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초점] 노르망디 상륙 그 후 50년

입력 1994.06.0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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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웅 특파원 :

프랑스 빠리에서 영불해엽 쪽으로 2백Km 쯤 달려가면은 이른바 노르망디라고 불리우는 프랑스 북부지방이 나옵니다. 노르망디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큰 도시가 깡이라는 도시인데, 이 깜을 중심으로 곡물과 사과 그리고 철광 등으로 중화확 공업이 발달했고, 노르망디 해변은 항구와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말기인 1944년 6월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해진 이곳은 올해로 그 상륙 작적이 실시된 지 꼭 50주년을 맞으면서, 연합군으로 참가했던 참전용사와 그 가족, 각국의 원수와 귀빈, 프랑스주민과 보도진 등 수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각종 기념행사가 지역에 따라서 성대히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서있는 바로 이 지역이, 영어표기로는 스워드 비치, 그리고 제가 들고 있는 이 프랑스 지도에는, 오이스트렘 해변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입장에서 보면 맨 오른편이 되고, 그리고 공격을 개시했던 연합군 측 마다 쪽에서 보면, 맨 왼쪽편이 됩니다. 이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으로 약 80Km 지역을 5개 지역으로 나뉘어서 연합군인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카나다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바로 그날이 정확히 50년 전 1944년 6월 6일 새벽이었습니다.

오늘도 바람을 이용해서,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윈드서핑을 한가롭게 즐기고 있지만은 바로 이 해변에 파도 높이 2m, 바람속도 15노트의 조건을 이용해서 37만 명의 연합군병사들은 아이젠하우워 장군의 작전 명령서를 받아 쥔 채, 나타난 것입니다.

골드비치, 이곳은 영국군과 카나다군이 상륙했던 해변이지만은 독일군의 해안방어를 위해서 사용됐던 장비들이 지금도 해안근처에 전시돼있었으며, 연합군이 첫날 7개 사단을 상륙시킨 부표들이 골드비치 바다와 해변에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쟝두생 (63. 골드해변주민) :

이것들은 인공부표인데, 연합군은 콩크리트로 된 기둥을 바다 밑에 넣어 기초를 만든 뒤 이 같은 블록으로 부교를 만들고 탱크. 차량. 대포 등을 해안에 상륙 시켰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부표설치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주민 한 사람이, 아직도 이 해안을 지키며,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상륙당시 이곳에 살았죠?


앙뚜앙 렁글르와 (68) 부표 설치했던 주민 :

네, 상륙전 때 이 근처 해변에 살았죠, 밤 10시-11시쯤 비행기가 계속 날아다녀 무엇인가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는데 새벽 4시 반쯤 독일인이 고용한 폴란드 일꾼들이 뛰어다니며 ‘상륙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상륙당시 독일군의 저항도 한때 대단했던 듯, 건재한 해안 벙커들이 여기저기서 남아있고, 특히 현재 프랑스의 지방소형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대형 벙커는 5층 철근 콩크리트로 벽두께가 lm정도나 돼서 내부는, 조금도 파손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박물관 이름도 르 그랑드 뮤지에, 대형벙커인 이 진지는 작전을 위한 통신시설은 물론이고, 각종 대포와 전면해안 180도를 회전하면서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이 그대로 보전돼 있었습니다. 1944년 5월 2일, 롬멜 장관이 이 곳 병사들을 격려한 사진도 선명히 보관돼 있었습니다.

스워드, 주노, 골드, 오마하, 유타 등 5군데 해안공격 지점 중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냈던 이 오마하 해변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된 동료를 생각하며, 이곳을 찾았다는 한 6.25 참전용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이넨 (67. 네덜런드인 한국전 참전용사) :

2차 대전은 50년 전 일인데 당시 나는 젊은 병사였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생명과 세계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나는 유엔군의 일원으로써 한국전에도 참가했으며 우리는 세계의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이 배지는 2차 대전을 상징하며 여기 3색 가운데 붉은색은 미국. 청색은 캐나다. 백색은 영국이고 전체는 프랑스와 독일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서 만들었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오마하 해변 중에 가장 경사도가 심했던, 오오크절벽 해안에 구축한 해안의 진지들이 마치 개미굴이 연결되듯 반영구적인 철근 콩크리트 구조물이었지만 7백t의 포탄세례를 받고는 집체만한 콘크리트 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벙커 내부와 콩크리트 구조물 위를 전쟁의 참상을 연상하며, 찾아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성공은 했습니다만은, 이 뒤에 보시는 독일군의 해안포대 흔적을 보더라도 얼마나 저항이 심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약 1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깡도시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데는 약 20여일이 걸려서, 6월 6일에 상륙작전이 시작돼서 6월말에나 깡이 해방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프란세스치(40. 오마하 해변 주민) :

상륙작전 당시 어머니는 17살 였는데, 바다에 떠있는 배를 보고 기뻐했고 아침 일찍부터 폭격이 시작돼 숲과 들로 피난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피해는 엄청났고 교두보 확보에 힘들었다고 들었다.


고수웅 특파원 :

해안을 떠나 내륙 쪽으로 들어오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조그만 쌩뜨 메르에글리스 즉, 성모교회 마을은 상륙당시의 낙하산 부대와 맺은 인연 때문에, 해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을 맞고 있었습니다.

낙하산으로 투하하다가 이 성당종탑에 걸려서, 4시간 만에 주민도움으로 구출됐던 미국의 존 스틸병사도, 오늘 74살의 노병으로 이곳을 찾아 머네킹으로 바뀌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간인 1944년 6월6일부터 8월29일까지 약 석 달 동안 인명피해를 보면은, 연합군측이 행방불명을 포함해서 사망이 8만4천911명, 부상이 15만3천475명이었고, 독일군의 피해는 희생자가 약 20만 명, 포로가 또 20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 밖의 프랑스의 순수한 민간인 피해는 만5천명이었습니다.

이 오마하의 해변을 통해서 상륙작전을 벌이다가 고이 잠든 미군들은 미 제5군단 29사단 소속인 4개 보병대대 병사들 이었습니다. 총 3만6천여 명 가운데서 3만425명만이 상륙에 성공을 했고, 약 2천여 명이 희생이 되었으며, 해군과 공군을 합쳐서는 약 3천여 명이 희생을 되어서,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미국의 한대령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곳에는 딱 2종류의 인간만이 존재 한다. 그 하나는 죽은 자요, 또 하나는 곧 죽을 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제기랄 전투’였습니다.


헨리 호서 (84. 미국인 참전당시 중대장) :

50년 전에 비해 많이 변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변한 이곳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행운입니다. 당시 이곳을 오르기가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바로 이곳에서 많은 부하들을 잃었습니다. 상륙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간의 전투는 정말 치열했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순수한 미군만은, 9천 386명으로 연합군 중에 가장 많았습니다. 젊은 미국인들의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프랑스를 해방시켰다는 점을 다음세대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카 (10 프랑스 ‘깡’국교생) :

당시 연합군은 우리를 위해 싸웠고 우리나라를 해방시키지 못했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고 자유 없는 식민지인 이었을 거예요.


고수웅 특파원 :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의 폐망을 앞당겼고, 그 주된 폐망원인은, 소련군이 130개 군 사단으로 열흘 만에 독일 야전군을 괴멸시키고, 35만 명을 살상하거나 생포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는 페튼 장군 밑에 2개의 가짜 야전군을 만들어서, 영-불해 엽에서 독일에 가장 가까운 깔레에 상륙하는 척 했던, 첩보전도 들 수가 있습니다.

나치즘에 대항해온 연합군은, 전쟁 후에 민주주의의 실현을 꾀했지만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국가는 전후처리를 둘러쌓고, 이해가 서로 엇갈려 결국, 두 체제로 나뉘어졌습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는 공산주의라는 정치체제였고, 프랑스-영국 등은 식민지를 잃고, 유럽에서는 공산당의 힘이 크게 성장했지만, 50년이 지난지금 두 양극체제는 붕괴되고 과거의 적이 현재의 친구가 되고, 국경도 없앤 채 한 연합국가로 결속돼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절했던 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아직도 독일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습니다.


홈 부르크 (74. 네덜란드 노틀담 시민) :

나는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정말 혹독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독일이 패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은 지 꼭 50년이 지난 지금, 유럽전체는 아니지만은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1965년부터 1976년 사이에 태어난 전후세대에게는 이번 노르망디 50주년 기념행사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일 뿐 큰 의미부여를 않고 있으며, 따라서 헬무트 콜 독일수상의 행사 참여도, 과거는 지나갔으므로 친구로서 참석해도 좋다는 쪽이 69%나 됐습니다.

그러나, 65세 이상의 세대는 이 행사가 아주 중요하다는 쪽이 85%나 됐고, 콜 수상의 참석도 반대한다는 쪽이어서 결국, 이웃국들은 콜 수상의 참석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대의 갈등도, 오늘의 이 화려한 기념식들도 인간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 있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100주년 기념행사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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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초점] 노르망디 상륙 그 후 50년
    • 입력 1994-06-06 21:00:00
    뉴스 9

고수웅 특파원 :

프랑스 빠리에서 영불해엽 쪽으로 2백Km 쯤 달려가면은 이른바 노르망디라고 불리우는 프랑스 북부지방이 나옵니다. 노르망디 지역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큰 도시가 깡이라는 도시인데, 이 깜을 중심으로 곡물과 사과 그리고 철광 등으로 중화확 공업이 발달했고, 노르망디 해변은 항구와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말기인 1944년 6월에 연합군의 상륙작전으로 유명해진 이곳은 올해로 그 상륙 작적이 실시된 지 꼭 50주년을 맞으면서, 연합군으로 참가했던 참전용사와 그 가족, 각국의 원수와 귀빈, 프랑스주민과 보도진 등 수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각종 기념행사가 지역에 따라서 성대히 열리고 있습니다.

제가 서있는 바로 이 지역이, 영어표기로는 스워드 비치, 그리고 제가 들고 있는 이 프랑스 지도에는, 오이스트렘 해변으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입장에서 보면 맨 오른편이 되고, 그리고 공격을 개시했던 연합군 측 마다 쪽에서 보면, 맨 왼쪽편이 됩니다. 이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서쪽으로 약 80Km 지역을 5개 지역으로 나뉘어서 연합군인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카나다군이 상륙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바로 그날이 정확히 50년 전 1944년 6월 6일 새벽이었습니다.

오늘도 바람을 이용해서,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윈드서핑을 한가롭게 즐기고 있지만은 바로 이 해변에 파도 높이 2m, 바람속도 15노트의 조건을 이용해서 37만 명의 연합군병사들은 아이젠하우워 장군의 작전 명령서를 받아 쥔 채, 나타난 것입니다.

골드비치, 이곳은 영국군과 카나다군이 상륙했던 해변이지만은 독일군의 해안방어를 위해서 사용됐던 장비들이 지금도 해안근처에 전시돼있었으며, 연합군이 첫날 7개 사단을 상륙시킨 부표들이 골드비치 바다와 해변에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쟝두생 (63. 골드해변주민) :

이것들은 인공부표인데, 연합군은 콩크리트로 된 기둥을 바다 밑에 넣어 기초를 만든 뒤 이 같은 블록으로 부교를 만들고 탱크. 차량. 대포 등을 해안에 상륙 시켰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부표설치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주민 한 사람이, 아직도 이 해안을 지키며,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상륙당시 이곳에 살았죠?


앙뚜앙 렁글르와 (68) 부표 설치했던 주민 :

네, 상륙전 때 이 근처 해변에 살았죠, 밤 10시-11시쯤 비행기가 계속 날아다녀 무엇인가 일어나리라고 생각했는데 새벽 4시 반쯤 독일인이 고용한 폴란드 일꾼들이 뛰어다니며 ‘상륙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상륙당시 독일군의 저항도 한때 대단했던 듯, 건재한 해안 벙커들이 여기저기서 남아있고, 특히 현재 프랑스의 지방소형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대형 벙커는 5층 철근 콩크리트로 벽두께가 lm정도나 돼서 내부는, 조금도 파손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박물관 이름도 르 그랑드 뮤지에, 대형벙커인 이 진지는 작전을 위한 통신시설은 물론이고, 각종 대포와 전면해안 180도를 회전하면서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이 그대로 보전돼 있었습니다. 1944년 5월 2일, 롬멜 장관이 이 곳 병사들을 격려한 사진도 선명히 보관돼 있었습니다.

스워드, 주노, 골드, 오마하, 유타 등 5군데 해안공격 지점 중에서 가장 큰 희생자를 냈던 이 오마하 해변에서, 자유를 위해 희생된 동료를 생각하며, 이곳을 찾았다는 한 6.25 참전용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이넨 (67. 네덜런드인 한국전 참전용사) :

2차 대전은 50년 전 일인데 당시 나는 젊은 병사였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생명과 세계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나는 유엔군의 일원으로써 한국전에도 참가했으며 우리는 세계의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이 배지는 2차 대전을 상징하며 여기 3색 가운데 붉은색은 미국. 청색은 캐나다. 백색은 영국이고 전체는 프랑스와 독일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서 만들었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오마하 해변 중에 가장 경사도가 심했던, 오오크절벽 해안에 구축한 해안의 진지들이 마치 개미굴이 연결되듯 반영구적인 철근 콩크리트 구조물이었지만 7백t의 포탄세례를 받고는 집체만한 콘크리트 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벙커 내부와 콩크리트 구조물 위를 전쟁의 참상을 연상하며, 찾아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상륙작전에 성공은 했습니다만은, 이 뒤에 보시는 독일군의 해안포대 흔적을 보더라도 얼마나 저항이 심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약 1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깡도시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데는 약 20여일이 걸려서, 6월 6일에 상륙작전이 시작돼서 6월말에나 깡이 해방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프란세스치(40. 오마하 해변 주민) :

상륙작전 당시 어머니는 17살 였는데, 바다에 떠있는 배를 보고 기뻐했고 아침 일찍부터 폭격이 시작돼 숲과 들로 피난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피해는 엄청났고 교두보 확보에 힘들었다고 들었다.


고수웅 특파원 :

해안을 떠나 내륙 쪽으로 들어오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조그만 쌩뜨 메르에글리스 즉, 성모교회 마을은 상륙당시의 낙하산 부대와 맺은 인연 때문에, 해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을 맞고 있었습니다.

낙하산으로 투하하다가 이 성당종탑에 걸려서, 4시간 만에 주민도움으로 구출됐던 미국의 존 스틸병사도, 오늘 74살의 노병으로 이곳을 찾아 머네킹으로 바뀌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간인 1944년 6월6일부터 8월29일까지 약 석 달 동안 인명피해를 보면은, 연합군측이 행방불명을 포함해서 사망이 8만4천911명, 부상이 15만3천475명이었고, 독일군의 피해는 희생자가 약 20만 명, 포로가 또 20만 명 정도였습니다. 이 밖의 프랑스의 순수한 민간인 피해는 만5천명이었습니다.

이 오마하의 해변을 통해서 상륙작전을 벌이다가 고이 잠든 미군들은 미 제5군단 29사단 소속인 4개 보병대대 병사들 이었습니다. 총 3만6천여 명 가운데서 3만425명만이 상륙에 성공을 했고, 약 2천여 명이 희생이 되었으며, 해군과 공군을 합쳐서는 약 3천여 명이 희생을 되어서,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미국의 한대령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곳에는 딱 2종류의 인간만이 존재 한다. 그 하나는 죽은 자요, 또 하나는 곧 죽을 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제기랄 전투’였습니다.


헨리 호서 (84. 미국인 참전당시 중대장) :

50년 전에 비해 많이 변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변한 이곳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행운입니다. 당시 이곳을 오르기가 힘들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바로 이곳에서 많은 부하들을 잃었습니다. 상륙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간의 전투는 정말 치열했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희생된 순수한 미군만은, 9천 386명으로 연합군 중에 가장 많았습니다. 젊은 미국인들의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프랑스를 해방시켰다는 점을 다음세대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카 (10 프랑스 ‘깡’국교생) :

당시 연합군은 우리를 위해 싸웠고 우리나라를 해방시키지 못했다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고 자유 없는 식민지인 이었을 거예요.


고수웅 특파원 :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의 폐망을 앞당겼고, 그 주된 폐망원인은, 소련군이 130개 군 사단으로 열흘 만에 독일 야전군을 괴멸시키고, 35만 명을 살상하거나 생포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는 페튼 장군 밑에 2개의 가짜 야전군을 만들어서, 영-불해 엽에서 독일에 가장 가까운 깔레에 상륙하는 척 했던, 첩보전도 들 수가 있습니다.

나치즘에 대항해온 연합군은, 전쟁 후에 민주주의의 실현을 꾀했지만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국가는 전후처리를 둘러쌓고, 이해가 서로 엇갈려 결국, 두 체제로 나뉘어졌습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는 공산주의라는 정치체제였고, 프랑스-영국 등은 식민지를 잃고, 유럽에서는 공산당의 힘이 크게 성장했지만, 50년이 지난지금 두 양극체제는 붕괴되고 과거의 적이 현재의 친구가 되고, 국경도 없앤 채 한 연합국가로 결속돼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절했던 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아직도 독일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습니다.


홈 부르크 (74. 네덜란드 노틀담 시민) :

나는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정말 혹독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독일이 패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고수웅 특파원 :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은 지 꼭 50년이 지난 지금, 유럽전체는 아니지만은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1965년부터 1976년 사이에 태어난 전후세대에게는 이번 노르망디 50주년 기념행사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일 뿐 큰 의미부여를 않고 있으며, 따라서 헬무트 콜 독일수상의 행사 참여도, 과거는 지나갔으므로 친구로서 참석해도 좋다는 쪽이 69%나 됐습니다.

그러나, 65세 이상의 세대는 이 행사가 아주 중요하다는 쪽이 85%나 됐고, 콜 수상의 참석도 반대한다는 쪽이어서 결국, 이웃국들은 콜 수상의 참석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대의 갈등도, 오늘의 이 화려한 기념식들도 인간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앞으로 있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100주년 기념행사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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