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 침묵의 한

입력 1992.01.1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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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 침묵의한; 일제시대 때 정신대 로 끌려갔던 노시복 배봉기 할머니의 현재생활; 일본인 위안부 히로타 씨 인터뷰; 기자회견 하는 김학순 할머니


박대석 앵커 :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됐던 여인들은 용케 살아 왔어도 얼굴을 들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침묵으로 한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역사로서의 기록은 남겨야 합니다.

권혁주 기자가 일본 패망 이후의 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를 취재했습니다.


24살까지 6년 동안 우리 모두 죽지 못해 살았어.


권혁주 기자 :

19살 때 강제로 끌려가 싱가폴, 인도네시아 그리고 태국을 전전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위안부 노릇을 했던 노시복 할머니, 자신의 삶의 일부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잊은 듯 태국 한야이에서 밝은 새 삶을 살아왔지만 그때의 생활을 묻는 질문엔 굳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몰라, 몰라, 내 태생은 만주 필요 없어, 필요 없어.


권혁주 기자 :

한국이라는 것조차 밝히길 꺼리며 살아온 한평생, 연합군의 폭격 속에서 낮에는 탄약을 나르고 밤에는 위안부 노릇을 해야 했던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이 끌려온 오키나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작년 11월에 한 많은 생을 마쳤습니다.


군인 놈의 새끼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그 말도 못해요, 그 당한 얘기는 말도 못해요. 가슴이 아프고, 말도 못 한 다구요.


권혁주 기자 :

해방된 지 46년만에야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는 가슴속에 묻어 왔던 한 맺힌 과거를 끄집어내곤 울음으로 끝을 냈습니다.

20만 명에 이르는 종군 위안부 가운데 그 사실이 밝혀진 한국인 위안부는 현재 노시복, 배봉기, 김학순 할머니 3명뿐이지만 이들 모두는 이렇게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일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는 일본인 위안부였던 시로타시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욕할 틈도 없었어요.

세면대를 사용했어요. 하루에 30-40명 정도 매일 심하게 섹스를 강요받았어요.

군인들이 쭉 서있었고.


권혁주 기자 :

인간사냥, 노예사냥으로 불리던 정신대 강제연행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부터 국민포고령이 내려진 44년에 이르러 극에 달합니다.

12살 이상의 소녀들은 물론 결혼한 여성까지 빨래터에서, 들에서 닥치는 대로 잡혀간 한국 여성들은 중국 대륙과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그리고 싸이판 괌 등 남방에서 사할린에 이르기까지 확대전 전산을 따라 일본군이 있는 곳은 어디나 끌려 다니며 위안부의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일본인은 왜 우리의 여성들을 끌고 간 것일까?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라는 책에서 작가 김일매는 그 이유를 한민족의 모체가 되는 여성을 짓밟음으로서 민족의 동질성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밝히며 이것은 일본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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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대 침묵의 한
    • 입력 1992-01-14 21:00:00
    뉴스 9

정신대 침묵의한; 일제시대 때 정신대 로 끌려갔던 노시복 배봉기 할머니의 현재생활; 일본인 위안부 히로타 씨 인터뷰; 기자회견 하는 김학순 할머니


박대석 앵커 :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됐던 여인들은 용케 살아 왔어도 얼굴을 들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침묵으로 한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역사로서의 기록은 남겨야 합니다.

권혁주 기자가 일본 패망 이후의 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를 취재했습니다.


24살까지 6년 동안 우리 모두 죽지 못해 살았어.


권혁주 기자 :

19살 때 강제로 끌려가 싱가폴, 인도네시아 그리고 태국을 전전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위안부 노릇을 했던 노시복 할머니, 자신의 삶의 일부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잊은 듯 태국 한야이에서 밝은 새 삶을 살아왔지만 그때의 생활을 묻는 질문엔 굳게 입을 다물었습니다.


나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몰라, 몰라, 내 태생은 만주 필요 없어, 필요 없어.


권혁주 기자 :

한국이라는 것조차 밝히길 꺼리며 살아온 한평생, 연합군의 폭격 속에서 낮에는 탄약을 나르고 밤에는 위안부 노릇을 해야 했던 배봉기 할머니는 자신이 끌려온 오키나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작년 11월에 한 많은 생을 마쳤습니다.


군인 놈의 새끼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그 말도 못해요, 그 당한 얘기는 말도 못해요. 가슴이 아프고, 말도 못 한 다구요.


권혁주 기자 :

해방된 지 46년만에야 국내 거주자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는 가슴속에 묻어 왔던 한 맺힌 과거를 끄집어내곤 울음으로 끝을 냈습니다.

20만 명에 이르는 종군 위안부 가운데 그 사실이 밝혀진 한국인 위안부는 현재 노시복, 배봉기, 김학순 할머니 3명뿐이지만 이들 모두는 이렇게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일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는 일본인 위안부였던 시로타시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욕할 틈도 없었어요.

세면대를 사용했어요. 하루에 30-40명 정도 매일 심하게 섹스를 강요받았어요.

군인들이 쭉 서있었고.


권혁주 기자 :

인간사냥, 노예사냥으로 불리던 정신대 강제연행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부터 국민포고령이 내려진 44년에 이르러 극에 달합니다.

12살 이상의 소녀들은 물론 결혼한 여성까지 빨래터에서, 들에서 닥치는 대로 잡혀간 한국 여성들은 중국 대륙과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그리고 싸이판 괌 등 남방에서 사할린에 이르기까지 확대전 전산을 따라 일본군이 있는 곳은 어디나 끌려 다니며 위안부의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일본인은 왜 우리의 여성들을 끌고 간 것일까?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라는 책에서 작가 김일매는 그 이유를 한민족의 모체가 되는 여성을 짓밟음으로서 민족의 동질성을 말살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밝히며 이것은 일본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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