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조국에 긍지를 느낍네다” 북한 수행원들과 깨알 대화

입력 2018.06.16 (10:05) 수정 2018.06.16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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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정상회담이 끝나고 숙소인 싱가포르 세인트 레지스 호텔로 들어온 김정은 위원장. 이제 남은 것은 김 위원장이 언제 떠나는지, 혹시 변수는 없는지 마지막까지 그의 움직임을 취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 출국 예정 시각은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쯤. 서둘러 호텔로 갔습니다.


공항에서나 볼 듯한 삼엄한 보안 검색대가 김정은 위원장이 묵고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 입구에 설치됐습니다. 싱가포르 정부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철저히 경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X-레이를 통과하고 가방을 열어 물건까지 내보여도 투숙객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면 통과할 수 없습니다. "Are you a news reporter?"(취재기자 입니까?)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돌아온 것은 나가라는 손짓. 결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3시간이 지난 뒤 다시 호텔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도 싱가포르 경찰들이 모두 바뀌어 있었습니다. 셔츠를 풀고, 머리를 헝클고, 물건도 비닐봉지에 담아 최대한 기자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다행히 통과! 그렇게 김정은 위원장이 묵고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호텔 로비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까맣고 헐렁한 양복에 배지를 단 북한 수행원들. 싱가포르 경찰과 공무원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온, 투숙객처럼 보이는 기자들이었습니다.

현지시각 오후 7시. 알려진 시간보다 5시간이 지났지만 김 위원장은 아직도 호텔 안에 있었습니다. 북한 수행원들은 호텔 식당으로 들어가 코스요리를 먹었고, 의외로 여유 있는 모습으로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쉬기도 했습니다. 쉬고 있는 수행원에게 조심스레 물어봤습니다. 북한 수행원과 처음 얘기를 해보는 것이어서 떨렸던 목소리를 애써 눌러 감췄습니다.
"오늘 떠나는 것 맞아요?"
입은 열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도리도리'.
"(김정은 위원장)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역시 입은 열지 않고 두 손을 모아 뺨에 대며 자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미정상회담이 끝나자 몰려오는 피로감을 잠으로 해소하는 듯 보였습니다.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일정이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회담 전날 김정은 위원장은 밤늦은 시간에 수행원과 함께 '깜짝 외출'을 했습니다. 싱가포르의 대표적 관광지인 마리나베이 샌즈를 찾아 야경을 보고 초대형 식물원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도 방문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이런 파격 행보의 배경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싱가포르의 관광산업을 보고 배우려 한다는 추측이 나왔습니다. 현재 북한은 내년 4월 원산 갈마 해안 관광지구를 완공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 위원장이 깜짝 외출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북한은 개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떠나기 직전, 혹시나 또다른 경제 시찰을 하고 출국하지 않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기자) "오늘 떠납니까?"
(수행원) "잘 모르겠어 그건. 내일 갈 수도 있고."
(기자) "로비에 수행원이 많은데 어디 가려고 하나요?"
(수행원)"구경갈라고. 참관할라고."
또 이런 대답도 있었습니다. "산보 갑네다."
노동신문 기자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혹시 마리나베이 가세요?" "도로 복잡하지 않나 좀 보고."


북한 수행원들은 저희한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회담 봤습네까?" "봤습니다."
수행원에게 회담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상당히 호탕해 보였던 그 수행원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조국에 긍지를 느낍니다."

하지만 '산보를 간다'는 북한 수행원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리용호, 최선희, 김성혜 등 북한 주요 인물이 호텔 밖을 나오고 약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갑자기 싱가포르 경찰의 통제가 심해지고 사진 촬영은 더욱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현지시각으로 밤 11시 20분. 김정은 위원장이 드디어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실제로 본 김정은 위원장의 키는 170cm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김 위원장은 자신보다 키가 적어도 15cm나 더 큰 방탄수행단(?)에 둘러싸여 호텔 로비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일부 투숙객들이 마치 연예인을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 위원장은 무표정이었지만 상당히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방송용 카메라와 사진기를 든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은둔형 지도자'의 이미지는 그렇게 깨졌습니다. 전날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외무장관과 함께 웃으며 찍은 셀카가 떠올랐습니다. 세계무대로의 화려한 데뷔. 그는 이번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그렇게 없애고 새로운 젊은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현지시각으로 자정이 다 되어서 창이공항을 통해 싱가포르를 떠났습니다. 머릿속에는 김 위원장의 마지막 뒷모습과 대화를 나눴던 많은 북한 수행원들의 모습이 잔상으로 계속 남았습니다. 수행원으로서 김 위원장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우리말을 썼고, 대화하며 함께 웃었고, 심지어 저녁을 먹지 않았던 기자를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더 만나 그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물어보며 웃고 얘기하고 싶은데, 다시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번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터진 평화의 물길이 큰 강과 바다로 이어져 그들을 다시 만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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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조국에 긍지를 느낍네다” 북한 수행원들과 깨알 대화
    • 입력 2018-06-16 10:05:24
    • 수정2018-06-16 22:14:19
    취재후·사건후
북미정상회담이 끝나고 숙소인 싱가포르 세인트 레지스 호텔로 들어온 김정은 위원장. 이제 남은 것은 김 위원장이 언제 떠나는지, 혹시 변수는 없는지 마지막까지 그의 움직임을 취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싱가포르 출국 예정 시각은 현지 시각으로 오후 3시쯤. 서둘러 호텔로 갔습니다.


공항에서나 볼 듯한 삼엄한 보안 검색대가 김정은 위원장이 묵고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 입구에 설치됐습니다. 싱가포르 정부에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철저히 경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X-레이를 통과하고 가방을 열어 물건까지 내보여도 투숙객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면 통과할 수 없습니다. "Are you a news reporter?"(취재기자 입니까?)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했지만 돌아온 것은 나가라는 손짓. 결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3시간이 지난 뒤 다시 호텔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도 싱가포르 경찰들이 모두 바뀌어 있었습니다. 셔츠를 풀고, 머리를 헝클고, 물건도 비닐봉지에 담아 최대한 기자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다행히 통과! 그렇게 김정은 위원장이 묵고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호텔 로비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까맣고 헐렁한 양복에 배지를 단 북한 수행원들. 싱가포르 경찰과 공무원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온, 투숙객처럼 보이는 기자들이었습니다.

현지시각 오후 7시. 알려진 시간보다 5시간이 지났지만 김 위원장은 아직도 호텔 안에 있었습니다. 북한 수행원들은 호텔 식당으로 들어가 코스요리를 먹었고, 의외로 여유 있는 모습으로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쉬기도 했습니다. 쉬고 있는 수행원에게 조심스레 물어봤습니다. 북한 수행원과 처음 얘기를 해보는 것이어서 떨렸던 목소리를 애써 눌러 감췄습니다.
"오늘 떠나는 것 맞아요?"
입은 열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도리도리'.
"(김정은 위원장)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역시 입은 열지 않고 두 손을 모아 뺨에 대며 자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미정상회담이 끝나자 몰려오는 피로감을 잠으로 해소하는 듯 보였습니다.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일정이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회담 전날 김정은 위원장은 밤늦은 시간에 수행원과 함께 '깜짝 외출'을 했습니다. 싱가포르의 대표적 관광지인 마리나베이 샌즈를 찾아 야경을 보고 초대형 식물원인 '가든스 바이 더 베이'도 방문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이런 파격 행보의 배경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싱가포르의 관광산업을 보고 배우려 한다는 추측이 나왔습니다. 현재 북한은 내년 4월 원산 갈마 해안 관광지구를 완공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 위원장이 깜짝 외출을 통해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북한은 개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떠나기 직전, 혹시나 또다른 경제 시찰을 하고 출국하지 않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기자) "오늘 떠납니까?"
(수행원) "잘 모르겠어 그건. 내일 갈 수도 있고."
(기자) "로비에 수행원이 많은데 어디 가려고 하나요?"
(수행원)"구경갈라고. 참관할라고."
또 이런 대답도 있었습니다. "산보 갑네다."
노동신문 기자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혹시 마리나베이 가세요?" "도로 복잡하지 않나 좀 보고."


북한 수행원들은 저희한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회담 봤습네까?" "봤습니다."
수행원에게 회담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웃는 얼굴로 상당히 호탕해 보였던 그 수행원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조국에 긍지를 느낍니다."

하지만 '산보를 간다'는 북한 수행원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리용호, 최선희, 김성혜 등 북한 주요 인물이 호텔 밖을 나오고 약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갑자기 싱가포르 경찰의 통제가 심해지고 사진 촬영은 더욱더 엄격히 금지됐습니다. 현지시각으로 밤 11시 20분. 김정은 위원장이 드디어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실제로 본 김정은 위원장의 키는 170cm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김 위원장은 자신보다 키가 적어도 15cm나 더 큰 방탄수행단(?)에 둘러싸여 호텔 로비로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일부 투숙객들이 마치 연예인을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김 위원장은 무표정이었지만 상당히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눈에 띄는 것은 방송용 카메라와 사진기를 든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은둔형 지도자'의 이미지는 그렇게 깨졌습니다. 전날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외무장관과 함께 웃으며 찍은 셀카가 떠올랐습니다. 세계무대로의 화려한 데뷔. 그는 이번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자신에게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그렇게 없애고 새로운 젊은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현지시각으로 자정이 다 되어서 창이공항을 통해 싱가포르를 떠났습니다. 머릿속에는 김 위원장의 마지막 뒷모습과 대화를 나눴던 많은 북한 수행원들의 모습이 잔상으로 계속 남았습니다. 수행원으로서 김 위원장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우리말을 썼고, 대화하며 함께 웃었고, 심지어 저녁을 먹지 않았던 기자를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더 만나 그때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물어보며 웃고 얘기하고 싶은데, 다시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번 북미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터진 평화의 물길이 큰 강과 바다로 이어져 그들을 다시 만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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