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동일본 대지진 7년…일본은 아직도 복구 중

입력 2018.07.10 (16:23) 수정 2018.07.1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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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4월 16일이 되면 언론에서는 1주년, 2주년 이런 식으로 보도한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유가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안전의식은 얼마나 개선됐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에서는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라는 유례없는 재난이 발생했다. 3가지가 한꺼번에 닥쳐왔다는 의미로 '트리플 디재스터'(triple disaster)라고 불린다. 총 사망자는 1만 8천 명 이상으로 일본에서도 매년 3월 11일이 되면 '기념일 보도'라고 불리는 뉴스들이 쏟아져나오곤 했다.

그러나 7년이 흐른 지금은 뉴스가 대폭 줄었다. 겨우 지역 언론들을 중심으로 보도가 이어지는 수준이다. 복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진과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미야기 현을 찾았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쓰나미 피해 컸던 센다이, 아직도 공사 중

센다이 시는 지진의 진앙으로부터 서쪽으로 179km 떨어져 있었다. 당시 피해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재난 강국이라는 일본이지만 센다이 시는 아직도 힘겨운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무너진 제방을 높게 쌓는 작업과 도로 포장, 주택 건설 등의 작업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대형 트럭과 레미콘 차량이 쉴새 없이 흙먼지를 날리며 공사장을 오가고 있었다. 쓰나미가 밀려온 지역은 거주 금지지역으로 지정됐고, 주민들은 정부가 조성한 공공 주택으로 이사하거나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지진이 발생한 순간, 많은 사람이 넓은 공터 등지로 대피했다. 그러나 추가 여진이 언제 발생할지 몰라 그대로 있거나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 사람들은 곧이어 밀려온 쓰나미에 휩쓸리고 말았다.

지진이 났을 때는 운동장처럼 떨어질 물건이 없는 공간으로 피해야 하지만 쓰나미는 얘기가 달라진다. 밀려오는 바닷물을 피해 고층건물 옥상이나 야산 등 가능한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 센다이보다 더 바다와 가까운 이시노마키 시에서는 쓰나미로 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오카와 초등학교 74명 희생, 대피만 시켰어도…

당시 엄청난 지진 후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지만 높은 제방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설마 하는 생각에 집에 머물러 있었고 가족을 데리러 나갔던 사람들은 참변을 당했다. 또 강과 가까운 곳에 있던 오카와(大川) 초등학교에서는 전교생에 가까운 74명의 어린이가 숨졌다.

지진 발생 직후 교직원 10명은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대피시켰다. 바다와 4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쓰나미가 훨씬 파괴적이었다. 지진 발생 후 50분 정도의 대피 시간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이 시킨 대로 가만히 운동장에 머물러 있었고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주변 중학교의 선생님이면서 당시 사고로 딸을 잃은 사토 토시로 씨는 "쓰나미는 물만 밀려오는 게 아니라 집과 배, 자동차, 흙, 나무, 사람까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휩쓸고 온다"면서 "수만 그루의 소나무 등 잔해가 밀려와 다리를 막으면서 강물이 범람했고 학교와 마을을 송두리째 덮쳤다"고 당시 처참한 상황을 설명했다.

오카와 초등학교는 내진 설계가 돼 있어 지진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쓰나미로 7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이 지역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사토 씨는 "당시 교장 선생님이 출장 중이어서 교사들이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며 "주변에 바로 대피할 수 있는 야산이 있는데도 그쪽으로 대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말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은 ‘보트’가 아닌 ‘사람’

그는 한국의 세월호 참사 때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세월호에 보트는 많았지만 목숨을 구하지 못했고, 오카와 교정 근처에는 야산이 있었지만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매우 중요하다"며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평소에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아이들이 전원 구조돼 헬기에 실려올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줄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또 4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준비해둔 새 교복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재난 시 유일한 대안은 TV 아닌 ‘라디오’

미야기 현에서 지진 당일에는 모든 전기가 끊겼고 다음날에야 지역 라디오 방송이 재개됐다. 1주일간 주민들의 이름과 주소를 일일이 읽어주며 생사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지역 케이블방송국에서는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안부를 확인하고 대피시켰다.

야기 신타로 미야기케이블테레비 방송기술부장은 "TV 방송이 복구되는 데 3주 정도가 걸렸다"며 "재해 상황에서는 안테나만 있으면 방송할 수 있는 라디오가 최선의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대지진 이후 재해에 관한 내용만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지역 FM 방송도 시작됐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정전으로 TV를 볼 수 없고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을 때 유일하게 라디오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재난 시 휴대할 수 있는 라디오를 평소에도 준비한다.


학교 보존 놓고도 의견 팽팽, 아직도 싸움은 진행 중

아이들이 뛰놀던 오카와 초등학교의 교실은 모두 무너져 폐허와 같은 모습이다. 구름다리와 야외 시설들도 마찬가지다. 2층 천장까지 물이 들어찬 흔적이 남아있었다. 학교를 이 상태로 보존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보존을 반대했던 시에서는 학교 관리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자원봉사자와 유족, 졸업생들이 청소를 하고 꽃을 심고 방문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사고 후 이시노마키 시와 교육청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임을 강조하기에만 급급했다. 살아남은 교직원은 3월 11일 당시가 아닌, 수풀이 우거진 7월 11일의 사진을 보여주며 산으로 대피하기가 어려웠다고 증언했다. 결국, 유가족들은 시효를 하루 남겨두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1, 2차 재판 모두 승소한 상태다.

후쿠시마 원전 지역 주민들, 정부 불신 여전

원전 폭발 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 현의 주민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 전역으로 20~30만 명 정도가 피난을 떠난 것으로 집계된다. 현재 일본 정부는 원전과 일정 거리가 떨어진 지역에 대해 위험 해제를 발표했지만, 여전히 도쿄나 오사카 등지의 친척 집에 머무는 사람들도 많다.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정부는 원전 사고 발생 2년이 지난 뒤에야 방사성 요오드의 수치를 측정한 지도를 공개했다. 주민들 사이에 갑상샘암을 앓는 환자들이 늘고 있을 때였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 빠져있는 주민들은 스스로 자료의 원문을 찾아본 뒤 항공조사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구 30만 명이 넘는 큰 도시인데도 원전으로부터 20km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후쿠시마와 도쿄, 오사카를 비롯해 전국 30개 법원에서 원전 피해자들은 정부와 도쿄전력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진행 중이다. 참여하는 인원은 총 1만 2천 명에 이른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현재 가나가와 현의 집단 소송 대표를 맡은 무라타 히로무 씨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보통의 생활, 피난의 권리, 안심의 미래"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11일 지진이 발생한 순간 삶은 무너져버렸다. 가족을 잃고 생활터전을 잃은 뒤에야 '보통의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3월 12일 원전 1호기 폭발 후 정부는 피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TV 자막에 20km 밖으로 나가라는 내용뿐이어서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정부의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지역의 대피자들은 '자주 피난자'라고 불리며 오히려 비난을 받는 상황도 펼쳐졌다. '피난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쓰나미 피해를 입은 미야기 현이나 원전 피해로 소송 중인 후쿠시마 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안심의 미래'일 것이다.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고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는 나라에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아베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상태가 '언더 컨트롤'(제어 가능)이라고 발표하며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은 대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외부의 상처를 봉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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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포] 동일본 대지진 7년…일본은 아직도 복구 중
    • 입력 2018-07-10 16:23:38
    • 수정2018-07-10 16:25:59
    취재K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4월 16일이 되면 언론에서는 1주년, 2주년 이런 식으로 보도한다.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유가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우리 사회의 안전의식은 얼마나 개선됐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에서는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라는 유례없는 재난이 발생했다. 3가지가 한꺼번에 닥쳐왔다는 의미로 '트리플 디재스터'(triple disaster)라고 불린다. 총 사망자는 1만 8천 명 이상으로 일본에서도 매년 3월 11일이 되면 '기념일 보도'라고 불리는 뉴스들이 쏟아져나오곤 했다.

그러나 7년이 흐른 지금은 뉴스가 대폭 줄었다. 겨우 지역 언론들을 중심으로 보도가 이어지는 수준이다. 복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진과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미야기 현을 찾았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쓰나미 피해 컸던 센다이, 아직도 공사 중

센다이 시는 지진의 진앙으로부터 서쪽으로 179km 떨어져 있었다. 당시 피해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재난 강국이라는 일본이지만 센다이 시는 아직도 힘겨운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무너진 제방을 높게 쌓는 작업과 도로 포장, 주택 건설 등의 작업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대형 트럭과 레미콘 차량이 쉴새 없이 흙먼지를 날리며 공사장을 오가고 있었다. 쓰나미가 밀려온 지역은 거주 금지지역으로 지정됐고, 주민들은 정부가 조성한 공공 주택으로 이사하거나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지진이 발생한 순간, 많은 사람이 넓은 공터 등지로 대피했다. 그러나 추가 여진이 언제 발생할지 몰라 그대로 있거나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 사람들은 곧이어 밀려온 쓰나미에 휩쓸리고 말았다.

지진이 났을 때는 운동장처럼 떨어질 물건이 없는 공간으로 피해야 하지만 쓰나미는 얘기가 달라진다. 밀려오는 바닷물을 피해 고층건물 옥상이나 야산 등 가능한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 한다. 센다이보다 더 바다와 가까운 이시노마키 시에서는 쓰나미로 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오카와 초등학교 74명 희생, 대피만 시켰어도…

당시 엄청난 지진 후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지만 높은 제방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설마 하는 생각에 집에 머물러 있었고 가족을 데리러 나갔던 사람들은 참변을 당했다. 또 강과 가까운 곳에 있던 오카와(大川) 초등학교에서는 전교생에 가까운 74명의 어린이가 숨졌다.

지진 발생 직후 교직원 10명은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대피시켰다. 바다와 4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쓰나미가 훨씬 파괴적이었다. 지진 발생 후 50분 정도의 대피 시간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이 시킨 대로 가만히 운동장에 머물러 있었고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주변 중학교의 선생님이면서 당시 사고로 딸을 잃은 사토 토시로 씨는 "쓰나미는 물만 밀려오는 게 아니라 집과 배, 자동차, 흙, 나무, 사람까지 주변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휩쓸고 온다"면서 "수만 그루의 소나무 등 잔해가 밀려와 다리를 막으면서 강물이 범람했고 학교와 마을을 송두리째 덮쳤다"고 당시 처참한 상황을 설명했다.

오카와 초등학교는 내진 설계가 돼 있어 지진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쓰나미로 7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이 지역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사토 씨는 "당시 교장 선생님이 출장 중이어서 교사들이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며 "주변에 바로 대피할 수 있는 야산이 있는데도 그쪽으로 대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말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은 ‘보트’가 아닌 ‘사람’

그는 한국의 세월호 참사 때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세월호에 보트는 많았지만 목숨을 구하지 못했고, 오카와 교정 근처에는 야산이 있었지만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매우 중요하다"며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평소에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아이들이 전원 구조돼 헬기에 실려올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줄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또 4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준비해둔 새 교복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재난 시 유일한 대안은 TV 아닌 ‘라디오’

미야기 현에서 지진 당일에는 모든 전기가 끊겼고 다음날에야 지역 라디오 방송이 재개됐다. 1주일간 주민들의 이름과 주소를 일일이 읽어주며 생사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지역 케이블방송국에서는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안부를 확인하고 대피시켰다.

야기 신타로 미야기케이블테레비 방송기술부장은 "TV 방송이 복구되는 데 3주 정도가 걸렸다"며 "재해 상황에서는 안테나만 있으면 방송할 수 있는 라디오가 최선의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대지진 이후 재해에 관한 내용만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지역 FM 방송도 시작됐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정전으로 TV를 볼 수 없고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을 때 유일하게 라디오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재난 시 휴대할 수 있는 라디오를 평소에도 준비한다.


학교 보존 놓고도 의견 팽팽, 아직도 싸움은 진행 중

아이들이 뛰놀던 오카와 초등학교의 교실은 모두 무너져 폐허와 같은 모습이다. 구름다리와 야외 시설들도 마찬가지다. 2층 천장까지 물이 들어찬 흔적이 남아있었다. 학교를 이 상태로 보존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보존을 반대했던 시에서는 학교 관리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자원봉사자와 유족, 졸업생들이 청소를 하고 꽃을 심고 방문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사고 후 이시노마키 시와 교육청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임을 강조하기에만 급급했다. 살아남은 교직원은 3월 11일 당시가 아닌, 수풀이 우거진 7월 11일의 사진을 보여주며 산으로 대피하기가 어려웠다고 증언했다. 결국, 유가족들은 시효를 하루 남겨두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1, 2차 재판 모두 승소한 상태다.

후쿠시마 원전 지역 주민들, 정부 불신 여전

원전 폭발 사고가 있었던 후쿠시마 현의 주민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 전역으로 20~30만 명 정도가 피난을 떠난 것으로 집계된다. 현재 일본 정부는 원전과 일정 거리가 떨어진 지역에 대해 위험 해제를 발표했지만, 여전히 도쿄나 오사카 등지의 친척 집에 머무는 사람들도 많다.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정부는 원전 사고 발생 2년이 지난 뒤에야 방사성 요오드의 수치를 측정한 지도를 공개했다. 주민들 사이에 갑상샘암을 앓는 환자들이 늘고 있을 때였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 빠져있는 주민들은 스스로 자료의 원문을 찾아본 뒤 항공조사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구 30만 명이 넘는 큰 도시인데도 원전으로부터 20km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조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후쿠시마와 도쿄, 오사카를 비롯해 전국 30개 법원에서 원전 피해자들은 정부와 도쿄전력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진행 중이다. 참여하는 인원은 총 1만 2천 명에 이른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현재 가나가와 현의 집단 소송 대표를 맡은 무라타 히로무 씨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보통의 생활, 피난의 권리, 안심의 미래"라고 말했다.

2011년 3월 11일 지진이 발생한 순간 삶은 무너져버렸다. 가족을 잃고 생활터전을 잃은 뒤에야 '보통의 생활'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3월 12일 원전 1호기 폭발 후 정부는 피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TV 자막에 20km 밖으로 나가라는 내용뿐이어서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했다. 정부의 지시가 내려지지 않은 지역의 대피자들은 '자주 피난자'라고 불리며 오히려 비난을 받는 상황도 펼쳐졌다. '피난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쓰나미 피해를 입은 미야기 현이나 원전 피해로 소송 중인 후쿠시마 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안심의 미래'일 것이다.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고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는 나라에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아베 일본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상태가 '언더 컨트롤'(제어 가능)이라고 발표하며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은 대지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내·외부의 상처를 봉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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