년 만인 1426년도에 우의정이 되어서 세종대왕 돌아가시는 그해까지 24년 여 가까이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정승 자리에 있었던 셈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24년 간 정승자리를 하고 그다음에 19년 동안 영의정 자리를 했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오랜 동안 영의정을 했다면 그 당시에 세종대왕 시대에 어떤 어떤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까?

□ 신세돈
거기에 이제, 오늘 소개할 다른 분들은 다 아주 분명히 드러나는 업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윤덕 같은 경우에는 4군을 만들었다든지 김종서 같으면 6진을 만들고 그랬는데 황희정승은 뚜렷한 어떤 업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세종대왕의 31년의 치세 동안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임금과 반대 의견을 가진 신하들의 아주 탁월한 중재역할을 해서 임금하고 신하들이 의견대립을 해서 이 사안이 진전이 되지 않을 때마다 그 틀어진 것을 메꾸어서 중재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야말로 세종대왕의 정신적인 멘토라고 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이분이 정승으로 계시면서 끊임없이 훌륭한 인재들을 조정으로 등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아까 허조라고 하는 이조판서도 황희정승이 등용을 시켰고요. 최윤덕이라고 하는 명장도 황희정승이 이 인재를 알아봤고요. 우리가 조금 이따 소개할 장영실도 황희정승이 했고요. 정초도 황희정승, 그러니까 황희정승이 사람들을 정확하게 보고 추천하는 그런 역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황희정승이 무슨 뚜렷한 손에 잡히는 그런 업적은 내지 못했을지 몰라도 세종 31년 6개월 치세 동안 굉장히 중요한 안건 뒤에는 항상 황희가 결정적으로 신하들의 다른 의견들을 조정하고 설득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서 저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정신적인 멘토였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아마 황희가 없었으면 그 어떤 격렬한 신하들의 반대를 이렇게 조정해 나가는 데 연령 면에서나 경륜 면에서 상당히 부족했을 텐데 그것을 황희정승이 참 잘 메꿔줬다는 차원에서 첫 번째로 세종대왕의 치적에 중요한 결정적인 어떤 보조자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가 평가할 수 있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조정의 화합과 또 인재를 정확히 뽑아서 임금에게 세종대왕에게 천거를 했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황희정승에 대해서는 야사에서는 굉장히 성격이 온화하고 아주 청렴하고 강직한 분이다, 이렇게 돼 있지만 또 실제 실록에 보면 그렇지 않은 면도 적혀 있다고 들었어요.

□ 신세돈
네, 실록에는 황희정승의 말하자면 흠결이라고 할 만한 사건들이 한 7~8가지가 나오는데요.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사위 서달이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을 했었을 때 그것을 무마하려고 맹사성을 동원했다가 결국은 파직이 되는 사건이 있었고요. 또 태석균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인사청탁을 받았거나,

□ 한상덕 / 진행
사위 서달이 어디 지방행차를 하는데 제대로 예를 표하지 않았다고 버릇이 없다고 데려다가 때려서 죽인 거죠?

□ 신세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서천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길래 “내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데 건방지게 인사도 하지 않는가” 이래서 결국은 때려 죽였는데 때려 맞아 죽은 사람이 엉뚱한 다른 동네의 공무원이었어요. 그래서 그 건 때문에 관련자들이 전부 문책을 당하는 게 유명한 서달 폭행 치사사건이고, 그다음에 남원부사가 뇌물을 줘 가지고 뇌물을 받은 뇌물수수 사건이 기록이 돼 있고, 박용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또 말을 받아서 뇌물을 받은 사건이 있고 또 뇌물을 하도 많이 받아서 대사헌이라고 그러면 검찰총장인데 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황희하고 김익정이라고 하는 두 대사헌이 하도 뇌물을 많이 받아서 황희의 ‘황’씨하고 김익정의 ‘김’씨를 따 가지고 황금대사헌이라고 비아냥댈 정도로 그 당시에 뇌물에 연루가 많이 되었는데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럴 때마다 황희는 임금한테 사직서를 냈습니다. 사직서를 내가 “내가 이 사실이 맞든 안 맞든 간에 나는 그런 스캔들 가지고 직을 수행할 수 없다” 이렇게 사직서를 냈는데 임금께서 파직을 하시고 며칠 만에 다시 복직을 시킨다든지 해서 항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임금님은 관용을 베푸셨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보면 황희정승이 이렇게 뇌물이라든지 청탁으로 연루되었던 사건들이 꽤 많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간통사건까지 실록에는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하여간 저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황희정승에 대한 이미지와는 일면들이 실록에는 기록이 돼 있는 게 좀 놀랍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께서 황희를 그토록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이유랄까?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은 또 어떤 게 있었을까요?

□ 신세돈
그게 세종대왕의 용병술이죠. 그러니까 사람의 흠결이나 결점을 보고 판단을 하면 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판단이세요. 따라서 누구든지 그 사람의 흠결이 있으면 그 흠결에 따른 처벌을 받으면 되는 것이고 세종대왕의 사람 씀씀이를 보면 항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보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종대왕이 황희를 보기에는 경륜이 있고 덕망이 있고 지식도 있고 또 신하들을 잘 아우를 수 있는 중재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대왕으로서는 황희가 없으면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은 중신들을 통제하기가 힘들다, 그런 관점에서 형벌을 주더라도 짧게 주고 그로서 충분히 죄의 대가를 받게 하고 대신 빨리 등용을 시켜서 황희를 세종대왕이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곁에 두시고서 중요한 자문을 얻어냈다, 이런 것들이 황희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다른 신하들에게도, 김종서라든지 최윤덕이나 이천이나 모든 사람에게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항상 그 장점만 취하셔서 활용을 하셨다, 이게 세종대왕의 용병술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고 특징인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군요. 처음에 신 교수님께서 모두에 세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끈 쌍두마차로서 황희정승하고 허조정승을 말씀해 주셨는데 황희정승에 비하면 허조정승은 좀 알려져 있는, 부각되지 않은 그런 인물이지 않나 싶은데, 허조라는 분은 어떤 인물이셨습니까?

□ 신세돈
허조도 출생은 고려시대 때 과거시험을 쳤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정권이 바뀌면서 숨어 있다가 결국은 등용됐다는 점에서, 고려의 인물인데요. 사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허조는 제가 보기에는 황희정승보다도 훨씬 더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고 그다음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굉장히 뛰어난 행정가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분은 한마디로 굉장히 청빈한 사람이고 평생 어머니가 지어준 옷 두 벌 가지고 평생을 살 정도로 청빈했고요. 이분이 얼마나 청빈했느냐 하면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자기 동생의 부인이, 동생이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그 아들을 양자로 삼겠다고 하면서 양자가 되면 자기가 있는 재산을 다 주겠다고 하니까 딱 허조가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 아들이 그런 재물을 받으면 사람이 잘못될 수가 있으니 재물을 주신다고 하면 내 아들을 양자로 들일 수 없소”라고 거절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분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고요. 그다음에 이분 스승이 염정수라고 하는 고려시대 때 권신인데 이성계 파에 의해서 이게 목이 날라 가요. 그 목이 날라 갔을 때 그 밑에 있던 학생들이 다 도망갔는데 허조는 그 목이 날라 간 스승 염정수의 시체를 끝까지 장례를 시켜줄 정도로 이분 아주 강단이 매우 강한 그런 충신이었고 이분도 태조 이후에 조정에 들어와 가지고 여러 가지로 강단 있는 정책을 하다가 많이 쫓겨나고 했는데요.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응방사건입니다. 이 응방사건이 뭐냐 하면 이방원이 매를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매를 좋아하다 보니까 매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응방인이라고 하는데 이 응방인들이라는 게 태종 이방원의 위세를 믿고 굉장히 건방지게 많이 굴었어요. 그래서 허조가 그때 검찰청이, 말하자면 검사였는데 응방인들을 싹 다 가두어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이방원이 화가 나 가지고 “왜 가두었는가” 그랬더니 매와 같은 이런 오락을 가지고 이렇게 나라 기강을 흔들면 되겠냐고, 그래서 허조가 끝까지 밀어붙여서 응방인들을 규제를 했던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결국은 좌천이 되었지만 황희가 옆에서 보고 허조는 자기도 강단 있게 말하다가 좌천이 많이 됐지만 허조는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서 황희가 이분을 찍어서 계속해서 자기 밑에, 그래서 황희정승이 승진하는 그 뒷길을 그대로 허조가 밟아갈 정도로 허조는 어떤 의미에서는 황희의 그림자였고 현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청빈하고 의지가 강하고 강단 있는 그런 대표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이렇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 시대에 이조판서로서 10년간 1422년부터 1432년까지 역임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조판서면 지금의 내무장관인가요?

□ 신세돈
내무장관 겸 기재부장관 겸, 하여튼 이조의 역할이 굉장히 크니까요. 지금의 내무행정부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한 업무영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앞서 태종시대 때 응방인 구속사건과 관련된 일화를 말씀해 주셨는데 태종 때는 그렇고 세종대왕 시대 때는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

□ 신세돈
아마 이분만큼 많은 업종을 남긴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 가장 쟁점이 되었던 법이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거예요. 이게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게 뭐냐 하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고발할 수 없다는 법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법인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법 취지가 뭐냐 하면 밑에 있는 사람이 자꾸 위에 사람을 모함을 하는 거예요.

□ 한상덕 / 진행
무고를 한다는 거죠?

□ 신세돈
무고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봉건체제 하에서는 상하 위상이 굉장히 분명한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집적거리면서 거짓무고를 하고 하니까 기강이 흔들린다고 생각을 해서 허조는 강력하게 부민고소금지법을 주장을 하고 세종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이 제도를 1420년, 세종 즉위 2년에 이것을 제도로 정착을 시킵니다. 그래서 이게 이분의 가장 중요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게 문제가 뭐냐 하면 그렇게 되니까 밑에 있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해도 상사를 고발할 길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에 젊은 사대부들이 이런 제도가 있기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공무원들이 부정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부패가 심해진다, 이런 논란이 일어나서 세종대왕 임기 내내 이 부민고소금지법을 철폐해야 된다, 또는 고쳐야 된다, 하는 논의가 계속됩니다. 그 논란의 한 가운데에 허조는 부민고소금지법을 지키려고 했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여러 가지 수정을 통해서 부민고소금지법들이 약간씩 수정이 되는데 그 수정의 핵심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상사를 고발할 수 있다, 그렇게 단서조항이 들어가면서 부민고소금지법은 이렇게 보완이 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허조가,

□ 한상덕 / 진행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 수령이라든가,

□ 신세돈
제3자.

□ 한상덕 / 진행
네, 수령이 어느 고을에서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당한 것이 아니면 그때는 고소를 못했었는데 내가 당하면 고소를 할 수가 있다, 이런 말씀이시죠?

□ 신세돈
그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그래도 부패가 그쳐지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그때 생각한 제도가 뭐냐 하면 그러면 비서실에서 특별감찰관을 보내자, 그래서 특별감찰관이 지방에 내려가서 못된 짓을 하는 수령이 있으면 그놈들을 이렇게 고발하도록 하자, 그래서 일종에 말하자면 암행어사 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제도를 보완시키기는 하는데 어쨌든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대왕 당시에 가장 논란이 많았던 법이었고 그 중심에 허조가 있었다, 그게 허조의 공헌이고요.
또 하나 쟁점이 됐던 법인데요. 이게 뭐냐 하면 수령육기법이에요. 수령육기법은 뭐냐 하면요. 관리들은 서울에 3년, 지방에 6년, 이렇게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 수령육기법인데 이전에는 어떤 제도가 있었냐 하면 수령삼기법이었어요. 서울에서 1년 반 근무하고 지방에 3년 근무하고 또 서울에 1년 반 들어오고 지방에, 이렇게 되니까 세종대왕께서 너무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이게 행정이 안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것을 좀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허조하고 황희가 이 육기법을 적극 지지를 하거든요. 그래서 허조하고 황희의 지지를 통해서 조선조에 수령육기법이 정착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요.

□ 한상덕 / 진행
3년을 지방근무를 6년으로 늘린 건가요?

□ 신세돈
네, 그러니까 지방근무 3년 하던 것을 6년으로 늘렸죠. 그때 반발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요. 교육이었어요.

□ 한상덕 / 진행
한양에서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 신세돈
네, 서울에서, 강남에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지방으로 내려가야 되니까 반발이 굉장히 심했었는데,

□ 한상덕 / 진행
세종대왕 입장에서 보면 지방에 가서 잘하는 사람을 굳이 잘하는 곳에 둬야지 왜 자주 불러들이느냐,

□ 신세돈
그렇죠. 그리고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개념도 있고요.

□ 한상덕 / 진행
네. 어떻게 보면 부민고소금지법, 수령을 마을 백성들이 고소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 이것은 세종대왕의 사회적 약자, 장애인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노비, 천민에 대한 그런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애민정신에서 보면 조금은 어긋나는 그런 정책이 아닌가 싶은데,

□ 신세돈
고민 많이 하셨어요. 세종대왕께서 이것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고민을 많이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아까 그것 말씀하신 대로 애민정신에서 핍박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의 억울한 부분을 고칠 수 있는가를, 어떻게 하면 제도를 보완할 수 있는가를 세종대왕께서 고민을 많이 하신 결과 자기의 억울한 부분을 들어주도록 수정을 아까 했다고 했고, 또 비서실에서 찰방이라고 하는 찰방이라고 하는 암행어사를 보내서 지방에 있는 어떤 그런 비리를 고발하도록 하는 이런 제도들을 많이 수정 보완하셨기 때문에 그 부분은 세종대왕께서 진짜 고민을 많이 하신 부분이긴 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허조정승이 그런 실책에도 불구하고 종묘가 신주에 모셔진 신하, 배향공신까지 그 지위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 신세돈
일단 이분이 굉장히 청빈했고요. 그다음에 이분의 소신이 매우 뚜렷했고요.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세종대왕에게 “북쪽의 여진족이 쳐들어올 염려가 많으니 항상 북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셔야만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도 이렇게 세종대왕에게 건의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보다는 조금 빨리 돌아가시긴 하지만 세종의 배향공신이 형님 둘하고 그다음에 스승 이수하고 3명을 빼면 4명인데 배향공신이 7명인데 7명 중에서 3명을 빼면 4명이 황희, 그다음에 이 허조가 문신이고 그다음에 신개, 최윤덕이 무신인데 황희와 허조가 세종대왕의 배향공신으로 뽑힐 만큼 세종대왕으로서는 탁월한 세종대왕의 업적에 기여를 한 분이다, 이렇게 당시에 이미 평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의 배향공신에 형님 두 분이라고 말씀하시면 양녕, 효령대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신세돈
네, 그렇습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배향공신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습니까? 네. 그러면 여기서 노래 한 곡 듣고 계속해서 신세돈 교수님과 설특집 강연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지난 2008년에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의 OST에 수록된 포지션의 ‘태양을 위해’ 듣고 오겠습니다.

(♪ 포지션 ‘태양을 위해’)

□ 한상덕 / 진행
지금 여러분께서는 KBS <공감토론>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포지션의 ‘태양을 위해’라는 노래를 듣고 오셨습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북한 핵, 미사일 도발 같은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물론 지금은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대화 국면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요. 문재인 대통령도 강한 안보와 책임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세종대왕 당시의 국방 환경은 어땠을까요?

□ 신세돈
그 당시는 참으로 정말 어두웠어요. 지금 압록강, 두만강 그쪽에서는 여진족, 여진족도 한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있는데요. 그 여진족들이 끊임없이 남침을 했고요. 밑으로는 또 대마도 이쪽에서 일본 왜구들이 끊임없이 침범을 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1415년 제주, 1417년 울릉도 독도, 1418년 제주, 1419년 해주, 그러니까 우리 조선의 동쪽, 서쪽, 남쪽 할 것 없이 끊임없이 왜구가 쳐들어왔는가 하면 북쪽에서는 끊임없이 여진족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임금이 되시고 했을 그 무렵, 1418년도 전후에는 안팎으로 국방상황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어요.

□ 한상덕 / 진행
네. 남으로 왜구의 침범이 잦았다면, 이게 조선시대 초기뿐만 아니라 고려 말부터 계속된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에 대한 조선시대 초기의 대책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 신세돈
일단 세종대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구들이 끊임없이 침범하는 그 기록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는 고려뿐만이 아니고 이시조선에서도 “이것은 모기 같은 거다. 그러니까 박멸할 수가 없으니 그냥 따끔따끔 물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물론 아버지 태종이 강력하게 해서 그러긴 하지만 세종대왕이 즉위하시는 그 해에 세종1년에 태종 이방원이 “안 되겠다. 이것 발본색원해야 되겠다” 해서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 한상덕 / 진행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서 대마도 정벌을 직접 지휘를 한 거죠?

□ 신세돈
직접 지휘를 하신 겁니다. 그때 임금은 세종이었지만 사실상 군사권은 태종이 가지고 계셨고, 그래서 1418년 5월 달에 삼군도체찰사, 이게 총사령관인데 이종무 그리고 유정현, 최윤덕, 이런 분들이 구성이 돼 가지고 지금 동호대교 북단, 그 이름이 두모포인데 그 두모포에서 성대한 송별연을 하면서 조선의 수군들이 한강을 건너서 서해안을 따라서 대마도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마도 정벌은 두 차례 하게 되는데 사실 두 번째 정벌은 하다가 대마도가 “잘못했다” 꿇어서 빌고 “다시는 그렇게 쳐들어오지 않겠다” 그걸 해서 2차 출병은 계획만 하다가 결국은 말았지만 세종18년도에 우리가 동원한 배가요. 기록에 따르면 227척, 엄청난 대군입니다. 227척의 배하고 17,285명의 해군이 6월 17일 한산도 추봉리를 출병해서 성과가 뭐였냐 하면 적선을 129척 탈취를 하고 적 114명을 살해를 하고 131명 우리가 포로를 했는데 그 사이에 아군은 180명이 전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1차 대마도 정벌 이후에 승전도 승전이지만 대마도에서는 조선에 대해서 다시는 이렇게 왜구 출몰을 하지 않겠다, 반성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 그렇게 반성을 해서 결국 2차 정벌은 추진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왜구 출몰이 상당히 줄고 대신 대마도하고 조선정부하고의 공식적인 통교를 틀게 되죠.

□ 한상덕 / 진행
네. 조선의 해안가를 끊임없이 계속 왜구들이 출몰하면서 백성들한테 많은 그런 피해를 입혔는데 완전히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한 것은 이들로서도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겠어요?

□ 신세돈
그러니까 227척이니까 깜짝 놀란 거죠. 그렇죠? 그래서 대마도에서는 종정성이라고 하는 대마도주가 조선 우습게보면 안 되겠구나, 해서 그 후로는 왜구의 출몰숫자가 상당히 많이 줄어듭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아버지 태종의 이런 대마도 정벌을 지켜본 세종대왕의 생각, 북쪽의 여진 침입에 대해서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나도 뭔가를 좀 해 봐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 같아요.

□ 신세돈
나이가 이때 스물 셋, 넷밖에 안 되니까 아직도 군사적인 식견은 없었지만 사실상 조선의 그런 국경을 위협하는 차원에서 보면 대마도 쪽보다도 오히려 북쪽이 훨씬 더 심각한 게 두 가지가 있는 게요. 하나는 북쪽의 여진족이 아까도 제가 크게 세 종족이 있다고 했어요. 조금 생소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압록강 주변에 있었던 여진족을 올량합이라고 합니다.

□ 한상덕 / 진행
올량합.

□ 신세돈
올량합 또는 오랑합이라고 하기도 하고 두만강 쪽에 있었던 여진족이 알타리 또는 오도리라고 하는 여진족이 있었고요. 그 위에 흑룡강 지역에 살고 있는 올적합, 이 세 부족이 서로 비슷비슷한 종족이긴 하나 조금 달랐어요. 얘네들이 서로 갈등을 하면서 서로 이렇게 다투니까 세종으로서는 굉장히 다루기가 쉬웠어요. 그런데 세종이 임금이 되실 즈음부터는 이놈들이 단합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단합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뭐냐 하면 올량합의 추장이 자기 딸을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세 번째 부인으로 바칩니다. 그러니까 명나라 이쪽에서는 이것 장인의 나라다, 이렇게 되니까 법적 지위가 여진족이 굉장히 커지면서 조선을 아주 우습게보기 시작하죠. 그래서 1410년도 저간부터는 여진족들이 단합을 해서 연합을 해서 압록강, 두만강 쪽을 아주 끊임없이 쳐들어오기 시작을 하는데 그 당시에 신하들이라는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했어요. 대부분 전쟁을 할 줄도 모르고 전쟁을 싫어하기도 하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쳐들어 내려올 때마다 신하들은 “전쟁은 안 된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설득해야 된다” 계속 화친책을 14년, 15년 동안 강조를 했어요. 화친책을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허조, 이런 분들이에요. 세종대왕이 한두 해도 아니고 1년, 2년, 3년, 4년, 14년, 15년차에 ‘더 이상 너희 말을 못 믿겠다. 손 좀 봐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 가지고 세종15년도에 결국은 대대적으로 여진족을 토벌하시게 되는데 그 토벌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유일한 신하가 최윤덕입니다. 그래서 최윤덕하고 손 딱 잡고,

□ 한상덕 / 진행
최윤덕은 또 황희정승이 천거를 한 거군요.

□ 신세돈
황희정승이 천거를 했지만 최윤덕 이 양반은 김종서의 표현에 의하면 글도 못 읽고 말도 어눌하고 똑같은 말 계속해서 반복하고 그야말로 관료로서는 형편없는 사람인데 군인으로서는 아주 기가 막힌 능력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최윤덕을 이렇게 속으로 생각을 하시고 세종15년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1차 파저강전투라고 해서 여진족을 토벌하게 되십니다. 그래서 요약을 하면 남쪽에서 대마도가 끊임없이 왜구의 소굴이 된 것을 소탕을 하시고 한 15년 동안 북쪽의 여진족 침입을 고민 고민하셨는데 신하들이 계속해서 반대, 반대, 반대만 하니까 세종대왕께서 내가 이렇게 미루다가는 이것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세종15년 1433년에 세종 혼자서 최윤덕 장군하고 북벌을 아주 감행을 하시게 되고요. 이 1433년부터 10여 년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변의 4진, 그다음에 두만강변의 6군, 6진,

□ 한상덕 / 진행
4군 6진이죠.

□ 신세돈
4군 6진이요. 그래서 1433년부터 1440년에 걸쳐서 한 7년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을 확고히 조선의 영토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하신 분이 세종대왕이세요.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께서는 조정에서는 계속 그렇게 화친을 하자,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전쟁으로 가시게 된 마음을 강경책으로 굳히게 된 기계가 무엇인지, 또 그 당시에 우리 조선이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강력한 국방력은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 부분도 한번 짚어주시죠.

□ 신세돈
그렇죠. 처음에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올적합, 그다음에 알타리, 올량합, 이 세 다른 여진족들이 따로 따로 노는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서로 서로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다른 여진족들하고는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조선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조선의 지원을 받았던 사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놈들이 연합을 해서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이놈들이 연합을 하면 조선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 더 커지기 전에 이놈들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요. 놀라운 사실은 그 올량합의 부하 중에서 나중에 청나라 누르하치가 나옵니다. 누르하치의 조상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께서 그때 여진족을 정리를 하시지 아니하셨으면 오히려 명나라가 훨씬 더 빨리 망했고요. 청나라가 훨씬 더 빨리 득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께서도 군사적으로 아주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으셨군요.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이 벌인 그 북벌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 신세돈
그 당시에 1차 파저강전투는 그 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얼마나 꼼꼼한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한 부분까지, 군사 몇 명 가야 되냐, 신하들이 3천 명이라고 해요. 3천 명 갖고 안 된다, 5천, 7천, 만, 결국에 15,000명 보내고요.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부터 어느 경로로 가며 어디에 다리를 놓으며 언제 출병하며 몇 갈래 길로 나누어 가며 모든 것을 세종대왕이 전략을 세우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요. 그 결과는 어땠냐 하면 적을 248명 생포를 하고 183명을 사살하고 아군전사는 4명, 부상 5명이니까 아군전사에 비하면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아니, 240명, 180명,

□ 한상덕 / 진행
아니, 이백 사십 몇 명이 죽었는데 아군전사는 4명밖에 안 됐으면 이것은 정말 세계 전사에 기록될 만한 그런 전쟁 아닙니까?

□ 신세돈
그렇습니다. 그리고 진군하는 것을 보면 7개의 길로 나누어서 강계에서 출발을 하는데 첫날 어디에 가고 그다음 날 어디에 가고 어디어디에 가서 4월 19일 날 어디에서 만나서 습격을 한다, 이 계획까지를 세종대왕이 다 기록을 하셔서 지시를 내렸어요. 그런 것을 보면 세종대왕 이분이 정말 병법이나 군사동원, 이 능력에 있어서도 장수 못지않게 저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이 이렇게 큰 전공을 받아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 신세돈
진짜 놀라운 게요. 뭐라고 기록이, 4월 19일 날 이제 이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현장에서 승전보고가 조정에 올라온 게 5월 3일인데 5월 3일 날 세종대왕께서 하신 말씀이 딱 이겁니다. “내가 오늘 전쟁에 이겨서 굉장히 기쁘긴 한데 이 공적을 유지해서 영원히 후환이 없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이게 고민이다” 할 정도로 일단 전쟁을 이기고 나시면 어떻게 하면 후환을 없애는가, 이 부분을 걱정을 하셨어요. 이 부분이 세종대왕의 정말 뛰어난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쟁의 성과에 전혀 도취하시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전공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게 뭐였느냐 하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6진을 구축하시고 그다음에 4군을 구축하시고 압록강변에 성곽을 만드시고 그리고 군사교육을 강화하고 장수를 기르고 조금 이따 나옵니다마는, 끊임없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배의 수명을 늘리며 어떻게 하면 창의 수명이나 기능을, 이런 것들이 뒤에 나오는 장영실이나 이천이나 이런 분들이 한 거지만 끊임없이 전쟁을 이기고 나서도 그 다음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그런 예리함, 대비함, 이런 것들이 굉장히 돋보이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여진족을 토벌하시고 나서 그쪽 지역을 어떻게 확고하게 우리의 영토로서 앞으로 지켜나갈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깊으셨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그러면 그 당시에 함경도 방면에 6진을 개척하기 위해서 김종서 장군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시죠.

□ 신세돈
그래서 아까 1433년에 1차 파저강전투를 이겼는데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것 그러면 어떻게 함경도 지역을 지키고 어떻게 하면 압록강 지역을 지킬 것인가, 이게 고민이셔 가지고 압록강 쪽은 조금 이따 소개해 드릴 이천을 보냈고요. 함경도 쪽을 보니까 김종서만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 한상덕 / 진행
김종서는 원래는 문신이었죠?

□ 신세돈
문신입니다. 문신인데 왜 김종서를 보냈냐 하면요. 사실 김종서가 말도 제대로 못했답니다. 그런데 김종서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게 뭐냐 하면 김종서가 세종대왕의 비서실에 있었지 않습니까? 비서실에 있다 보니까 세종대왕이 함경도 지역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때 문제가 된 게 뭐냐 하면 이게 조금 어려운 부분인데 함경도지역을 지키는 중심부 이름이 경원입니다. 말하자면 함경도 도청소재지인 셈이죠. 그런데 이 경원이 여진족 때문에 계속해서 뒤로 밀립니다. 그래서 원래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지금 경흥에 있었어요. 경흥은 어디냐 하면 두만강하고 중국하고 소련하고 만나는 그 부분에 있었는데 여진족 때문에 뒤로 쭉 뮐려 가지고 어디까지 왔었느냐면 경성이라고 거의 함흥 가까이 내려와 있었어요. 그래서 신하들이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 하면 아직도 여진족들이 출몰을 하니 경원부를 더 낮추자, 더 내려가자, 라고 하는 논의가 조정의 아주 중론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것은 내가 죽어도 못한다. 올라가면 갔지 더 내려올 수는 없다” 그래서 경원부를 남쪽으로 옮기자고 하는 거의 모든, 황희정승마저도 남쪽으로 옮기자고 했고요. 정초도 옮기자고 했고 허조도 옮기자고 했는데 유일하게 세종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람이 김종서예요. 그래서 김종서를 보내서 “나는 뒤로 물릴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더 올라갈 생각이니 네가 내 뜻을 잘 앎으로 네가 가서 내가 그쪽을 지키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보여줘라” 그래서 군인도 아닌데 김종서를 함경도 도절제사로 파견했었던 이유가 세종의 의지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어쨌든 세종시대에 이렇게 북방에 대한 변방을 튼튼히 지키지 못했다면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은 조선시대에 성립되지 못했다고 봐야겠죠?

□ 신세돈
거의 성립될 가능성이 저는 0%라고 봅니다. 세종대왕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다음에 세조대왕이 오셔 가지고 우리가 잘 아는 남이장군이 영토를 더 굳건하게 하시기는 하지만 세종, 세조가 없었으면 압록강하고 두만강은 우리 국경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저는 크다. 그래서 우리 북방한계선, 우리 북방의 국경을 확고하게 다지신 분은 세종의 공이 150%다, 이렇게 봐야 되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어쨌든 북한 영토도 만약 세종대왕이 그때 북방을 정리하지 않았으면 상당히 좁아졌을 테니까 모르긴 해도 북한 역사책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은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겠는데요?

□ 신세돈
네, 그러리라고 저도 추측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지금 여러분께서는 KBS <공감토론>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 한상덕 / 진행
세종대왕 하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군주이신데 그러다 보니까 백성의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발명을 많이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 신세돈
일단 세종대왕이 왜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는가, 그 부분을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이 무슨 기계 만지기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셨냐 하면 하늘이 돌아가는 것은, 즉, 천체가 돌아가는 것은 내가 정치를 잘하는가 하지 못하는가를 반영해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하늘이 돌아가는 움직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내가 정치를 잘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지 못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야말로 내가 정치를 잘하는 것, 아주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분이 해라든지 달이라든지 별의 움직임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분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과학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백성들을 좀 더 잘 살게 하고 또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야 된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서 애착이 남달랐던 것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좋은 정치, 선정을 펼치기 위한 그런 바탕으로 과학을 생각하셨던 거군요. 그렇다면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발전하면 많은 분들이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떠올리실 텐데, 어떻습니까?

□ 신세돈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너무 잘 몰라서 그런 것이죠. 장영실이라고 하는 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는데 장영실이 한 것은 물건을 만드는 제작, 장인이었어요. 물건을 기획하고 어떤 기계를 설계하고 이런 기계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고 아이디어를 낸 분들은 장영실이 아니에요. 세종대왕하고 그다음에 정초, 그다음에 이천, 이 세 분이 실질적으로 세종이 발명하신 거의 모든 기계의 아이디어부터 설계부터 모든 것을 주도하신 분이고 장영실이라는 분은 그런 설계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기계를 만들어 내는가, 장인의 입장에서는 장영실이 큰 기여를 한 것은 맞지만 이런 엄청난 기계, 인류 역사상 만들어 보지 못했던 이 기계를 설계하고 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장영실은 세종대왕이나 정초, 이천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는데 왜 이렇게 우리는 장영실만 했는가. 저는 이게 아마 우리가 왜정시대 때 일본 치하 때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 조선의 왕이나 조선의 관료들의 뛰어난 능력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서 장영실과 같은 비천한 사람을 내세웠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보긴 하는데 어쨌든 확실한 것은 장영실보다도 정초, 이천, 그리고 세종의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 한상덕 / 진행
네, 지금 설계가 기획한 분은 정초하고 이천이라는 인물을 드셨는데,

□ 신세돈
네, 세종대왕하고 세 분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다면 이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설계하고 기획한 것입니까?

□ 신세돈
먼저 정초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분이 지금 출생연도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저는 요절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종대왕께서 이분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 슬퍼 가지고, 제가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이 어찌 나가 이렇게 크게 의지하는 사람을 빨리 데려가서 내 마음을 이렇게 상하게 하는가’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정초는 세종대왕한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제 생각에는 40대나 50대 초반에 요절했다고 판단이 되는데요. 이분이 만든 기계가 뭐냐 하면 물시계라는 것을 이분이 만들었어요. 그래서 물시계를 세종대왕과 함께 설계를 하고, 물론 제작에는 장영실이 참여를 하지만 1424년이니까 세종대왕이 즉위하신지 6년 만에 물시계, 이것을 우리 누기라고 하는데 누기를 만드셨고 그다음에 농사를 짓는 기술에 관련된 최초의 백과사전 농사직설을 1429년에 만들었고 그다음에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가 혼천의라는 게 있는데 이 혼천의를 만들 때 정초가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정초하고 이천하고 장영실, 이 세 분이 만들 때 세종대왕하고 문종이 거의 매일 와서 이 기계 만드는 것을 보시고 상의하시고 제안하시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물시계와 혼천의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요. 이 외에도 그 당시에 달력이 굉장히 부정확해서 이 달력을 만드는 개편작업에 또 몰입을 하셨고 그다음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종대왕이 천문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셔 가지고 아랍과 중국에 있는 모든 천문서적을 다 규합을 해 가지고 칠정산내편, 외편을 만드세요. 칠정산내편, 외편이 뭐냐 하면 칠정산이라는 게, 칠이라는 게 저거거든요. 해, 달, 물, 우리 월화수목금토 이건데, 즉, 천문에 관련된 그 당시에 나와 있던 모든 서적들을 집대성 해 가지고 칠정산내외편을 1433년에 편찬한 분이 정초예요. 그러니까 정초는 물시계 만들었죠. 농사직설 썼죠. 혼천의 만들었죠. 달력 새로 만들었죠. 칠정산내외편 편찬했죠. 그러니까 이 정도의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신 분이 조선실록에 기록이 별로 없거든요. 저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초야말로 세종대왕의 상반기의 과학, 그런 업적을 거의 주도한 분이다, 이렇게 평가해도 틀림이 없을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지금 평가하시는 것을 보면 거의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버금가는 천재였던 것 같군요?

□ 신세돈
그렇죠. 그것도 한 100년 앞서서.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죠. 장영실이 한 구체적인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신세돈
기록에 보면 세종의 아이디어와 정초의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에 참여한 사람이 장영실이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고요. 거의 모든 새로운 기계제작에 장영실이 기여를 했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까 혼천의라든지 자격루라고 하는 누기라든지 측우기를 만들 때 장영실이 참여를 한 것은 사실이고 장영실이 또 이렇게 기계를 만들다 보면 철광석이 많이 필요하고 그랬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장영실을 전국에 보내서 동광이라고 할까? 철광석을 개발하는 광산개발에도 상당히 기여를 많이 했고, 그다음에 우리나라에서 나는 그런 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에 또 장영실이 많이 기여를 했고요. 그다음에는 나중에 나오지만 이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활자를 만드는데 그 활자를 만들 때도 장영실이 개입을 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세종대왕께서 아이디어를 내시고 그다음 정초나 이천이 설계를 하시고 그다음에 장영실이 그것을 만들어 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 세 분이 협업체계가 되어서 저는 그런 과학업적을 내는데 장영실의 역할이 우리가 무시 못 할 정도로 상당히 큰 기여를 한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어떻게 보면 과학기술 발전에 있어서 세 사람이 발을 묶고 함께 보조를 맞춰서 뛰어가는,

□ 신세돈
그렇죠. 3인1각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그런 형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장영실의 이후 조선실록의 행보는 어떻게 기록돼 있습니까?

□ 신세돈
1442년 이후에 장영실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1442년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요. 임금님께서 가끔 1년에 한 번씩 군사훈련을 가세요. 군사훈련을 가면 거대한 군마가 따르는데 세종대왕께서 어가가 이천입니다. 경기도 이천 말고 강원도 이천입니다. 38선 이북에 있습니다. 그 이천에 궁이 있는데 그때 폭우가 내려 가지고 행궁의 처마 밑에서 세종대왕께서 쉬고 계셨는데 폭우 때문에 기와장이 떨어져 가지고 그 기와장 때문에 세종대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행궁을 지었던 사람하고 가마를 제작했던 사람들이 다 처벌이 되는데 그때 장영실이 대호군이라고 종3품이니까 상당히 높은 직책에 있었는데 이분이 그 수레가마를 만드는 총 책임자였는데 그래서 책임을 물어서 결국은 1차로 판결이 나기를, 이렇게 했는데 세종대왕께서는 그동안에 공적이 있으니까 면제를 시켜줬어요. 면제 시켜줬는데 황희하고 허조가 이것은 불경에 관한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임금의 몸이 상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그렇게 관대하게 처리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하시니까 세종대왕께서 결국은 다시 탄핵을 하셔서 장영실한테 곤장 80대를 때리고 그다음에 공무원 직책을 회수를 하고 보냈는데 그 후로는 기록이 안 나오는 것 보니까 어디 귀향 가서 자연스럽게 수를 마친 것 같아요. 그래서 장영실의 기록은 1442년 5월 기록이 곤장 50대 맞았다는,

□ 한상덕 / 진행
곤장 80대.

□ 신세돈
네, 80대 맞는 것, 이후로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곤장 80대를 맞은 뒤에 그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앞서서 정초, 장영실이라는 인물 외에도 이천이라는 분을 말씀하셨는데 이분은 어떤 분입니까?

□ 신세돈
네, 정초라는 분이 과학적인 부분에 굉장히 능력을 발휘했다고 하면 이천은 현실 차원에서 생활과학을 완성한 분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그 당시에 거울이 굉장히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이 거울을 가지고 속이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어떻게 하면 이 거울을 속이는 놈들을 없앨 것인가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저울을 많이 만들어서 집집마다 보급하면 되겠구나, 해서 이천한테 거울을 만들라고 지시를 하셔서 호조참판 이천이 저울 1,500개를 만들어서 보급을 했고요. 그다음에 지금 한강을 가시다 청평댐 밑에 유심히 보시면 바위가 굉장히, 강바닥이 많거든요. 그 강바닥에 바위가 많아서 운항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천이 그 강바닥에 있는 돌을 전부 깨뜨려 가지고 한강 입구에서 배가 저 위에 거의 충주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강바닥을 완전히 깬 사람이 이천이고요. 그다음에 이천의 가장 큰 공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에 있는 성, 그리고 압록강 주변에 있는 성, 이 성로서 구축하는 데는 확실하고 탁월한 능력을 보여 줬고요. 마지막으로 이천이 만든 가장 중요한 공적이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활자, 갑인자라고 하는 게 있는데 1434년에 이 갑인자를 만들게 되는데 이 갑인자를 만들어서 대한민국의 출판문화를 세계 수준까지 올리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이천이십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태종시대 때 계미자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 신세돈
아름답고 그다음에 자판이 잘 나오고,

□ 한상덕 / 진행
네, 고쳐진 게 세종시대 갑인자로 저희 국사시간에 배웠는데,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군요. 대단한 업적인데, 그런데 이러한 화려한 업적에 비하면 이천이라는 분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런데, 그런 이유, 왜 이렇게 이천의 업적에 대해서 평가가 그동안 국사 사학계에서 낮았던 걸까요?

□ 신세돈
이천의 외삼촌이 고려시대 영흥방이라고 이성계 파에게 시해 당한 소위 말하는 구시대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사대부들은 아무리 이천이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강을 파는 기술이나 이런 것들은 이게 유교의 기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이것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천이라고 하는 사람 자체가 출신이 고려권신 출신이기 때문에 이는 구시대 가문이다, 이런 생각을 해서 끊임없이 이천을 배척하고 출신 가지고 폄훼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천에 대한 무고가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세종대왕께서는 끝까지 이천을 지켜주십니다. “원래 이렇게 재능이 많은 사람은 원래 모함을 하기 마련이니 너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말고 하는 일을 잘해라. 네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국방무기나 이런 부분은 할 사람이 없으니 나만 믿고 임무에 충실해 달라” 이런 말씀을 여러 번 당부하시는 것을 보면 이천이 이렇게 업적이 평가가 낮은 것은 그 당시의 문신들, 그 당시의 사관들이 이천의 출신에 대해서 상당히 …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러니까 실록에서도 문신들이 이분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 낮게 보니까,

□ 신세돈
말은 못하죠. 그것 때문이라고 말은 못하지만 이천의 아주 작은 허물 가지고 계속해서 모함을 하고 무고하고, 이런 기록들은 실록에 여러 번 나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뭔가 자신들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 이것에 대해서 못마땅한 그런 시선이 있었다는 그런 말씀이시군요.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네. 이번에는 지난 2012년에 방영된 KBS 대하사극 대왕의 꿈 OST, 제시카의 ‘마음길’을 듣고 신세돈 교수님의 설특집 강연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이야기 이어 가겠습니다.

(♪ 제시카 ‘마음길’)

□ 한상덕 / 진행
지금 여러분께서는 KBS <공감토론> 설특집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에 관해서 숙명여자 대학교 신세돈 교수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신 교수님, 마지막으로 교육문화역사 분야를 한번 짚어보겠는데요. 태종에게 변계량이라는 재상이 있었다면 세종에겐 정인지가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훈민정음,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극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어린 백성이 니르고저 할빼이셔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이를 능히 펴지 못하니 이를 어여삐 여겨 이 글자를 만들어라’ 그렇게 돼 있죠?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네, 이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정인지가 세종대왕을 적극 지지한 그런 인물이기도 한데 정인지는 어떤 인물입니까?

□ 신세돈
일단 엄청 천재였습니다. 엄청 천재였고요. 이분이 세종대왕보다 1살 위입니다. 세종대왕이 1397년인데 이분은 1396년생인데요. 이분이 태종 때 문과에서 일등급제를 합니다. 일등급제를 하는데 이게 선발관이 1등, 2등, 3등을 가지고 태종한테 올렸어요. 이것 누가 1등인가, 자기네들이 결정하기 좀 뭐하고 해서 올렸더니 태종께서 직접 이 사람이 1등이다, 라고 짚은 사람이 정인지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머리가 좋았고요. 나중에 세종한테 임금 지위를 물려줄 때 세종한테 “앞으로 이 사람은 크게 등용할 사람이다” 이렇게 콕 집어서 이야기할 정도로 젊어서부터 굉장히 촉망을 받았던 사람인데 이분도 태종 때는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군사훈련 명령이 떨어졌는데 딴 짓 하다가 참석을 못해 가지고 좌천되기도 하고요. 어쨌든 태종이 있을 당시에는 그렇게 똑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각을 못 나타내다가 세종대왕께서 딱 취임하시자마자 이 사람을 집현전 응교로 하면서 집현전에 집어넣고 이 사람을 아주 활용을 했는데, 따라서 정인지의 역할은 집현전을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고 집현전이 그럼 뭐냐, 세종대왕의 싱크탱크니까 세종대왕의 머리 역할을 한 세종의 동년배이면서 매우 탁월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세종의 오른팔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평가할 수 있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집현전 하면 그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어떤 산실 역할을 한 어떤 싱크탱크의 모임이었던 그런 곳인데 당시에는 최만리를 비롯한 지배계층에서는 왜 자신들이 쓰고 있는 한자 갖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또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고 하느냐, 이런 반대가 상당히 극심하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집현전 부작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시에 최고 높은 사람은 최만리였습니다. 최만리가 그때 60세가 넘는 고령이었는데요. 세종대왕께 이렇게 말씀을 해요. “여진족이 고유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야만인입니까, 아닙니까?” “야만인이다” “몽고가 고유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 “몽고가 야만인입니까, 아닙니까?” “그것 야만인이지” “토번, 티베트가 고유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 “야만인입니까, 아닙니까?” “야만인” 세종대왕께서 대답하시는 족족 야만인이다, 최만리가. 그래서 결국은 “그러면 우리 조선이 고유문자를 가지는 순간 야만인이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이렇게 최만리가 물어보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는 ‘최만리하고는 일을 같이 못하겠구나’ 해서 최만리를 결국은 낙향을 시키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해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내시는데요. 훈민정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실록에 별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 나와 있지 않냐 하면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반대,

□ 한상덕 / 진행
다 반대를 했죠.

□ 신세돈
네. 그러니까 이것을 내가 만든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언급하는 순간 벌떼 같이,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는 정말 믿을 만한 신복들만 가지고 작업을 하셨기 때문에 기록에 안 남아 있는데 제 추측컨대는 문종 이향하고 세조하고 그다음에 정인지하고 성삼문, 신숙주, 이런 그때의 신진사료들 중심으로 해서 비밀리에 작업을 한 것 같아요. 어쨌건 중요한 것은 세종대왕이 왜 훈민정음을 만드셨을까. 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이것 때문에 내가 훈민정음을 만든다, 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세종대왕께서 굉장히 애석하게 생각하신 것은 뭐냐 하면요. 법이 한자로 돼 있는데 법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무엇이 죄가 되는 줄 몰라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 그다음에 의학책이 전부 한문으로 돼 있는데 그 의학책에 대한 정보를 한문 때문에 얻지 못해서 억울하게 병들어죽는 사람들, 그다음에 예절책이라는 게 전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뭐가 예절이고 뭐가 야만인인지를 알지 못해서 억울하게 야만인이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세종대왕은 너무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일거에 구제하는 방법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 어려운 이 책들을 전부 한글로 만들어 주는 일밖에 없겠다고 생각을 하셔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바로 아까 말씀하신 대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이렇게 나오는 거거든요.

□ 한상덕 / 진행
어린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표현을 못한다는 거죠.

□ 신세돈
못한다. 그래서 저는 세종대왕이 애민정신이 가장 결정체화 된 것이 훈민정음이고 이것을 그렇게 많은 사대부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신하들 중심으로 비밀리에 작업을 했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나오고 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했는가를 보면 의도를 알 수 있어요. 법을 만들었고요. 법책을 한글로 번역했고요. 그다음에,

□ 한상덕 / 진행
삼강행실,

□ 신세돈
삼강행실도라고 하는 책을 한글로 번역했고요. 그다음에 의학책을 한글로 번역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분이 한글을 만들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을 보면 이분이 훈민정음을 만든 의도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저는 그래서 훈민정음 제작에 세종의 깊은 애민정신이 숨어 있었던 것이고 이 작업을 잘 이끌고 리드해 갔던 사람이 정인지다, 그래서 이분의 제일 큰 업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저는 그보다도 사실은 더 중요한 업적이라고 보는 것이 세종대왕이 역사를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세종대왕이 특히 자치통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책을 구입을 하셔 가지고 너무 감명을 받아 가지고 이게 분량이 너무 기니까 이것을 어떻게 좀 축약할 수 없겠는가, 해서 자치통감이라고 하는 책을 축약해서 만들기도 했고요. 그다음에 거기에 나오는 통치의 법칙, 통치의 그런 방법을 전부 요약을 해 가지고 치평요람이라는 책을 정인지한테 편찬시키거든요. 그래서 정인지의 역할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도 기여를 했지만 자치통감을 축약을 해서 책을 하나 만들었던 것과 함께 치평요람이라고 하는 아시아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치의 강독본이라고 할까, 이런 책을 만들어 냈다. 저는 그래서 사실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훈민정음과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의 업적이 치평요람을 제작은 것이고 이것도 물론 세종대왕께서 지시를 하셨지만,

□ 한상덕 / 진행
고려사회에 관한 것도 세종시대 때,

□ 신세돈
그렇죠. 고려사를 만드는 것도 정인지가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그 전에 변계량이라든지 맹사성이 하던 작업을, 설순이라든지 작업을 이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저는 독창적인 차원에서는 치평요람과 자치통감강목인가 하고 그다음에 훈민정음 제작을 한 것, 이것이 저는 정인지가 남겨놓은 가장 큰 훌륭한 업적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은 또 음악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대왕과 함께 음악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던 인물이라면 박연을 들 수 있죠?

□ 신세돈
박연이죠.

□ 한상덕 / 진행
박연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해 주시죠.

□ 신세돈
일단 박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 조정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우리가 조금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그런 정신을 일체화시킨 유교의 경전과 맞먹는 중요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악을 굉장히 중요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 악은 향악이라고 해서 그냥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그런 토속음악일 뿐이었거든요.

□ 한상덕 / 진행
네, 궁중에서 쓰이는 궁중악은 아니었죠?

□ 신세돈
그렇죠. 그게 궁중에 쓰이는 악이 전부 향악이었거든요. 세종대왕께서는 우리가 유교의 그런 해동성국을 만드는데 거기에 격에 맞는 음악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것을 아악이라고 하는데 아악을 만드는데 박연이라고 하는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저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 이 세 사람은 저는 K-Pop의 원조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아주 독특한 창조성을 가지고 우리 조선의 음악을 완전히 구축을 했다, 저는 그렇게 보는데 박연이 이렇게 음악을 잘했다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이 사람이 그냥 소리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박연은요. 태종11년에 진사시를 합격했고요. 태종18년에 대과를 합격한 엄청난, 이 사람은 말하자면 사료입니다. 문인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악기를 굉장히 잘 다뤘어요. 대금을 굉장히 잘 불렀고요. 이 사람이 또 음악에 되게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있는데다가 이렇게 진사시, 생원시, 대과까지 합격할 정도니까 잡기에도 능하고 이런 과거에도 능한 사람인데 이분이 집현전 교리로 들어오기도 했고 사간부 정언도 했고 사헌부 지평도 했고 세자의 스승도 했으니까 사실 박연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정인지의 손색이 없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평소에 음악에 되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세종대왕께서 그것을 아시고 박연을 통해서 우리가 말하는 아악, 즉, 궁중의 형식에 짜여 있는 아악의 아주 획기적인 틀을 세우는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이분의 업적을 보면 석경이라고,

□ 한상덕 / 진행
그러니까 궁중음악이라고 하면 그동안에는 향악이라고 해서 궁중 밖에서 민간에 쓰이던 음악을 아악이라고 해서 국가행사, 중요행사에 쓰일 수 있는 그런 음악을 집대성한 것이죠?

□ 신세돈
집대성하고 창작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서 그 아악을 제대로 공연할 수 있는 그런 악기제작부터 작곡부터 편곡부터 모든 것을 다 했다.

□ 한상덕 / 진행
그런데 역사책에 보면 악기를 박연이 만들어서 세종대왕 앞에서 시연을 하니까 “어느 음이 그것은 좀 낮다, 틀렸다” 그래서 악기를 살펴보니까 그 돌이 조금 잘못된 돌이었더라, 이런 것까지 역사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도 음악에 굉장한 조예가 있으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 신세돈
그렇죠.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까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세종이 느끼는 기분이 과학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과학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알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하늘이 돌아가는 일을 알아야 되겠다, 똑같은 논리로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고 이게 즐거워서가 아니고 이것이 말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유교경전이나 예나 모든 것들이 집대성돼 있는 것이 음악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서는 굉장히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소홀히 하시지 아니하셨고 이 재능을 박연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박연을 통해서 작곡 시키고 그다음에 악기를 만들도록 하시고 그다음에 편곡하시고 그다음에 시골에 있는 음악을 편곡을 해서 궁중악으로 이렇게 전환시키는 작업들을 하게 한 그런 분이기 때문에 세종대왕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그 당시에 상당히 최고봉이라고 봐야 되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당시 사대부들은 또 그 악기 하나 다루는 것은 기본이었던 것 같아요. 사극에서 보면 가야금이라든가 거문고, 대금, 이런 것들을 부는 장면 같은 것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 신세돈
그런데 그것은 극화돼 있는 거고 제가 말씀드리는 황희나 허조나 최윤덕이 악기를 불렀다는 기록은 적어도 실록에 없는 것을 보면 물론 불긴 불었겠지만 사료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박연은 구체적으로 우리 조선시대 음악발전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그 업적을 하나씩 짚어주시면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 신세돈
일단 이분이 악학별좌라고 하는 음악을 담당하는 부서의 종6품관이 되셔 가지고 궁중음악을 총괄해서 새로 곡을 만드시고 그다음에 기존의 곡들을 편곡을 하시고 그다음에 그 음악을 잘 공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예를 들면 악기, 석경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시고 그리고 시골에 있는 음악들을 또 다시 국민들이 편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편곡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아악이 됐든 향악이 됐든 조선초기의 음악에 대한 확실한 기본을 세종의 지시 하에서 만들어 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음악에 대한 소양이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체계를 잡도록 한 것이 박연이 한 일이다. 저는 그래서 정인지의 훈민정음 못지않게 그 당시에 악학에 대한 역할을 세종대왕께서 중점을 두시고 지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생각하면 훈민정음이나 아까 이야기한 대로 치평요람 같은 것에 더 방점이 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세종대왕은 음악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한 의식을 가지시고 박연에 대한 지지를 하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보면 박연의 아들이 김종서하고 연루가 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가지고 결국은 죽게 됐는데 이 박연이 워낙 세종의 아낌을 받았고 음악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박연은 자기 아들이 계유정난에, 말하자면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연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연은 면제가 되어서 낙향을 하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박연이 그 당시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에 대한 연구에 아주 전문이신 우리 신세돈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면 세종대왕께서는 병법에도 아주 탁월하시고 또 역사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과학기술 발전은 또 말할 것도 없고요. 또 음악에까지 이렇게 조예가 깊으셨다면 도대체 세종대왕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밑에서 일하는 신하들로서는 정말 참 피곤했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이야기하면 자신들보다 더 위에서 알고 지시를 하니까 상당히 일하기가 곤란했을 것 같은데요.

□ 신세돈
그러니까 맡겨뒀죠. 그러니까 본인이 아이디어를 내시고 신하들이 그것을 이끌어내시고 잘못 가면 잘못 가는 것을 고쳐주시고 했지, 본인이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을 끌고 간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레잇을 했기 때문에 자기 밑에 그 많은 명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리드할 수 있는 그런, 현대말로 하면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의 지휘자와 같이 모든 파트를 다 꿰뚫고 계셨던 그런 역량을 보이신 분이 세종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그분이 돋보이는 것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분이 굉장히 오래 사셨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재위를 31년 하셨어요. 그러니까 조선에 굉장히 길게 재위를 하신 분이기 때문에, 물론 건강 때문에 53세에 돌아가시긴 하셨지만 그래도 재위를 30년 이상 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한 20년만 더 사셨으면 저는 대한민국은 아마 지금쯤 만주가 우리 땅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분이 53세에 요절한 것이 저는 굉장히 안타깝고 아쉽고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53세면 아까 말씀하셨던 세종대왕 밑에서 정치를 했던 재상들에 비하면 황희정승 같은 분에 비하면 굉장히 요절하신 그런 편이었는데,

□ 신세돈
굉장히 요절한 거죠.

□ 한상덕 / 진행
죽음의 이유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 신세돈
병이 굉장히 많으셨어요. 병이 많으셨는데 기록을 보면 당뇨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다음에 몸이 많이 부으셨다고 하는 것을 보면,

□ 한상덕 / 진행
소갈증이라고 역사책에 나오던데요. 소갈증이 당뇨죠?

□ 신세돈
네, 당뇨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질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임질은 요즘 임질하고는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병이 많으셨고요. 그래서 온천을 굉장히 자주 다니셨고요.

□ 한상덕 / 진행
그때는 피부병이 많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네, 피부병 때문에 온천에 가기도 했고 그다음에 혈압 때문에 가신 것 같기도 하고 눈병도 있다고 했고요. 그래서 그 병명이 굉장히 다양한 것을 보면 저는 당뇨복합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53세에 떠나신 것은 굉장히 일찍 떠나신 것이 사실이고 너무 또 일을 많이 하시고 하니까 요절하시긴 하셨지만 저는 53세에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31년 이상 봉직을 하시면서 우리 후손들한테 이렇게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 주고 이렇게 훌륭한 인재들을 발굴해서 끊임없이 모함이 들어올 때마다 지켜주고 모함이 들어오면 불러서 “내가 너를 믿는데 너는 걱정할 게 뭐냐.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들을 김종서한테도 하셨고 이천한테도 하셨고 허조한테도, 이런 것을 보면 이분이 사람을 쓸 때 보면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고,

□ 한상덕 / 진행
무한신뢰.

□ 신세돈
네, 이런 부분들이 보통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부분들이 요즘에는 특별히 돋보인다, 이렇게 생각이 드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그러면 세종대왕께서는 다음에 아드님 문종으로,

□ 신세돈
계승이 되죠.

□ 한상덕 / 진행
왕위가 계승이 되는데 문종한테는 유언 같은 걸까요? 그런 것을 어떤 점을 강조하는 유언을 남기셨을까요?

□ 신세돈
일단 세종대왕이 돌아가셔서 문종이 계승을 받는 게 아니고요. 세종도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돌아가시기 한 6~7년 전부터 사실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일단 넘겨줍니다. 넘겨주고 모든 행정을 문종이 해라, 그렇게 하시면서 문종을 보살펴주라고 말하자면 부탁을 합니다.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김종서 그다음에 황보인 이런 분들이 세종대왕이 돌아가시는 머리맡에서 문종을 보필하게 되는데 이때 몰래 불러 가지고 문종을 부탁한 분이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이런 분입니다. 그러니까 사육신이 나중에,

□ 한상덕 / 진행
계유정난 때 사육신으로 꼽힌 인물들이죠?

□ 신세돈
사육신이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이분이 세종대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끝까지 문종을 보필해 주라는 어떤 특명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분들이 나중에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복위에 참여를 한 것이다, 저는 그렇게 봐서 세종대왕께서 돌아가실 때 이미 몇 년 전에 왕권은 문종한테 물려준 상황이지만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까 그것을 신하들한테 부탁을 했는데 그때 부탁을 받은 사람이 성삼문 그다음에 이런 신하들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듣고 보면 정치에 황희와 허조, 또 국방분야에 최윤덕과 김종서,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정초와 장영실 그리고 이천, 교육문화역사 분야에서는 정인지와 박연까지 이렇게 상당히 많은 재상들, 인재가 있었다는 점이 지금 시대는 참 부러운 그런 리더십이었고, 유능한 인재를 곳곳에 등용한 세종대왕의 혜안, 아까는 황희정승의 추천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또 그런 추천을 받고서 그대로 승낙하신 그런 혜안도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위한지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을 꼽고 있지 않습니까?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그 부분은 왜 그렇게 세종대왕을 꼽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시는지요.

□ 신세돈
일단 세종이 어떻게 정치를 하셨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몰라요. 우리가 세종대왕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너무 모른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세종대왕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정치를 어떤 마음가짐을 했는가를 우리가 조금 들여다보면 세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한마디로 세종대왕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정신은 이겁니다. 내가 정치를 잘 못하면 바로 하늘이 나한테 벌을 내린다, 이게 외천정신이에요. 하늘을 무서워하는 정신이죠. 따라서 조그마한 무슨 일이 생겨도 세종대왕은 항상 돌이켜 앉아서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가를 신하들한테 묻고 백성들한테 묻고 친척들한테 묻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물어서 정치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런 엄청난 업적을, 그래서 해동요순이라는 업적을 내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기까지 말이죠. 세종대왕께서는 신하들과 토론을 즐겨했고, 신하들을 믿고 힘을 실어줬습니다. 단점은 덮고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또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신하에게 일만 맡겨두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고 얼마나 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늘 점검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으랴 하였거니와, 지금도 역시 반드시 있을 것이로되, 다만 몰라서 그를 못 쓰는 것일 뿐이다” 그만큼 세종대왕께서는 훌륭한 인재를 뽑아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최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늘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성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의 이 말로 KBS <공감토론>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설특집 강연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해 주신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신세돈 교수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신세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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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세종 즉위 600주년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 입력 2018-02-19 19:52:03
    KBS공감토론
▒ 패널 (가나다순) ▒

신세돈 교수 : 숙명여자대학교



□ 한상덕 / 진행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KBS <공감토론>입니다. 이 시간 진행을 맡고 있는 백운기 앵커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게 돼 오늘은 제가 대신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KBS 한상덕 기자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십니까?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친지 분들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신지요. 올해는 워낙 한파가 기승을 부려서 날씨 이야기들도 많이 하셨을 것 같고요. 동계올림픽 개막식, 북한의 김영남, 김여정 등 손님과 남북 단일팀 이야기, 북한 응원단, 예술단 이야기 등으로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방선거를 앞둔 명절이다 보니까 정치 이야기도 참 많이 하셨을 텐데요. 오늘 KBS <공감토론>은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이라는 주제로 설특집 강연을 준비해 봤습니다. 올해는 세종대왕이 즉위하신 지 600주년이 되는 그런 해인데요.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펼친 세종대왕을 통해서 국가지도자가 어떻게 인재를 등용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 보고 생각을 나눠보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KBS <공감토론> 시작하겠습니다.

□ 한상덕 / 진행
오늘 KBS <공감토론>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서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이라는 주제로 설특집 강연으로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참 많이 들어본 말씀이실 것입니다. 그만큼 국가지도자에게는 어떤 인재를 어떻게 등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그런 의미일 텐데요.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맞아서 <외천본민 : 세종대왕의 바른정치> 저자이신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님과 함께 세종의 태평성대를 함께 한 숨은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추석에 이어서 이번 설에도 특강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죠. 신세돈 교수님, 스튜디오에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세요

□ 신세돈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한상덕 / 진행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천본민 글자 뜻을 보면 하늘을 두려워하고 그리고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 이런 뜻을 담은 제목인 것 같은데요. 신세돈 교수님 약력부터 먼저 소개를 해 드리면요. 신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중퇴하시고 미국 UCLA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하셨습니다. 이후 한국은행과 삼성경제연구소를 거쳐서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30년째 재직 중이신데요. 국가미래연구원 이사를 지내셨고, 금융감독원 자문교수단 금융소비자보호 분과위원장과 국민검사청구심의위원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사회에서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신 교수님, 먼저 처음 드는 느낌은 세종대왕의 연구에 대해서 천착하게 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 신세돈
그동안 우리는 경제가 제일 중요하다, 잘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1인당 3만 불까지 와 보니까 경제만 잘하고 반도체나 자동차만 잘 만들어 가지고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더라, 진짜 정치를 선진국스럽게 해야만 나라가 정말 제대로 된 나라가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몇 년 전에 하고 경제학자로서 경제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게 정치구나,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 조선에 가장 훌륭한 정치를 하신 분이 누군가를 살펴보는 와중에 세종대왕이 30년 남짓 통치를 하시면서 정치는 이렇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조금 아시면, 특히 정치인들이 아시면 우리 정치가 한 두 단계, 세 단계 업그레이드되는데 저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경제학자로서 제가 지금 외람되게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정치다운 정치가 펼쳐졌던 태평성대가 세종대왕 시대였기에 거기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를 하셨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 오늘 특강 주제가 <세종시대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이런 제목인데 올해는 특히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세종대왕께서 즉위하신지 600주년이 되는 그런 해라고 하더라고요.

□ 신세돈
그렇죠. 무술년이, 네, 딱 600주년.

□ 한상덕 / 진행
네, 오늘 강연주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해 주실 겁니까?

□ 신세돈
일단 아무리 세종대왕이 훌륭하시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훌륭한 인재가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정치가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도 그랬고 그 후에 나오는 모든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통령 혼자서 탁월하셔서 되는 게 아니고 그 주변에 정말 훌륭한 전문가들이 많이 뒷받침을 해 줘야 된다는 것을 세종대왕의 그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아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가 잘되려고 하면 대통령이나 어떤 특정한 인물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정치가 되는 것이다. 그 사례를 우리가 세종에게서 한번 찾아보자, 그런 취지로 이런 시간을 마련한 셈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께서 아무리 학문을 좋아하고 공부를 많이 한 그런 훌륭한 임금이라고 해도 천년에 다시 없는 그런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시지만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잘하고 다 할 수는 없는 그런 사정이었을 텐데 각계 전문가들을 이용해서 찬란한 그런 문화를 꽃 피우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세종 태평성대였는데. 그렇게 훌륭한 인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그런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정치경제 분야에서 세종대왕의 그런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그런 분들은 어떤 분들이었다고 꼽으시겠습니까?

□ 신세돈
네, 일단 정치, 경제, 이 두 분야에 있어서는 우리가 황희정승과 허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황희는 우리가 많이 아는 편인데요. 허조라고 하는 분은 조금 이따 우리가 상세하게 들여다보겠지만 세종대왕 치하에서 이조판서를 10년 이상 하셨고요. 나중에는 정승까지 올라가긴 합니다마는, 황희정승이 세종대왕의 영의정이라고 하면 허조대감은 세종대왕의 영원한 이조판서다. 그래서 이 두 분이 정치와 경제를 거의 주도해 나갔다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정치와 경제의 쌍두마차다, 이렇게 볼 수 있겠군요?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황희정승과 허조정승이요. 많은 분들이 황희정승에 대해서는 다 어린 시절 위인전을 통해서 접한 사람들도 있고 많이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재상으로 허조라는 분에 대해서는 좀 부각이 덜 됐던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도 들고요. 어쨌든 황희정승은 24년간이나 정승자리에 있었고 19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했던 그런 인물인데 황희정승에 대해서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자세히 평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 신세돈
일단 굉장히 오래 사셨습니다. 90세까지 사셨고요.

□ 한상덕 / 진행
조선시대에 90세라고 그러면 지금으로 치면 한 100살도 넘게 산 걸로 봐야겠죠?

□ 신세돈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죠? 조선시대는 사람들이 굉장히 단명했다고 생각하는데 세종대왕의, 지금 오늘 소개하는 분들은 거의 70세, 80세, 90세까지 사셨어요. 그러니까 그때도 상당히 장수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다만, 평균수명이 짧았던 이유는 태어나서 얼마 만에 죽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수명이 조금 짧게 나타나는 것이지 그때도 보면 80세, 90세, 100세를 넘은 분들도 그때 많이 있기 때문에 황희정승의 90세는 조금 드물기는 하지만 90세까지 사셨고요. 그 기록에 보면 어릴 적부터 영특함이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 이분이 결국은 과거시험은 고려 때 했지만 고려가 망하면서 조금 은둔생활을 하다가 태조가 등용을 시켜서 태조 때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하는데 황희는 첫째 오래 사셨고 둘째 특징이 뭐냐 하면 매우 직언을 잘했습니다. 이분은 직언이라고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직언을 많이 한 분이고요. 그다음에 판단력이 매우 뛰어난 분이고, 마지막으로 이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관용입니다. 굉장히 너그러웠고요. 그래서 나중에 사가들은 형벌을 너무 가볍게 해서 조금 흠이 가는 것 아닌가, 라는 이런 비평을 하기도 하는데 황희가 얼마나 강직한 사람인가 라고 하는 것을 잘 나타내주는 사례가요. 이성계 있지 않습니까? 이성계 할머니가 계세요. 이성계 할머니의 묘를 순능이라고 했습니다. 이 순능이 어디 있느냐 하면 지금 함경북도하고 소련하고 중국하고 경계지역, 거기가 이성계의 본거지인데 거기에 할머니 묘가 있었는데 이성계가 이제 왕이 되니까 이 묘를 조금 남쪽으로 옮겨서 매우 호화롭게 능묘를 건설하는데 그 능묘 이름이 순능입니다. 그런데 황희가 이때 보니까 이 순능이 너무 호화롭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나라가 고려에서 이조로 넘어오는 이 초기에 임금도 아니고 임금의 할머니의 묘를 이렇게 호화롭게 해 가지고는 기강이 서겠는가, 이렇게 비판을 했다가 태조한테 쫓겨나는 그런 일도 있었고요. 또 한 번은 태조가, 선공감이라는 게 뭐냐 하면 궁궐 내에 있는 많은 공사 일을 하는 부서인데 이 선공감에 정난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모친상을 당해 가지고 상중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태조가 보니까 지금 궁궐 안에 너무 할 일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태조가 명을 해요. “정난 너는 한 일주일만 상을 하고 빨리 근무처로 돌아오라” 이렇게 명을 내렸거든요. 그런데 이 황희가 꼭지를 다는 겁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 궁궐을 수리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 그리고 다른 사람 많다. 정난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위공무원인데 이 사람이 어머니 모친상을 당했으면 3년을 다 치르고 기복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렇게 대들었다가 또 좌천하고,

□ 한상덕 / 진행
그렇게 왕에게 직언을 자꾸 하다 보면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좀 눈 밖에 나서 귀향을 자주 갔겠군요?

□ 신세돈
네, 귀향을 많이 갔는데요. 태조는 이성계는 이 사람을 굉장히 많이 찍었는데요. 그 옆에서 유심히 황희를 들여다보는 사람이 누구냐, 이방원이었어요. 저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해서 나중에 이방원이 왕이 되고 나서 황희를 아주 본격적으로 등용을 해서 중용을 하면서 세종한테 “황희는 정말 쓸 만한 사람이니 이 사람을 믿고 등용을 해라” 이렇게 넘겨주게 되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에게 양해를 하면서 황희를 좀 중히 써라, 이렇게 유언을 했군요?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래서 황희는 세종대에 어떤 어떤 관직을 하게 됩니까?

□ 신세돈
그래서 이성계 때는 계속 쫓겨 다녔고요. 태종 때도 중요한 직책에 있었지만 주로 세자를 가르치는 직, 이런 쪽에 있었는데 세종대왕이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시킨 게 예조판서고요. 예조판서 바로 다음에는 강원도 관찰사, 왜냐하면 강원도 그때 흉년이 져 가지고 강원도 사람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재부사, 이게 군사직인데요. 대사헌, 우찬성, 이조판서를 거쳐서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신지 8년 만인 1426년도에 우의정이 되어서 세종대왕 돌아가시는 그해까지 24년 여 가까이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정승 자리에 있었던 셈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24년 간 정승자리를 하고 그다음에 19년 동안 영의정 자리를 했다, 이렇게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오랜 동안 영의정을 했다면 그 당시에 세종대왕 시대에 어떤 어떤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까?

□ 신세돈
거기에 이제, 오늘 소개할 다른 분들은 다 아주 분명히 드러나는 업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윤덕 같은 경우에는 4군을 만들었다든지 김종서 같으면 6진을 만들고 그랬는데 황희정승은 뚜렷한 어떤 업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세종대왕의 31년의 치세 동안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임금과 반대 의견을 가진 신하들의 아주 탁월한 중재역할을 해서 임금하고 신하들이 의견대립을 해서 이 사안이 진전이 되지 않을 때마다 그 틀어진 것을 메꾸어서 중재역할을 훌륭하게 해낸 그야말로 세종대왕의 정신적인 멘토라고 할 수 있고요. 그다음에 이분이 정승으로 계시면서 끊임없이 훌륭한 인재들을 조정으로 등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아까 허조라고 하는 이조판서도 황희정승이 등용을 시켰고요. 최윤덕이라고 하는 명장도 황희정승이 이 인재를 알아봤고요. 우리가 조금 이따 소개할 장영실도 황희정승이 했고요. 정초도 황희정승, 그러니까 황희정승이 사람들을 정확하게 보고 추천하는 그런 역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황희정승이 무슨 뚜렷한 손에 잡히는 그런 업적은 내지 못했을지 몰라도 세종 31년 6개월 치세 동안 굉장히 중요한 안건 뒤에는 항상 황희가 결정적으로 신하들의 다른 의견들을 조정하고 설득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는 점에서 저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정신적인 멘토였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아마 황희가 없었으면 그 어떤 격렬한 신하들의 반대를 이렇게 조정해 나가는 데 연령 면에서나 경륜 면에서 상당히 부족했을 텐데 그것을 황희정승이 참 잘 메꿔줬다는 차원에서 첫 번째로 세종대왕의 치적에 중요한 결정적인 어떤 보조자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가 평가할 수 있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조정의 화합과 또 인재를 정확히 뽑아서 임금에게 세종대왕에게 천거를 했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그런데 황희정승에 대해서는 야사에서는 굉장히 성격이 온화하고 아주 청렴하고 강직한 분이다, 이렇게 돼 있지만 또 실제 실록에 보면 그렇지 않은 면도 적혀 있다고 들었어요.

□ 신세돈
네, 실록에는 황희정승의 말하자면 흠결이라고 할 만한 사건들이 한 7~8가지가 나오는데요.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사위 서달이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을 했었을 때 그것을 무마하려고 맹사성을 동원했다가 결국은 파직이 되는 사건이 있었고요. 또 태석균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인사청탁을 받았거나,

□ 한상덕 / 진행
사위 서달이 어디 지방행차를 하는데 제대로 예를 표하지 않았다고 버릇이 없다고 데려다가 때려서 죽인 거죠?

□ 신세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서천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도 안 하고 지나가길래 “내가 도대체 누구의 아들인데 건방지게 인사도 하지 않는가” 이래서 결국은 때려 죽였는데 때려 맞아 죽은 사람이 엉뚱한 다른 동네의 공무원이었어요. 그래서 그 건 때문에 관련자들이 전부 문책을 당하는 게 유명한 서달 폭행 치사사건이고, 그다음에 남원부사가 뇌물을 줘 가지고 뇌물을 받은 뇌물수수 사건이 기록이 돼 있고, 박용이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또 말을 받아서 뇌물을 받은 사건이 있고 또 뇌물을 하도 많이 받아서 대사헌이라고 그러면 검찰총장인데 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황희하고 김익정이라고 하는 두 대사헌이 하도 뇌물을 많이 받아서 황희의 ‘황’씨하고 김익정의 ‘김’씨를 따 가지고 황금대사헌이라고 비아냥댈 정도로 그 당시에 뇌물에 연루가 많이 되었는데요. 더 중요한 것은 이럴 때마다 황희는 임금한테 사직서를 냈습니다. 사직서를 내가 “내가 이 사실이 맞든 안 맞든 간에 나는 그런 스캔들 가지고 직을 수행할 수 없다” 이렇게 사직서를 냈는데 임금께서 파직을 하시고 며칠 만에 다시 복직을 시킨다든지 해서 항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임금님은 관용을 베푸셨어요. 그래서 기록으로 보면 황희정승이 이렇게 뇌물이라든지 청탁으로 연루되었던 사건들이 꽤 많이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간통사건까지 실록에는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하여간 저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황희정승에 대한 이미지와는 일면들이 실록에는 기록이 돼 있는 게 좀 놀랍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흠결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께서 황희를 그토록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이유랄까? 또 그래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은 또 어떤 게 있었을까요?

□ 신세돈
그게 세종대왕의 용병술이죠. 그러니까 사람의 흠결이나 결점을 보고 판단을 하면 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판단이세요. 따라서 누구든지 그 사람의 흠결이 있으면 그 흠결에 따른 처벌을 받으면 되는 것이고 세종대왕의 사람 씀씀이를 보면 항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보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종대왕이 황희를 보기에는 경륜이 있고 덕망이 있고 지식도 있고 또 신하들을 잘 아우를 수 있는 중재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종대왕으로서는 황희가 없으면 자기보다도 나이가 많은 중신들을 통제하기가 힘들다, 그런 관점에서 형벌을 주더라도 짧게 주고 그로서 충분히 죄의 대가를 받게 하고 대신 빨리 등용을 시켜서 황희를 세종대왕이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곁에 두시고서 중요한 자문을 얻어냈다, 이런 것들이 황희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다른 신하들에게도, 김종서라든지 최윤덕이나 이천이나 모든 사람에게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항상 그 장점만 취하셔서 활용을 하셨다, 이게 세종대왕의 용병술의 가장 중요한 장점이고 특징인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군요. 처음에 신 교수님께서 모두에 세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끈 쌍두마차로서 황희정승하고 허조정승을 말씀해 주셨는데 황희정승에 비하면 허조정승은 좀 알려져 있는, 부각되지 않은 그런 인물이지 않나 싶은데, 허조라는 분은 어떤 인물이셨습니까?

□ 신세돈
허조도 출생은 고려시대 때 과거시험을 쳤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정권이 바뀌면서 숨어 있다가 결국은 등용됐다는 점에서, 고려의 인물인데요. 사실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허조는 제가 보기에는 황희정승보다도 훨씬 더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고 그다음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굉장히 뛰어난 행정가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분은 한마디로 굉장히 청빈한 사람이고 평생 어머니가 지어준 옷 두 벌 가지고 평생을 살 정도로 청빈했고요. 이분이 얼마나 청빈했느냐 하면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자기 동생의 부인이, 동생이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그 아들을 양자로 삼겠다고 하면서 양자가 되면 자기가 있는 재산을 다 주겠다고 하니까 딱 허조가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 아들이 그런 재물을 받으면 사람이 잘못될 수가 있으니 재물을 주신다고 하면 내 아들을 양자로 들일 수 없소”라고 거절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분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고요. 그다음에 이분 스승이 염정수라고 하는 고려시대 때 권신인데 이성계 파에 의해서 이게 목이 날라 가요. 그 목이 날라 갔을 때 그 밑에 있던 학생들이 다 도망갔는데 허조는 그 목이 날라 간 스승 염정수의 시체를 끝까지 장례를 시켜줄 정도로 이분 아주 강단이 매우 강한 그런 충신이었고 이분도 태조 이후에 조정에 들어와 가지고 여러 가지로 강단 있는 정책을 하다가 많이 쫓겨나고 했는데요. 대표적인 게 뭐냐 하면 응방사건입니다. 이 응방사건이 뭐냐 하면 이방원이 매를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매를 좋아하다 보니까 매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응방인이라고 하는데 이 응방인들이라는 게 태종 이방원의 위세를 믿고 굉장히 건방지게 많이 굴었어요. 그래서 허조가 그때 검찰청이, 말하자면 검사였는데 응방인들을 싹 다 가두어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이방원이 화가 나 가지고 “왜 가두었는가” 그랬더니 매와 같은 이런 오락을 가지고 이렇게 나라 기강을 흔들면 되겠냐고, 그래서 허조가 끝까지 밀어붙여서 응방인들을 규제를 했던 그런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결국은 좌천이 되었지만 황희가 옆에서 보고 허조는 자기도 강단 있게 말하다가 좌천이 많이 됐지만 허조는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서 황희가 이분을 찍어서 계속해서 자기 밑에, 그래서 황희정승이 승진하는 그 뒷길을 그대로 허조가 밟아갈 정도로 허조는 어떤 의미에서는 황희의 그림자였고 현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청빈하고 의지가 강하고 강단 있는 그런 대표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이렇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 시대에 이조판서로서 10년간 1422년부터 1432년까지 역임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조판서면 지금의 내무장관인가요?

□ 신세돈
내무장관 겸 기재부장관 겸, 하여튼 이조의 역할이 굉장히 크니까요. 지금의 내무행정부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한 업무영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앞서 태종시대 때 응방인 구속사건과 관련된 일화를 말씀해 주셨는데 태종 때는 그렇고 세종대왕 시대 때는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

□ 신세돈
아마 이분만큼 많은 업종을 남긴 분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 당시에 가장 쟁점이 되었던 법이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거예요. 이게 부민고소금지법이라는 게 뭐냐 하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고발할 수 없다는 법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법인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법 취지가 뭐냐 하면 밑에 있는 사람이 자꾸 위에 사람을 모함을 하는 거예요.

□ 한상덕 / 진행
무고를 한다는 거죠?

□ 신세돈
무고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봉건체제 하에서는 상하 위상이 굉장히 분명한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집적거리면서 거짓무고를 하고 하니까 기강이 흔들린다고 생각을 해서 허조는 강력하게 부민고소금지법을 주장을 하고 세종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이 제도를 1420년, 세종 즉위 2년에 이것을 제도로 정착을 시킵니다. 그래서 이게 이분의 가장 중요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게 문제가 뭐냐 하면 그렇게 되니까 밑에 있는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해도 상사를 고발할 길이 없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에 젊은 사대부들이 이런 제도가 있기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공무원들이 부정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부패가 심해진다, 이런 논란이 일어나서 세종대왕 임기 내내 이 부민고소금지법을 철폐해야 된다, 또는 고쳐야 된다, 하는 논의가 계속됩니다. 그 논란의 한 가운데에 허조는 부민고소금지법을 지키려고 했고요. 그다음에 나오는 여러 가지 수정을 통해서 부민고소금지법들이 약간씩 수정이 되는데 그 수정의 핵심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상사를 고발할 수 있다, 그렇게 단서조항이 들어가면서 부민고소금지법은 이렇게 보완이 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 두 번째로 허조가,

□ 한상덕 / 진행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 수령이라든가,

□ 신세돈
제3자.

□ 한상덕 / 진행
네, 수령이 어느 고을에서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당한 것이 아니면 그때는 고소를 못했었는데 내가 당하면 고소를 할 수가 있다, 이런 말씀이시죠?

□ 신세돈
그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그래도 부패가 그쳐지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이 그때 생각한 제도가 뭐냐 하면 그러면 비서실에서 특별감찰관을 보내자, 그래서 특별감찰관이 지방에 내려가서 못된 짓을 하는 수령이 있으면 그놈들을 이렇게 고발하도록 하자, 그래서 일종에 말하자면 암행어사 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제도를 보완시키기는 하는데 어쨌든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대왕 당시에 가장 논란이 많았던 법이었고 그 중심에 허조가 있었다, 그게 허조의 공헌이고요.
또 하나 쟁점이 됐던 법인데요. 이게 뭐냐 하면 수령육기법이에요. 수령육기법은 뭐냐 하면요. 관리들은 서울에 3년, 지방에 6년, 이렇게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 수령육기법인데 이전에는 어떤 제도가 있었냐 하면 수령삼기법이었어요. 서울에서 1년 반 근무하고 지방에 3년 근무하고 또 서울에 1년 반 들어오고 지방에, 이렇게 되니까 세종대왕께서 너무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이게 행정이 안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것을 좀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허조하고 황희가 이 육기법을 적극 지지를 하거든요. 그래서 허조하고 황희의 지지를 통해서 조선조에 수령육기법이 정착하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요.

□ 한상덕 / 진행
3년을 지방근무를 6년으로 늘린 건가요?

□ 신세돈
네, 그러니까 지방근무 3년 하던 것을 6년으로 늘렸죠. 그때 반발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요. 교육이었어요.

□ 한상덕 / 진행
한양에서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 신세돈
네, 서울에서, 강남에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지방으로 내려가야 되니까 반발이 굉장히 심했었는데,

□ 한상덕 / 진행
세종대왕 입장에서 보면 지방에 가서 잘하는 사람을 굳이 잘하는 곳에 둬야지 왜 자주 불러들이느냐,

□ 신세돈
그렇죠. 그리고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개념도 있고요.

□ 한상덕 / 진행
네. 어떻게 보면 부민고소금지법, 수령을 마을 백성들이 고소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 이것은 세종대왕의 사회적 약자, 장애인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노비, 천민에 대한 그런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애민정신에서 보면 조금은 어긋나는 그런 정책이 아닌가 싶은데,

□ 신세돈
고민 많이 하셨어요. 세종대왕께서 이것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고민을 많이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아까 그것 말씀하신 대로 애민정신에서 핍박 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의 억울한 부분을 고칠 수 있는가를, 어떻게 하면 제도를 보완할 수 있는가를 세종대왕께서 고민을 많이 하신 결과 자기의 억울한 부분을 들어주도록 수정을 아까 했다고 했고, 또 비서실에서 찰방이라고 하는 찰방이라고 하는 암행어사를 보내서 지방에 있는 어떤 그런 비리를 고발하도록 하는 이런 제도들을 많이 수정 보완하셨기 때문에 그 부분은 세종대왕께서 진짜 고민을 많이 하신 부분이긴 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허조정승이 그런 실책에도 불구하고 종묘가 신주에 모셔진 신하, 배향공신까지 그 지위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 신세돈
일단 이분이 굉장히 청빈했고요. 그다음에 이분의 소신이 매우 뚜렷했고요. 그리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세종대왕에게 “북쪽의 여진족이 쳐들어올 염려가 많으니 항상 북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셔야만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도 이렇게 세종대왕에게 건의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보다는 조금 빨리 돌아가시긴 하지만 세종의 배향공신이 형님 둘하고 그다음에 스승 이수하고 3명을 빼면 4명인데 배향공신이 7명인데 7명 중에서 3명을 빼면 4명이 황희, 그다음에 이 허조가 문신이고 그다음에 신개, 최윤덕이 무신인데 황희와 허조가 세종대왕의 배향공신으로 뽑힐 만큼 세종대왕으로서는 탁월한 세종대왕의 업적에 기여를 한 분이다, 이렇게 당시에 이미 평가가 내려졌다는 이야기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의 배향공신에 형님 두 분이라고 말씀하시면 양녕, 효령대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신세돈
네, 그렇습니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배향공신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습니까? 네. 그러면 여기서 노래 한 곡 듣고 계속해서 신세돈 교수님과 설특집 강연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지난 2008년에 KBS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의 OST에 수록된 포지션의 ‘태양을 위해’ 듣고 오겠습니다.

(♪ 포지션 ‘태양을 위해’)

□ 한상덕 / 진행
지금 여러분께서는 KBS <공감토론>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포지션의 ‘태양을 위해’라는 노래를 듣고 오셨습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북한 핵, 미사일 도발 같은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물론 지금은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대화 국면을 이어가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요. 문재인 대통령도 강한 안보와 책임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세종대왕 당시의 국방 환경은 어땠을까요?

□ 신세돈
그 당시는 참으로 정말 어두웠어요. 지금 압록강, 두만강 그쪽에서는 여진족, 여진족도 한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있는데요. 그 여진족들이 끊임없이 남침을 했고요. 밑으로는 또 대마도 이쪽에서 일본 왜구들이 끊임없이 침범을 했습니다. 기록을 보면 1415년 제주, 1417년 울릉도 독도, 1418년 제주, 1419년 해주, 그러니까 우리 조선의 동쪽, 서쪽, 남쪽 할 것 없이 끊임없이 왜구가 쳐들어왔는가 하면 북쪽에서는 끊임없이 여진족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에 세종대왕은 임금이 되시고 했을 그 무렵, 1418년도 전후에는 안팎으로 국방상황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어요.

□ 한상덕 / 진행
네. 남으로 왜구의 침범이 잦았다면, 이게 조선시대 초기뿐만 아니라 고려 말부터 계속된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에 대한 조선시대 초기의 대책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 신세돈
일단 세종대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구들이 끊임없이 침범하는 그 기록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는 고려뿐만이 아니고 이시조선에서도 “이것은 모기 같은 거다. 그러니까 박멸할 수가 없으니 그냥 따끔따끔 물리고 마는 것이다” 이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물론 아버지 태종이 강력하게 해서 그러긴 하지만 세종대왕이 즉위하시는 그 해에 세종1년에 태종 이방원이 “안 되겠다. 이것 발본색원해야 되겠다” 해서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 한상덕 / 진행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서 대마도 정벌을 직접 지휘를 한 거죠?

□ 신세돈
직접 지휘를 하신 겁니다. 그때 임금은 세종이었지만 사실상 군사권은 태종이 가지고 계셨고, 그래서 1418년 5월 달에 삼군도체찰사, 이게 총사령관인데 이종무 그리고 유정현, 최윤덕, 이런 분들이 구성이 돼 가지고 지금 동호대교 북단, 그 이름이 두모포인데 그 두모포에서 성대한 송별연을 하면서 조선의 수군들이 한강을 건너서 서해안을 따라서 대마도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마도 정벌은 두 차례 하게 되는데 사실 두 번째 정벌은 하다가 대마도가 “잘못했다” 꿇어서 빌고 “다시는 그렇게 쳐들어오지 않겠다” 그걸 해서 2차 출병은 계획만 하다가 결국은 말았지만 세종18년도에 우리가 동원한 배가요. 기록에 따르면 227척, 엄청난 대군입니다. 227척의 배하고 17,285명의 해군이 6월 17일 한산도 추봉리를 출병해서 성과가 뭐였냐 하면 적선을 129척 탈취를 하고 적 114명을 살해를 하고 131명 우리가 포로를 했는데 그 사이에 아군은 180명이 전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1차 대마도 정벌 이후에 승전도 승전이지만 대마도에서는 조선에 대해서 다시는 이렇게 왜구 출몰을 하지 않겠다, 반성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 그렇게 반성을 해서 결국 2차 정벌은 추진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왜구 출몰이 상당히 줄고 대신 대마도하고 조선정부하고의 공식적인 통교를 틀게 되죠.

□ 한상덕 / 진행
네. 조선의 해안가를 끊임없이 계속 왜구들이 출몰하면서 백성들한테 많은 그런 피해를 입혔는데 완전히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한 것은 이들로서도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겠어요?

□ 신세돈
그러니까 227척이니까 깜짝 놀란 거죠. 그렇죠? 그래서 대마도에서는 종정성이라고 하는 대마도주가 조선 우습게보면 안 되겠구나, 해서 그 후로는 왜구의 출몰숫자가 상당히 많이 줄어듭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아버지 태종의 이런 대마도 정벌을 지켜본 세종대왕의 생각, 북쪽의 여진 침입에 대해서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나도 뭔가를 좀 해 봐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가졌을 것 같아요.

□ 신세돈
나이가 이때 스물 셋, 넷밖에 안 되니까 아직도 군사적인 식견은 없었지만 사실상 조선의 그런 국경을 위협하는 차원에서 보면 대마도 쪽보다도 오히려 북쪽이 훨씬 더 심각한 게 두 가지가 있는 게요. 하나는 북쪽의 여진족이 아까도 제가 크게 세 종족이 있다고 했어요. 조금 생소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압록강 주변에 있었던 여진족을 올량합이라고 합니다.

□ 한상덕 / 진행
올량합.

□ 신세돈
올량합 또는 오랑합이라고 하기도 하고 두만강 쪽에 있었던 여진족이 알타리 또는 오도리라고 하는 여진족이 있었고요. 그 위에 흑룡강 지역에 살고 있는 올적합, 이 세 부족이 서로 비슷비슷한 종족이긴 하나 조금 달랐어요. 얘네들이 서로 갈등을 하면서 서로 이렇게 다투니까 세종으로서는 굉장히 다루기가 쉬웠어요. 그런데 세종이 임금이 되실 즈음부터는 이놈들이 단합을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단합하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뭐냐 하면 올량합의 추장이 자기 딸을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세 번째 부인으로 바칩니다. 그러니까 명나라 이쪽에서는 이것 장인의 나라다, 이렇게 되니까 법적 지위가 여진족이 굉장히 커지면서 조선을 아주 우습게보기 시작하죠. 그래서 1410년도 저간부터는 여진족들이 단합을 해서 연합을 해서 압록강, 두만강 쪽을 아주 끊임없이 쳐들어오기 시작을 하는데 그 당시에 신하들이라는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했어요. 대부분 전쟁을 할 줄도 모르고 전쟁을 싫어하기도 하니까 이렇게 계속해서 쳐들어 내려올 때마다 신하들은 “전쟁은 안 된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설득해야 된다” 계속 화친책을 14년, 15년 동안 강조를 했어요. 화친책을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허조, 이런 분들이에요. 세종대왕이 한두 해도 아니고 1년, 2년, 3년, 4년, 14년, 15년차에 ‘더 이상 너희 말을 못 믿겠다. 손 좀 봐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 가지고 세종15년도에 결국은 대대적으로 여진족을 토벌하시게 되는데 그 토벌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유일한 신하가 최윤덕입니다. 그래서 최윤덕하고 손 딱 잡고,

□ 한상덕 / 진행
최윤덕은 또 황희정승이 천거를 한 거군요.

□ 신세돈
황희정승이 천거를 했지만 최윤덕 이 양반은 김종서의 표현에 의하면 글도 못 읽고 말도 어눌하고 똑같은 말 계속해서 반복하고 그야말로 관료로서는 형편없는 사람인데 군인으로서는 아주 기가 막힌 능력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최윤덕을 이렇게 속으로 생각을 하시고 세종15년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1차 파저강전투라고 해서 여진족을 토벌하게 되십니다. 그래서 요약을 하면 남쪽에서 대마도가 끊임없이 왜구의 소굴이 된 것을 소탕을 하시고 한 15년 동안 북쪽의 여진족 침입을 고민 고민하셨는데 신하들이 계속해서 반대, 반대, 반대만 하니까 세종대왕께서 내가 이렇게 미루다가는 이것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세종15년 1433년에 세종 혼자서 최윤덕 장군하고 북벌을 아주 감행을 하시게 되고요. 이 1433년부터 10여 년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변의 4진, 그다음에 두만강변의 6군, 6진,

□ 한상덕 / 진행
4군 6진이죠.

□ 신세돈
4군 6진이요. 그래서 1433년부터 1440년에 걸쳐서 한 7년 동안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을 확고히 조선의 영토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하신 분이 세종대왕이세요.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께서는 조정에서는 계속 그렇게 화친을 하자,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전쟁으로 가시게 된 마음을 강경책으로 굳히게 된 기계가 무엇인지, 또 그 당시에 우리 조선이 그들을 무찌를 수 있는 강력한 국방력은 보유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 부분도 한번 짚어주시죠.

□ 신세돈
그렇죠. 처음에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올적합, 그다음에 알타리, 올량합, 이 세 다른 여진족들이 따로 따로 노는 줄 알았거든요. 그리고 서로 서로 이야기하기를 우리는 다른 여진족들하고는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조선의 힘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조선의 지원을 받았던 사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놈들이 연합을 해서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이놈들이 연합을 하면 조선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 더 커지기 전에 이놈들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요. 놀라운 사실은 그 올량합의 부하 중에서 나중에 청나라 누르하치가 나옵니다. 누르하치의 조상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세종대왕께서 그때 여진족을 정리를 하시지 아니하셨으면 오히려 명나라가 훨씬 더 빨리 망했고요. 청나라가 훨씬 더 빨리 득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께서도 군사적으로 아주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으셨군요.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이 벌인 그 북벌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 신세돈
그 당시에 1차 파저강전투는 그 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얼마나 꼼꼼한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한 부분까지, 군사 몇 명 가야 되냐, 신하들이 3천 명이라고 해요. 3천 명 갖고 안 된다, 5천, 7천, 만, 결국에 15,000명 보내고요.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부터 어느 경로로 가며 어디에 다리를 놓으며 언제 출병하며 몇 갈래 길로 나누어 가며 모든 것을 세종대왕이 전략을 세우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고요. 그 결과는 어땠냐 하면 적을 248명 생포를 하고 183명을 사살하고 아군전사는 4명, 부상 5명이니까 아군전사에 비하면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요. 아니, 240명, 180명,

□ 한상덕 / 진행
아니, 이백 사십 몇 명이 죽었는데 아군전사는 4명밖에 안 됐으면 이것은 정말 세계 전사에 기록될 만한 그런 전쟁 아닙니까?

□ 신세돈
그렇습니다. 그리고 진군하는 것을 보면 7개의 길로 나누어서 강계에서 출발을 하는데 첫날 어디에 가고 그다음 날 어디에 가고 어디어디에 가서 4월 19일 날 어디에서 만나서 습격을 한다, 이 계획까지를 세종대왕이 다 기록을 하셔서 지시를 내렸어요. 그런 것을 보면 세종대왕 이분이 정말 병법이나 군사동원, 이 능력에 있어서도 장수 못지않게 저는 능력이 있었다, 이런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이 이렇게 큰 전공을 받아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 신세돈
진짜 놀라운 게요. 뭐라고 기록이, 4월 19일 날 이제 이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현장에서 승전보고가 조정에 올라온 게 5월 3일인데 5월 3일 날 세종대왕께서 하신 말씀이 딱 이겁니다. “내가 오늘 전쟁에 이겨서 굉장히 기쁘긴 한데 이 공적을 유지해서 영원히 후환이 없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내가 이게 고민이다” 할 정도로 일단 전쟁을 이기고 나시면 어떻게 하면 후환을 없애는가, 이 부분을 걱정을 하셨어요. 이 부분이 세종대왕의 정말 뛰어난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쟁의 성과에 전혀 도취하시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전공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게 뭐였느냐 하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6진을 구축하시고 그다음에 4군을 구축하시고 압록강변에 성곽을 만드시고 그리고 군사교육을 강화하고 장수를 기르고 조금 이따 나옵니다마는, 끊임없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배의 수명을 늘리며 어떻게 하면 창의 수명이나 기능을, 이런 것들이 뒤에 나오는 장영실이나 이천이나 이런 분들이 한 거지만 끊임없이 전쟁을 이기고 나서도 그 다음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그런 예리함, 대비함, 이런 것들이 굉장히 돋보이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여진족을 토벌하시고 나서 그쪽 지역을 어떻게 확고하게 우리의 영토로서 앞으로 지켜나갈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깊으셨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그러면 그 당시에 함경도 방면에 6진을 개척하기 위해서 김종서 장군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시죠.

□ 신세돈
그래서 아까 1433년에 1차 파저강전투를 이겼는데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것 그러면 어떻게 함경도 지역을 지키고 어떻게 하면 압록강 지역을 지킬 것인가, 이게 고민이셔 가지고 압록강 쪽은 조금 이따 소개해 드릴 이천을 보냈고요. 함경도 쪽을 보니까 김종서만한 사람이 없다고 해서,

□ 한상덕 / 진행
김종서는 원래는 문신이었죠?

□ 신세돈
문신입니다. 문신인데 왜 김종서를 보냈냐 하면요. 사실 김종서가 말도 제대로 못했답니다. 그런데 김종서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게 뭐냐 하면 김종서가 세종대왕의 비서실에 있었지 않습니까? 비서실에 있다 보니까 세종대왕이 함경도 지역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때 문제가 된 게 뭐냐 하면 이게 조금 어려운 부분인데 함경도지역을 지키는 중심부 이름이 경원입니다. 말하자면 함경도 도청소재지인 셈이죠. 그런데 이 경원이 여진족 때문에 계속해서 뒤로 밀립니다. 그래서 원래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지금 경흥에 있었어요. 경흥은 어디냐 하면 두만강하고 중국하고 소련하고 만나는 그 부분에 있었는데 여진족 때문에 뒤로 쭉 뮐려 가지고 어디까지 왔었느냐면 경성이라고 거의 함흥 가까이 내려와 있었어요. 그래서 신하들이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 하면 아직도 여진족들이 출몰을 하니 경원부를 더 낮추자, 더 내려가자, 라고 하는 논의가 조정의 아주 중론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것은 내가 죽어도 못한다. 올라가면 갔지 더 내려올 수는 없다” 그래서 경원부를 남쪽으로 옮기자고 하는 거의 모든, 황희정승마저도 남쪽으로 옮기자고 했고요. 정초도 옮기자고 했고 허조도 옮기자고 했는데 유일하게 세종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람이 김종서예요. 그래서 김종서를 보내서 “나는 뒤로 물릴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더 올라갈 생각이니 네가 내 뜻을 잘 앎으로 네가 가서 내가 그쪽을 지키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보여줘라” 그래서 군인도 아닌데 김종서를 함경도 도절제사로 파견했었던 이유가 세종의 의지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어쨌든 세종시대에 이렇게 북방에 대한 변방을 튼튼히 지키지 못했다면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은 조선시대에 성립되지 못했다고 봐야겠죠?

□ 신세돈
거의 성립될 가능성이 저는 0%라고 봅니다. 세종대왕이 있었기 때문에. 물론 그다음에 세조대왕이 오셔 가지고 우리가 잘 아는 남이장군이 영토를 더 굳건하게 하시기는 하지만 세종, 세조가 없었으면 압록강하고 두만강은 우리 국경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저는 크다. 그래서 우리 북방한계선, 우리 북방의 국경을 확고하게 다지신 분은 세종의 공이 150%다, 이렇게 봐야 되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어쨌든 북한 영토도 만약 세종대왕이 그때 북방을 정리하지 않았으면 상당히 좁아졌을 테니까 모르긴 해도 북한 역사책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은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겠는데요?

□ 신세돈
네, 그러리라고 저도 추측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지금 여러분께서는 KBS <공감토론>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 한상덕 / 진행
세종대왕 하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군주이신데 그러다 보니까 백성의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발명을 많이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 신세돈
일단 세종대왕이 왜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는가, 그 부분을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이 무슨 기계 만지기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세종대왕은 기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셨냐 하면 하늘이 돌아가는 것은, 즉, 천체가 돌아가는 것은 내가 정치를 잘하는가 하지 못하는가를 반영해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하늘이 돌아가는 움직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내가 정치를 잘하고 있는가 잘하고 있지 못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야말로 내가 정치를 잘하는 것, 아주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분이 해라든지 달이라든지 별의 움직임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분의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과학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결국은 백성들을 좀 더 잘 살게 하고 또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야 된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과학에 대해서 애착이 남달랐던 것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좋은 정치, 선정을 펼치기 위한 그런 바탕으로 과학을 생각하셨던 거군요. 그렇다면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발전하면 많은 분들이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떠올리실 텐데, 어떻습니까?

□ 신세돈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너무 잘 몰라서 그런 것이죠. 장영실이라고 하는 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는데 장영실이 한 것은 물건을 만드는 제작, 장인이었어요. 물건을 기획하고 어떤 기계를 설계하고 이런 기계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고 아이디어를 낸 분들은 장영실이 아니에요. 세종대왕하고 그다음에 정초, 그다음에 이천, 이 세 분이 실질적으로 세종이 발명하신 거의 모든 기계의 아이디어부터 설계부터 모든 것을 주도하신 분이고 장영실이라는 분은 그런 설계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기계를 만들어 내는가, 장인의 입장에서는 장영실이 큰 기여를 한 것은 맞지만 이런 엄청난 기계, 인류 역사상 만들어 보지 못했던 이 기계를 설계하고 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장영실은 세종대왕이나 정초, 이천을 전혀 따라갈 수가 없는데 왜 이렇게 우리는 장영실만 했는가. 저는 이게 아마 우리가 왜정시대 때 일본 치하 때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 조선의 왕이나 조선의 관료들의 뛰어난 능력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서 장영실과 같은 비천한 사람을 내세웠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보긴 하는데 어쨌든 확실한 것은 장영실보다도 정초, 이천, 그리고 세종의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

□ 한상덕 / 진행
네, 지금 설계가 기획한 분은 정초하고 이천이라는 인물을 드셨는데,

□ 신세돈
네, 세종대왕하고 세 분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다면 이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설계하고 기획한 것입니까?

□ 신세돈
먼저 정초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분이 지금 출생연도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저는 요절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세종대왕께서 이분이 돌아가셨을 때 너무 슬퍼 가지고, 제가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늘이 어찌 나가 이렇게 크게 의지하는 사람을 빨리 데려가서 내 마음을 이렇게 상하게 하는가’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정초는 세종대왕한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제 생각에는 40대나 50대 초반에 요절했다고 판단이 되는데요. 이분이 만든 기계가 뭐냐 하면 물시계라는 것을 이분이 만들었어요. 그래서 물시계를 세종대왕과 함께 설계를 하고, 물론 제작에는 장영실이 참여를 하지만 1424년이니까 세종대왕이 즉위하신지 6년 만에 물시계, 이것을 우리 누기라고 하는데 누기를 만드셨고 그다음에 농사를 짓는 기술에 관련된 최초의 백과사전 농사직설을 1429년에 만들었고 그다음에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가 혼천의라는 게 있는데 이 혼천의를 만들 때 정초가 아주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정초하고 이천하고 장영실, 이 세 분이 만들 때 세종대왕하고 문종이 거의 매일 와서 이 기계 만드는 것을 보시고 상의하시고 제안하시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물시계와 혼천의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요. 이 외에도 그 당시에 달력이 굉장히 부정확해서 이 달력을 만드는 개편작업에 또 몰입을 하셨고 그다음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종대왕이 천문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셔 가지고 아랍과 중국에 있는 모든 천문서적을 다 규합을 해 가지고 칠정산내편, 외편을 만드세요. 칠정산내편, 외편이 뭐냐 하면 칠정산이라는 게, 칠이라는 게 저거거든요. 해, 달, 물, 우리 월화수목금토 이건데, 즉, 천문에 관련된 그 당시에 나와 있던 모든 서적들을 집대성 해 가지고 칠정산내외편을 1433년에 편찬한 분이 정초예요. 그러니까 정초는 물시계 만들었죠. 농사직설 썼죠. 혼천의 만들었죠. 달력 새로 만들었죠. 칠정산내외편 편찬했죠. 그러니까 이 정도의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신 분이 조선실록에 기록이 별로 없거든요. 저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초야말로 세종대왕의 상반기의 과학, 그런 업적을 거의 주도한 분이다, 이렇게 평가해도 틀림이 없을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지금 평가하시는 것을 보면 거의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버금가는 천재였던 것 같군요?

□ 신세돈
그렇죠. 그것도 한 100년 앞서서.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상당히 친숙한 인물이죠. 장영실이 한 구체적인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신세돈
기록에 보면 세종의 아이디어와 정초의 설계도를 가지고 제작에 참여한 사람이 장영실이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고요. 거의 모든 새로운 기계제작에 장영실이 기여를 했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까 혼천의라든지 자격루라고 하는 누기라든지 측우기를 만들 때 장영실이 참여를 한 것은 사실이고 장영실이 또 이렇게 기계를 만들다 보면 철광석이 많이 필요하고 그랬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장영실을 전국에 보내서 동광이라고 할까? 철광석을 개발하는 광산개발에도 상당히 기여를 많이 했고, 그다음에 우리나라에서 나는 그런 광석을 제련하는 기술에 또 장영실이 많이 기여를 했고요. 그다음에는 나중에 나오지만 이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활자를 만드는데 그 활자를 만들 때도 장영실이 개입을 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세종대왕께서 아이디어를 내시고 그다음 정초나 이천이 설계를 하시고 그다음에 장영실이 그것을 만들어 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이 세 분이 협업체계가 되어서 저는 그런 과학업적을 내는데 장영실의 역할이 우리가 무시 못 할 정도로 상당히 큰 기여를 한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어떻게 보면 과학기술 발전에 있어서 세 사람이 발을 묶고 함께 보조를 맞춰서 뛰어가는,

□ 신세돈
그렇죠. 3인1각이죠.

□ 한상덕 / 진행
네, 그런 형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장영실의 이후 조선실록의 행보는 어떻게 기록돼 있습니까?

□ 신세돈
1442년 이후에 장영실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1442년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요. 임금님께서 가끔 1년에 한 번씩 군사훈련을 가세요. 군사훈련을 가면 거대한 군마가 따르는데 세종대왕께서 어가가 이천입니다. 경기도 이천 말고 강원도 이천입니다. 38선 이북에 있습니다. 그 이천에 궁이 있는데 그때 폭우가 내려 가지고 행궁의 처마 밑에서 세종대왕께서 쉬고 계셨는데 폭우 때문에 기와장이 떨어져 가지고 그 기와장 때문에 세종대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행궁을 지었던 사람하고 가마를 제작했던 사람들이 다 처벌이 되는데 그때 장영실이 대호군이라고 종3품이니까 상당히 높은 직책에 있었는데 이분이 그 수레가마를 만드는 총 책임자였는데 그래서 책임을 물어서 결국은 1차로 판결이 나기를, 이렇게 했는데 세종대왕께서는 그동안에 공적이 있으니까 면제를 시켜줬어요. 면제 시켜줬는데 황희하고 허조가 이것은 불경에 관한 문제다, “자칫 잘못하면 임금의 몸이 상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그렇게 관대하게 처리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하시니까 세종대왕께서 결국은 다시 탄핵을 하셔서 장영실한테 곤장 80대를 때리고 그다음에 공무원 직책을 회수를 하고 보냈는데 그 후로는 기록이 안 나오는 것 보니까 어디 귀향 가서 자연스럽게 수를 마친 것 같아요. 그래서 장영실의 기록은 1442년 5월 기록이 곤장 50대 맞았다는,

□ 한상덕 / 진행
곤장 80대.

□ 신세돈
네, 80대 맞는 것, 이후로는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곤장 80대를 맞은 뒤에 그 이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앞서서 정초, 장영실이라는 인물 외에도 이천이라는 분을 말씀하셨는데 이분은 어떤 분입니까?

□ 신세돈
네, 정초라는 분이 과학적인 부분에 굉장히 능력을 발휘했다고 하면 이천은 현실 차원에서 생활과학을 완성한 분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그 당시에 거울이 굉장히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이 거울을 가지고 속이는 사람들이 많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어떻게 하면 이 거울을 속이는 놈들을 없앨 것인가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저울을 많이 만들어서 집집마다 보급하면 되겠구나, 해서 이천한테 거울을 만들라고 지시를 하셔서 호조참판 이천이 저울 1,500개를 만들어서 보급을 했고요. 그다음에 지금 한강을 가시다 청평댐 밑에 유심히 보시면 바위가 굉장히, 강바닥이 많거든요. 그 강바닥에 바위가 많아서 운항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천이 그 강바닥에 있는 돌을 전부 깨뜨려 가지고 한강 입구에서 배가 저 위에 거의 충주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강바닥을 완전히 깬 사람이 이천이고요. 그다음에 이천의 가장 큰 공적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에 있는 성, 그리고 압록강 주변에 있는 성, 이 성로서 구축하는 데는 확실하고 탁월한 능력을 보여 줬고요. 마지막으로 이천이 만든 가장 중요한 공적이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활자, 갑인자라고 하는 게 있는데 1434년에 이 갑인자를 만들게 되는데 이 갑인자를 만들어서 대한민국의 출판문화를 세계 수준까지 올리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이천이십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태종시대 때 계미자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 신세돈
아름답고 그다음에 자판이 잘 나오고,

□ 한상덕 / 진행
네, 고쳐진 게 세종시대 갑인자로 저희 국사시간에 배웠는데,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렇군요. 대단한 업적인데, 그런데 이러한 화려한 업적에 비하면 이천이라는 분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런데, 그런 이유, 왜 이렇게 이천의 업적에 대해서 평가가 그동안 국사 사학계에서 낮았던 걸까요?

□ 신세돈
이천의 외삼촌이 고려시대 영흥방이라고 이성계 파에게 시해 당한 소위 말하는 구시대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 사대부들은 아무리 이천이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강을 파는 기술이나 이런 것들은 이게 유교의 기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이것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천이라고 하는 사람 자체가 출신이 고려권신 출신이기 때문에 이는 구시대 가문이다, 이런 생각을 해서 끊임없이 이천을 배척하고 출신 가지고 폄훼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천에 대한 무고가 올라오거든요. 그런데 세종대왕께서는 끝까지 이천을 지켜주십니다. “원래 이렇게 재능이 많은 사람은 원래 모함을 하기 마련이니 너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말고 하는 일을 잘해라. 네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국방무기나 이런 부분은 할 사람이 없으니 나만 믿고 임무에 충실해 달라” 이런 말씀을 여러 번 당부하시는 것을 보면 이천이 이렇게 업적이 평가가 낮은 것은 그 당시의 문신들, 그 당시의 사관들이 이천의 출신에 대해서 상당히 …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추측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그러니까 실록에서도 문신들이 이분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 낮게 보니까,

□ 신세돈
말은 못하죠. 그것 때문이라고 말은 못하지만 이천의 아주 작은 허물 가지고 계속해서 모함을 하고 무고하고, 이런 기록들은 실록에 여러 번 나옵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뭔가 자신들과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 이것에 대해서 못마땅한 그런 시선이 있었다는 그런 말씀이시군요.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네. 이번에는 지난 2012년에 방영된 KBS 대하사극 대왕의 꿈 OST, 제시카의 ‘마음길’을 듣고 신세돈 교수님의 설특집 강연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이야기 이어 가겠습니다.

(♪ 제시카 ‘마음길’)

□ 한상덕 / 진행
지금 여러분께서는 KBS <공감토론> 설특집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에 관해서 숙명여자 대학교 신세돈 교수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신 교수님, 마지막으로 교육문화역사 분야를 한번 짚어보겠는데요. 태종에게 변계량이라는 재상이 있었다면 세종에겐 정인지가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훈민정음,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극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어린 백성이 니르고저 할빼이셔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이를 능히 펴지 못하니 이를 어여삐 여겨 이 글자를 만들어라’ 그렇게 돼 있죠?

□ 신세돈
그렇죠.

□ 한상덕 / 진행
네, 이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정인지가 세종대왕을 적극 지지한 그런 인물이기도 한데 정인지는 어떤 인물입니까?

□ 신세돈
일단 엄청 천재였습니다. 엄청 천재였고요. 이분이 세종대왕보다 1살 위입니다. 세종대왕이 1397년인데 이분은 1396년생인데요. 이분이 태종 때 문과에서 일등급제를 합니다. 일등급제를 하는데 이게 선발관이 1등, 2등, 3등을 가지고 태종한테 올렸어요. 이것 누가 1등인가, 자기네들이 결정하기 좀 뭐하고 해서 올렸더니 태종께서 직접 이 사람이 1등이다, 라고 짚은 사람이 정인지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머리가 좋았고요. 나중에 세종한테 임금 지위를 물려줄 때 세종한테 “앞으로 이 사람은 크게 등용할 사람이다” 이렇게 콕 집어서 이야기할 정도로 젊어서부터 굉장히 촉망을 받았던 사람인데 이분도 태종 때는 여러 가지 실수를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군사훈련 명령이 떨어졌는데 딴 짓 하다가 참석을 못해 가지고 좌천되기도 하고요. 어쨌든 태종이 있을 당시에는 그렇게 똑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각을 못 나타내다가 세종대왕께서 딱 취임하시자마자 이 사람을 집현전 응교로 하면서 집현전에 집어넣고 이 사람을 아주 활용을 했는데, 따라서 정인지의 역할은 집현전을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고 집현전이 그럼 뭐냐, 세종대왕의 싱크탱크니까 세종대왕의 머리 역할을 한 세종의 동년배이면서 매우 탁월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세종의 오른팔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평가할 수 있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집현전 하면 그것이 훈민정음 창제의 어떤 산실 역할을 한 어떤 싱크탱크의 모임이었던 그런 곳인데 당시에는 최만리를 비롯한 지배계층에서는 왜 자신들이 쓰고 있는 한자 갖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굳이 또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고 하느냐, 이런 반대가 상당히 극심하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집현전 부작이었어요. 그러니까 당시에 최고 높은 사람은 최만리였습니다. 최만리가 그때 60세가 넘는 고령이었는데요. 세종대왕께 이렇게 말씀을 해요. “여진족이 고유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 “야만인입니까, 아닙니까?” “야만인이다” “몽고가 고유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 “몽고가 야만인입니까, 아닙니까?” “그것 야만인이지” “토번, 티베트가 고유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 “야만인입니까, 아닙니까?” “야만인” 세종대왕께서 대답하시는 족족 야만인이다, 최만리가. 그래서 결국은 “그러면 우리 조선이 고유문자를 가지는 순간 야만인이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이렇게 최만리가 물어보거든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는 ‘최만리하고는 일을 같이 못하겠구나’ 해서 최만리를 결국은 낙향을 시키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해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내시는데요. 훈민정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실록에 별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왜 나와 있지 않냐 하면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반대,

□ 한상덕 / 진행
다 반대를 했죠.

□ 신세돈
네. 그러니까 이것을 내가 만든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언급하는 순간 벌떼 같이,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는 정말 믿을 만한 신복들만 가지고 작업을 하셨기 때문에 기록에 안 남아 있는데 제 추측컨대는 문종 이향하고 세조하고 그다음에 정인지하고 성삼문, 신숙주, 이런 그때의 신진사료들 중심으로 해서 비밀리에 작업을 한 것 같아요. 어쨌건 중요한 것은 세종대왕이 왜 훈민정음을 만드셨을까. 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이것 때문에 내가 훈민정음을 만든다, 라고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세종대왕께서 굉장히 애석하게 생각하신 것은 뭐냐 하면요. 법이 한자로 돼 있는데 법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무엇이 죄가 되는 줄 몰라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 그다음에 의학책이 전부 한문으로 돼 있는데 그 의학책에 대한 정보를 한문 때문에 얻지 못해서 억울하게 병들어죽는 사람들, 그다음에 예절책이라는 게 전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뭐가 예절이고 뭐가 야만인인지를 알지 못해서 억울하게 야만인이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세종대왕은 너무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일거에 구제하는 방법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 어려운 이 책들을 전부 한글로 만들어 주는 일밖에 없겠다고 생각을 하셔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바로 아까 말씀하신 대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이렇게 나오는 거거든요.

□ 한상덕 / 진행
어린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표현을 못한다는 거죠.

□ 신세돈
못한다. 그래서 저는 세종대왕이 애민정신이 가장 결정체화 된 것이 훈민정음이고 이것을 그렇게 많은 사대부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신하들 중심으로 비밀리에 작업을 했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나오고 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했는가를 보면 의도를 알 수 있어요. 법을 만들었고요. 법책을 한글로 번역했고요. 그다음에,

□ 한상덕 / 진행
삼강행실,

□ 신세돈
삼강행실도라고 하는 책을 한글로 번역했고요. 그다음에 의학책을 한글로 번역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분이 한글을 만들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을 보면 이분이 훈민정음을 만든 의도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저는 그래서 훈민정음 제작에 세종의 깊은 애민정신이 숨어 있었던 것이고 이 작업을 잘 이끌고 리드해 갔던 사람이 정인지다, 그래서 이분의 제일 큰 업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고, 저는 그보다도 사실은 더 중요한 업적이라고 보는 것이 세종대왕이 역사를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세종대왕이 특히 자치통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책을 구입을 하셔 가지고 너무 감명을 받아 가지고 이게 분량이 너무 기니까 이것을 어떻게 좀 축약할 수 없겠는가, 해서 자치통감이라고 하는 책을 축약해서 만들기도 했고요. 그다음에 거기에 나오는 통치의 법칙, 통치의 그런 방법을 전부 요약을 해 가지고 치평요람이라는 책을 정인지한테 편찬시키거든요. 그래서 정인지의 역할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도 기여를 했지만 자치통감을 축약을 해서 책을 하나 만들었던 것과 함께 치평요람이라고 하는 아시아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치의 강독본이라고 할까, 이런 책을 만들어 냈다. 저는 그래서 사실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훈민정음과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의 업적이 치평요람을 제작은 것이고 이것도 물론 세종대왕께서 지시를 하셨지만,

□ 한상덕 / 진행
고려사회에 관한 것도 세종시대 때,

□ 신세돈
그렇죠. 고려사를 만드는 것도 정인지가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그 전에 변계량이라든지 맹사성이 하던 작업을, 설순이라든지 작업을 이어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저는 독창적인 차원에서는 치평요람과 자치통감강목인가 하고 그다음에 훈민정음 제작을 한 것, 이것이 저는 정인지가 남겨놓은 가장 큰 훌륭한 업적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은 또 음악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대왕과 함께 음악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던 인물이라면 박연을 들 수 있죠?

□ 신세돈
박연이죠.

□ 한상덕 / 진행
박연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해 주시죠.

□ 신세돈
일단 박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 조정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를 우리가 조금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유교의 그런 정신을 일체화시킨 유교의 경전과 맞먹는 중요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악을 굉장히 중요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 악은 향악이라고 해서 그냥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그런 토속음악일 뿐이었거든요.

□ 한상덕 / 진행
네, 궁중에서 쓰이는 궁중악은 아니었죠?

□ 신세돈
그렇죠. 그게 궁중에 쓰이는 악이 전부 향악이었거든요. 세종대왕께서는 우리가 유교의 그런 해동성국을 만드는데 거기에 격에 맞는 음악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그것을 아악이라고 하는데 아악을 만드는데 박연이라고 하는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저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 이 세 사람은 저는 K-Pop의 원조라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아주 독특한 창조성을 가지고 우리 조선의 음악을 완전히 구축을 했다, 저는 그렇게 보는데 박연이 이렇게 음악을 잘했다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이 사람이 그냥 소리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박연은요. 태종11년에 진사시를 합격했고요. 태종18년에 대과를 합격한 엄청난, 이 사람은 말하자면 사료입니다. 문인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악기를 굉장히 잘 다뤘어요. 대금을 굉장히 잘 불렀고요. 이 사람이 또 음악에 되게 관심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있는데다가 이렇게 진사시, 생원시, 대과까지 합격할 정도니까 잡기에도 능하고 이런 과거에도 능한 사람인데 이분이 집현전 교리로 들어오기도 했고 사간부 정언도 했고 사헌부 지평도 했고 세자의 스승도 했으니까 사실 박연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정인지의 손색이 없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분이 평소에 음악에 되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세종대왕께서 그것을 아시고 박연을 통해서 우리가 말하는 아악, 즉, 궁중의 형식에 짜여 있는 아악의 아주 획기적인 틀을 세우는데 기여를 했다. 그래서 이분의 업적을 보면 석경이라고,

□ 한상덕 / 진행
그러니까 궁중음악이라고 하면 그동안에는 향악이라고 해서 궁중 밖에서 민간에 쓰이던 음악을 아악이라고 해서 국가행사, 중요행사에 쓰일 수 있는 그런 음악을 집대성한 것이죠?

□ 신세돈
집대성하고 창작하고 새로 만들기도 하고 그다음에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서 그 아악을 제대로 공연할 수 있는 그런 악기제작부터 작곡부터 편곡부터 모든 것을 다 했다.

□ 한상덕 / 진행
그런데 역사책에 보면 악기를 박연이 만들어서 세종대왕 앞에서 시연을 하니까 “어느 음이 그것은 좀 낮다, 틀렸다” 그래서 악기를 살펴보니까 그 돌이 조금 잘못된 돌이었더라, 이런 것까지 역사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도 음악에 굉장한 조예가 있으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 신세돈
그렇죠. 그러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까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세종이 느끼는 기분이 과학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과학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알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하늘이 돌아가는 일을 알아야 되겠다, 똑같은 논리로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고 이게 즐거워서가 아니고 이것이 말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유교경전이나 예나 모든 것들이 집대성돼 있는 것이 음악이다, 이렇게 해석을 했기 때문에 음악에 대해서는 굉장히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소홀히 하시지 아니하셨고 이 재능을 박연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박연을 통해서 작곡 시키고 그다음에 악기를 만들도록 하시고 그다음에 편곡하시고 그다음에 시골에 있는 음악을 편곡을 해서 궁중악으로 이렇게 전환시키는 작업들을 하게 한 그런 분이기 때문에 세종대왕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그 당시에 상당히 최고봉이라고 봐야 되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당시 사대부들은 또 그 악기 하나 다루는 것은 기본이었던 것 같아요. 사극에서 보면 가야금이라든가 거문고, 대금, 이런 것들을 부는 장면 같은 것들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 신세돈
그런데 그것은 극화돼 있는 거고 제가 말씀드리는 황희나 허조나 최윤덕이 악기를 불렀다는 기록은 적어도 실록에 없는 것을 보면 물론 불긴 불었겠지만 사료로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 한상덕 / 진행
네. 박연은 구체적으로 우리 조선시대 음악발전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그 업적을 하나씩 짚어주시면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 신세돈
일단 이분이 악학별좌라고 하는 음악을 담당하는 부서의 종6품관이 되셔 가지고 궁중음악을 총괄해서 새로 곡을 만드시고 그다음에 기존의 곡들을 편곡을 하시고 그다음에 그 음악을 잘 공연하기 위해서 필요한 새로운, 예를 들면 악기, 석경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내시고 그리고 시골에 있는 음악들을 또 다시 국민들이 편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편곡을 했기 때문에 적어도 아악이 됐든 향악이 됐든 조선초기의 음악에 대한 확실한 기본을 세종의 지시 하에서 만들어 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음악에 대한 소양이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체계를 잡도록 한 것이 박연이 한 일이다. 저는 그래서 정인지의 훈민정음 못지않게 그 당시에 악학에 대한 역할을 세종대왕께서 중점을 두시고 지원을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생각하면 훈민정음이나 아까 이야기한 대로 치평요람 같은 것에 더 방점이 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세종대왕은 음악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한 의식을 가지시고 박연에 대한 지지를 하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보면 박연의 아들이 김종서하고 연루가 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가지고 결국은 죽게 됐는데 이 박연이 워낙 세종의 아낌을 받았고 음악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박연은 자기 아들이 계유정난에, 말하자면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연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연은 면제가 되어서 낙향을 하거든요. 그런 것을 보면 박연이 그 당시에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간접적으로 느낄 수가 있겠죠.

□ 한상덕 / 진행
네. 세종대왕에 대한 연구에 아주 전문이신 우리 신세돈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면 세종대왕께서는 병법에도 아주 탁월하시고 또 역사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과학기술 발전은 또 말할 것도 없고요. 또 음악에까지 이렇게 조예가 깊으셨다면 도대체 세종대왕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밑에서 일하는 신하들로서는 정말 참 피곤했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이야기하면 자신들보다 더 위에서 알고 지시를 하니까 상당히 일하기가 곤란했을 것 같은데요.

□ 신세돈
그러니까 맡겨뒀죠. 그러니까 본인이 아이디어를 내시고 신하들이 그것을 이끌어내시고 잘못 가면 잘못 가는 것을 고쳐주시고 했지, 본인이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을 끌고 간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레잇을 했기 때문에 자기 밑에 그 많은 명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리드할 수 있는 그런, 현대말로 하면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의 지휘자와 같이 모든 파트를 다 꿰뚫고 계셨던 그런 역량을 보이신 분이 세종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그분이 돋보이는 것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분이 굉장히 오래 사셨거든요. 아니, 그러니까 재위를 31년 하셨어요. 그러니까 조선에 굉장히 길게 재위를 하신 분이기 때문에, 물론 건강 때문에 53세에 돌아가시긴 하셨지만 그래도 재위를 30년 이상 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한 20년만 더 사셨으면 저는 대한민국은 아마 지금쯤 만주가 우리 땅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분이 53세에 요절한 것이 저는 굉장히 안타깝고 아쉽고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53세면 아까 말씀하셨던 세종대왕 밑에서 정치를 했던 재상들에 비하면 황희정승 같은 분에 비하면 굉장히 요절하신 그런 편이었는데,

□ 신세돈
굉장히 요절한 거죠.

□ 한상덕 / 진행
죽음의 이유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 신세돈
병이 굉장히 많으셨어요. 병이 많으셨는데 기록을 보면 당뇨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다음에 몸이 많이 부으셨다고 하는 것을 보면,

□ 한상덕 / 진행
소갈증이라고 역사책에 나오던데요. 소갈증이 당뇨죠?

□ 신세돈
네, 당뇨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질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 임질은 요즘 임질하고는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병이 많으셨고요. 그래서 온천을 굉장히 자주 다니셨고요.

□ 한상덕 / 진행
그때는 피부병이 많지 않았습니까?

□ 신세돈
네, 피부병 때문에 온천에 가기도 했고 그다음에 혈압 때문에 가신 것 같기도 하고 눈병도 있다고 했고요. 그래서 그 병명이 굉장히 다양한 것을 보면 저는 당뇨복합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53세에 떠나신 것은 굉장히 일찍 떠나신 것이 사실이고 너무 또 일을 많이 하시고 하니까 요절하시긴 하셨지만 저는 53세에 돌아가신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31년 이상 봉직을 하시면서 우리 후손들한테 이렇게 훌륭한 리더십을 보여 주고 이렇게 훌륭한 인재들을 발굴해서 끊임없이 모함이 들어올 때마다 지켜주고 모함이 들어오면 불러서 “내가 너를 믿는데 너는 걱정할 게 뭐냐.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들을 김종서한테도 하셨고 이천한테도 하셨고 허조한테도, 이런 것을 보면 이분이 사람을 쓸 때 보면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고,

□ 한상덕 / 진행
무한신뢰.

□ 신세돈
네, 이런 부분들이 보통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부분들이 요즘에는 특별히 돋보인다, 이렇게 생각이 드는 거죠.

□ 한상덕 / 진행
네. 그러면 세종대왕께서는 다음에 아드님 문종으로,

□ 신세돈
계승이 되죠.

□ 한상덕 / 진행
왕위가 계승이 되는데 문종한테는 유언 같은 걸까요? 그런 것을 어떤 점을 강조하는 유언을 남기셨을까요?

□ 신세돈
일단 세종대왕이 돌아가셔서 문종이 계승을 받는 게 아니고요. 세종도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돌아가시기 한 6~7년 전부터 사실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일단 넘겨줍니다. 넘겨주고 모든 행정을 문종이 해라, 그렇게 하시면서 문종을 보살펴주라고 말하자면 부탁을 합니다.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김종서 그다음에 황보인 이런 분들이 세종대왕이 돌아가시는 머리맡에서 문종을 보필하게 되는데 이때 몰래 불러 가지고 문종을 부탁한 분이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이런 분입니다. 그러니까 사육신이 나중에,

□ 한상덕 / 진행
계유정난 때 사육신으로 꼽힌 인물들이죠?

□ 신세돈
사육신이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이분이 세종대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끝까지 문종을 보필해 주라는 어떤 특명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분들이 나중에 죽음을 무릅쓰고 단종복위에 참여를 한 것이다, 저는 그렇게 봐서 세종대왕께서 돌아가실 때 이미 몇 년 전에 왕권은 문종한테 물려준 상황이지만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래도 걱정이 되니까 그것을 신하들한테 부탁을 했는데 그때 부탁을 받은 사람이 성삼문 그다음에 이런 신하들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듣고 보면 정치에 황희와 허조, 또 국방분야에 최윤덕과 김종서,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정초와 장영실 그리고 이천, 교육문화역사 분야에서는 정인지와 박연까지 이렇게 상당히 많은 재상들, 인재가 있었다는 점이 지금 시대는 참 부러운 그런 리더십이었고, 유능한 인재를 곳곳에 등용한 세종대왕의 혜안, 아까는 황희정승의 추천이 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또 그런 추천을 받고서 그대로 승낙하신 그런 혜안도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위한지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을 꼽고 있지 않습니까?

□ 신세돈
그렇습니다.

□ 한상덕 / 진행
그 부분은 왜 그렇게 세종대왕을 꼽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시는지요.

□ 신세돈
일단 세종이 어떻게 정치를 하셨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몰라요. 우리가 세종대왕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너무 모른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세종대왕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정치를 어떤 마음가짐을 했는가를 우리가 조금 들여다보면 세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한마디로 세종대왕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정신은 이겁니다. 내가 정치를 잘 못하면 바로 하늘이 나한테 벌을 내린다, 이게 외천정신이에요. 하늘을 무서워하는 정신이죠. 따라서 조그마한 무슨 일이 생겨도 세종대왕은 항상 돌이켜 앉아서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가를 신하들한테 묻고 백성들한테 묻고 친척들한테 묻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물어서 정치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런 엄청난 업적을, 그래서 해동요순이라는 업적을 내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 한상덕 / 진행
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기까지 말이죠. 세종대왕께서는 신하들과 토론을 즐겨했고, 신하들을 믿고 힘을 실어줬습니다. 단점은 덮고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또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신하에게 일만 맡겨두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고 얼마나 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늘 점검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으랴 하였거니와, 지금도 역시 반드시 있을 것이로되, 다만 몰라서 그를 못 쓰는 것일 뿐이다” 그만큼 세종대왕께서는 훌륭한 인재를 뽑아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최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늘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성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의 이 말로 KBS <공감토론> <세종의 태평성대와 숨은 인재들> 설특집 강연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해 주신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과 신세돈 교수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신세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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