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본문 영역

상세페이지

심수봉 “통일되면 구순 어머니 북녘 고향에 가고파”
입력 2018.05.02 (11:51) 연합뉴스
가수 심수봉(본명 심민경·63)의 차분하고 낭랑한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올해 통일이 된다고 믿어요."

지난달 27일 남북정상 회담이 우리에게 감동적인 장면을 안긴 뒤라지만 확신처럼 강한 염원이다.

데뷔 40주년에 즈음해 5년 만에 발표한 새 앨범 '내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에 담긴 신곡 '알이랑'(With GOD)을 얘기하면서다. '알이랑'은 '아리랑'이란 뜻과 '하나님(히브리어로 알·el)과 함께'란 중의적인 의미다.

'아리랑'과 '애국가' 가사가 차용된 이 노래는 그가 "통일이 되면 부르고 싶어 2년 전에 만든 곡"이다. "딸의 노래가 있어 살았고 행복했다"는 실향민 어머니를 위한 노래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평안남도 진남포(지금의 남포) 출신이다.

"구순(九旬) 어머니에게 통일되면 같이 고향에 가자고 했는데 지금 몸이 안 좋으세요. 저 때문에 힘들고 아팠던 어머니가 통일이 될 때까지 살아계셔야 하는데…."

지난달 30일 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심수봉은 민낯의 편안한 차림이었다. 11년 전 자택 지하에 지은 소극장에서 오는 7~8일 서울 롯데호텔월드 크리스탈볼룸에서 열 '40주년 특별 디너쇼' 연습을 마친 길이었다.

40주년이란 말에 그는 "정확히 내년이지만, 숫자는 무의미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알려진 대로 그의 데뷔 시절은 멍든 기억이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부른 그는 1979년 1집을 내며 등장과 함께 인기 가수가 됐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이유로 꽃다운 20대에 삶은 뒤틀렸다.

유일하게 끌어안아 준 것은 그의 음악을 들어주는 대중이었다.

"더는 가수로 노래할 생각을 안 했을 때 대중만이 유일하게 절 끌어안아 줬죠. 전 정치 때문에 혼난 사람이고, 방송이나 언론도 제 편을 들어준 적이 없어요. 힘들어서 하소연한 게 노래였고, 이상하게 살기 위해 호소한 것들에 대중이 공감해줬죠. 감사한 마음을 갚을 길이 없어요."

◇ 음악, 그리고 어머니와 신앙…"자존감 회복하며 힐링된 게 올해"

그런 그가 앨범에 '내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란 제목을 내걸었다. "인생을 깊이 관찰하고 영혼까지 들어가 보면서 힐링이 된 게 올해부터"라는 게 이유다. 세상의 원망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가 충만한 '안식년' 같다고도 했다. 구면이지만 확실히 어느 때보다 표정이 환했다.

힐링의 계기로는 뜻밖에도 '자존감 회복'을 꼽았다.

"지금껏 절 죽이려 한 정치든, 출연 금지한 방송이든 무엇인가에 대항해보거나 따져야 한다는 정서 자체를 가진 적이 없어요. 권리를 부르짖지 못한 것은 자존감이 낮았던 탓이죠.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당하면 당해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창작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할까'란 생각으로 곡을 만든 적이 없어요. 제 음악은 살기 위한 호소였거든요."

앨범의 신곡 3곡과 새롭게 편곡한 대표곡 10곡은 모두 자작곡이다. 첫 곡과 끝 곡에 자리한 신곡 '엄마 사랑해요'와 '아빠'에서 어머니와 신앙이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임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짓밟히고/ 이유 없이 버려졌을 때도/ 엄마는 내 손을 놓지 않은 분 (중략)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만 하던/ 엄마의 모든 눈물 씻어주세요.'('엄마 사랑해요' 중)

어머니는 충청도 중고제 국악인 집안의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심수봉을 낳았다. 이번 공연에선 어머니의 이야기가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올려진다.

"아버지 예순에 제가 태어났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일찍이 헤어졌고 함께 피란 내려온 삼촌은 절 보육원에 보내길 원했어요. 아이를 안고 보니 어디 어미 심정이 그랬겠어요. 어머니는 또 한 번 남자에게 시련을 겪고서 저를 데리고 서울로 오셨죠. 실향민 어머니의 모진 삶은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투영해요."

1985년부터 신앙에 의지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빠에 빗댄 내레이션 곡 '아빠'를 통해 힘든 이들이 위로받고 자신처럼 치유하길 바랐다. 그윽한 피아노와 스트링 연주 가운데로 흘러나오는 '아이가 보인다/ 울고 있는 아이/ 구름과 같이 아이의 시선은/ 누군가를 찾고 있다 (중략) 아빠 아빠가 있었다'란 내레이션은 간절하기까지 하다. 시처럼 읊어 보인 그는 "아이는 바로 '나'"라고 했다.

다시 부른 10곡은 유독 애착이 있던 노래인 타이틀곡 '나의 신부여'를 비롯해 '그때 그 사람', '비나리', '사랑밖엔 난 몰라' 등 그의 인생곡들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송영주가 편곡에 가세해 트로트 풍을 걷고 재즈 색을 입혔다. 재킷 속지에는 히브리어로 된 '나의 신부여' 가사를 실었다.

수록곡 중 심수봉의 콧소리가 간지러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최근 남북 관계의 급진전과 함께 재조명됐다. 이 노래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남측 공연서,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서, 남북정상 회담 만찬장에서 불렸다. '그때 그 사람'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어머니 고용희가 생전 좋아한 노래라는 증언도 있다.

그는 "정서 때문인지, 오랜 노래여선지 북한에서 제 노래가 불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며 "이런 모습을 보면 정치보다 더 강렬한 힘은 문화 예술이란 걸 느낀다"고 말했다.

◇ 나훈아가 재능 알아봐…"어떤 정권서도 특별대우 받은 적 없어"

심수봉의 유일무이한 음색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은 나훈아였다. 1976년 남산 도쿄호텔 23층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심수봉은 나훈아가 손님으로 오자 '물레방아 도는데'를 선물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나훈아는 바로 유명 음반사 사장 둘을 불렀다. "이 사람이 가수가 안 되면 누가 되나"라며 데뷔를 권유했다.

그러나 심수봉에게 가수는 로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무대 뒤 모습은 열악해 보였고, 10대부터 드럼과 피아노를 연주하며 재즈에 관심이 있었다.

"나훈아 선배가 신세기레코드 사장에게 노래를 만들어왔고, 한 달 안에 절 설득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죠. 당시 나훈아 선배가 만든 '여자이니까'를 취입했는데 결국 흐지부지돼 발표하지 않았어요."

데뷔 목전에서 좌초되자 마음이 허전했던 그는 1978년 '그때 그 사람'으로 대학가요제에 도전했다.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지구레코드 사장의 눈에 띄었고 2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서 '그때 그 사람'을 취입하며 데뷔했다. 대박이 나자 이전에 녹음한 '여자이니까'도 세상에 나왔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노래를 좋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본 것은 딱 세 번이다.

그는 "데뷔 전 노래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한번, 국무총리 사는 집이 리모델링됐을 때 여러 가수와 한번, 그날(10·26)"이라고 떠올렸다.

10·26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계엄사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한남동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방송 출연 금지 조치를 당했고 한동안 출국 금지가 됐으며, 1984년 방송 금지가 해제되고서 낸 '무궁화'(1985)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는 "어떤 정권에서도 날 특별 대우한 적은 없었기에 뜻하지 않게 휘말린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헛웃음이 난다"며 "정말 정치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나만이 가진 힘으로 충실히 음악만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난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본 심경에 대한 물음에도 그는 속내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꾸준히 싱글로도 새 노래를 내고 싶다는 그는 "상당히 재미있는 곡들이 많다"며 "점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기대했다.

"사랑에 굶주려 '사랑밖엔 난 몰라'란 노래처럼 사랑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웃은 그는 "사람을 믿었지만 사람은 믿음보다 사랑의 대상이더라.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늘 얘기했던 뮤지컬 제작에 대한 꿈은 더 구체화했다고 한다.

"제 삶이 이런 것들을 위한 스토리였나…. 스토리를 안 만들어도 스토리이니. 토해내고 싶을 때 토해낸 음악들이니까요. 저뿐 아니라 사람들은 다 각자 자신의 드라마를 설계하는 인생의 작품자들이죠."

[사진출처 : 연합뉴스]
  • 심수봉 “통일되면 구순 어머니 북녘 고향에 가고파”
    • 입력 2018-05-02 11:51:30
    연합뉴스
가수 심수봉(본명 심민경·63)의 차분하고 낭랑한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올해 통일이 된다고 믿어요."

지난달 27일 남북정상 회담이 우리에게 감동적인 장면을 안긴 뒤라지만 확신처럼 강한 염원이다.

데뷔 40주년에 즈음해 5년 만에 발표한 새 앨범 '내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에 담긴 신곡 '알이랑'(With GOD)을 얘기하면서다. '알이랑'은 '아리랑'이란 뜻과 '하나님(히브리어로 알·el)과 함께'란 중의적인 의미다.

'아리랑'과 '애국가' 가사가 차용된 이 노래는 그가 "통일이 되면 부르고 싶어 2년 전에 만든 곡"이다. "딸의 노래가 있어 살았고 행복했다"는 실향민 어머니를 위한 노래이기도 하다. 그의 어머니는 평안남도 진남포(지금의 남포) 출신이다.

"구순(九旬) 어머니에게 통일되면 같이 고향에 가자고 했는데 지금 몸이 안 좋으세요. 저 때문에 힘들고 아팠던 어머니가 통일이 될 때까지 살아계셔야 하는데…."

지난달 30일 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자택에서 만난 심수봉은 민낯의 편안한 차림이었다. 11년 전 자택 지하에 지은 소극장에서 오는 7~8일 서울 롯데호텔월드 크리스탈볼룸에서 열 '40주년 특별 디너쇼' 연습을 마친 길이었다.

40주년이란 말에 그는 "정확히 내년이지만, 숫자는 무의미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알려진 대로 그의 데뷔 시절은 멍든 기억이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부른 그는 1979년 1집을 내며 등장과 함께 인기 가수가 됐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이유로 꽃다운 20대에 삶은 뒤틀렸다.

유일하게 끌어안아 준 것은 그의 음악을 들어주는 대중이었다.

"더는 가수로 노래할 생각을 안 했을 때 대중만이 유일하게 절 끌어안아 줬죠. 전 정치 때문에 혼난 사람이고, 방송이나 언론도 제 편을 들어준 적이 없어요. 힘들어서 하소연한 게 노래였고, 이상하게 살기 위해 호소한 것들에 대중이 공감해줬죠. 감사한 마음을 갚을 길이 없어요."

◇ 음악, 그리고 어머니와 신앙…"자존감 회복하며 힐링된 게 올해"

그런 그가 앨범에 '내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란 제목을 내걸었다. "인생을 깊이 관찰하고 영혼까지 들어가 보면서 힐링이 된 게 올해부터"라는 게 이유다. 세상의 원망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가 충만한 '안식년' 같다고도 했다. 구면이지만 확실히 어느 때보다 표정이 환했다.

힐링의 계기로는 뜻밖에도 '자존감 회복'을 꼽았다.

"지금껏 절 죽이려 한 정치든, 출연 금지한 방송이든 무엇인가에 대항해보거나 따져야 한다는 정서 자체를 가진 적이 없어요. 권리를 부르짖지 못한 것은 자존감이 낮았던 탓이죠.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당하면 당해야 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창작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어떤 걸 좋아할까'란 생각으로 곡을 만든 적이 없어요. 제 음악은 살기 위한 호소였거든요."

앨범의 신곡 3곡과 새롭게 편곡한 대표곡 10곡은 모두 자작곡이다. 첫 곡과 끝 곡에 자리한 신곡 '엄마 사랑해요'와 '아빠'에서 어머니와 신앙이 그를 지탱해준 버팀목임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짓밟히고/ 이유 없이 버려졌을 때도/ 엄마는 내 손을 놓지 않은 분 (중략)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만 하던/ 엄마의 모든 눈물 씻어주세요.'('엄마 사랑해요' 중)

어머니는 충청도 중고제 국악인 집안의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심수봉을 낳았다. 이번 공연에선 어머니의 이야기가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올려진다.

"아버지 예순에 제가 태어났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일찍이 헤어졌고 함께 피란 내려온 삼촌은 절 보육원에 보내길 원했어요. 아이를 안고 보니 어디 어미 심정이 그랬겠어요. 어머니는 또 한 번 남자에게 시련을 겪고서 저를 데리고 서울로 오셨죠. 실향민 어머니의 모진 삶은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투영해요."

1985년부터 신앙에 의지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빠에 빗댄 내레이션 곡 '아빠'를 통해 힘든 이들이 위로받고 자신처럼 치유하길 바랐다. 그윽한 피아노와 스트링 연주 가운데로 흘러나오는 '아이가 보인다/ 울고 있는 아이/ 구름과 같이 아이의 시선은/ 누군가를 찾고 있다 (중략) 아빠 아빠가 있었다'란 내레이션은 간절하기까지 하다. 시처럼 읊어 보인 그는 "아이는 바로 '나'"라고 했다.

다시 부른 10곡은 유독 애착이 있던 노래인 타이틀곡 '나의 신부여'를 비롯해 '그때 그 사람', '비나리', '사랑밖엔 난 몰라' 등 그의 인생곡들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송영주가 편곡에 가세해 트로트 풍을 걷고 재즈 색을 입혔다. 재킷 속지에는 히브리어로 된 '나의 신부여' 가사를 실었다.

수록곡 중 심수봉의 콧소리가 간지러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는 최근 남북 관계의 급진전과 함께 재조명됐다. 이 노래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남측 공연서,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서, 남북정상 회담 만찬장에서 불렸다. '그때 그 사람'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어머니 고용희가 생전 좋아한 노래라는 증언도 있다.

그는 "정서 때문인지, 오랜 노래여선지 북한에서 제 노래가 불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며 "이런 모습을 보면 정치보다 더 강렬한 힘은 문화 예술이란 걸 느낀다"고 말했다.

◇ 나훈아가 재능 알아봐…"어떤 정권서도 특별대우 받은 적 없어"

심수봉의 유일무이한 음색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은 나훈아였다. 1976년 남산 도쿄호텔 23층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심수봉은 나훈아가 손님으로 오자 '물레방아 도는데'를 선물했다. 그의 노래를 들은 나훈아는 바로 유명 음반사 사장 둘을 불렀다. "이 사람이 가수가 안 되면 누가 되나"라며 데뷔를 권유했다.

그러나 심수봉에게 가수는 로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무대 뒤 모습은 열악해 보였고, 10대부터 드럼과 피아노를 연주하며 재즈에 관심이 있었다.

"나훈아 선배가 신세기레코드 사장에게 노래를 만들어왔고, 한 달 안에 절 설득해서 노래를 부르게 했죠. 당시 나훈아 선배가 만든 '여자이니까'를 취입했는데 결국 흐지부지돼 발표하지 않았어요."

데뷔 목전에서 좌초되자 마음이 허전했던 그는 1978년 '그때 그 사람'으로 대학가요제에 도전했다. 입상에는 실패했지만 지구레코드 사장의 눈에 띄었고 2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서 '그때 그 사람'을 취입하며 데뷔했다. 대박이 나자 이전에 녹음한 '여자이니까'도 세상에 나왔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노래를 좋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본 것은 딱 세 번이다.

그는 "데뷔 전 노래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한번, 국무총리 사는 집이 리모델링됐을 때 여러 가수와 한번, 그날(10·26)"이라고 떠올렸다.

10·26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는 계엄사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한남동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됐다. 전두환 정권 시절 방송 출연 금지 조치를 당했고 한동안 출국 금지가 됐으며, 1984년 방송 금지가 해제되고서 낸 '무궁화'(1985)는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는 "어떤 정권에서도 날 특별 대우한 적은 없었기에 뜻하지 않게 휘말린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헛웃음이 난다"며 "정말 정치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나만이 가진 힘으로 충실히 음악만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난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본 심경에 대한 물음에도 그는 속내를 꺼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꾸준히 싱글로도 새 노래를 내고 싶다는 그는 "상당히 재미있는 곡들이 많다"며 "점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고 기대했다.

"사랑에 굶주려 '사랑밖엔 난 몰라'란 노래처럼 사랑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웃은 그는 "사람을 믿었지만 사람은 믿음보다 사랑의 대상이더라.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늘 얘기했던 뮤지컬 제작에 대한 꿈은 더 구체화했다고 한다.

"제 삶이 이런 것들을 위한 스토리였나…. 스토리를 안 만들어도 스토리이니. 토해내고 싶을 때 토해낸 음악들이니까요. 저뿐 아니라 사람들은 다 각자 자신의 드라마를 설계하는 인생의 작품자들이죠."

[사진출처 : 연합뉴스]
kbs가 손수 골랐습니다. 네이버에서도 보세요.
기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