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추적 781-1234] 어느 광복군 가족

입력 1994.06.0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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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앵커 :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옛날 나라를 잃었던 시절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몸 바쳐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감회가 깊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광복군으로 활동하고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어느 광복군의 사연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은 유족들은 옛동지의 유족들과 함께 서류를 만들어서 보훈처에 냈는데도 심사조차하지 않아서 누락됐다고 주장합니다.

백운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노래)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백운기 기자 :

독립기념관 안에 있는 임시정부관 입니다.

이 사진은 광복이후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서 중국에 남은 임시정부 조화대표단의 모습입니다. 가운데 보이는 이분이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고 안담용 선생입니다. 광복군 복장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노래) 나아가 나아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 가자


서울 중화동 주택가 골목길, 기울어져 가는 처마를 간신히 붙들어 맨 단칸 셋방이 안담용선생 유족들의 보금자리 입니다.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안담용 선생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담용선생은 6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양례(미망인) :

내가 인정받지 못해서 자식들 못살게 했다고 돌아가실 때도 많이 울고 돌아가셨어요.


백운기 기자 :

안담용선생은 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했는가?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위원회에서 심사를 거쳤습니까?


거쳤습니다.


이선우 (국가보훈처) :

신청한 사람은 (서류를)다 올리지 안올리는 거 없어요.


백운기 기자 :

그러나, 이 담당과장의 얘기와는 달리, 실제 안담용씨의 심사위원회에 올라가지도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서류를 접수했던 전 보훈처 자료 관리과 직원의 얘기입니다.


그때 안담용씨 것도 심사에 올라갔습니까?


보훈처 전직원 서모씨 :

그기도 못 올라갔죠.


그러면 아예 심사가 안됐습니까?


그렇죠. 온 자료가.. 자료가 없어가지고 그 양반은 못 올라 갔죠.


백운기 기자:

아들 승덕씨가 더욱 억울해 하는 것은 지난 90년 부친의 옛동기 24명의 유족과 함께 서류를 만들어서 제출했는데도 유독 아버지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안승덕 (고 안담용씨 아들) :

자료 미달이다, 이것은.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이해가 안가고 어떠한 착오라든지 이러한 사람들의 억지적인 장난이 없이는, 이게 한사람만 누락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백승기 기자 :

안담용선생이 광복군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옛동지의 증언으로도 확인됩니다.

황의선 (광북군동지회 부회장) :

이용화, 한선, 김광수, 강재식, 안담용해서 이 멤바에 들어있습니다. 똑같이 해가지고...


서류도 똑같고, 구비서류도 똑같고, 증거자료도 똑같고...


그렇죠. 그 안에 들어있는 사진들이..


그런데, 안담용씨 이름만 빠졌다..


예.


백운기 기자 :

황선생이 광복군당시 꼼꼼하게 적었던 색바랜 일기에도, 함께 사선을 넘었던 동지, 안담용선생이름 석자가 뚜렷합니다.

아들 안승덕씨는 해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돌아오면은 선친에 대한 죄송함으로 6월을 맞습니다.

KBS 뉴스, 백운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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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추적 781-1234] 어느 광복군 가족
    • 입력 1994-06-04 21:00:00
    뉴스 9

김광일 앵커 :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옛날 나라를 잃었던 시절엔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몸 바쳐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누구보다 감회가 깊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은 광복군으로 활동하고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어느 광복군의 사연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은 유족들은 옛동지의 유족들과 함께 서류를 만들어서 보훈처에 냈는데도 심사조차하지 않아서 누락됐다고 주장합니다.

백운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노래)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백운기 기자 :

독립기념관 안에 있는 임시정부관 입니다.

이 사진은 광복이후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를 보호하기 위해서 중국에 남은 임시정부 조화대표단의 모습입니다. 가운데 보이는 이분이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고 안담용 선생입니다. 광복군 복장의 모습이 선명합니다.


(노래) 나아가 나아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 가자


서울 중화동 주택가 골목길, 기울어져 가는 처마를 간신히 붙들어 맨 단칸 셋방이 안담용선생 유족들의 보금자리 입니다.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안담용 선생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안담용선생은 6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양례(미망인) :

내가 인정받지 못해서 자식들 못살게 했다고 돌아가실 때도 많이 울고 돌아가셨어요.


백운기 기자 :

안담용선생은 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했는가?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위원회에서 심사를 거쳤습니까?


거쳤습니다.


이선우 (국가보훈처) :

신청한 사람은 (서류를)다 올리지 안올리는 거 없어요.


백운기 기자 :

그러나, 이 담당과장의 얘기와는 달리, 실제 안담용씨의 심사위원회에 올라가지도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서류를 접수했던 전 보훈처 자료 관리과 직원의 얘기입니다.


그때 안담용씨 것도 심사에 올라갔습니까?


보훈처 전직원 서모씨 :

그기도 못 올라갔죠.


그러면 아예 심사가 안됐습니까?


그렇죠. 온 자료가.. 자료가 없어가지고 그 양반은 못 올라 갔죠.


백운기 기자:

아들 승덕씨가 더욱 억울해 하는 것은 지난 90년 부친의 옛동기 24명의 유족과 함께 서류를 만들어서 제출했는데도 유독 아버지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안승덕 (고 안담용씨 아들) :

자료 미달이다, 이것은.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이해가 안가고 어떠한 착오라든지 이러한 사람들의 억지적인 장난이 없이는, 이게 한사람만 누락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백승기 기자 :

안담용선생이 광복군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옛동지의 증언으로도 확인됩니다.

황의선 (광북군동지회 부회장) :

이용화, 한선, 김광수, 강재식, 안담용해서 이 멤바에 들어있습니다. 똑같이 해가지고...


서류도 똑같고, 구비서류도 똑같고, 증거자료도 똑같고...


그렇죠. 그 안에 들어있는 사진들이..


그런데, 안담용씨 이름만 빠졌다..


예.


백운기 기자 :

황선생이 광복군당시 꼼꼼하게 적었던 색바랜 일기에도, 함께 사선을 넘었던 동지, 안담용선생이름 석자가 뚜렷합니다.

아들 안승덕씨는 해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돌아오면은 선친에 대한 죄송함으로 6월을 맞습니다.

KBS 뉴스, 백운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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