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2년 전 그 날, 대학생 ‘김지영’의 삶은 바뀌었다

입력 2018.05.18 (19:33) 수정 2018.05.1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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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서울 도심 한복판, 강남역 근처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습니다. 얼굴조차 모르는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해자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여성들로 인한 스트레스와 분노를 해소하고 여성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 △△빌딩 건물의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그곳을 이용하는 여성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 1심 판결문 中)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해 전국에는 쪽지 3만 5천 장이 붙었습니다. '단지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다음은 우리가 아닐까'. 고인의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의 언니들이, 친구들이, 동생들이 살아있는 한 끝까지 싸울게'라며 다짐했던 사람들. 대학생 김지영(가명) 씨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년 전 그 날 이후, 김지영 씨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2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추모 쪽지2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추모 쪽지

대학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였던 어제, 고려대학교 여학생위원회 사무실에서 이제는 4학년이 된 김지영 씨를 만났습니다. 김지영 씨가 여학생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건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던 2016년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이나 여성 인권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가, 이제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고 제가 가지고 있던 그런 두려움들이 구체화됐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학내 분위기도 그때 약간 폭발적으로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지난 2년 동안, 본인이 달라졌듯 사회도 달라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여성들이 굉장히 많이 변화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전에는 설명하지 못했던 불이익이나 고통에 목소리를 내면서 변화의 시작점을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또 결과적으로, 특히 여성 당사자가 아닌 많은 사람의 의식은 별로 변한 거 같지 않아요. 좌절감이나 무력감을 느낀 지점도 그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김지영 씨는 여학생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혐오와 조롱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학교 내 강의실 등에서 나오는 혐오 발언 사례를 수집하려고 익명 채팅방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채팅방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더니, '페미들 뚱뚱', '한국 여자 병균', '남혐이나 하지 마' 등 오히려 혐오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를 굉장히 극도로 하는 그런 사진들을 올리면서 막 깔깔대고 그런 식으로 되게 과시적으로 성차별적인 발언, 그리고 혐오 발언 이런 걸 계속 했었어요. 거의 2시간 동안."

페미니즘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행사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혐오'의 표적이 됐습니다.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신상이 털리는' 건 예삿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활동하는 학생뿐 아니라, 여학생위원회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라온 글을 공유하거나 '좋아요'를 누른다는 이유만으로 조롱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연대 의사를 밝혔을 때 조롱하고 공격이 들어오니까 의사가 있어도 그것을 표현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내가 회자된다는 것? 그런 것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상처를 받는 구성원들이 많다고 느껴져요.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되니까 힘든 것 같고요."

김지영 씨는 그럴수록 서로 다독이고 위로하고 뭉쳐야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쓰면 좋겠냐고 물으니, 가명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음.. 이름은 '김지영'이라고 해주세요." 문재인 대통령도 갖고 있다는, 어떤 책이 생각나는 이름이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추모 집회‘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추모 집회

앞으로 몇 년을, 강남역에 또 모여야 할까

어둑해질 무렵, 강남역 일대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센 비가 쏟아졌습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이번 페미니즘 집회에 염산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 글도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 나중에는 2천 명 가까이 됐습니다. '멈추지 않겠다'며 구호를 외치는 집회 참가자들 중에는 여자도 많았지만, 남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변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차별적 구조가 문제라고 보는데, 제가 남자로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집회에 나왔습니다. 함께 바꾸면 더욱 빨리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서 오늘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정대망, 서울시 양천구)

"힘을 보태드리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생물학적 남자라 하더라도 여성이 당한 범죄에 대해서는 같이 분노하고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이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려왔으니까, 여성들의 권리 쟁취 운동에 함께해야 합니다." (송승현, 경기도 화성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 문제 제기도, 반성도 많았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성이 피해자인 강력 범죄는 오히려 늘었고, 여성을 상대로 한 혐오 발언도 그칠 줄을 모릅니다. 2016년, 2017년, 그리고 올해 2018년에도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언제까지, 5월 17일마다 강남역에 모여야 할까요.

[연관 기사/뉴스9] ‘강남역 살인 사건’ 2년…커지는 ‘여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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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2년 전 그 날, 대학생 ‘김지영’의 삶은 바뀌었다
    • 입력 2018-05-18 19:33:39
    • 수정2018-05-19 08:40:21
    취재후·사건후
2016년 5월 17일. 서울 도심 한복판, 강남역 근처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습니다. 얼굴조차 모르는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해자는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여성들로 인한 스트레스와 분노를 해소하고 여성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 △△빌딩 건물의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그곳을 이용하는 여성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가해자 1심 판결문 中)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해 전국에는 쪽지 3만 5천 장이 붙었습니다. '단지 여자라서 죽었습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다음은 우리가 아닐까'. 고인의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너의 언니들이, 친구들이, 동생들이 살아있는 한 끝까지 싸울게'라며 다짐했던 사람들. 대학생 김지영(가명) 씨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2년 전 그 날 이후, 김지영 씨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2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추모 쪽지
대학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였던 어제, 고려대학교 여학생위원회 사무실에서 이제는 4학년이 된 김지영 씨를 만났습니다. 김지영 씨가 여학생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건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던 2016년 그해 겨울이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이나 여성 인권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가, 이제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고 제가 가지고 있던 그런 두려움들이 구체화됐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게 됐어요. 학내 분위기도 그때 약간 폭발적으로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지난 2년 동안, 본인이 달라졌듯 사회도 달라진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여성들이 굉장히 많이 변화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전에는 설명하지 못했던 불이익이나 고통에 목소리를 내면서 변화의 시작점을 마련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또 결과적으로, 특히 여성 당사자가 아닌 많은 사람의 의식은 별로 변한 거 같지 않아요. 좌절감이나 무력감을 느낀 지점도 그런 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김지영 씨는 여학생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혐오와 조롱에 시달렸다고 말했습니다. 학교 내 강의실 등에서 나오는 혐오 발언 사례를 수집하려고 익명 채팅방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채팅방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오더니, '페미들 뚱뚱', '한국 여자 병균', '남혐이나 하지 마' 등 오히려 혐오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를 굉장히 극도로 하는 그런 사진들을 올리면서 막 깔깔대고 그런 식으로 되게 과시적으로 성차별적인 발언, 그리고 혐오 발언 이런 걸 계속 했었어요. 거의 2시간 동안."

페미니즘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행사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혐오'의 표적이 됐습니다.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신상이 털리는' 건 예삿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활동하는 학생뿐 아니라, 여학생위원회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라온 글을 공유하거나 '좋아요'를 누른다는 이유만으로 조롱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연대 의사를 밝혔을 때 조롱하고 공격이 들어오니까 의사가 있어도 그것을 표현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내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내가 회자된다는 것? 그런 것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상처를 받는 구성원들이 많다고 느껴져요.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되니까 힘든 것 같고요."

김지영 씨는 그럴수록 서로 다독이고 위로하고 뭉쳐야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습니다. 이름을 어떻게 쓰면 좋겠냐고 물으니, 가명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음.. 이름은 '김지영'이라고 해주세요." 문재인 대통령도 갖고 있다는, 어떤 책이 생각나는 이름이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2주기 추모 집회
앞으로 몇 년을, 강남역에 또 모여야 할까

어둑해질 무렵, 강남역 일대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센 비가 쏟아졌습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이번 페미니즘 집회에 염산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 글도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비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 나중에는 2천 명 가까이 됐습니다. '멈추지 않겠다'며 구호를 외치는 집회 참가자들 중에는 여자도 많았지만, 남자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변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성차별적 구조가 문제라고 보는데, 제가 남자로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집회에 나왔습니다. 함께 바꾸면 더욱 빨리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서 오늘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정대망, 서울시 양천구)

"힘을 보태드리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생물학적 남자라 하더라도 여성이 당한 범죄에 대해서는 같이 분노하고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이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려왔으니까, 여성들의 권리 쟁취 운동에 함께해야 합니다." (송승현, 경기도 화성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 문제 제기도, 반성도 많았지만 아직도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성이 피해자인 강력 범죄는 오히려 늘었고, 여성을 상대로 한 혐오 발언도 그칠 줄을 모릅니다. 2016년, 2017년, 그리고 올해 2018년에도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언제까지, 5월 17일마다 강남역에 모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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