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부터 캐나다까지…‘벽보 훼손’에 맞서는 여성 후보들

입력 2018.06.1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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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동자가 담뱃불로 지져졌습니다. 이마와 윗입술에는 구멍이 뚫렸습니다. 얼굴이 아예 떼어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지난달 31일부터 서울 시내에 게시된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벽보에 가해진 일들입니다. 오늘(11일) 오전까지 강남구에서 21개, 노원구에서 2개, 강동구·구로구·동대문구·서대문구·송파구·영등포구에서 각각 1개 등 모두 29개의 벽보가 훼손됐습니다. 하루 두 세 개꼴로 봉변을 당한 셈입니다.

당장 지난 주말 사이에도 노원구와 송파구에서 훼손된 벽보 2개가 새로 발견됐습니다. 강남구 선릉역 앞 벽보는 추가 훼손돼, 후보의 두 눈이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선거 벽보 훼손은 종종 있어 왔던 일이지만, 군소정당 후보의 벽보가 이처럼 집중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훼손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훼손된 선거 벽보들. (출처: 트위터, 신지예 후보 캠프)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훼손된 선거 벽보들. (출처: 트위터, 신지예 후보 캠프)

신 후보의 선거 벽보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단지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을 뿐입니다. 신 후보 측이 이번 사건을 단순 공직선거 범죄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한 이유입니다.

미얀마에서도, 캐나다에서도…찢겨진 여성들

여성 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훼손되는 게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닙니다. 최근 3년 동안 벌어진 몇 가지 사건만 살펴볼까요.

2015년 미얀마에서는 총선에 출마한 여성 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찢기는 일이 잇따라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 응한 무소속 뇨뇨틴(Nyo Nyo Thinn) 후보(현 의원)는 "여성 후보들은 아주 빈번하게 괴롭힘의 대상이 되지만, 우리를 보호해주는 법은 전혀 없다"라며 자신을 괴롭히는 "전담 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뇨뇨틴 의원 페이스북출처: 뇨뇨틴 의원 페이스북

같은해 캐나다 총선에서도 여성 후보를 겨냥한 벽보 훼손이 잇따랐습니다.

몬트리올의 한 선거구에서는, 벽보에 실린 한 보수당 여성 후보의 얼굴에 핸드크림을 채워 넣은 콘돔을 붙인 경우가 5건, 후보의 성생활에 대한 음담패설이 적힌 벽보도 7개 발견됐습니다.

출처: CBC 기사 캡처출처: CBC 기사 캡처

당사자인 발레리 애술린(Valérie Assouline) 후보는 당시 지역지와의 인터뷰에서 '남자 후보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물론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 뒤, "이것은 나에 대한 공격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내가 여성처럼 보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또 다른 여성 후보의 포스터에는 남성의 성기가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여성 후보 사진이 꽃바구니 사진으로 바뀐 사연

성차별이 심각한 중동 지역 국가에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16년 요르단 총선에서, 한 지역구 여성 후보가 벽보에 본인의 얼굴이 아닌 꽃바구니 사진을 실어서 논란이 된 겁니다.

해당 후보 측은 현지 언론에 "지역 공동체에서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웠다"고 사진을 꽃바구니로 대체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후보의 사진이 낙서 등으로 훼손되거나 바닥에 버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트위터 @muslimgirl출처: 트위터 @muslimgirl

가장 최근인 지난해 캐나다 퀘백 주의 한 시장 선거(CDN-NDG)에서는, 여성 후보들의 벽보에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sluts)을 립스틱으로 휘갈겨 쓴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시장 후보였던 수 몽고메리(Sue Montgomery)는 캐나다 공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사회에 넘쳐난다"면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며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신문 기자 출신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지해왔던 그녀는, 47%의 득표율로 시장에 당선돼 현재 임기 중에 있습니다.

출처: 수 몽고메리 시장 페이스북출처: 수 몽고메리 시장 페이스북

"찢어진 벽보 두렵지만, '페미니스트' 정치 멈출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 또 한 사람의 여성 후보가 선거 벽보를 통해 공격받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사진이 찢어지고, 담뱃불에 태워지고, 납치까지 되는 것은 분명 무섭고 위협적인 일일 겁니다. 하지만 신지예 후보는 이번 벽보 훼손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 여성과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정치인,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필요한 이유를 절감했다고 말합니다.

"(벽보 훼손 사건으로) 저뿐만 아니라 저를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분들께서도 많은 두려움을 느끼셨어요. … 저는 한국 사회에 여성 혐오가 굉장히 뿌리깊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은 공포와 불안을 계속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지지하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나 너무 두려웠다'예요.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지 몰랐는데 정치로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공공의 영역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다섯 글자가 눈앞에 드러났다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용기를 준다. 이런 말씀도 해주셨어요. 저도 그런 말씀을 듣고 저 또한 용기가 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공격이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덕분에 용기가 난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저 또한 용기를 많이 얻습니다.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만약 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KBS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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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얀마부터 캐나다까지…‘벽보 훼손’에 맞서는 여성 후보들
    • 입력 2018-06-11 17:46:21
    취재K
두 눈동자가 담뱃불로 지져졌습니다. 이마와 윗입술에는 구멍이 뚫렸습니다. 얼굴이 아예 떼어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지난달 31일부터 서울 시내에 게시된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벽보에 가해진 일들입니다. 오늘(11일) 오전까지 강남구에서 21개, 노원구에서 2개, 강동구·구로구·동대문구·서대문구·송파구·영등포구에서 각각 1개 등 모두 29개의 벽보가 훼손됐습니다. 하루 두 세 개꼴로 봉변을 당한 셈입니다.

당장 지난 주말 사이에도 노원구와 송파구에서 훼손된 벽보 2개가 새로 발견됐습니다. 강남구 선릉역 앞 벽보는 추가 훼손돼, 후보의 두 눈이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선거 벽보 훼손은 종종 있어 왔던 일이지만, 군소정당 후보의 벽보가 이처럼 집중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훼손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더 주목받고 있습니다.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훼손된 선거 벽보들. (출처: 트위터, 신지예 후보 캠프)
신 후보의 선거 벽보에는 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단지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가 크게 적혀 있을 뿐입니다. 신 후보 측이 이번 사건을 단순 공직선거 범죄가 아닌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한 이유입니다.

미얀마에서도, 캐나다에서도…찢겨진 여성들

여성 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훼손되는 게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닙니다. 최근 3년 동안 벌어진 몇 가지 사건만 살펴볼까요.

2015년 미얀마에서는 총선에 출마한 여성 후보들의 선거 벽보가 찢기는 일이 잇따라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 응한 무소속 뇨뇨틴(Nyo Nyo Thinn) 후보(현 의원)는 "여성 후보들은 아주 빈번하게 괴롭힘의 대상이 되지만, 우리를 보호해주는 법은 전혀 없다"라며 자신을 괴롭히는 "전담 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뇨뇨틴 의원 페이스북
같은해 캐나다 총선에서도 여성 후보를 겨냥한 벽보 훼손이 잇따랐습니다.

몬트리올의 한 선거구에서는, 벽보에 실린 한 보수당 여성 후보의 얼굴에 핸드크림을 채워 넣은 콘돔을 붙인 경우가 5건, 후보의 성생활에 대한 음담패설이 적힌 벽보도 7개 발견됐습니다.

출처: CBC 기사 캡처
당사자인 발레리 애술린(Valérie Assouline) 후보는 당시 지역지와의 인터뷰에서 '남자 후보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물론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 뒤, "이것은 나에 대한 공격이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내가 여성처럼 보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또 다른 여성 후보의 포스터에는 남성의 성기가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여성 후보 사진이 꽃바구니 사진으로 바뀐 사연

성차별이 심각한 중동 지역 국가에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16년 요르단 총선에서, 한 지역구 여성 후보가 벽보에 본인의 얼굴이 아닌 꽃바구니 사진을 실어서 논란이 된 겁니다.

해당 후보 측은 현지 언론에 "지역 공동체에서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웠다"고 사진을 꽃바구니로 대체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후보의 사진이 낙서 등으로 훼손되거나 바닥에 버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트위터 @muslimgirl
가장 최근인 지난해 캐나다 퀘백 주의 한 시장 선거(CDN-NDG)에서는, 여성 후보들의 벽보에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sluts)을 립스틱으로 휘갈겨 쓴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시장 후보였던 수 몽고메리(Sue Montgomery)는 캐나다 공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성차별과 여성 혐오가 사회에 넘쳐난다"면서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며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습니다. 신문 기자 출신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지해왔던 그녀는, 47%의 득표율로 시장에 당선돼 현재 임기 중에 있습니다.

출처: 수 몽고메리 시장 페이스북
"찢어진 벽보 두렵지만, '페미니스트' 정치 멈출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 또 한 사람의 여성 후보가 선거 벽보를 통해 공격받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사진이 찢어지고, 담뱃불에 태워지고, 납치까지 되는 것은 분명 무섭고 위협적인 일일 겁니다. 하지만 신지예 후보는 이번 벽보 훼손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 여성과 성소수자를 대변하는 정치인,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필요한 이유를 절감했다고 말합니다.

"(벽보 훼손 사건으로) 저뿐만 아니라 저를 지지하는 여성 유권자분들께서도 많은 두려움을 느끼셨어요. … 저는 한국 사회에 여성 혐오가 굉장히 뿌리깊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은 공포와 불안을 계속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지지하시는 분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나 너무 두려웠다'예요.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지 몰랐는데 정치로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공공의 영역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다섯 글자가 눈앞에 드러났다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용기를 준다. 이런 말씀도 해주셨어요. 저도 그런 말씀을 듣고 저 또한 용기가 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많은 공격이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덕분에 용기가 난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저 또한 용기를 많이 얻습니다.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만약 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KBS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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